I Became A Renowned Genius At My Arts High School RAW novel - Chapter (41)
41화. 첫 수업(1)
날이 너무 추워 더는 길에서 떠들기 어려웠다. 마크에게 다시 보자는 인사를 남기고 수현은 곧바로 목적지를 향했다.
빙글빙글 돌아오긴 했지만 애초에 고만고만한 동네라 길을 찾기 어렵지 않았다.
사거리 왼쪽으로 한 면이 곡면으로 된 건물이 서 있는 걸 발견하기만 하면 됐다. 그 옆 건물이 제임스 리의 작업실이었으니까. 그런데, 그건 수현만의 생각이었는지,
“어떻게 된 거야? 걱정했잖아.”
“제대로 헤맨 모양인데? 얼굴이 완전히 얼었어.”
현관에 들어서자 제임스 리와 준이 화들짝 놀란 얼굴로 수현을 맞았다.
“이리 와. 몸부터 녹여. 집에도 없고, 봤다는 사람도 없어서 우리가 얼마나 놀랐다고.”
“좀 전에 준이 널 깨우러 갔다가 없어진 줄 알고 여기저기 찾아다녔어.”
“아, 죄송해요. 동네를 조금 구경하고 온다는 게.”
마크를 만나 사건에 휘말린 바람에 예상보다 작업실로 오는 시간이 늦어졌다. 하필 그때 준이 수현을 찾으러 나왔다 길이 엇갈린 모양이었다.
그래봐야 30분쯤이었지만, 낯선 이국에 수현은 아직 고등학생, 즉 미성년자 신분이니 둘이 걱정을 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핸드폰이 없는 시절이니 확인하기도 어려웠을 거고.
“그런데 구경이라니? 마켓이나 화랑이라도 다녀왔니?”
“아, 그래피티요. 여기저기 벽화들이 많이 그려져 있더라고요.”
“아하. 거리의 예술가들을 보고 온 모양이구나.”
제임스 리가 알겠다는 듯 수현의 손에 들린 스프레이에 시선을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쇼디치 거리의 명물이긴 하지. 몇몇 작가는 꽤 유명해.”
누구보다 수현이 가장 잘 알 얘기였다. 그들 중 나중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할 위대한 화가가 섞여 있으니까.
‘운이 좋다면 만나볼 수 있으려나. 아니지, 여기서 더 운이 좋을 순 없을 거야.’
잠시 다른 생각에 빠졌던 수현이 고개를 흔들며 진지한 얼굴로 돌아왔다.
새로운 것투성이인 요즘, 감당하기 어려운 속도로 많은 행운이 수현에게 쏟아지고 있었다.
현란하고 화려한 세계는 넋을 잃을 정도로 반짝거렸고.
‘이럴 때일수록 정신을 바짝 차려야지.’
수현은 런던에 온 목적을 상기했다. 최고의 화가, 제임스 리의 가르침을 받을 다시 없을 기회.
한 달 동안 그에게 최대한 많은 걸 배우고 성장하길 기대하고 왔으니 구경이나 또 다른 경험은 잠시 뒤로 미룰 생각이었다.
“그나저나 잠은 푹 잤니? 시차 적응은 어때? 한참 고생하는 사람도 있거든.”
제임스 리가 따끈한 홍차를 내리며 다정하게 물었다.
“네. 잘 잤어요. 몸도 가뿐하고요. 시차도 이 정도면 적응한 것 같은데요?”
“다행이네. 여긴 안 그래도 날씨가 우중충해서 몸이 덩달아 무거워질 때가 있어.”
“10대 체력이야 걱정할 게 없지만 워낙 추운 날씨라서 말이야. 감기라도 걸리면 큰일인데. 얼른 따뜻한 차부터 마셔.”
제임스 리가 내린 홍차에 준이 따뜻한 우유를 부어 밀크티를 만들었다.
그리고 둘은 선반을 열어 토끼 캐릭터가 앙증맞게 붙은 초콜릿이며 부들부들한 식감이 눈으로도 느껴지는 쿠키를 곁들여 내놓았다.
“아, 맞다. 저도 드릴 게 있어요.”
쿠키를 보고 떠올랐는지 수현이 가방 안에 넣어 온 작은 상자를 꺼내 제임스 리와 준에게 하나씩 내밀었다.
“뭔데?”
“별건 아니고요. 지난번에 좋아하신단 얘길 얼핏 들은 것 같아서요.”
한국에서 만나 전시회 특전에 대해 자세히 들었던 날, 지나가듯 제임스 리와 준이 한국의 간식들에 대해 말한 적이 있었다.
그때 수현은 제임스 리와 준이 약과를 무척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됐고, 잊지 않고 그걸 선물로 가져왔던 거다.
“세상에. 약과잖아? 안 그래도 종종 생각났어. 내가 이걸 좋아한다고 말한 걸 기억했던 거야? 와, 감동이네. 고마워. 진짜 잘 먹을게.”
비싼 물건은 아니지만 무척 마음에 들었는지 제임스 리는 이제껏 본 중 가장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기뻐했다. 덩달아 수현의 기분도 좋아졌다.
“나도 고마워. 제임스만큼은 아니어도 나, 이거 꽤 좋아하거든. 어휴, 하나뿐이면 우리 싸울 뻔했다. 그치?”
준도 장난스럽게 고맙단 인사를 전하고는 얼른 약과를 하나 꺼내 입에 쏙 집어넣었다.
“와, 맛있어. 쫀득하고 달아. 이거 홍차랑도 딱이다.”
“쿠키도 맛있어요. 차도요.”
“그래. 천천히 먹자.”
근황을 나누며 차를 어느 정도 마시자 얼었던 몸이 스르륵 녹았다.
수현의 얼굴색이 제대로 돌아오자 제임스 리가 앞으로 어떻게 수업이 진행될지 간단히 일러주었다.
“오늘은 오리엔테이션 정도로 생각하면 될 거야.”
첫날이니 작업실과 수현이 그림을 그리게 될 방을 일러주고 짐 정리를 한 다음 근처 화방이며 작은 서점들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준다고 했다. 그 후 원하면 간단히 스케치 정도를 하다 돌아가도 좋다고 했고.
“그래도 4시쯤엔 나랑 집으로 돌아가자. 저녁엔 식사 약속이 있으니까 외출 준비를 해야지.”
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유진 관장은 내일 점심이면 런던을 떠나 보름 정도 아일랜드 지방에 머물 예정이었다.
그러니 애들을 부탁하고 격려도 할 겸 오늘 저녁은 자신이 사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일단 일어날까? 작업공간부터 보여줄게.”
제임스 리의 손짓에 준과 수현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
클래식하면서 차가운 느낌을 주는 벽돌집.
빈티지한 타일 바닥과 포인트가 되는 조명들. 가파르고 좁은 계단과 아치 형태를 한 창은 이 집의 연식을 은근한 방법으로 일러주고 있었다.
‘여기가 제임스 리, 그리고 준의 작업실이구나.’
수현은 갑자기 처음 일선화랑 아뜰리에에 들어섰을 때를 떠올렸다.
‘기성 화가들의 공간이란 생각에 위축되는 느낌이었지. 스티브의 작업실을 잘못 열었을 땐 당황하는 한편 충격을 받았고.’
국내 최고 화랑인 일선.
고등학생을 후원한 건 이례적인 일이었다. 스티브야 이미 뉴욕에서부터 이름을 알린 천재였다지만, 수현에게까지 문을 열어준 건 획기적인 결정.
그때만 해도 현실 감각이 느껴지지 않아 얼떨떨했는데, 이제는 런던.
그것도 제임스 리의 작업실에 입성하게 되다니.
‘새삼 엄청 떨리네.’
수현이 심호흡했다.
제임스 리와 준의 작업공간은 일선화랑보다 아담하고 소박했지만 두 예술가의 포스 때문일까.
코로 들어오는 공기마저 묵직한 기분이었다.
“여기 2층 계단 쪽 방은 준이 쓰는 공간이야. 그 옆으로 널찍한 방은 다 그린 작품들과 재료들을 보관하는 곳이고.”
1층은 응접실과 주방, 창고, 화장실로 나뉘어 있었고, 2층엔 준의 작업실, 작품 보관실, 화장실, 그리고 다른 방이 하나 더 있었다.
그리고 3층은 제임스 리의 단독 공간. 작업실과 생활 공간이 4층 다락방까지 이어져 있다고 했다.
‘결국 건물 하나를 다 쓴다는 거잖아. 어마어마한데.’
아직 부동산이 저평가된 쇼디치 거리. 하지만 건물을 통으로 사서 쓰다니 제임스 리의 재력과 인지도가 얼마나 대단한지 능히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또 한 번 어마어마한 격차에 거리감이 느껴지는 순간.
“머무는 동안 내 작업실과 준의 작업실에 와서 그림을 구경해도 좋아.”
제임스 리가 심리적 거리를 바짝 좁히는 호의를 보였다.
“정말요?”
수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재차 확인했다.
작가의 가장 사적인 공간.
그의 습관과 고민, 상상, 생각의 경로와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오롯이 담긴 작업실을 공개한다니.
몇 번 드나들며 보는 것만으로도 수현에겐 큰 자극이 되고 배움을 얻을 수 있었다.
“물론이지. 잠깐 네 선생님 노릇을 하게 되겠지만 궁극적으론 같은 예술가잖아. 예술가로서 너의 의견을 듣고 싶어서 그래.”
“예술가라니요. 게다가 제가 어떻게 두 분의 그림을.”
수현이 질색하며 손을 내젓자 제임스 리와 준이 싱긋 웃었다.
“예술가가 왜? 시험이라도 보고 합격해야 오늘부터 예술가라고 인증받는 건가?”
“아니면 뭐 나이 제한이라도 있는 거였어?”
이게 가진 자의 여유일까.
수현이 둘의 너스레에 고개를 저었다.
“두 분의 말대로 예술가를 규정하는 조건 같은 건 없겠지만 그 말이 주는 무게가 너무 무거워서요. 전 아직 그런 말을 들을 실력은 아닌 것 같아요.”
겸손한 수현의 말에 준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네 생각이 그렇다면 그 생각이 바뀌는 게 먼저겠지. 더 놀리진 않을게. 제임스, 수현한테 방을 소개해줘야지.”
“응. 2층 제일 안쪽 방이 네가 쓰게 될 작업공간이야. 가끔 친구들이 와서 그림 그리거나 파티를 열 때 쓰기도 하는데, 한번 들어가 볼래?”
제임스와 준이 성큼성큼 앞서 걷더니 닫힌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와.”
뒤따르던 수현이 저도 모르게 나지막한 탄성을 내뱉었다.
“마음에 들어?”
“끝내주는데요?”
마음에 들고말고 말할 게 없었다.
깔끔한 모노 톤의 벽. 인공적인 조명이 필요 없겠다 싶을 정도로 채광도 넉넉했다.
해가 들어오는 창은 수현이 양팔을 벌리면 끝에서 끝이 닿을 정도로 큼지막한 아치 형태였는데, 그 창문 너머로 보이는 풍경이 예술이었다.
그야말로 저절로 영감이 피어오를 낭만적인 분위기.
“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이네.”
“그래. 이 게스트룸은 항상 인기가 좋았잖아.”
“맞아. 우리도 한 번씩 기분 전환 삼아 여기서 그리기도 하니까.”
수현의 반응이 뿌듯했는지 준과 제임스 리가 눈을 찡긋거리며 속닥속닥 이야길 나누었다.
“이젤은 여기 이걸 쓰면 돼. 가져온 도구들은 이쪽 사물함이랑 캐비닛에 넣어두고.”
혼자 쓰기엔 넉넉하고 둘이 쓰기엔 살짝 비좁은 크기였다.
하지만 작업공간으로 생각하니 그렇지 8인용 식탁을 넣고 다이닝을 즐길 수 있을 정도의 너비라 답답함은 전혀 없었다.
수현은 창밖 풍경을 좀 더 바라보다가 짊어지고 온 화구통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차곡차곡 물감과 파렛트, 붓, 스케치 도구들을 꺼내 사용하기 편한 위치에 정리했다.
“이건 뭐야?”
수현이 정리를 마칠 즈음 제임스 리가 수현의 스케치북을 가리켰다.
“아, 다음 주제요.”
“다음 주제?”
“네, 지난번에 새 그림을 어떻게 그릴지 고민해보라고 하셨잖아요.”
“오, 찾은 거니?”
제임스 리가 눈을 반짝였다.
과제를 주긴 했지만 공식이 있거나 물리적인 시간을 들인다고 찾을 수 있는 답이 아니니 어쩌면 빈손으로 올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그런데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다음 소재를 포착했다니 대견하면서도 궁금했다.
“작업실을 보니까 또 연결이 되기도 하네요.”
수현이 수줍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다음 주제로 생각한 게 [창>이거든요.”
“[창>?”
“네. 안쪽에 있는 화자와 그의 시선이 향하는 창, 그리고 창 너머의 풍경을 그리고 싶어요.”
“음. 스토리와 감정에 중점을 두겠단 거구나?”
“네, 맞아요.”
과연 제임스 리였다. 몇 마디만으로도 수현이 그리려는 게 뭔지 알아들은 눈치.
“하지만 설명적인 그림보단 감정의 움직임과 크기에 더 초점을 두려고요.”
수현이 연영과 교환 수업에서 느꼈던 벅찬 감정을 떠올리며 말했다.
“흠. 수업은 내일부터 하려고 했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스케치만 좀 볼까?”
제임스 리가 드르륵, 의자를 끌고 와 앉았고 수현이 긴장된 표정으로 스케치북을 내밀었다.
팔랑. 스르륵.
제임스 리가 천천히 수현의 스케치북을 넘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