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Renowned Genius At My Arts High School RAW novel - Chapter (44)
44화. 거리의 예술가들(2)
“같이 그림을 그리자고?”
수현이 얼떨떨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 뜻이 맞아? 그러니까 그래피티를 함께 해보자고 하는 거야?”
스티브에게도 묻자 뚱한 대답이 돌아왔다.
“입 다물라면서.”
“아니, 스티브. 지금 그 얘기가 아니잖아.”
그 모습을 재밌다는 듯 관찰하던 뱅크시가 웃음을 터트렸다.
“뭔가 막혔을 땐 새로운 자극을 주는 게 좋아. 환경을 바꾸거나 주제를 바꾸거나, 그것도 아니면 스피드.”
“스피드?”
“거리에서 그림을 그리려면 스피드가 필수거든. 쇼디치 거리는 벽화를 인정해주는 분위기지만 다른 동네는 그렇지 않으니까.”
“어?”
“걸리지 않으려면 어둠 속을 잘 다니면서 순식간에 그림을 완성해야 해. 긴장 속에서 속도를 올려 그림을 그리다 보면 잡생각 같은 건 슈융- 순식간에 날아가 버리고 말이야.”
뱅크시가 싱긋 웃었다.
“어때? 너와 네 친구도 한번 도전해보는 게. 벽을 깨기 위해서 말이야.”
***
집으로 돌아오는 길.
수현은 귀에서 피가 나오는 게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스티브에게 잔소리를 듣고 있었다.
“오늘 처음 본 애들이라면서. 대체 뭘 믿고 같이 가겠다는 거야?”
“마크는 두 번 본 거긴 한데.”
“하아. 넌 너무 경계심이 없어. 여긴 한국이 아니라고. 한국에선 탈선을 삼는 애들이 어디까지 나가는지 몰라도 쟤들은 위험해. 파티와 힙합에 깊이 빠진 애들 중엔 약을 하거나 집시처럼 사는 애들도 많아. 무정부주의에 무질서하고 범죄를 저지르는 것도 눈 하나 깜짝 안 한다니까?”
“물론 그런 애들도 있겠지.”
하지만 뱅크시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려던 수현은 멈칫했다.
베일에 가려진 뱅크시에 대해선 수현도 알지 못하는 게 많았다. 스티브의 걱정이 뭔지도 잘 알겠고.
“우리만 선을 잘 지키면 되지 않을까?”
“뭐?”
그래도 수현은 한 번 더 밀어붙였다. 당장 스티브를 설득할 말은 없었지만 이건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뱅크시와 함께 그림을 그릴 수 있다니, 그의 작업 과정을 눈앞에서 지켜볼 수 있다니.
수현에게도 스티브에게도 다시 오지 않을 일생일대의 기회.
“그냥 남의 집 담벼락에 작은 낙서를 하고 오자는 거잖아. 너, 어릴 때 그런 경험 안 해봤어?”
“하아. 그런 건 아니지만.”
스티브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수현의 말대로 어린애들 장난처럼 축소해 쉽게 받아들일 수도 있는 일.
그러나 앞서 뉴욕에서 대대적으로 일어난 그래피티스트 소탕 작전을 기억하는 스티브는 거리예술가들과 어울리는 게 위험하게 여겨졌다.
‘잘못하면 기물파손죄로 잡혀갈 수도 있다고.’
무엇보다,
‘마음에 안 들어.’
처음 본 수현에게 과한 관심과 호기심을 보이는 마크, 뱅크시, 그의 친구들이 스티브의 경계심과 불안을 잔뜩 끌어올렸다.
하지만, 수현은 이미 어느 정도 결심을 한 눈치였고.
‘내가 반대하면 오히려 불편해할 수도 있겠지. 혼자서라도 다녀오겠다고 몰래 움직이기라도 한다면.’
그건 더 큰 일이었다. 그럴 바에야 눈에 보이는 데에서 그림을 그리게 두는 편이 낫다.
결국 스티브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위험하다 싶으면 곧바로 빠져나오는 거야. 약속해.”
“물론이지.”
수현이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이른 시각, 스티브가 준의 집으로 와 수현을 찾았다.
“나가자.”
“어딜?”
“준비해야지. 살 것도 많고 연습도 해야 하니까 바빠. 서둘러야 해.”
전날과는 다르게 의지가 충만한 눈빛. 수현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재료들?”
“그래. 걔들이랑 당장 다음 주에 다시 만나기로 했잖아. 그럼 뭘 그릴지도 고민해봐야 하고 그림 도구도 마련해야지. 알아봤더니 두 블럭 떨어진 곳에 꽤 큰 페인트 가게가 있더라고. 거기부터 가자.”
“아, 그래피티 재료들을 말한 거구나.”
“그래. 그나저나 수현이 너, 스프레이 써본 적 있어?”
“어? 아니.”
“그럼 더더욱 느긋할 때가 아니지. 얼른 일어나!”
스티브의 눈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
“이것도 담고, 이거, 이것도 필요해.”
페인트 가게를 다 살 작정인 걸까.
스티브가 공격적으로 선반을 털었다.
“잠깐. 이거 들고 다니기엔 너무 많지 않을까?”
수현이 말렸지만 스티브는 단호했다.
“들고 다닐 건 나중에 따로 고르면 되고, 일단 연습해야 하니까. 재료는 많을수록 좋은 법이잖아.”
이왕 이렇게 된 거 실력을 제대로 보여주겠어.
어젯밤, 침대에 누워 몇 시간을 뒤척이던 스티브가 장고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거리예술? 좋다 이거야.
나도 그렇게 편견 있는 사람은 아니니까.
경험이 많은 스티브에게 물감 대신 페인트를 쓰고 캔버스 대신 거친 벽을 쓰는 것쯤이야 하등의 문제가 아니었다.
다만 걸리는 게 있다면,
‘건방져. 암만 생각해도 마음에 안 드는 녀석들이야.’
그날 뱅크시와 그의 친구들은 정규 코스를 밟으며 그림을 그리는 자신과 수현에게 몇 번이나 도전적인 말을 던졌다.
“그림이 꼭 갤러리에 걸릴 필요가 있을까?”
“맞아, 꼭 사각의 캔버스로 표현의 범위를 규정해야 하는 거야?”
“현대미술은 예술적 가치보다는 돈을 좇은 지 오래지. 이제 작품에 제대로 집중하는 사람은 없다고 봐. 그런데 거기에 매달릴 이유가 뭐야? 나를 인정해달라 고개를 숙여가면서 말이야.”
“은유니 뭐니 어렵기도 하잖아. 굉장히 거만하고 폐쇄적이야. 아티스트나 갤러리나, 그걸 사는 멍청이들이나 다 똑같아.”
그뿐 아니었다.
너희는 우물 안 개구리다, 더 넓은 세상엔 어마어마한 게 있다, 예술은 그런 게 아니다, 모두 주체성을 잃고 시스템에 이용당하고 있다…… 등등 거침없이 내뱉는 공격적인 말들.
얼굴에 잔뜩 묻은 근본을 모르겠는 자신감과 어린애 보는 듯한 눈빛도 거슬렸다.
‘제법 그림을 그려본 녀석들 같긴 했지. 실력도 나빠 보이진 않았고. 하지만 그래봐야 10대, 20대. 그래피티의 매력에 빠졌다고 해서 제도권 안의 그림과 예술가를 싸잡아 우습게 여기는 건 선을 넘은 거야. 오히려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사고방식을 가진 건 걔들일 수도 있는 거잖아?’
물론 스티브도 현대 예술이 지나친 상업주의로 쏠리는 데엔 부정적이었다. 이들의 말에 어느 정도 동의하는 부분도 있었고.
하지만 너무 지나친 건 문제.
극단적으로 몰아가는 말들을 듣자니 울컥 화가 치솟았다.
스티브 역시 반항심 넘치는 10대였다. 먼저 신경을 건드려온다면 피할 이유가 없는 펄펄 끓는 피의 10대. 게다가,
‘벽에 부딪혔다니, 레슨 중에 뭔가 있었던 모양이네. 하, 그런 고민이 생겼으면 나나 친구들에게 털어놓을 일이지. 처음 본 녀석들이랑 어울려 다니면서 깨달음을 얻으려 한 거야? 진짜 서운하다. 한수현.’
수현이 자신에게 고민을 꺼내지 않은 것도 마음이 상했다.
설마 수현은 나보다 그 애들이 더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한 걸까?
하, 그런 거라면 내가 더 낫다는 걸 확실히 증명할 필요가 있겠지.
이왕 벌어진 판이었다.
스티브는 녀석들의 콧대를 눌러줄 만한 대단한 그림을 그려보겠다고, 가만히 다짐했다.
필요하다면 조금은 거친 교류를 해서라도.
한편 같은 시각.
이런 스티브의 생각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수현은 바구니에 가득 담긴 스프레이 통을 난감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정말 이쪽은 경험이 없는데.’
과거 세현예고를 비롯해 대학에 가고 30대 초반까지 미술 작업을 하면서 이런저런 재료로 여러 시도를 해보긴 했다.
벽화를 그린 일도 있었고.
그러나 제대로 된 그래피티는 해본 일이 없었다. 작업물을 쓱 지나듯 구경해본 게 전부.
‘이대로 현장에 나갔다면 뭘 제대로 그려보지도 못하고 당황하다 돌아왔을 수도 있겠어.’
뱅크시의 작업을 구경할 생각에 들떠 자신이 그림을 그려야 할 상황까진 그려보지 못했던 수현은 새삼 스티브의 배려에 고마움을 느꼈다.
오늘도 먼저 찾아와 재료를 사고 연습하자고 해주다니.
덕분에 뭘 해야 할지 감이 잡히고 있었다.
“고마워. 스티브.”
수현이 싱긋 웃으며 감사를 표했다.
“어? 뭐가?”
“같이 가주기로 한 것도, 이렇게 재료를 사러 가자고 말해준 것도. 모두 다.”
“으이구.”
스티브가 피식 웃더니 수현의 어깨를 툭툭 쳤다.
“스프레이 써본 적 없다고 했지?”
“어? 어.”
“어려울 거 하나도 없어. 이런 그림은 시인성이 중요한 거라, 어떤 메시지를 담을지, 어떻게 사람들 눈에 띄게 그릴지만 고민하면 되거든. 테크닉이야 별 게 없고. 흠. 그래도 내가 몇 가지는 알려줄게. 조금만 그려보면 감이 올 거야. 넌 워낙 감이 좋은 애니까.”
따뜻한 말. 그러나 그건 수현을 향할 때만 나오는 적정 온도였을 뿐.
“샀으면, 나가자. 해가 지기 전에 최대한 많이 그려봐야지. 그 자식들한테 질 순 없잖아?”
10대 스티브의 승부욕은 이제 누구도 말릴 수 없게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
“왜 낮에 보자고 한 거야?”
수현과 스티브가 뱅크시와 그의 친구들을 다시 만난 건 수요일 점심 무렵.
주로 밤과 새벽을 틈타 그림을 그린다는 애들이라 낮에 만나자는 연락을 받았을 때 의아했다.
뱅크시는 수현의 질문에 가볍게 답했다.
“오늘은 답사.”
“어?”
“거리를 걷다 보면 너를 부르는 무언가를 만나게 될 거야.”
뱅크시가 꿈에 젖은 듯한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난 아무 생각 없이 길을 걷다가 영감을 얻을 때가 있거든. 풍경이 속삭여주면 아이디어가 갑자기 번뜩이는 거지. 어느 곳에 어떤 그림을 그리면 재밌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찾아와.”
그러니까, 일단은 사냥감을 찾는 맹수처럼 거리를 다니며 소재를 얻잔 거구나. 나중에 그곳으로 와서 그림을 그리면 되는 거니까.
수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뱅크시의 그림은 그 장소에 있기 때문에 돋보이는 것이 많았다.
공놀이 금지라는 팻말이 붙은 벽 아래에 몰래 공을 튕기는 쥐를 그려놓는다거나 정보통신본부 담장에 공중전화를 도청하는 탐정들을 그린다거나.
팔레스타인 장벽엔 꽃다발을 던지는 시위대를 그려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기도 했고.
‘나는 아직 공익적이거나 정치적인 이슈에 대해 깊이 생각한 적은 없지만…… 그냥 길을 지나는 사람들이 한 번 피식 웃을 수 있는 그림, 누군가 따뜻한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이야기 같은 건 가능하지 않을까.’
수현의 눈이 뱅크시의 시선을 따라 도시 곳곳을 지나갔다.
순간 머릿속에 수많은 물음표가 떠올랐다.
어떻게 해야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내가 구상한 이미지를 완벽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작가의 세계로 사람들을 초대하려면 어떤 스위치가 필요할까.
초대받는 사람들이 그 세계를 계속해 떠올리게 만들려면 어떤 경험을 심어줘야 할까.
여태까지 수현은 인정받는 그림을 그리려 애쓸 때가 많았다.
그런데 다시 예고 시절로 돌아온 후, 여러 사건을 겪으며 전과 다른 생각들이 마음을 휘저었다.
나는 왜 그림을 그리는 걸까.
어떤 그림을 그리고 싶은 걸까.
그것으로 뭘 얻으려는 걸까.
단순한 욕망일까.
특별한 의지가 담겨있을까.
좀 더 원초적인. 그래서 조금은 위험하게 느껴지는 질문들이 수현을 거칠게 흔들었다.
“가볼까?”
그 물음의 답은 가기 전엔 구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가서 확인해보는 수밖에.’
뱅크시 마크, 다른 친구들이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오늘 쟤들을 따라가면 이 물음표의 답을 하나쯤은 얻을 수 있을까.
“우리도 가자, 스티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수현이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