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Renowned Genius At My Arts High School RAW novel - Chapter (45)
45화. 거리의 예술가들(3)
“저 다리는 어때? 여기 코너에서 돌면 한눈에 보이는 자리잖아?”
“그러게. 확실히 눈에 띄긴 하네. 근데 꽤 위험해 보이는데?”
“새벽이면 눈에 안 띌 거야. 그리고 저길 봐봐. 저 건물을 타고 저 창문을 딛고 다시 저 나무를 밟고 올라가면 다리 아래까지 충분히 닿을 수 있어.”
“음. 몸이 가볍고 날렵하다면야.”
“와, 근데 옆 건물도 상당히 끌린다.”
“그러게. 어떻게 저긴 벽이 깨끗하지?”
“너무 대로변이라 도전하기 어려웠던 모양인데? 와, 승부욕이 생기네.”
“흠. 차라리 조금 꺾어진 저쪽 건물 담벼락이 어때? 꽤 넓어 보이잖아. 행인들과 마주칠 일도 없겠고.”
“행인은 신경 쓰지 마. 어차피 늦은 밤일 거고 스텐실로 하면 문제없잖아. 어디든 금방 끝낼 수 있을 거야.”
사냥이란 말은 취소다.
쇼핑하러 나온 단체 관광객들.
그 표현이 딱이었다.
뱅크시와 친구들은 이곳저곳을 우왕좌왕 몰려다니며 끊임없이 떠들었다.
흥분한 나머지 말들이 점점 빨라져 수현이 알아듣기 어려웠는데, 그때마다 스티브가 대충 통역해주거나,
“저건 다 쓸데없는 말이야. 신경 쓸 필요 없어.”
자체적으로 걸러 주기도 했다.
그렇게 두 시간쯤 걸었을까.
슬슬 다리가 아팠다.
춥기도 했고.
어쨌든 1월의 런던이었으니까.
“잠깐 쉬어야겠는데?”
코를 훌쩍이는 수현을 본 스티브가 애들에게 브레이크를 걸었다.
“따뜻한 차라도 한잔 마시는 게 어때? 몸이 얼어서 말이야.”
“차라고?”
“우리랑?”
피식거리는 애들. 황당해하는 건 당연했다. 페인트를 살 돈도 없는데 쓸데없는 차를 마시자니.
“역시 스티브 쟨 귀공자였어. 어쩐지 말투도 왕자님 같지 않았어?”
“에이, 놀리지들 마. 영국은 홍차의 나라, 티타임의 나라라 생각해서 한 말일 수도 있잖아.”
낄낄대며 놀리는 애들.
동시에 스티브의 얼굴이 벌게졌고, 이러다 싸움이라도 나는 거 아닌가 싶어 수현이 잔뜩 긴장했다. 그러니 어떻게든 나서려는데,
꼬르륵.
누군가의 배꼽시계가 우렁차게 울렸다. 그리고,
꼬르르륵-.
꼬르르르륵.
잇따라 소리가 울렸다.
한 명의 것이 아니었다.
최소 세 명.
얘들, 혹시 점심을 안 먹고 나온 건가?
“그럼 우리 차는 그만두고 뭘 좀 먹으면 어떨까.”
수현이 얼른 나섰다.
“흠. 괜찮아. 해가 지기 전에 빨리 움직이는 게 좋으니까.”
그러나 자존심 때문인지 버티는 애들.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으니 뭘 사 먹자는 말도 부담이겠지.
수현은 백번 이해됐다. 자신도 한 푼 없이 어렵게 지낸 시절이 있었으니까.
“내가 살게. 내가 배가 고파서 더는 못 걷겠어서 그래. 여기 혹시 피자 파는 곳 없어?”
암만 맛집 찾기 어려운 동네라 해도 피자 맛이야 비슷하게 흉내 내겠지.
수현이 적절한 메뉴를 추천하자, 애들 몇몇이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나,
“네가 왜 우리한테 밥을 사는데?”
“맞아. 우리가 너한테 얻어먹을 이유가 있어?”
낯선 호의에 몇몇은 날카롭게 굴었고,
“왜 없어?”
수현은 그런 애들의 반응에 태연하게 답했다.
“너희가 나랑 스티브한테 쇼디치 거리 구석구석을 소개해주고 있잖아. 앞으로 특별한 경험도 하게 해줄 거고. 음, 그러니까 이건 가이드 비용 같은 거지. 정당하지 않아?”
자존심이 다치지 않는 말에 애들도 결국 수군대며 긍정했다.
“맞는 말 같은데?”
“야, 그래도 수욘은 친구잖아. 친구한테 돈을 쓰게 하는 건 아니지.”
“왜? 친구라면 얻어먹을 수도 있는 거 아니야?”
“그런가?”
“수욘 말대로 우리가 관광을 시켜주고 수욘이 밥을 사는 거면 무슨 문제가 있는데? 서로 호의를 베푸는 거잖아.”
“아, 안 그래도 요 근처에 괜찮은 마켓이 있어.”
결국 마크가 가성비 좋은 식당을 안다며 나섰고, 다른 애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마크, 선데이 로즈 말하는 거지?”
“거기가 괜찮긴 하지. 피자 종류도 많고.”
“난 베이컨이 잔뜩 얹어진 게 좋아.”
“이탈리아식은 안 돼. 미국식으로 두껍고 배부른 거. 그게 최고라고.”
“그건 맛을 몰라서 하는 소리지. 피자는 얇은 게 맛있는 거라고. 어차피 치즈를 잔뜩 얹으면 피자 맛은 거기서 거기긴 하지만 말이야.”
애들이 자연스럽게 방향을 틀더니 슬금슬금 피자집을 향해 걸어갔다.
“허.”
그 얄미운 뒤통수를 스티브가 잔뜩 약이 오른 얼굴로 한참 노려봤다.
***
올드 스피탈필즈 마켓.
한참 후 리모델링이 되겠지만 지금은 올드란 말이 너무나 어울리는 오래된 건물이었다.
여러 작은 상점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는데, 푸드코트 구역에 마크가 말한 선데이 로즈가 있었다.
왠지 피자집이랑은 안 어울리는 이름.
들어 가보니 피자뿐 아니라 스파게티, 피시앤칩스, 파이와 빵, 주류와 음료, 꽤 다양한 메뉴를 취급하는 집이었다.
‘자고로 맛집은 단일 메뉴로 승부를 보는 법인데, 이런 곳이라면 맛을 기대하지 않는 게 좋겠지.’
수현이 기대를 접으며 주문을 애들에게 맡겼고, 스티브가 적당히 조절하며 주문을 도왔다.
잠시 후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그리고,
“어윽.”
피자를 한입 베어 문 수현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다.
“왜?”
“짜. 이거 너무 짠데?”
강렬한 짠맛에 수현이 씹던 걸 멈췄다.
“푸핫. 이쪽 음식이 좀 그렇긴 해.”
그러나 스티브를 비롯한 다른 애들은 아무렇지도 않은지 오히려 게걸스럽게 속도를 올려가며 음식에 달려들었다.
“넌 이걸 먹어.”
스티브가 다정하게 따로 시킨 라자냐를 수현 쪽으로 밀어주었다.
그나마 덜 짠 라자냐를 몇 번 떠먹던 수현은 결국 음료수만 홀짝홀짝 들이켰다.
“한잔할래?”
그리고 뱅크시가 수현과 스티브의 테이블로 다가왔다.
와, 20대라 이거지.
당당하게 맥주를 한 잔 시켜 들고 온 뱅크시.
수현이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고등학생의 몸이 됐으니 자연스럽게 멀어진 술. 하지만 그 맛은 아직 기억에 생생했다.
저 맥주 한 모금이면 이 텁텁하고 짠맛을 단숨에 날려버릴 수 있을 텐데.
“뭐야, 궁금해? 수욘. 이거 마셔보고 싶어?”
수현의 시선을 느꼈는지 뱅크시가 맥주잔을 내밀었다.
“원한다면 말해. 오늘은 내가 너희 보호자도 되는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뱅크시가 눈을 찡긋했다.
이 시절이야 민증 검사 같은 게 있을 리 없고, 이런 동네에선 애들한테 술을 파는 게 놀랄 일도 아니었다.
게다가 거리의 예술가라 다니는 애들이니 영혼은 얼마나 자유로울까.
슬쩍 그 분위기를 따라갈 수도 있었지만 수현은 고개를 저었다.
“하하. 난 괜찮아. 아직 미성년자라. 한국에선 미성년자는 술을 마실 수 없거든.”
“흐음. 그래? 하지만 여긴 한국이 아닌데? 너를 알아볼 사람도 없고 말이야.”
“내가 알잖아.”
“어?”
“어차피 2년 뒤면 얼마든지 즐길 수 있는데 급할 것도 없고. 또 지금 중요한 건 따로 있으니까.”
그래. 지금 중요한 건 오직 그림뿐이지. 집중하자, 집중.
사뭇 진지해진 수현의 얼굴을 뱅크시가 흥미롭다는 듯 바라보았다.
“……왜?”
“너 말이야. 거리낌 없는 것 같다가도 굉장히 보수적인 면이 있어서 신기해.”
“내가?”
“응. 수욘, 너 이거저거 생각이 많은 편이야?”
예술가라면 규칙 같은 걸 무시하고 일탈을 즐기기도 해야 한다고 말하려는 건가. 수현이 뱅크시의 의도를 슬쩍 넘겨짚을 때.
“뭐, 좋은 거야. 그건.”
뱅크시가 뜻밖의 답을 했다.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하고, 그 의지를 지킨다는 건 존중받을 일이니까. 물론 나쁜 일이 아닐 때 한해서 말이지만.”
그 말에 놀란 건 수현뿐 아닌 모양이었다.
“웬일로 맞는 말도 하네.”
스티브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어?”
“말이 나온 김에 하나만 묻자.”
스티브가 뱅크시 쪽으로 몸을 틀며 말했다.
“스스로 선택하고 의지를 보이는 걸 존중한다면 말이야. 갤러리에 그림을 전시하는 예술가들을 왜 그렇게 못 잡아먹어 안달인 건데?”
“못 잡아먹어? 우리가?”
“그래. 너희. 물론 예술이 상업주의에 지나치게 물들어 본질을 잃어버리는 건 경계해야 할 일이야. 하지만 명예나 돈에 상관없이 작품에만 매진하는 작가들도 얼마든지 있다고. 단지 그들이 갤러리에 전시하고 시장에서 그림의 가치가 올라간다는 것만으로 비난의 대상이 돼야 하는 건가?”
“흐음. 그건 그렇지.”
“게다가 돈을 버는 게 어때서. 뱅크시, 넌 예술가는 항상 가난해야 한다고 생각해?”
뱅크시가 재밌다는 듯 스티브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가난은 부끄러운 게 아니지만 자랑할 만한 배지도 아니야. 부자가 된 예술가에게 적개심을 드러내는 거, 난 그게 상당히 불편해.”
“흠.”
뱅크시는 장난스럽게 미간을 찌푸리더니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뭔가 오해가 있던 모양인데. 나는 예술이 부자들의 소유나 유희가 되어선 안 된다고 말했던 거야. 가난한 사람들도 예술을 즐길 자격이 있고. 입장료를 내지 않아도, 어려운 공부를 하지 않아도 예술은 공평하게 모두 즐길 수 있는 것이어야 하니까.”
뱅크시가 이번엔 스티브에게 맥주잔을 내밀었다.
“한잔할래? 아, 너도 거절인가?”
당연히 거절하겠지, 여긴 건 수현의 오판이었다.
벌컥벌컥.
뱅크시의 맥주를 받아마신 스티브는 추가로 두 잔을 더 주문해 수현을 황당하게 했다.
그러나 그건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둘은 계속해서 예술가와 현대미술, 갤러리의 문제점과 대안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였고 수현은 그 대화를 따라가기 바빴다.
“예술은 심오해. 많은 작가가 새로운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극한으로 자신을 몰아가지. 마치 상처 입은 조개가 진주를 품고 키워내는 것처럼 말이야. 그러니 우린 등수를 매기지 않고 각각의 세계를 존중하고 즐겨야 해. 그럼 우리의 세계도 확장될 테니까.”
“하지만 아무 실력도 없이 유명세를 누리는 사람도 수없이 많아. 아무런 감흥이 느껴지지 않는 그림들이 수십만, 수백만 달러에 팔리는 건 옳지 않지. 무엇보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데, 다른 사람들이 대작이라고 한다는 이유만으로 같이 고개를 끄덕이는 거. 그건 정말 바보 같은 짓이라고.”
“흠. 그건 나도 동의해. 진짜 멍청한 그림들이 높은 가격에 팔리기도 하니까.”
“내 말이 그 말이야.”
둘은 어떤 점에선 뜻을 모았고, 어떤 지점에선 대립했다.
프랑스 파리 인상파 화가들의 아지트, 카페 게르부아가 이런 풍경이었을까.
수현은 둘의 얘기에 귀 기울이며 현대미술을 이끌어 갈 예술가들의 신념을 엿보았다.
한두 시간이 더 흐르자 분위기는 아주 흥겨워졌다.
“마크! 대체 이 애들을 어디서 데려온 거야?”
뱅크시가 유쾌하게 웃으며 수현과 스티브에게 호감을 표했고,
“너희 말도 옳아. 그래, 우린 싸우고 비난할 게 아니라 이렇게 건강한 토론을 통해 새로운 방법을 모색해야 해.”
“그런데, 거리미술을 사람들이 무시하는 거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해?”
“글씨를 써둔 게 예술의 격을 떨어뜨린다고 믿는 사람도 있더라니까?”
“맞아, 그 글과 그림이 어울리는 걸 보고 피식 웃은 주제에 말이야.”
“됐어. 일단 웃게 했으면 우리가 이긴 거잖아?”
이제는 다른 애들도 스스럼없이 대화에 끼어들며 자기 생각을 마음껏 발산했다.
그러는 사이, 짧은 겨울 해는 꼴깍 떨어졌다.
따뜻한 음식들로 든든히 배를 채운 애들의 눈이 빛나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흠. 캄캄해졌는데? 이제 본격적으로 나서볼까?”
뱅크시의 신호에 모두가 우르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