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Renowned Genius At My Arts High School RAW novel - Chapter (48)
48화. 깨달음(2)
창작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신비한 영역의 일이다.
무엇이 어떻게 작용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지 창작자 본인조차 인지하거나 설명할 수 없게, 마치 다른 차원의 사건처럼 그냥 일어나버리곤 하니까.
수현도 그랬다.
분명 어느 때보다 진한 감정을 느꼈는데, 그걸 하나하나 말로 풀어내기가 어려웠다.
다만.
짐작 가는 바는 있었다.
부담이 없어서였을까.
다른 사람의 기대와 시선에서 자유로워지고 그리는 즐거움이 크기가 무엇보다 커지자, 저도 모르게 이미지를 좇아 손을 움직이게 됐다.
그건 본능적인 행위였다.
그리고 그렇게 나온 그림은 여태 수현의 머릿속을 부유하던 이미지와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었고.
‘마음에 들어.’
수현은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내가 그림을 처음 그렸을 때가 생각나네.”
한국의 흔한 부장님처럼 제임스 리가 갑자기 옛날 얘길 끄집어냈다.
“난 미술 시간이 너무 싫었어.”
그러나 거장의 사적인 얘기라니, 모두의 시선은 오롯이 제임스 리를 향했다.
“왜요?”
“너무 주목받아서?”
“음. 주목받긴 했지. 그림을 진짜 못 그렸거든.”
조금 시무룩한 대답에 준이 쿡. 웃음을 터트렸다. 준은 잘 아는 얘기인 모양.
“관찰력이 없어서 대충 그린 건데, 지금 생각해 보면 관찰할 의지가 없었던 거야. 그땐 세상에 별 기대나 관심이 없었거든.”
어린 시절 얘기라더니, 인생 다 산 노인의 얘기처럼 들렸다.
수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세상에 기대도 관심도 없는, 그래서 관찰할 의지조차 없던 소년.
그게 제임스 리의 과거라니.
“근데 여기 런던에 와서 만난 미술 선생님이 좀 특별했어. 단순히 숙련도를 보는 게 아니라 뭘 표현하려고 했는지를 중요하게 여기더라고. 뭐, 그렇다고 해서 내 그림이 한국에서보다 더 나은 점수를 받은 건 아니었지만 말이야.”
서사를 대강 풀어낸 제임스 리가 이번엔 자기 와인 잔에 포크를 담그더니 냅킨 위에 붉은 선을 그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이런 걸 나한테 내미는 거야.”
제임스가 냅킨을 모두에게 들어 보였다. 형태를 알아보기 힘든 선.
미로 같기도, 낙서 같기도 했다.
“선생님이 이걸 따라 그려보라고 하더라고.”
“선을요?”
“그래서요?”
“쉽잖아. 그저 구불구불한 선일 뿐이니까. 딱히 거절할 이유는 없어서 그려봤지. 그런데.”
제임스가 냅킨을 뒤집었다.
“엇.”
“허어.”
“와.”
동시에 애들 입에서 짤막한 감탄사가 터졌다.
“사람이네요?”
“선화였구나.”
“근데 포즈가 무척 어려운데요?”
거꾸로 봤을 땐 형태를 짐작하기 힘들었던 그림.
그걸 뒤집자 모자를 쓴 채 구부정하게 허리를 구부리고 앉은 할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복잡한 선들은 인물의 외곽뿐 아니라 옷의 주름, 근육의 움직임, 표정 따위를 일일이 담고 있었고, 그러니 거꾸로 봤을 땐 원래 모습을 짐작하기 어려웠던 거다.
“선생님이 이 그림의 비밀을 알려줬을 때 솔직히 놀랐지. 그리고 슬쩍 내 그림도 뒤집어봤어. 어땠을 것 같아?”
“글쎄요?”
“제법 괜찮았을까요?”
“응. 그렇더라고.”
제임스 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그린 그림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꽤 잘 그린 그림이 완성돼 있었어. 구부정한 자세의 할아버지가 종이 안에 그대로 담겨있더라니까?”
“뇌를 속인 거군요. 형태와 고정관념에 갇히지 않고 자유롭게 그릴 수 있게.”
“맞아. 본능에 따라 오직 눈에만 의지하게 말이야.”
스티브의 질문에 제임스 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때 알았지. 몰입의 즐거움을.”
제임스 리가 다시 수현을 바라보았다.
“은근히 신경 쓰고 있었던 거야. 내 그림을 보고 애들이 비웃거나 이런저런 말들을 하는 게. 그래서 미술 시간이 더 싫었던 거고. 근데 한 장의 그림에서 얻은 재미로 그 턱을 휙- 넘어버린 거지.”
그 뒤 그림에 흥미가 생기기 시작한 제임스 리는 더 많은 걸 그렸다고 했다.
그러다 보니 지금의 자신이 됐다는 다소 위인전 같은 결론이 이 이야기의 마무리였고.
“어쨌든 아무 생각 없이 자기 세계로 몰입해 들어가는 것. 그건 아주 중요한 일이야. 그러다 보면 벽을 깨고 계단을 뛰어넘어 성장하게 돼 있거든.”
제임스 리가 잔을 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건배라도 할까? 자, 앞으로 수현이 우리에게 보여줄 신세계를 위하여.”
“위하여!”
모두가 잔을 들어 부딪쳤다.
***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온 수현이 침대에 몸을 기대고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초저녁까지 푹 자둔 바람에 정신은 무척이나 맑고 또렷했다.
“밤 풍경도 멋지네.”
적막이 깔린 도시는 어제를 기점으로 색채가 달라졌다.
수현은 이제 골목 구석구석의 특징과 냄새, 거길 지나는 사람들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똑같은 창을 통해 내다보고 있는데 감상이 달라진 거다.
달라진 건 또 있었다.
그림, 소재를 바라보는 시선의 깊이.
“하아.”
수현이 서랍을 열고 스케치북을 꺼냈다. 이대로 새 작업을 밀어붙이기보다 확인과 점검의 시간을 갖는 게 낫겠단 생각에 수현의 사고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있었다.
창.
두 번째 그림의 소재.
그걸 그리면서 수현은 한 번씩 머뭇거렸다.
자신을 향한 기대의 눈빛들 때문에.
제임스 리는 새로운 그림을 구상해오라는 과제를 내주었고, 일선화랑 강유진 관장은 런던까지 기꺼이 동행했다. 친구들도 잔뜩 기대하며 따라왔고.
한 달이라는, 길어 보여도 결국엔 짧은 시간 동안 새 그림을 완성해야 한다는 중압감.
과거와 달리 큰 기회를 얻었으니 이걸 망쳐서는 안 된다는 부담감.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으나 그런 무거운 감정들이 자꾸만 수현의 붓끝을 망설이게 했다.
거기에 하나 더.
수현은 자신이 안고 있던 문제를 직시했다.
‘아직은 감정을 제대로 펼치기가 어려워.’
몸은 10대로 돌아왔으나 정신과 경험은 그대로인 수현.
그게 도움이 된 순간도 많았으나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감정을 부딪쳐야 할 때는 둔해진 어른의 마음이 오히려 방해될 때가 있었다.
특히나 밝고 가벼운 감정은 다루기가 어려웠다.
어쩐지 어색하기도 했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싶었으니까.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런 류의 감정은 아예 마모된 건지도 모르겠어.’
과거의 상처들. 절망스러운 기억들은 수현이 원래 가지고 있던 밝음을 퇴색시켰다.
이젠 그런 게 애초에 있었는지 모르겠다 싶을 정도로 가물가물해졌고.
너덜너덜해진 마음으로 돌아온 과거. 그래도 위안을 얻고 웃는 날이 생겼지만 깊숙한 내면까지는 벌써 해결됐을 리가.
그러니, 오로지 혼자 캔버스를 마주하는 순간.
수현은 복잡한 심상에 젖을 때가 많았다.
차곡차곡 쌓인 감정들을 태연히 들여다보고 정제해 자유자재로 끄집어내기엔 아직 마음 정리가 덜 됐다고 해야 할까.
‘즐겁고 행복하고 웃음이 터져 나오는 감정들은 막상 표현하려고 할 때마다 어딘가 턱턱 걸리는 느낌이 들어. 그렇다고 언제까지 우울한 그림만 그릴 순 없는데.’
수현이 스케치북을 넘기며 지난 작업을 복기했다.
섬네일까지는 그럭저럭 괜찮았는데, 캔버스에 옮겨 그리자니 막막해진 것들이 있었다. 분석해보니 모두 수현이 지금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을 재료로 쓰는 소재들이라 그런 듯했다.
‘하지만 지난밤엔 그런 걸 까맣게 잊을 수 있었잖아.’
수현이 갈증처럼 그 시간을 떠올렸다.
‘그 감각을 붙잡을 방법이 없을까.’
지난밤 수현은 무엇이든 거침없이 그릴 수 있었다.
에머럴드 빛 바다와 백사장. 해맑게 웃는 아이들과 연인. 야자수와 동물들…….
평소 수현이 즐겨 그린 소재도, 즐겨 쓰는 정서도 아니었지만 손끝에서 막힘없이 술술 나왔다.
‘그 느낌이 흐려져 사라지기 전에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해. 그렇게만 된다면 제임스 리가 말한 오리지널리티, 그리고 내가 완성하고 싶은 그림에 한층 가까워질 수 있을 텐데. ……아, 혹시.’
생각을 이어 나가던 수현이 미간을 찌푸렸다.
애들과 웃고 떠드는 사이, 정말 10대가 된 것처럼 마음이 가벼워졌던 일이 떠올랐던 거다.
‘만약 어제의 그 감각이 또래 집단과 어울리다 깨어난 거라면.’
수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은 애들과 만나는 것도 좋겠는데.’
제임스 리는 수현에게 또래 예술가들과 교류하길 추천했다.
뱅크시는 속도에 쫓기면서 그리다 보면 복잡한 감정들에서 벗어나 쉽게 몰입할 수 있을 거라 조언했고.
그 둘의 얘길 종합해봐도 결론은 같았다.
‘몇 번 더 만나서 함께 그림을 그려봐야겠어.’
다행히 어제의 작업은 수현에게만 즐거운 것이 아니었다. 같이 그림을 그린 뱅크시도 한 번 더 다른 걸 그려보자고 했으니까.
‘그나저나 신기하네. 나야 충분히 도움을 얻고 있다지만, 걔들은 무슨 재미로 함께 그림을 그리자고 하는 걸까.’
수현이 스케치북을 덮으며 씁쓸하게 웃었다.
‘뭐, 이런 게 거리의 예술가다운 오픈마인드란 건가.’
그럴듯한 답을 찾아다 붙이긴 했으나, 그건 의외로 보는 눈이 까다로운 거리 예술가들의 성향을 아직 수현이 다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
“그 애, 또 올까?”
“누구?”
“수욘이랑 스티브.”
한편 뱅크시와 마크, 그리고 거리예술가들은 아지트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적어도 1월까진 런던에 있을 거라고 했다며.”
“응.”
“그럼 마주칠 일이 있겠지. 또 그리자는 말에 알겠다고 했잖아.”
“그렇긴 하지만.”
마크가 웅얼거렸다.
“볼수록 우리와는 다른 세계의 애인 것 같아서 말이야.”
“그야 그렇지. 특히 수욘은 신비로운 동양에서 왔으니까. 그 애, 한국인이라고 했지? 너희 한국이 어딘지 알아?”
토마스가 마크의 말을 대충 넘기며 자기 하고 싶은 말을 신나게 떠들었다.
“글쎄. 들어본 적도 없어.”
“난 찾아봤어.”
“어?”
“오늘 서점에 가서 지도를 펼쳐봤지.”
“와, 네가 서점에 갔다고?”
“왜, 제임스 리 그 사람도 한국인이라잖아. 덩달아 궁금해지더라고. 그런 예술가들을 배출한 나라라니.”
“그래서?”
“아주 작은 나라던데? 게다가 둘로 나뉘어 있어서, 더 작아. 찾느라 아주 혼났어.”
“흠. 별로였음 좋겠다.”
마크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어?”
“그곳보다 런던이 더 마음에 들어서 오래오래 있었으면 좋겠어.”
툭 튀어나온 본심에 애들이 당황하며 눈을 마주치다가 곧 야유를 보냈다.
“워어.”
“국경을 뛰어넘는 세기의 사랑이야?”
“마크, 너 지금 첫사랑이 시작된 거야? 맞아?”
“운명적인 만남이긴 했지! 나쁜 녀석들에게 스프레이를 빼앗길 뻔 한 걸 수욘이 구해준 거잖아!”
“그만해!”
마크가 발끈했다.
“그런 거 아니라고!”
“그럼 뭔데?”
“그냥, 인간적인 호감. 예술가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재능을 가진 애니까, 좀 더 오래 보고 싶을 뿐이야.”
“그래, 사랑은 그렇게 시작되는 거지.”
“지금은 부정하겠지. 하지만 그 마음은 점점 더 뜨거워질걸?”
“어휴, 진짜 이 멍청이들이!”
버럭 화를 내봐야 마크의 말을 들어줄 애는 없었다. 그렇게 한참 마크를 놀리는 말들이 오갈 때.
“근데 나도 비슷한 생각이긴 해.”
여태 침묵을 지키던 뱅크시가 툭 던지듯 말했다.
순간 아지트가 고요해졌다.
“그 애들, 확실히 뛰어나잖아. 너희는 궁금하지 않아?”
“어?”
“그 애들이 가진 거, 같이 그려보면서 좀 더 확인하고 싶지 않냐고.”
뱅크시가 눈을 빛냈다.
“너희만 동의한다면 내가 그 애들을 좀 더 오래 묶어둘 방법이 있는데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