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Renowned Genius At My Arts High School RAW novel - Chapter (50)
50화. 낮과 밤(2)
브리스톨은 그래피티의 성지인 동시, 힙합의 성지다.
새로운 음악과 물결을 타려는 젊은 애들은 한참 전부터 이곳으로 물밀듯 몰려들었다.
거리의 예술가만큼이나 음악가들이 넘실거리는 곳.
그림과 음악을 동시에 하는 아티스트도 흔했다.
당연하게도 그 안에선 스타가 탄생했고, 긴 그늘이 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뱅크시가 스타라면 히치라들은 그림자. 그것도 관심이 너무도 고픈 관심 종자들인 것.
“오, 잠깐. 이 녀석들 이제 보니 누군지 알 것 같아.”
그리고 뻔뻔하기까지 한 히치들은 속이 들여다보이는 연기를 하기 시작했다.
“뱅크시 친구들 아니야? 몇 번 어울리는 걸 봤어.”
처음부터 알아본 것 같은데, 이제야 생각난 척. 덩치 하나가 제 이마를 손바닥으로 탁, 치며 말했고.
“오, 그러고 보니 맞네.”
“그 뱅크시의 친구들이라니 이런 인연이 있을 수 있나. 안 그래도 볼일이 있었는데 말이야.”
다른 덩치들이 피식거리며 토마스 앞으로 한걸음 성큼 다가왔다.
뭐야, 이러다 사고라도 나는 거 아니야?
모두가 긴장한 그때.
“어? 다들 여기서 뭐 해?”
주인공은 마지막에 등장한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뱅크시가 머리를 긁적이며 골목 끝에서 나왔다.
***
“그러니까 보상을 하란 말이지?”
“그래, 우리 그림을 망친 거니까 제대로 된 보상을 해야지.”
“흐음. 뭐, 덧칠이라도 해주라는 거야?”
“글쎄? 그게 가능할까? 덧칠을 한다고 원래 그림이랑 같아질 순 없잖아?”
토마스가 그림을 망쳤으니 응당 보상해야 한다는 히치들.
그러나 요구 조건은 불가능에 가까운 억지였다.
“맞아. 그 그림엔 우리의 소울이 담겨있었다고. 그걸 복구하는 게 가능하겠어?”
“뭐? 소울?”
“이 그래피티를 만들 때의 감정, 너희가 훼손시킨 건 바로 그 감정이야. 우리의 심장을 짓밟은 거나 마찬가지지.”
“하.”
점점 일을 크게 벌이려는 히치들의 태도에 뱅크시가 냉소를 흘렸다.
“그럼 어떤 보상을 원하는데?”
꿀꺽.
그 말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바쁘게 시선을 교환하는 히치들.
“그림은 그림으로.”
“그래. 우리 그림을 망쳤으니 이번엔 네 그림을 내놔.”
“뭐?”
“그걸 우리가 망칠 테니까.”
“하.”
뱅크시가 고개를 저었다.
“알다시피 이 거리엔 이미 내 그림이 넘쳐나. 원한다면 아무거나 골라서 망치도록 해.”
뱅크시가 귀찮다는 듯 말하자 히치들이 당황했다. 그리고 우물쭈물 다시 앞뒤가 안 맞는 말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아니, 이미 질리도록 본 그림이랑 따끈따끈한 그림을 같은 거라 볼 순 없지.”
“그래. 우리의 새 그림을 망쳤으니까 너도 새 그림을 그려내. 그래야 공평하지.”
“뭐야?”
“그리고 사과의 뜻을 담아 그림 주제는 우리가 정해주는 걸 따르도록 하고.”
“하, 어떤 주젠데?”
“흠. 우리 히치들을 주인공으로 그려. ‘위대한 히치들’이란 문구와 함께 말이야.”
“잠깐. 너희를 그리라고? 너희 손으로 망칠 그림이라고 하지 않았어?”
“그런데?”
“왜, 문제 있어?”
“네가 지금 뭔가를 따질 상황은 아닌 것 같은데?”
‘이렇게 유치할 수가.’
수현이 부들부들 떨리는 볼을 가만히 손바닥으로 눌렀다.
다시 고등학생이 된 후, 안 그래도 또래 애들의 유치하고 오글거리는 행동에 적응하는 게 힘들 때가 많았는데 브리스톨에서 또다시 이런 경험을 하게 되다니.
‘게다가 짜증 나.’
고작 이런 시비 때문에 뭔가 그려질 것 같던 순간을 망쳐버리다니 화도 났다.
히치란 애들은 이번 기회에 포스터에 맺힌 한을 풀려는 것처럼 보였다. 뱅크시에게 억지로 그림을 얻어내 홍보의 수단으로 삼으려고 일을 키우는 게 분명했다.
“미치겠네.”
그런 속은 누가 봐도 읽히는 것이었는지 스티브와 애들이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이제 잘못 걸렸다는 게 무슨 말인지 알겠지?”
브라이언이 고개를 저었다.
“근데 쟤들 말이 안 되는 소릴 하는 거잖아.”
“맞아. 뱅크시의 새 그림을 망치겠단 말이 사실일 리 없어.”
“오히려 그 그림을 이용해 공연에 손님을 끌어들이려는 거 아냐?”
“뱅크시, 그렇담 네가 나설 일이 아니야. 애초에 이건 말이 안 돼!”
웅성거리는 애들 사이에서 토마스가 잔뜩 굳은 얼굴로 나섰다.
“솔직히 사건의 발단이 된 건 나잖아. 내가 쟤들 그림을 건드렸으니, 쟤들도 내 그림을 건드려야 맞는 계산이지. 그러니 내가 해결할게.”
그러나 뱅크시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런 억지를 부리는 애들한테 그런 논리가 통할 것 같아? 아까도 들었잖아. 소울이 어쩌고, 심장이 어쩌고 하는 소리들 말이야. 네가 그린다고 나서면 이 그림엔 소울이 없네, 진심이 없네 하면서 몇 번이고 다시 그리라고 할 수도 있어.”
“뭐?”
“지금은 쟤들이 주도권을 쥐고 있단 소리야. 일단은 들어주는 척하면서 한 방 먹일 방법을 찾아봐야지.”
그리고는 뱅크시가 찬찬히 일행을 돌아봤다.
“너희들 내 장기가 뭔지 알지?”
“어?”
“쟤들, 나한테 그림을 그려달라고 한 걸 후회하게 해줄 거야.”
뱅크시의 눈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아, 이건 좀 위험한데?’
수현이 긴장했다.
뱅크시가 누군가.
불의에 꺾이지 않고 세력에 저항하며 비판적인 메시지를 용감하게 던지던 아티스트.
만약 그가 적성을 백분 발휘해 히치들을 조롱하는 그림을 그리기라도 한다면.
‘집에 무사히 돌아가기 어려워질지도 몰라.’
그리고 그건 수현만의 걱정은 아니었는지,
“무슨 생각인데 그래?”
“대체 뭘 그릴 건데?”
“말해줘. 너 사고 치려는 거지?”
애들의 눈이 불안하게 떨렸다.
“차라리 내가 나서면 어떨까?”
수현이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어?”
“수현, 네가?”
마크와 스티브, 브라이언이 깜짝 놀라며 수현을 바라봤다.
“너까지 말려들게 할 순 없지. 그래도 우리 손님인데.”
“아니, 잠깐 들어봐. 너희끼린 서로 너무나 잘 알겠지만 히치들한테 한국에서 온 나에 대한 정보는 없잖아.”
“어? 그래서?”
“간단해. 너희가 잠깐 날 대단한 실력자인 것처럼 띄워주기만 해.”
“실력자로?”
“그럼 내가 복수해줄 수 있을 것 같거든.”
수현이 싱긋 웃었다. 좀 전 뱅크시가 눈빛을 이글거릴 때, 번뜩 떠오른 아이디어가 있었던 거다.
“내가 좀 전에 막 재밌게 그림을 그리려던 참이었는데 쟤들 때문에 다 망쳤거든.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는 걸 들어주기도 힘들고 말이야. 그러니까 나한테 한 번 맡겨 봐.”
수현이 스프레이 통을 가만히 움켜쥐었다.
***
“이런 비쩍 마른 여자애가 뱅크시를 대신한다고?”
“말조심해!”
예상대로 히치들은 수현을 무시하며 반발했지만, 대동단결한 뱅크시 무리의 기세에 점점 밀리기 시작했다.
“얜 한국에서 온 천재 아티스트야.”
“첫 그림이 무려 3만 달러에 낙찰됐다고. 한국에선 보물처럼 여기는 화가라니까?”
“그래. 너희 제임스 리 알지? 그 제임스 리가 첫 번째 제자로 인정한 엄청난 예술가기도 해.”
“제임스 리? 런던의 그 화가?”
“지저스. 나 그 사람 알아. 엄청난 예술가잖아.”
“그런데, 그런 대단한 애가 왜 너희 같은 애들이랑 어울리는데?”
“그것까지 말해야 해?”
“하. 영광으로 생각하진 못할망정. 하여튼 보는 눈이 발바닥에 달렸다니까. 그러니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치려는 거지.”
태연하게 연기하는 뱅크시와 친구들. 수현은 잠자코 애들 사이를 지나 벽 앞으로 다가가더니 치이익- 스프레이를 뿌렸다.
‘이 정도는 껌이지.’
그렇게 그려 나간 한 남자의 실루엣.
그건 히치 멤버 중 가장 덩치가 좋은 드러머였다. 드러머의 상반신을 순식간에 그려 완성한 것.
“우와!”
“대박!”
“진짜 미쳤는데?”
누가 봐도 드러머의 얼굴.
히치들의 입이 멍청하게 떡 벌어졌다.
인물의 특징을 완벽하게 잡아낸 스케치. 한번 슬쩍 본 것만으로 이렇게 그려내다니, 논쟁할 필요가 없는 실력자가 분명했다.
“나도.”
“그래, 나도 그려줘!”
“나도야!”
태세전환을 하는 애들을 보며 수현이 고개를 갸웃하자 뱅크시가 나섰다.
“뭐야. 그럼 수욘의 그림으로 대신 보상을 받겠다는 거야?”
“물론이지. 이건 정말 어메이징해.”
“그래, 솔직히 뱅크시보다 나은데? 뱅크시는 이런 그림은 못 그리잖아?”
“한국에서 온 천재라더니, 정말 그 말이 맞나 봐.”
“하 씨. 이거 제대로 된 작품 하나 나오는 거 아냐?”
인물 크로키며 캐릭터 스케치는 지난 생부터 수현이 지겹도록 해 온 것이었다. 재능의 영역이기도 했으나 반복된 훈련으로 몸에 완전히 익어버린 것.
그러나 수현의 과거를 알 리 없는 히치들의 눈엔 실물을 복사하듯 빠르게 그려내는 수현의 재주가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이렇게 퍼포먼스가 먹혔으니 슬슬 작전을 개시할 시간이었고.
“그런데 문구 말이야.”
수현이 히치들의 눈을 보며 태연히 말했다.
“난 한국 사람이라 그래피티를 할 땐 한글을 사용하거든. 그래도 괜찮겠지?”
“한글?”
“동양의 문자?”
“뭐. 오히려 힙할 것 같기도 하고?”
“그래. 어차피 우리 얼굴인 건 누구든 알아볼 거니까. 또 새로운 언어를 쓴 그래피티라면 오히려 시선을 끌 수도 있겠는데?”
수현의 그림에 호감이 상승한 히치들은 별문제 아니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뭐라고 쓸 건데?”
“음. 글쎄. 초상화 느낌이니까 너희 이름을 써주면 어떨까 싶기도 하고.”
“좋아. 우리도 작가와 예술세계를 존중하는 아티스트거든.”
“흐음. 그래. 고마워.”
그리고 수현은 치이익-.
스프레이를 다시 바쁘게 움직이며 나머지 멤버를 담벼락에 그려 나갔다.
***
그림은 문자보다 먼저 탄생했다.
훨씬 더 본능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러니 그림을 그릴 땐 눈으로 보이는 것을 판단하고 손의 방향을 지시하고 사물에 집중하는 모든 과정이 물 흐르듯 이루어지는 게 되려 자연스러운 것이다.
잘 그려야 한다는, 무언가를 보여줘야 한다는, 공식에 따라야 한다는 부담에서 벗어나 완벽하게 몰입할 때 진정한 그리기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고.
그건 수현도 마찬가지였다.
‘해보자.’
수현이 손을 들었다.
낯선 애들과의 갑작스러운 충돌로 짜증스러운 감정이 확 솟구쳤는데 그 바람에 오히려 자신을 둘러싼 잡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대충 그려도 그만이야.’
수없이 반복해온 크로키였다. 인물 크로키 정도야 거짓말 조금 보태면 눈 감고도 그릴 수 있을 정도.
그렇게 생각하자 어깨의 힘이 편안하게 빠졌다.
‘외곽선은 이렇게.’
치이익-.
수현의 손이 유려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익숙한 그림을 그리기 때문인지 잡념이 사라져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건 이전보다 더욱 거침이 없어졌다는 것.
‘어떻게 그려야 할지 보이는 것 같아.’
눈앞에 떠오르는 이미지를 그저 따라갈 뿐이었다.
움직이는 속도를 조절하며 스프레이를 분사하자 선의 농도가 흐려지다 진해졌다.
‘주름은 부드럽게.’
이번엔 손목을 돌리며 스프레이를 몸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바깥쪽으로 밀었다. 그러자 옷 주름이 자연스럽게 잡혔다.
‘좋았어. 이번엔 얼굴의 특징.’
우락부락한 드러머, 코가 길쭉한 기타리스트, 곱슬머리에 뾰족한 턱을 한 베이스, 눈 사이가 살짝 먼 보컬.
특징적인 인상들이 수현의 눈에 빠르게 담겼고 수현은 그것들은 다시 거침없이 그려냈다.
필요 없는 풍경들은 흐려졌고 수현의 시야에는 오로지 두 가지만 남았다.
담벼락과 그려낼 피사체.
수현의 손이 움직일수록 밋밋하던 담벼락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와아!”
그리고 잠시 후.
수현이 스프레이통을 내려놓고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완성된 그림 앞에 히치들이 쏟아지듯 몰려들었다.
“이건 박물관으로 가야 해!”
“진짜 어마어마한 게 그려졌잖아!”
그림을 잘 모르는 애들이라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만큼 수현이 그려낸 그림이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이었다.
“아깝다. 너무 훌륭하게 그려줬어.”
“그래. 그럴 필요 없는 애들인데.”
뱅크시와 그의 친구들도 씁쓸한 표정으로 감탄을 쏟아냈다.
막상 완성된 그림의 퀄리티가 너무 좋으니 대단하다 싶으면서도 아까웠던 것.
그러나,
“하아.”
수현은 그런 애들의 반응 같은 건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뭐였지?”
그림을 그리는 내내 내면을 휘몰아친 뜨거운 감정의 여운이 수현을 계속해서 달구고 있었던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