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Renowned Genius At My Arts High School RAW novel - Chapter (51)
51화. 낮과 밤(3)
히치들이 웃고 떠들다가 자리를 떴다. 뱅크시와 수현, 스티브, 또 다른 친구들은 그제야 긴장이 풀린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이건 기념하는 게 좋겠어.”
토마스가 소중하게 챙겨온 일회용 카메라를 꺼내더니 찰칵. 수현의 담벼락 그림을 촬영했다.
“아깝다. 너무 훌륭하게 그려줬어.”
“그래. 그럴 필요 없는 애들인데.”
투덜대긴 했으나 막상 완성된 그림의 퀄리티가 워낙 훌륭하다 보니 기념하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였다.
“우리도 찍을까?”
스티브도 가방에서 똑같이 생긴 일회용 카메라를 꺼냈다.
“그래. 기념하자.”
수현이 활짝 웃으며 담벼락 앞에 섰다.
찰칵.
순간 수현의 심장이 덜컹거렸다.
기록된 순간은 수현의 전환점이었다.
‘뭔가 잡힌 것 같아.’
수현이 가만히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사라져버리는 게 아닐까 조바심 낸 첫날의 감각.
그 걱정이 괜한 것이라는 듯, 그림을 그리는 동시에 수현은 곧바로 몰입에 들어갔다.
시선에서 자유로워지면서, 기대에서 벗어나 부담을 덜어내면서.
설명할 수 없는 기운에 강하게 이끌리더니 그림을 그리고 난 후에도 묘한 여운이 한참 출렁였다.
‘나도 모르게 애들처럼 행동했지. 억지를 부리고 유치하게 구는 행동에 화가 나서. 분위기에 휩쓸려서는 진짜 10대가 된 것처럼 행동해버렸어.’
그저 시비를 걸어온 애들에게 골탕을 먹이겠단 단순한 생각뿐이었는데, 스으윽- 스프레이를 뿌리는 순간 활기찬 그림이 저절로 유쾌하게 그려졌다.
솔직하게 반응한 덕분이었을까.
수현은 메말랐던 마음에 풍부한 감정이 훅 차오른 기분을 느꼈다.
예전으로 돌아온 것 같기도 했다.
아니 그보다 더 가볍고 밝았다.
마치 무채색이던 세상이 화사한 컬러로 물드는 듯한 느낌.
‘이대로라면 더 좋은 그림을 그려낼 수 있을 것 같아. …얼른 확인해보고 싶어.’
수현은 빨리 캔버스 앞에 서고 싶단 열망을 느꼈다.
이번엔 뭔가를 놓칠 것 같은 불안함 때문이 아니었다.
새로워진 내면에서 어떤 그림이 튀어나오게 될지 보고 싶은 다급한 마음. 그저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뜨거운 감정이 수현을 흔들었다.
“아, 근데 수현.”
그런 수현을 스티브가 다시 현실로 불러들였다.
“너 저기에 뭐라고 적은 거야?”
“어?”
스티브가 담벼락을 가리키며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한글은 잘 못 읽거든. 근데, 까막눈인 내가 봐도 저게 그 애들 이름 같진 않아서 말이야.”
‘아, 저게 있었지.’
수현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눈에 띈 이상 스티브를 속이긴 어려울 일. 수현이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실은 이름 대신 내가 좋아하던 노래 가사를 한 줄 적었어. 마침 딱 어울리는 게 있어서.”
“가사? 무슨 내용인데?”
“그게…….”
망설이던 수현이 작은 목소리로 빠르게 말했다.
“……루저, 외톨이, 센 척하는 겁쟁이, 못된 양아치…….”
“어?”
“뭐?”
“뭐라고?”
드러머, 기타, 베이스, 보컬의 얼굴 앞에 써둔 단어를 차례차례 읊자 애들이 깜짝 놀란 얼굴로 쳐다보았다.
“진짜?”
“그딴 게 노래 가사라고?”
한참 뒤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만들 노래지만, 지금은 누구도 알 리 없는 곡이었다.
***
“기절할 것 같아.”
“나도.”
긴 주말이었다.
브리스톨을 구경하고 히치와 시비가 붙어 그림을 그리고, 마크가 자랑했던 브리스톨 클럽의 파티에 갔다가 다시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니 완벽히 녹초가 된 기분.
그래도 소득이 컸다. 새로운 친구를 잔뜩 사귀고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도 만났다. 각자 표현하려는 주제에 대해 열띤 토론을 했고, 그중 몇 가진 수현의 머리를 빙빙 돌며 새로운 영감이 되고 있었다.
“얼른 쉬자.”
“응. 조심히 들어가. 스티브.”
“아, 그리고 수현.”
감기는 눈으로 준의 집에 들어서려는 수현을 스티브가 불러세웠다.
“나도 즐거웠어.”
“응?”
“거리에서 그림을 그리고 놀러 다닌 거 말이야. 런던하면 이제 그 추억이 떠오를 것 같거든.”
싱긋 웃어 보인 스티브가 다시 손을 흔들었고 수현도 미소 지으며 현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일주일 후.
“좋은데?”
제임스 리가 수현의 새로운 습작을 보며 턱을 쓸었다.
“수현, 너에게 뭔가 폭발이 있었던 거구나.”
“네?”
“감정이 달라졌어. 미묘하긴 하지만.”
수현은 여전히 [창>을 주제로 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큰 틀이 되는 초기 구상과 스케치는 그대로였으나 색감과 디테일이 조금 달라졌는데, 제임스 리는 그 미묘한 분위기를 귀신같이 알아차렸다.
“한층 풍부해진 느낌이네. 음. 나쁘지 않아.”
“다행이네요. ……사실 제 그림이 그간 좀 우울한 면이 있잖아요.”
수현이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았다.
“다양한 감정을 표현하고 싶은데 항상 어딘가 갇힌 것 같은 느낌이 들었거든요.”
“흐음. 그래?”
제임스 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스티브는 강렬한 느낌에 에너지가 넘치고, 준의 그림은 따뜻해요. 제임스 리, 선생님의 그림은 차가운 이성과 이지적인 느낌을 주고요.”
“그런데?”
“저는 그런 그림들에 비하면 텐션이 떨어진달까. 생기가 없어서요.”
“저런.”
제임스 리가 수현의 그림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말했다.
“난 그게 네 그림의 매력이라고 생각하는데?”
“네?”
“수현, 잘 들어. 중요한 건 네가 어떤 색을 가지고 있느냐가 아니야. 너만의 색을 가지고 있느냐지.”
“저만의 색이요?”
“남들이 다 가지고 있는 흔한 색은 필요 없어. 너에게만 있는 색, 그게 중요하다고. 그러니까 넌 예술가잖아. 네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어떤 일을 너만 해낼 수 있다는 거. 그게 얼마나 큰 축복인데 그래.”
“하지만 이왕이면, 그러니까 좀 더 대중적이려면 사람들이 기분 좋게 공감할 수 있는 감정을 표현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전혀.”
단호하게 답한 제임스 리가 책장을 향해 가더니 화집을 몇 권 꺼냈다.
“이것들을 봐. 네 그림보다 훨씬 더 기괴하고 그로테스크하기까지 해. 엄청나게 부정적인 감정을 풍기지. 압도적이기도 하고 숨이 막히게도 하고 때론 충격을 주며 보는 사람들을 괴롭히기도 하고 말이야. 하지만 이것들은 전부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은 작품들이야.”
“아…….”
“혹시 이 작가를 알고 있니?”
제임스 리가 가져온 책 중 두꺼운 도록을 한 권 펼쳤다.
“헉.”
낯익은 작품이 눈에 들어왔다.
“데미안 허스트잖아요.”
“와, 진짜 알고 있어?”
제임스 리가 오히려 놀란 눈으로 수현을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오히려 얘기가 쉬워지겠네. 이 친구는 삶과 죽음에 굉장히 관심이 많은 작가야. 91년 전시회에서는 포름알데히드를 가득 채운 유리 진열장에 죽은 상어를 넣어 전시했었지.”
유명한 작품이었다.
공교롭게도 뱅크시와 같은 영국 브리스톨에서 태어난 데미안 허스트는 91년 영국 사치갤러리에서 연 전시회에 죽은 상어를 박제한 작품을 발표해 평단의 주목을 받으며 일약 스타 작가로 떠올랐다.
[살아있는 자의 마음속에 있는 죽음의 육체적 불가능성>.박제된 상어 앞에 붙은 철학적인 작품명.
관객들은 상어의 비주얼에 한번 놀라고, 얼른 이해하기 힘든 작품명 앞에서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이해하기 위해 애썼다.
그리고 전시된 죽음에 기울던 관심은 다시 작가와 그의 다른 작품들로 옮겨갔다.
비슷한 시기 발표된 데미안 허스트의 작품들은 공교롭게도 모두 ‘죽음’을 소재로 삼았다.
죽은 소머리와 구더기, 설탕, 살충기, 물을 유리 진열장 안에 넣어 구더기가 파리가 돼 소머리에 덤벼드는 순간 전기 살충기로 죽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거나, 죽은 나비들, 해골과 보석, 인간의 장기 모형을 이용해 작품을 만들기도 했다.
“저도 이 작품은 봤어요. 물론 실물을 보진 못했지만요.”
수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도록을 넘겨보았다.
“데미안 허스트는 상업적인 요소에 지나치게 치우친 작가란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거장이 될 가능성이 큰 작가가 분명해.”
제임스 리가 수현이 보는 작품을 함께 눈으로 훑으며 말했다.
“어쨌거나 그가 인기를 끌고 작품활동을 이어갈 수 있는 건 충격적인 주제를 충격적인 방법으로 전시하기 때문일 거고.”
“그렇죠. 사체, 해골, 죽음. 모든 소재가 우리를 두렵게 하고 불안하게 만드는 것들이니까요.”
“그런 면에서 보면 아주 영리한 작가라고 할 수 있어.”
“맞아요. 동감해요.”
“수현.”
제임스 리가 수현을 가만히 불렀다.
“내가 이걸 너에게 보여주는 건 데미안 허스트처럼 비범하고 충격적인 작품을 설계하고 이목을 끌 방법을 고민하란 뜻이 아니야.”
“네.”
“데미안 허스트는 어릴 때부터 죽음과 해부라는 주제에 빠져 있었어. 대학 시절엔 장례식장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고. 그러면서 죽음의 본질, 실체를 경험할 수 있었지. 그간 예술은 죽음을 숭고하게, 성스럽게 묘사하려고 노력했는데 그가 볼 때 진짜 죽음은 훨씬 더 노골적이고 혐오스럽기도 했던 거야. 그는 그걸 여과 없이 드러내고 싶어 했던 거고.”
“…그건 남들이 하지 않던 시도였겠네요.”
“그렇지. 자, 그럼 데미안 허스트는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음. 자기만의 주제를 찾았기 때문일까요?”
“반쯤은 맞아. 먼저 자기만의 주제에 깊이 빠져 탐색하고 고민했으니 새로운 시각을 얻을 수 있었을 거야.”
“네.”
“자, 그럼 다음 질문. 데미안 허스트가 죽음 외에 다른 여러 가지 주제들을 이것저것 내놓았다면 어땠을까?”
“아.”
순간 수현이 탄성을 뱉었다.
제임스 리가 자신에게 하려는 말이 어떤 건지 바로 깨달아졌다.
“억지로 영역을 넓힐 필요는 없다는 말씀이신 거죠?”
“그래. 물론 예술가가 다양한 감정을 느끼고 경험의 폭을 넓히는 건 무척 중요한 일이야. 하지만 그 경험과 감정의 아웃풋은 오히려 일관성 있게 나타나는 게 좋겠지. 그게 예술가가 구축한 세계이자 작품의 색이 될 테니까.”
그럼 이대로여도 괜찮다는 걸까.
수현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얼마 전부터 수현은 순수한 감정을 온전히 느끼지 못하는 것에 불안을 느꼈고, 다시 새로운 감정을 느끼게 된 데에 희열을 느꼈다.
발견했고, 나아졌으니 이제 더 많은 시도를 해야겠다, 어쩌면 화풍을 바꿔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제임스 리는 오히려 수현의 장점과 매력에 집중하란 조언을 해주고 있었다.
“확장, 그리고 성장을 하려면 더 많은 것을 다룰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지. 나도 그랬어. 너 역시 새로운 에너지와 자극이 주어졌으니 이것저것 새로운 시도를 해보고 싶었을 거야. 이해해.”
제임스 리가 싱긋 웃었다.
“그런데 수현, 잊지 마. 넓고 얕은 것보다는 깊고 진한 게 좋다는 걸 말이야.”
“그럼 제가 잘하던 것에 더 집중할 방법을 찾아야겠네요.”
“그게 좋지. 그런데 그건 또 어려운 일이긴 할 거야. 모든 일이 그렇잖아? 초급을 하나 더 따는 것보다 중급, 고급으로 올라가는 게 힘든 법이니까. 하지만 도전해볼 가치는 있지. 해야 하고. 혹시 모르잖아? 새로운 경지가 보이게 될지.”
암호같이 아리송한 이야기.
그러나 수현은 그대로 따르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정말 제임스 리의 말대로 전엔 보지 못한 것들을 깨닫게 되면 내 그림은 또 어떻게 달라질 수 있을까.
캔버스에 그려진 아직 비어있는 창에 무엇을 그리면 좋을지 떠오른 건 바로 그 직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