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Renowned Genius At My Arts High School RAW novel - Chapter (52)
52화. 작은 전시회(1)
며칠째 수현은 아뜰리에에 틀어박혔다.
런던에 온 지 3주.
쏜살같이 시간이 흐르더니 일주일 후면 한국에 돌아갈 시간이 된 거다.
“아직도야?”
“그러게. 지금 몇 시간째지?”
수현의 작업방 밖에서 준과 제임스 리가 작게 속삭였다.
수현은 때론 10시간도 꼼짝하지 않고 그림을 그렸다. 식사를 거르고 밤을 새우는 날도 있었다.
준과 제임스 리도 때때로 영감에 사로잡힐 때 몰아치는 일이 있지만 며칠이나 그림의 세계에 들어간 수현을 보자니 걱정이 커졌다.
“그런데, 그림은 봤어?”
준이 슬쩍 물었다.
“사실 나 무척 놀랐어.”
“왜?”
“아까 티와 쿠키를 좀 가져다주려고 수현의 방에 들어갔거든.”
준의 표정이 묘해졌다.
“난 그렇게 빨리 성장하는 예술가는 처음 본 것 같아.”
연인인 제임스 리가 관심을 보인 작품에 덩달아 흥미를 느끼게 된 게 시작이었다.
한국의 고등학생. 바다 건너 작은 나라의 화가 지망생이 영국을 대표하는 예술가 제임스 리와 어떻게 비슷한 구상을 해낼 수 있었을까, 그저 궁금했다.
그 작은 궁금증은 수현이 그림을 완성해갈수록 눈덩이처럼 커져갔고, 세현예고 미술 전시회에선 웃음이 터지는 감탄이 되었다.
“제임스. 얜 지니어스야. 그렇지?”
한국에서 수현을 만난 후, 그리고 호텔에서 따로 짧은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 준은 수현을 천재라 인정했다. 그리고 그 인상은 이제 완벽하게 굳어지고 있었다.
“독특한 매력을 가졌어. 화려하진 않은데 잊을 수 없는 충격을 준다고 해야 하나. 난 수현의 그림을 보면 어딘가 아련하고 내가 경험하지도 않은 슬픈 일이 마치 내 것처럼 느껴져.”
“하하, 그래?”
“어. 그러다가 실은 진짜 나한테 있던 일인데 내가 그걸 까맣게 잊은 건 아닌가,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내 감정이 이렇게 진해질 수 있는 건지 헷갈리기도 해.”
“준은 워낙에 감수성이 풍부하니까.”
제임스 리가 싱긋 웃으며 준을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당신도 수현에게서 비슷한 걸 보고 있잖아. 저 애가 가진 오리지널리티 말이야.”
“분명히 있지. 아직은 원석이지만, 연마하면 어마어마한 보석이 될 아이야. 맞아. 난 그걸 기대하고 있어.”
“그래. 우린 엄청난 탄생의 과정을 지켜보고 있는지도 몰라.”
“확실히 흥미로운 아이야.”
제임스 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감정적인 준만큼은 아니었으나, 그 역시 수현을 지켜보며 몇 번이나 놀란 일이 있었다.
‘보통은 한 계단을 오르고 나면 정체기를 걷다 다시 힘겹게 다음 계단을 오르는 법인데…… 수현은 달라. 벌써 몇 개의 계단을 훌쩍훌쩍 뛰어넘고 있어. 대체 어디까지 이런 속도로 성장할 수 있을까.’
남다른 성장 속도. 타고난 센스에 가르치는 것들을 스펀지처럼 흡수하는 이해력.
무엇보다 자질이 훌륭했다.
겨우 10대의 아이에게서 나오는 것이라 믿을 수 없는 성찰과 깊이, 그리고 표현력.
‘언젠가 큰일을 낼 아이야. 하지만 세상에 제대로 내보이려면 많은 준비와 도움이 필요하겠지.’
천재는 이전에도 많았다.
그리고 모든 천재가 행복한 삶을 살고 인정받은 건 아니었다.
사후에 인기를 얻거나 중요한 시기, 사건에 휘말려 천재성을 잃은 이들도 있었고.
제임스 리는 미술계에서 수많은 사례를 목격한 만큼, 자신이 발굴한 첫 제자인 수현을 어떻게 보호하고 끌어가야 할지도 고민하고 있었다.
그리고,
“끝났다.”
덜컹-.
마침내 그림을 완성한 수현이 방 밖으로 나가려 문고리를 잡은 순간, 제임스 리 역시 뭔가를 결심하고 반대편에서 문고리를 돌렸다.
“어엇!”
“아이코!”
하마터면 크게 부딪칠뻔한 둘.
“괜찮니?”
“네. 잠깐 손에 힘이 빠져서.”
“하하. 얼굴이 말이 아니구나.”
“피곤하긴 해요.”
“좀 볼까?”
“네. 얼마든지요.”
수현이 슬쩍 문에서 비켜나며 제임스 리가 작업방에 들어올 수 있게 해주었다. 그리고 잠시 수현이 손을 씻으러 간 사이.
“…….”
수현이 완성한 그림을 본 제임스 리의 눈동자가 크게 일렁였다.
“미쳤군.”
제임스 리가 성큼, 수현의 그림으로 한 발자국 더 다가섰다.
“미쳤어.”
작은 미소가 제임스 리의 얼굴에 걸리더니 하하, 커다란 웃음으로 번져갔다.
“수현!”
제임스 리가 수현을 크게 불렀다.
“얼른 이리로 와봐! 네가 뭘 했는지 다시 한번 와서 확인해보라고!”
제임스 리가 고개를 저어가며 웃음을 터트렸다.
맹세코 어떤 전시에서도, 어떤 화가의 작품 앞에서도 보인 적 없는 격렬한 반응이었다.
***
“전시회라고요?”
다시 작업방으로 돌아온 수현은 흥분한 제임스 리에게 뜻밖의 제안을 받았다.
“그래. 원래 예정된 전시긴 한데, 쇼디치의 젊은 예술가들이란 테마 말고는 굉장히 자유로운 전시야.”
제임스 리는 바로 다음 주, 자신이 준비한 전시회가 열릴 예정인데 거기에 수현의 작품을 함께 거는 게 어떻겠느냔 말을 꺼내고 있었다.
“하지만, 제 그림을요?”
수현이 머뭇거렸다.
어떤 예술가들이 참여하는지는 다 알지 못했으나 대충 들은 바로는 제임스 리와 준의 작품이 걸릴 예정이었다.
그룹전이라 해도 이미 엄청난 인기를 얻고 있는 유명 작가들이 참여하는 전시인데 거기에 자신이 들어가도 되는 건가, 헷갈렸던 거다.
“마침 빈 벽이 있어.”
제임스 리가 걱정하지 말란 얼굴로 웃어 보였다.
“원래는 관객들을 위한 벽으로 비워둘 예정이었지. 전시를 본 관객들이 느낀 걸 기록하고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큰 벽을 공개할 생각이었거든. 그런데 갤러리 측에선 그 벽의 공간이 너무 크단 얘길 해왔고.”
“아, 그럼 그 벽의 일부를.”
“그래, 수현 너랑 또 다른 작가들의 그림을 더 거는 게 좋겠다는 게 내 생각이야.”
제임스 리는 이 계획엔 아무 문제가 없다며 수현의 친구인 스티브에게도 준이 똑같은 제안을 했을 거란 말을 했다.
“한국에서 함께 온 네 친구들이나 여기서 사귄 예술가 중에 참여를 원하는 작가가 있으면 함께 해도 좋아. 너무 수준 이하라면 곤란하겠지만 미리 작품을 보고 조율할 수 있다면, 갤러리에서도 좋아할 거야. 실험적인 작품, 신선한 예술가를 발굴하고 소개하는 게 그들의 의무기도 하니까.”
“네.”
수현은 그래도 얼떨떨하기만 했다.
영국에서의 한 달은 그야말로 꽉 채워진 시간이었다. 하나 버릴 것 없는 경험을 통해 스스로 느낄 만큼 성장했고, 많은 깨달음을 얻어 전과는 다른 그림을 그려낼 수 있었다.
[시선> 그리고 [창>.수현이 마지막으로 그린 그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95년으로 돌아온 후 수현이 그린 [바다 없는 바다>, [바람의 목소리>, [빛의 계절> 세 장의 그림은 또래들의 것에 비해 무척 훌륭했으나 마음 한구석엔 아쉬움이 남는 작품들이었다.
미술 전시회 그랑프리를 목표로 했으니 어떤 부분에선 계산이 들어가기도 했고,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정해두고 경험과 기술에 상당 부분 지분을 내어주기도 했으니까.
그래서 수현은 솔직함. 그리고 감정에 그대로 부딪치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리기도 했다.
다행히 거리예술가들과의 만남은 그런 답답함을 해소해주는 확실한 창구가 되었다.
즉흥적이고 감정적인 그리기를 몇 번이나 경험하고, 거기에 제임스 리의 조언이 더해지면서 수현은 자신의 색깔을 더 확실히 내며 한층 깊어진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됐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했는데.’
[창>.처음 구상할 때와 같은 건 창을 경계로 한 두 개의 공간이 다른 주제와 분위기를 풍긴다는 것이었다.
달라진 건 감정의 깊이.
수현은 창 안쪽에 행복을 담으면 바깥쪽엔 외로움을 담거나, 바깥쪽에 그리움을 담으면 안쪽엔 우울함을 담았다.
그리고 그 감정을 극대화하기 위해 캔버스의 방향을 바꾸었다.
세로가 긴 방향으로 세워 그리던 걸 90도로 눕혀, 높이가 낮고 폭이 넓어지는 방향으로 전환한 거다.
그것만으로 그림의 분위기는 확실히 달라졌다.
수현이 나타내려던 게 보다 완벽하게 구현된 거다.
‘세로가 긴 그림이어야 위태로운 감정이 고조될 거라 생각했지. 불안한 대비로 시선을 끌려면 캔버스를 세우는 게 낫다고 믿었고. 그런데 방향을 바꾸니 오히려 감정이 증폭됐어.’
음식에 소금을 살짝 더할 때 오히려 단맛이 높아지는 것과 같은 원리였다.
불안한 감정을 불안한 구도에 담는 게 아니라 불안한 감정을 편안한 구도에 담자 더 큰 화학작용이 일어났다.
폭발할 것 같던 감정이 권태로운 풍경을 만나 부글부글 끓으며 더 오래 보는 이의 시선을 붙잡았다.
‘나도 마음에 드는 그림이긴 해.’
수현이 찬찬히 시선을 돌려 다시 제임스 리를 바라보았다.
그는 수현의 이번 그림이 볼수록 묘한 감정을 일으킨단 평을 해주었다. 더 많은 사람이 이 그림을 볼 수 있게 해야 한단 말을 건넸고.
갑작스러운 큰 제안.
그룹전이라 해도 런던에서의 전시라니. 긴장되면서도 동시에 궁금했다.
다른 사람들은 내 그림을 어떻게 봐줄까.
수현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정말 저 그림으로 괜찮은 거라면 해보고 싶어요. 전시요.”
제임스 리가 걱정할 것 없단 얼굴로 싱긋 미소 지었다.
“그리고, 친구들과 신인 작가들이 함께 참여할 수 있다고 하셨죠?”
“어. 그랬지.”
“그럼 제가 청하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요.”
얼굴 가득 물음표를 떠올리고 있는 제임스 리에게 수현이 속으로 떠올렸던 아이디어를 천천히 꺼냈다.
***
“전시? 갤러리에?”
곧장 친구들에게도 소식을 알렸다. 제임스 리의 말대로라면 빈 벽은 꽤 넓었고, 신인들도 참여할 수 있는 전시였으니까.
그리고 친구들의 반응은 수현의 예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난 괜찮아.”
“사실 우리 놀기만 했어.”
박선화와 차윤희는 민망하게도 제출할 그림 같은 건 없다며 머리를 긁적였고,
“나야 언제든 오케이지.”
이미 준에게 전시 제안을 받은 스티브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전에도 말했든 난 내 그림을 갤러리에 박제해 부자들의 전유물이 되게 하지 않을 거야. 모두가 즐길 수 있게 그릴 생각이거든. 권위있는 비평가의 평가보단 펍에서 맥주를 한잔 마신 손님들이 해주는 칭찬이 더 듣기 좋기도 하고 말이야.”
오랜만에 만난 뱅크시는 제안을 단번에 거절했다.
“난 거리가 좋아. 거리의 관객들을 사랑하고. 그런데 수현, 너도 그 즐거움을 알게 된 거 아니었어?”
수현이 런던을 떠나기 전 한 번 더 거리에서의 콜라보를 제안하려 했는데 아쉽다는 말을 보태기도 했다.
“너무 잘 알지. 거리예술은 무척 매력적이잖아. 검사받거나 평가받을 필요가 없으니까 한없이 자유로워지고 무슨 일이 일어날지 두근두근하고 말이야. 관객들도 마음이 넓고.”
수현이 뱅크시를 달래듯 말했다.
“그런데 뱅크시. 거리예술과 갤러리의 예술이 만날 방법은 없을까?”
“어?”
“전시에 출품할 계획이 없더라도 한번 구경하러 와줘. 너한테 줄 선물이 있거든.”
수현이 환하게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