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Renowned Genius At My Arts High School RAW novel - Chapter (54)
54화. 작은 전시회(3)
살다 보면 새삼 자신이 살아있다는 걸 느끼게 되는 순간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할 때, 절경을 마주했을 때, 생명의 신비를 목도했을 때, 크나큰 진리를 비로소 깨달을 때.
계기는 크기도, 때론 사소하기도 한데, 이날 전시장엔 몇 장의 그림만으로 이런 감정의 증폭을 느끼는 이들이 속출하고 있었다.
“세상에. 이것 좀 봐.”
“제목부터가 예술이야. [오후 3시의 진실>이라니 꼭 추리소설 제목 같지 않아?”
“와, 이건 너무 웃겨. 표정이 너무 우스꽝스러운데?”
일반적인 갤러리와는 달랐다.
고요하게 침묵을 지킨 채, 이따금 헛기침을 참지 못한 사람들의 숨소리만 어색하게 들리는 위축되고 근엄한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었다.
“느낌이 강렬해. 이거 좋다.”
“나는 별로야. 그다지 와닿지 않아. 차라리 이 코너의 그림이 확 끌어당기는 뭔가가 있어.”
“이건 재기발랄한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것 같네.”
솔직한 감상이 오갔다.
그럴 수밖에. 권위 있는 화가의 이름도 그걸 강조하는 갤러리 관계자도 없이 그저 걸려있는 그림.
게다가 입장료가 없는 무료 전시니 누구나 들어와서 자기가 느낀 것을 편하게 내뱉을 수 있었다.
“와, 나 상처받았어.”
전시장을 둘러보면 스티브가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왜?”
“저기 저 꼬마 보이지? 빨간색 목도리를 두른 꼬마 아가씨 말이야.”
스티브가 전시장 한편을 걷고 있는 어린아이를 슬쩍 가리켰다.
“어, 저 애가 왜?”
“좀 전에 내 그림 앞에 한참 서 있더라고. 난 뭔가 제대로 된 감상을 하는 건가 흐뭇하게 지켜봤고 말이야.”
이야기를 하면서 스티브는 점점 울상이 되었다.
“근데 흐아아, 하고 하품을 하네?”
“어?”
“눈까지 비벼가면서 말이야. 두 번이나 연거푸 하품을 하더니 지금 다른 그림을 보고 있어.”
“하핫.”
“웃음이 나와? 수현, 이건 심각한 일이야. 솔직히 말해봐. 내 그림이 지루해? 졸음이 쏟아지는 그림이냐고.”
“그럴 리가. 그냥 저 애가 좀 피곤했나 보지. 아니면 네 그림에서 평안을 얻었거나.”
“하아. 몰라. 나 지금 멘탈이 흔들려. 이너피스. 이너피스를 찾아야겠어.”
휘적휘적, 스티브가 전시장의 다른 그림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쩐지 빨간 목도리 꼬마가 다른 그림을 어떻게 감상하는지 지켜보려는 의도 같아 보이긴 했지만, 수현은 피식 웃으며 모른 척해주었다.
그리고,
“이거 왜 이렇게 슬프지?”
“맞아. 아련해.”
“행복해 보이는 풍경인데 톤이 다운돼서 그런가?”
“몰라. 어쨌든 너무 슬퍼.”
“나는 권태로움 같은 게 느껴져. 무기력하고, 기운이 쭉 빠진달까.”
수현은 살짝 떨어져 이번엔 자기 그림 [창> 앞에서 감상을 나누는 사람들을 지켜보았다.
‘의도는 제대로 전달된 것 같네. 내가 표현하려고 애쓴 것들을 관람자가 느끼는구나.’
수현은 가로로 긴 구도에 도시의 정경을 담아두었다.
높이 올려진 빌딩과 아파트.
그리고 그 창으로 보이는 몇몇 집의 풍경을.
바쁘게 돌아가는 도시에서는 미친 듯 시간에 쫓기면서도 해결하기 어려운 외로움에 닿기 마련이다.
수현의 그림 속 인물들도 각자의 창 안에서 그런 양가적인 감정에 직면하고 있었다.
외출을 준비하다가 상대의 일방적인 취소로 집에 머물게 된 여자.
습관적으로 나갈 준비를 했지만, 직장을 잃어 막상 갈 곳은 없는 남자.
각자의 방에서 대화 없이 외딴섬으로 살아가는 가족들. 수화기를 든 채 울음을 삼키는 노인.
각자의 사연은 수현에게만 구체적으로 정해졌을 뿐, 표현은 작위적이지 않은 선에서 마무리했다.
그러나 그들의 분위기와 뉘앙스는 보는 이들에게 오롯이 전달된 모양이었다.
“역시 괜찮은 반응인데?”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수현이 화들짝 놀라며 돌아보았다가 한 번 더 놀랐다.
“허. 뭐예요? 깜짝이야.”
제임스 리였다.
익명 전시회니만큼 시선이 쏠리는 것과 누군가 알아보는 걸 경계했는지 챙이 있는 모자에 마스크까지 쓰고 있었다.
“저, 선생님. 오히려 이편이 더 눈에 띌 것 같은데요.”
“어? 그래? 하지만 궁금해서 참을 수가 있나.”
제임스 리가 어깨를 살짝 흔들며 웃었다.
“사람들을 봐. 이만하면 대성공이야. 최근 런던에서 이렇게 북적인 전시장은 없었거든.”
“네.”
“그래서 넌 어때?”
“저요?”
“진짜 반응은 잘 살펴보고 있어? 네가 원했던 진짜 반응 말이야.”
“이제 막 들어와서요. 그냥 조금 분위기만 살폈어요.”
“흐흠. 그래?”
제임스 리가 짓궂은 눈으로 수현을 바라보더니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나랑 친한 큐레이터의 정보인데, 오늘 저녁에 캐서린이 방문할 예정이래.”
“네?”
“아, 너는 잘 모르겠구나. 캐서린은 영국은 물론 유럽과 미국에까지 영향력이 대단한 세계적인 미술 평론가야. 나랑도 인연이 깊지.”
“그럼 선생님의 작품을 금방 알아보는 게 아닐까요?”
“물론, 그 친구 눈을 속이긴 어려울 거야. 내 그림이 들통나는 건 시간 문제겠지. 해서, 전시가 마무리될 때까진 스포일러를 자제해달란 부탁을 할 생각이고.”
“네.”
캐서린은 제임스 리에게 우호적인 평론가라 했다.
제임스 리의 전시마다 호평을 담은 기사를 신문과 잡지에 제일 먼저 실었고, 그의 전시가 다른 대륙에서 어떤 영향을 일으키고 반응을 보이는지 상세하게 기록해 국내 팬덤을 일으키는 데 일조했다는 것.
그녀는 특히 젊은 작가들과 현대미술의 움직임에 관심이 많아 새로운 시도와 도전에 열광하는 성격이라 했다.
그런 캐서린이니 이 수상한 전시를 그냥 넘길 리 없을 거고, 그러니 제임스 리도 자신의 참가 여부를 잡아떼기보단, 발표를 조금만 늦춰달란 부탁을 하는 게 낫단 설명이 그 뒤로도 한참 이어졌다.
“그런데, 제가 특별히 그분의 방문을 알아둬야 할 이유가 있나요?”
수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제임스 리의 측근인 유명 평론가. 그녀가 이번 전시회에 방문해 좋은 인상을 받는다면 영국 매체에 홍보가 될 만한 좋은 기사가 실리긴 할 거다.
그러나 그룹전, 그것도 유명 작가가 꽤 많이 참가한 전시니 스포트라이트는 제임스 리와 준을 비롯한 몇몇에게 꽂힐 게 분명했다.
‘얼굴이라도 익혀두라는 건가? 아님 따로 인사를 시켜주려나?’
영 감을 잡지 못하는 얼굴을 하는 제자, 수현이 귀엽다는 듯 제임스 리가 하하 웃으며 말했다.
“진짜 반응이 보고 싶다며.”
“네?”
“이따가 그녀가 오거든 네 그림에 어떤 반응을 보일지 지켜봐. 나도 궁금해서 자세히 볼 생각이야.”
“아, 제발 그만 놀리세요.”
아까부터 진짜 반응을 유독 강조하는 제임스 리의 말에 수현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제임스 리는 어깨를 으쓱 올리며 태연한 얼굴을 했다.
“아깐 조금 놀린 게 맞는데, 지금은 아니야. 수현, 잘 들어. 내가 현재 위치에 있을 수 있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캐서린이란다.”
“네?”
“무명 시절, 아무도 내 그림에 관심을 두지 않았을 때 그 가치를 가장 알아봐 준 게 바로 캐서린이었어. 나뿐 아니야. 준을 비롯해 여러 화가를 발굴한 매의 눈이기도 하지.”
“아, 그래요…….”
수현이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권위에 휘둘리지 않아. 게다가 안목이 좋아서 능력 있는 신인 발굴에 특화돼 있지. 어쨌거나 이번 전시회에 그녀가 온단 얘기에 무척 기대되더라고. 내 그림을 알아보는 거야 당연한 일이겠지만, 또 다른 보물을 알아볼지는 두고 봐야 할 일이니까.”
“뭐예요. 선생님. 놀리는 거 맞잖아요. 그런 위대한 평론가가 설마…….”
수현이 뒷말을 흐렸다.
날카롭고 높은 안목을 가진 평론가라니 어지간한 그림엔 눈을 두지 않을 테지.
어쩌면 자신의 그림 앞엔 몇 초 머물지 않고 쓱- 지나갈 수도 있었다. 그러니 기대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았는데, 제임스 리의 생각은 아주 달랐다.
“수현. 겸손은 예술가의 아주 중요한 덕목이지만 자신감이 없는 것과는 다른 문제야.”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지만 진심이 어린 진지한 말투.
“어쨌든 캐서린의 진짜 반응을 눈여겨보도록 해. 그리고 넌 좀 더 자신감을 가지는 게 좋겠어.”
제임스 리가 수현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곤 다시 관람객의 동선에 따라 다른 그림을 감상하러 걸음을 옮겼다.
“어휴. 세현예고 정도라면 모를까, 여기서 어떻게 자신감을 가지냐고요.”
그리고 수현은 더 담대한 심장을 가지란 제임스 리의 충고에 한숨을 내쉬었다.
안 그래도 넓은 전시장이 더 휑하게 느껴지며 자신의 존재가 한층 더 작아지는 기분이었다.
다시 몇 시간 후.
신기하게도 전시장의 관람객은 줄지 않고 오히려 점점 늘었다.
‘신기한 일이네.’
SNS나 스마트폰 같은 게 없는 시절이다. 뭔가 화젯거리가 생겨도 소문이 나는 데는 시간이 꽤 걸릴 텐데, 어디서 자꾸 사람이 몰려드는 걸까.
어쩌면 콘텐츠가 많지 않은 시절이라 집중도가 높아지는 건가?
갤러리에서 이 시대에 맞는 홍보전략을 펼쳤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 애써 긍정하며 수현이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어휴.”
좀 전 갤러리로 막 들어온 중년 여성 하나가 난처한 얼굴로 인상을 쓰고 있었다.
‘아, 밖이 아직 춥지.’
카멜색 코트에 체크무늬 목도리. 단정한 핸드백. 깔끔한 인상의 여성은 동그란 안경을 쓰고 있었는데, 따뜻한 실내에 들어오자 거기에 김이 잔뜩 서려 닦아내느라 낑낑대고 있었다.
‘밖에 눈이 내리나?’
코트와 목도리엔 아직 덜 녹은 눈송이가 달려있었다.
닦을 게 마땅하지 않았는지 여자는 목도리 끝으로 안경을 닦았는데 오히려 물기가 번져 점점 쓰기 나쁘게 되고 있었다.
‘저거 엄청 불편할 텐데.’
수현이 저도 모르게 성큼 여자에게 다가섰다.
“괜찮으시면 이걸 쓰시겠어요?”
마침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손수건을 내밀자 여자가 살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활짝 웃었다.
“고마워요. 친절한 아가씨. 그럼 잠깐 빌려 쓸게요.”
쓱쓱 안경을 닦는 여자.
잠시 후 안경이 깨끗해지자 그걸 걸쳐 쓴 여자가 찬찬히 전시장을 둘러보았다.
“꽤 그럴듯해 보이네요.”
“네?”
“여기요. 재밌어 보여서 들어왔거든요. 딱 기대했던 느낌이에요. 보통 전시장이랑 분위기도 다른 것 같고.”
“아, 자유로운 분위기긴 하죠.”
수현이 싱긋 웃자 여자가 수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여행자예요? 아님 새로 이사 온 이웃?”
“아, 저는 한 달 정도 런던에 머물고 있어요. 방학 동안에요.”
“음, 학생이었군요. 여행자치곤 영어 실력이 아주 좋은데요?”
“감사합니다.”
“미술에 관심이 많은가 봐요? 황금 같은 여행 기간에 전시장을 찾을 정도라니.”
“어, 좋아하긴 하죠.”
“미술이 좋은 점이 뭔지 알아요?”
여자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질문했다.
“그건 너무 많지 않나요?”
“하하 맞아요. 그건 그렇죠. 음, 근데 지금 내가 말하려는 건, 이거예요. 미술엔 국경과 인종, 시대와 세대를 뛰어넘는 힘이 있다는 거. 그래서 말인데…….”
여자가 한 번 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친절한 아가씨. 우리 잠깐 친구 하면서 같이 전시를 둘러보면 어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