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Renowned Genius At My Arts High School RAW novel - Chapter (56)
56화. 집으로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전시장 밖으로 무작정 나온 수현이 씩씩 숨을 몰아쉬며 골목 끝까지 급하게 달렸다.
‘아직 근처에 있을 거야.’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캐서린과 담소를 나누며 자기 그림 앞에 서 있던 시간은 10분 남짓.
‘진짜 감쪽같네.’
본래는 빈 벽이어야 하는 대각선 공간에 못 보던 그림이 한 점 걸려있었다.
‘뱅크시가 틀림없어.’
수현은 그 그림의 주인이 뱅크시일 거라 굳게 믿고 있었다.
‘예정에 없던 그림이 갑자기 걸렸어. 과거 뱅크시도 세계적인 박물관에 자신의 그림을 몰래 전시한 이력이 있었지. 지금이 조금 앞선 시기긴 하지만 똑같은 인물이니 똑같은 일을 벌일 수도 있을 거야. 게다가 그 그림, 누가 봐도 뱅크시의 화풍이었어. 뱅크시의 그림이 확실해.’
생각을 정리하는 수현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전시에 출품할 계획이 없더라도 한번 구경하러 와줘. 너한테 줄 선물이 있거든.”
수현의 부탁에 뱅크시는 이렇다 할 답을 주지 않았다. 수현도 전시 준비로 바빠 그 뒤 따로 얼굴을 볼 시간을 내지 못했고.
“그런데 정말 왔다는 거네. 구경뿐 아니라 자기 그림도 걸고 간 거고.”
얼마나 더 달렸을까.
골목 끝으로 낯익은 코트에 모자를 깊이 눌러쓴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뱅크시! 잠깐 멈춰! 기다려!”
수현이 크게 외쳤다.
***
“와, 나 바로 들킨 거야?”
뱅크시는 의외로 담담한 얼굴이었다.
“좀 불안하긴 했어. 작품 수가 그렇게 많은 전시장은 아니었으니까. 눈에 띄었겠지. 여기가 루브르도 아니고.”
뱅크시는 진지한 얼굴로 실패의 요인을 분석하더니,
“하, 그래도 고작 10분 안에 들통난 건 심각한 일인데.”
고개를 저으며 아쉬워했다.
“어떻게 된 거야?”
수현이 싱긋 웃으며 물었다.
“전시야 언제든 참여해도 좋다고 했잖아. 근데 왜.”
굳이 도둑 전시를 택한 이유가 궁금했다.
“오전까지만 해도 참여할 마음이 전혀 없었거든.”
뱅크시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수욘 너와의 약속이니까 오픈 시간에 맞춰 전시장에 왔어. 그리고 익명 전시회란 걸 알게 됐고.”
“역시, 그 컨셉이 마음에 들었던 거구나?”
“네가 뭘 말하려고 했는지 대강 알 것 같더라. 그러니까 갤러리와 합의점을 찾아보란 거잖아?”
진보적인 성향의 갤러리와 뱅크시의 필요가 만난다면 주류 밖에서도 얼마든지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을 거란 게 수현의 생각이긴 했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인터넷이 보급되기 전, 한발 앞서 대안이 될 만한 시스템을 찾을 수 있을 거고, 뱅크시는 물론 많은 거리예술가가 보다 안정적인 환경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될 거라고.
“맞아. 익명 전시회를 받아들인 갤러리처럼 새로운 시도에 겁내지 않는 곳이 분명 있을 거라 생각하거든.”
“확실히 신선하긴 했어. 하지만 전시 당일 생각이 바뀌었으니 자리를 달라고 할 순 없잖아. 아무리 나라도 그건 너무 민폐지.”
“와, 그래서 몰래 그림을 가져다가 걸었다고?”
“손님이 많긴 한데, 감시는 헐렁하던데?”
뱅크시가 슬쩍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어?”
“점심시간, 티타임. 그 후에도 거의 두 시간마다 한 번씩은 관리자들이 자리를 비우더라고. 처음엔 벽에 못을 박았고, 다음엔 그림을 옮겼고, 마지막으로 아까 숨겨뒀던 그림을 쓱 걸고 온 거지.”
뱅크시가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마크와 다른 친구들이 함께 한 작전이었다면서.
“다들 진짜 못 말리겠네. 어쨌든 걱정마. 내가 먼저 누군가에게 알릴 일은 없을 테니까.”
“크크. 그래. 그래 주면 고맙고.”
“그리고 뱅크시.”
“어?”
“주류와 비주류, 그 둘을 꼭 극단적으로 나눌 필욘 없어. 앞으로 네 생각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질 거고, 새로운 미술과 전시를 경험하는 방법을 찾게 될 거야.”
“정말 그렇게 생각해?”
“물론이지.”
수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너, 혹시 컴퓨터를 쓸 줄 알아?”
“조금은.”
“앞으론 컴퓨터를 쓸 일이 점점 많아질 거야. 전문적인 직업을 가진 사람뿐 아니라 보통 사람들이 그걸로 할 수 있는 게 많아질 거거든.”
미래에 올 이야기니 너무 깊게, 구체적으로 전해줄 순 없었다.
수현은 뱅크시가 의심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선을 떠올리며 도움이 될만한 이야기들을 골라내었다.
“특히 인터넷이 대중화되면 지역이나 시간에 매이지 않고 많은 사람이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게 될 거야. 그러니까 네가 너의 그림을 인터넷 공간에 올리면 전 세계 팬들이 모니터를 통해 그걸 동시에 보게 될 거란 거지.”
“갤러리나 다른 루트를 통하지 않고도?”
뱅크시가 눈을 끔뻑였다.
아직은 생소한 이야기.
그러나 깨어있는, 그리고 앞서가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그라면 이 정도로도 충분히 알아듣고 자극을 받을 게 분명했다.
‘조금이라도 먼저 개념을 잡으면 막상 그 시기가 올 때 누구보다 빠르게 자신이 해야 할 일과 할 수 있는 일들을 그려낼 수 있을 거야.’
수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당부와 팁이 될 말을 몇 가지 더 전했다.
비로소 뱅크시에게 진 고마운 빚을 조금은 갚은 것 같은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
“아쉽네.”
“그래, 너무 짧아. 이렇게 시간이 빠르게 흐를 줄이야.”
이틀 후, 준의 집.
올 때보다 한층 많아진 짐을 겨우 챙긴 수현이 두꺼운 코트를 챙겨입고 현관 앞에 서 있었고, 그 모습을 제임스 리와 준이 서운한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
“자주 연락해야 해.”
“물론이죠. 그간 정말 감사했어요. 예쁜 방도, 따뜻한 음식도요. 그리고 선생님, 많은 가르침을 얻었습니다.”
“너무 격식 차려 인사하지 않아도 돼. 또 금방 보게 될 테니까.”
“네?”
“올여름이나 가을, 한국에서 전시를 열게 될 것 같거든.”
“정말요? 어디서요?”
“강유진 관장이 적극 추진하고 있어. 일선화랑에서도 익명전시회 같은 재미난 전시를 열고 싶다면서 말이야.”
“와, 그래요.”
이별은 아쉬웠지만, 제임스 리와 준이 언제든 다시 볼 수 있는 인연이 됐다는 점이 서운한 마음을 달래주었다.
제임스 리의 말대로라면 여름이 되기 전, 한국에서 또 만날 일이 생길 테니까.
“참, 전시회 소식은 강유진 관장님께 따로 전해줄 거야. 아무래도 기숙사는 통화가 자유롭지 못할 테니까.”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당연한 일이지. 그리고 그림 대금은 갤러리 측에서 따로 연락해 줄 텐데 서류에 관한 건 좀 복잡할 거라, 그거 역시 일선화랑에서 대행해주기로 했단다.”
제임스 리가 상냥하게 덧붙였다.
익명 전시회는 아직 성황리에 열리고 있었다.
전시 마지막 날, 작가의 이름을 밝히면 어떤 반응이 더해질지, 언론이 뭘 어떻게 보도할지, 그게 영국의 현대미술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더불어 수현의 그림이 최종 얼마의 금액에 낙찰될지도.
“끝까지 보고 갔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게나 말이야. 수업 일수니 뭐니 한국 학교가 유난스러워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잖아.”
갑작스럽게 참여하게 된 전시였고, 곧 있을 학교 개학일에 맞춰 돌아갈 비행기 티켓을 끊어둔 탓에 귀국 날짜를 번복하긴 어려웠다.
이렇게 재밌는 일이 있을 줄 알았으면 좀 더 오래 머무는 건데.
아쉬운 마음이 컸지만 수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제 곧 겨울 방학이 끝난다. 2주간 수업을 한 후, 다시 봄방학을 거쳐 2학년에 진급하게 될 거고.
‘이것저것 준비할 것도 많겠지. 돌아가면 또 바빠지겠어.’
영국 생활에 흠뻑 젖어있었지만, 현재 수현의 본분은 학생이었다.
또, 한국에서 학교를 마치려면 지켜야 할 규칙들이 있었고.
아쉽지만 지금은 돌아가야 할 때였다.
“어쨌든 나가자. 아직 시간은 넉넉하니까, 마지막으로 밥 한 끼 먹고 가야지.”
제임스 리가 수현의 가방을 번쩍 들어주었다.
“오늘은 내 차로 가자.”
준이 차 키를 들어 보이며 미소 지었다.
수현이 제일 좋아하던 레스토랑을 예약한 둘은 수현과 강유진 관장, 스티브, 수현의 친구인 박선화와 차윤희의 자리까지 만들어 조촐하지만 따뜻한 송별회를 열어주었다.
몇 시간 후, 공항.
“확실한 건 영어가 꽤 늘었다는 거야.”
“나도. 근데 영국식 영어가 는 게 큰 도움이 될까?”
“무슨 도움?”
“영어 듣기평가 말이야.”
“우엑. 갑자기 시궁창에 밀쳐진 기분이 들었어.”
“왜?”
“듣기평가라니, 으아! 생각하기도 싫다고! 돌아가면 다시 그림, 공부, 그림, 공부. 무한 반복일 거 아냐.”
강유진 관장이 티켓을 확인하는 동안 박선화와 차윤희가 종알종알 떠들었다. 티격태격하는 건 여전했지만 한 달이나 함께 생활하면서 전보단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기념품은 좀 샀어?”
“무슨 기념품?”
“애들한테 나눠줄 과자 같은 거 말이야. 우리 영국 다녀온 거 다들 알 텐데, 싹- 입 닦기는 좀 민망할 거잖아.”
“아, 나 병정 캐릭터 인형 몇 개랑 월리를 찾아라 책 몇 권, 그리고 열쇠고리 몇 개 사긴 했어.”
“오, 잘 샀네. 이거 예쁘다. 나랑 하나 바꿀래?”
사소한 일에 호들갑을 떨며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니, 정말 이제 고등학교로 돌아가는 거구나, 실감이 나기도 했다.
그렇게 수현이 애틋한 마음을 갈무리할 때였다.
“수욘!”
“수욘! 여기야!”
수현을 부르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공항 대합실을 쩌렁쩌렁 울렸다.
“마크? 허, 뱅크시?”
수현이 저도 모르게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토마스, 대니까지. 다들 여기까지 어쩐 일이야?”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선 수현을 보고 고개를 젓는 애들.
런던에서 맺은 소중한 인연인 거리예술가들이었다.
“서프라이즈를 해주려고 찾아갔는데, 네가 벌써 출발했더라고.”
마크가 어깨를 으쓱 올리며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대체 공항엔 왜 이렇게 빨리 도착한 거야? 한국에 그렇게 빨리 가고 싶어?”
“아. 날 찾아왔었어?”
인사를 전하러 온 애들은 준의 집이 텅 비어있고, 이미 떠났다는 이웃의 얘길 들은 후 곧장 공항으로 왔다고 했다. 마지막 식사를 하고 이동하느라 수현과 일행이 집에서 일찍 나선 바람에 길이 엇갈렸던 거다.
“어쨌든 이렇게라도 얼굴을 봤으니 다행이지.”
뱅크시가 싱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잘 가. 수욘. 우리 또 만나자.”
“응. 그래. 꼭 그러자.”
수현이 뱅크시의 손을 맞잡았다.
“나도! 나랑도 꼭 다시 만나!”
뱅크시와의 악수가 끝나기가 무섭게 마크가 달려들었고, 수현은 차례차례 애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이거.”
뱅크시가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이게 뭐야?”
“선물이야.”
“선물?”
“별거 아니니까 부담 가질 건 전혀 없어.”
“하지만 난 준비한 게 없는데.”
“그러니까. 별거 아니니까 괜찮다고.”
뱅크시가 손을 내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에 내 주소도 들어 있어.”
“주소?”
“지난번에 수욘이 컴퓨터랑 인터넷 얘길 해줬잖아?”
“어, 그랬지.”
“마침 그쪽을 잘 아는 친구가 있어서 도움을 받았어. 그래서 이메일 주소란 걸 만들었거든.”
“와, 진짜?”
“어, 너도 가지고 있지? 이메일.”
“어?”
수현이 잠깐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인터넷이 얼마나 중요해질지 그렇게 강조해놓고, 막상 자신은 이 시기의 인터넷 수준은커녕 이메일조차 만들지 않았단 사실이 떠올랐던 거다.
“음. 돌아가면 네 이메일로 나한테 편지해줄래?”
다행히 뱅크시는 더는 따져 묻지 않고 편지를 주고받잔 이야길 했다.
“물론이지. 꼭 보낼게.”
“그래, 나도 답장할게.”
수현이 힘껏 미소 지었다.
아무도 정체를 모르는 금세기 최고의 천재 예술가.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 위대한 인물인 뱅크시와 메일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의 연속이었다.
“얘들아, 이제 들어가 봐야 해!”
그사이 강유진 관장이 수속을 마쳤는지 일행을 재촉했고.
“그럼 이만 가볼게.”
수현이 이번엔 진짜 작별 인사를 전했다.
작은 점이 될 때까지 손을 흔들어주는 애들의 모습을 보자니 어쩐지 가슴이 뭉클해졌다.
지이잉-.
자동문이 열렸고.
성큼.
수현이 한국행 비행기가 출국하는 게이트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