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Renowned Genius At My Arts High School RAW novel - Chapter (68)
68화. 연습
보름 후, 늦은 밤.
세현예고 미술과 실기동 2층 소묘실.
스스슥.
삭삭삭.
사각사각.
이젤 앞에 앉은 수현이 규칙적으로 어깨를 움직이며 선을 내리긋고 있었다.
“후웁.”
벌써 몇 장째인지 몰랐다.
2절지 종이를 화판에 압정으로 고정하고, 일정한 간격으로 가로와 세로 방향으로 직선을 몇 개 그어 작은 사각형들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사각형 안에 가로와 세로, 대각선. 각도가 저마다 다른 선들을 촘촘하게 반복해 그려 넣고 있었다.
모든 칸을 채운 다음엔, 먼저 그린 선과 45도, 혹은 90도로 틀어진 선을 한 번 더 채워 그렸다.
그리고 반복. 또 반복.
종이가 새카매질 때까지 선 긋기를 마치면 새 종이를 꺼내 다시 선 연습을 시작했다.
운동선수가 달리기로 먼저 몸을 풀 듯, 관악기 연주자가 곡을 불기 전에 소리 연습을 하듯, 똑같았다.
지루해도 반복해야 하는 기본기.
그림을 그릴 땐 선 연습이 항상 먼저였다.
툭 치면 턱 하고 나올 수 있을 때까지.
결정적인 순간 망설임 없이 쓱쓱 그려낼 수 있도록.
손이, 손에서 나오는 선이 내 눈에 담긴 형상과 머릿속에 번지는 이미지를 오차 없이 표현할 수 있게.
과거 수현은 셀 수 없이 많은 시간을 선 연습에 투자했다.
다시 고등학생이 된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화려한 기교나 눈에 띄는 기법에 시선을 뺏기기보다 근간이 되는 소박한 기본에 집중하고 있었다.
“하아.”
제법 뻐근해진 어깨를 돌리며 수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새카맣게 된 종이가 바닥에 쌓인 걸 보니 괜히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는 제법 돌아온 건가.”
수현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아니, 솔직히 말해 훨씬 나아졌지.”
처음 고교 시절로 돌아왔을 땐, 전성기만큼의 실력은 발휘할 수 없었다.
아직 고등학생의 몸이기 때문인지, 10년 넘는 기간 붓을 잡지 않아 손이 굳어서인지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수현은 꾸준히 수련을 반복했다.
그리고 곧 원래의 실력을 회복했고, 작품의 방향까지 제대로 잡아냈다.
그러니 지난 생에 30대까지 이루었던 성취보다 지금 가진 것들이 훨씬 커졌다 할 수 있었다.
그래도 새삼 긴장은 됐다.
지난겨울 런던으로 건너가 제임스 리, 준과 함께 그림을 그리고, 뱅크시와 친구들을 만나 거리를 쏘다니던 일은 꿈인 듯 멀었다.
‘쫄 필요는 없지만 방심해선 안 돼.’
수현이 마음을 다잡았다.
런던에서의 성취는 놀라운 것이었다. 이벤트의 효과였다 할지라도 세계적인 평론가에게 호평을 받고 그림을 팔기까지 했으니.
그러나, 세상은 넓고 천재는 수두룩하다.
재능있는 이들이 모두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이룬 성취엔 운과 인연이 상당 부분 작용했고, 그러니 결코 자만해서는 안 된다.
어찌 보면 답답할 정도로 수현이 자신을 가라앉히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대학 시절 유명했던 선배들, 차수혁 작가의 재능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평가받았던 차윤희, 화랑의 입주 작가 프로그램에서 만난 반짝이던 신인들.
수현이 볼 땐, 저마다 다른 결의 매력과 실력을 지닌 이들이었다.
그러나 과거 그들은 생활고로, 집안의 사정으로, 일신상의 문제로 결국 미술을 포기했다.
실력이 부족해서가 아니었으나 그걸 알아줄 사람은 없었다. 발견되기 전에 수명이 다했으니 그저 그걸로 끝이었다.
그러니 우물 안 개구리가 되어선 안 된다고, 나에게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수현은 새롭게 놓인 과제 앞에서 겸손한 자세를 취했던 거다.
탁. 탁. 토독.
이젤 앞으로 돌아온 수현이 화판에서 조심스럽게 압정을 뽑아냈다.
부주의로 잘못 흘렸다가는 언제 누군가의 발바닥에 꽂힐지도 모른다.
실제로 수현은 과거에도 돌아온 후에도 실기실에서 몇 번이나 압정을 밟은 기억이 있어 뒷정리에 더 꼼꼼했다.
스윽.
다 쓴 종이를 선반에 밀어 넣고, 가방에서 다이어리를 꺼내 오늘 그린 것들을 간단히 적어 넣었다.
전국대회까지 일주일.
내일이면 참가자들에게 제법 구체적인 대회 요강이 도착한다.
대회가 정말 코앞이었다.
***
“1차 시험은 우리 때랑 변동이 없네. 근데 참가자 수가 어마어마하구나. 와, 이번엔 3천 명 가까이 몰릴 모양인데?”
다음 날, 전국대회 준비반 교실.
김윤수 선생은 참가 경험자답게 자신이 대회에 출전했던 때의 상황과 이번 대회의 룰을 꼼꼼히 비교하며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1차 시험은 서울 서인대에서 치르게 될 거야. 참가자 수가 워낙 많은 데다가 후원사인 JK그룹이 최근 서인대 법인을 인수해서…… 아, 여기까진 알 필요 없나? 어쨌든 대회 일정이 토요일이라 비어있는 강의실이 많을 거고 거길 활용할 생각인 거 같다. 자, 1차 시험 룰을 먼저 설명해줄게.”
옹기종기 모여앉은 70명의 준비생이 김윤수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수현은 지난 삶에서 몇 번 들어본 이야기였으나, 워낙 오래전이기도 했고 김윤수의 분석도 궁금해 역시 집중하고 있었다.
“3천 명이라는 인원이 운동장에 모이면, 일단 위압감이 대단할 거다. 인원이 많은 만큼 감독관들도 철저할 거고, 거칠기도 할 거라 기가 죽을 수 있어. 하지만 내가 볼 때 1차 시험은 기세다. 겉보기엔 세 보여도 사실 시험 자체는 가장 부담스럽지 않은 편이거든.”
50명씩 들어가게 될 60개의 강의실. 부정행위를 방지하기 위해 주최 측은 각 교실의 시험 주제를 달리할 거란 단서를 달았다.
수험생이 번호를 뽑아 해당 교실에 들어가면, 시험 직전 그 교실의 시험 주제를 발표한다는 것.
어느 교실, 어떤 주제에 걸리느냐에 따라 실력을 발휘하는 정도가 달라질 텐데, 김윤수는 그 부분은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고 일축했다.
바로 그게 1차 시험의 함정이라면서.
“결국 1차 시험에서 보는 건 기본 실력이야. 소묘로 한정하는 것도 그 이유 때문이지. 드로잉 수준이 얼마나 되느냐, 그걸 보는 거거든.”
“그래도 쉬운 주제가 나오는 교실이 좀 더 유리한 거 아닌가요?”
“상대평가라면 그렇겠지. 그런데 1차 시험은 말 그대로 일정 수준 이상의 학생들에겐 모두 통과를 줄 거라 근소한 차이를 두고 스트레스를 받을 이유는 없어. 물론 이 일정 수준이라는 것도 주관적인 판단이긴 한데, 적어도 세현예고 미술과인 너희들은 충분히 통과할 수 있는 수준일 거다.”
아이들이 자신감을 얻을 수 있게 격려하는 김윤수.
그의 말대로 1차 시험은 소묘 실력, 즉 기본기를 확인하는 테스트에 가까웠다. 다만 시험 주제가 랜덤으로 정해진다는 것,
교실에 따라 정물, 인물, 풍경 등 다양한 주제가 나올 수 있다는 부분은 응시자들의 순발력과 기지를 확인하겠단 의도도 있었다.
김윤수도 그걸 모를 리 없었으나, 100을 전부 드러내기보다, 아이들의 사기를 올려주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한 듯했다.
“어쨌거나 종이를 뒤집어 그린다거나, 제출자의 이름을 쓰지 않고 낸다거나 하는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하지 않는 이상, 너희 모두 1차 시험은 너끈히 통과할 수 있을 거야. 그러니 자기 실력을 믿고,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그리는 게 중요해. 또, 시험 시간이 6시간으로 제법 긴 편이지? 점심 식사를 마치고 12시부터 6시까지 시험이니까 중간에 배고파서 힘이 달리거나, 너무 많이 먹어서 화장실에 들락거리거나 하는 일이 생기지 않게 각자 컨디션 관리도 잘해야 한다. 오케이?”
“네!”
“하하.”
“와, 오히려 그게 더 긴장되는데요?”
중간중간 농담을 섞어가기도 하면서 아이들의 긴장을 풀어주는 김윤수.
이번엔 디자인과 김여진 선생이 설명을 이어갔다.
“명심해. 너희에게 어려운 시험은 다른 애들에게도 똑같이 어렵다는 걸. 1차 시험은 누가 평정심을 유지하면서 평소 실력을 잘 내느냐가 관건이야. 주제가 쉽거나 어렵다고 흔들리지 말고 주제에 맞는 최선을 다해 보여주는 거, 그것만 하고 나오면 되는 거다. 진짜 시험은 2차인 본선부터거든.”
2차 시험부터는 수현도 잘 모르는 얘기였다. 과거 지나온 사건이었으나, 경험하지 않고 지나쳤던 일.
대회가 열리는 초반에만 관심을 두었다가 학과며 실기에 바빠져 자세한 내용을 알려 들지 않았었다.
그리고 이제야 전국대회의 룰을 제대로 알게 된 수현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떠올렸다.
생각보다 재밌는 대회가 되겠다는 감이 물씬 풍겼던 거다.
***
“야, 나 솔직히 이해를 못 했어. 그러니까 2차 본선은 투표로 주제를 뽑는다는 거지?”
수업이 다 끝난 후, 몇몇 애들이 그대로 남아 대회 요강 분석을 이어갔다.
“어, 100개 주제를 뿌려주고 그중에 두 개를 고르게 한다잖아.”
“그럼 제일 많이 뽑힌 두 개 주제가 시험에 나오는 거야?”
“아니, 그게 아니라.”
설명을 제대로 이해한 차윤희가 한숨을 푹푹 쉬며 애들의 민원을 처리했다.
“두 개의 주제가 선정되는 건 맞는데, 하나는 제일 많은 표를 얻은 거, 다른 하나는 제일 적은 표를 얻은 거로 뽑을 거래.”
“어? 왜?”
“그야 나도 모르지. 주최 측에서 정한 건데.”
“와, 이상하다. 괜히 복잡하고.”
“그니까 제일 인기 있는 애랑 찐따인 애를 그려야 한다는 거잖아?”
“맞아, 그거네. 몰표받은 주제야 다들 좋아하는 일반적인 주제가 될 가능성이 큰데, 적은 표를 받을 주제가 문제겠네.”
“그렇지. 그리기 까다로운 거, 싫은 거. 그런 게 뽑힐 거 아냐. 아, 진짜 생각만 해도 싫다.”
3차 결선은 베일에 싸여있었고, 정확한 대회 요강이 공개되지 않았다.
주최 측에서 구체적인 내용을 전달한 건 2차 본선까지였는데, 애들은 랜덤 시험인 1차보다 투표가 좌우할 2차 시험에 훨씬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작전을 잘 짜야겠다. 좋은 것만 두 개 쓰려고 했는데, 그랬다가 싫어하는 주제가 나올 수도 있는 거잖아.”
“아, 그럼 하나는 좋아하는 걸 쓰고, 하나는 진짜 걸리지 않았으면 좋겠는 걸 써야 하나?”
“오, 똑똑한데? 그렇게라도 표를 주면 주제에 선정될 가능성이 낮아지겠네.”
“와, 복잡해. 이거 꼭 가위바위보 심리 게임 같아. 아, 난 모르겠다.”
“야, 근데 너희 말이야.”
한참 떠들던 애들을 보며 차윤희가 어깨를 으쓱 올렸다.
“너무 김칫국 마시는 거 아니냐?”
“어?”
“1차 시험도 시작 안 했는데 무슨 2차 시험 걱정을 벌써부터 하고 있어.”
“아하하.”
“그, 그러네.”
머쓱하게 웃는 아이들. 그러자 차윤희가 또 껄껄 웃으며 그런 애들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걱정을 사서 하지 말잔 소리지, 1차나 걱정하란 얘긴 아니다?”
“어?”
“아까 쌤들이 그러셨잖아. 우리 실력이면 1차 예선 정도는 쉽게 통과할 수 있을 거라고.”
“아, 그건 그렇지.”
“맞아. 그건 그래.”
“응. 우리가 다른 학교 애들한테 밀릴 순 없지.”
한마디 한마디에 눌렸다가 금세 살아나는 게 애들은 애들이었다. 수현이 자부심에 어깨를 펴는 애들을 향해 슬쩍 웃어 보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먼저 간다.”
“어? 어딜?”
“같이 가, 한수현. 어디 가는데?”
“연습하러. 이제 대회 일주일도 안 남았잖아.”
“에이. 뭐야. 또 그리자고?”
“좀 쉬자. 떡볶이도 먹고.”
준비반에서 몇 시간 시달린 애들이 입을 삐죽거렸으나 수현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너희도 빨리 일어나. 걱정한다고 해결될 건 하나도 없으니까. 자, 연습하자. 연습. 연습만이 살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