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Renowned Genius At My Arts High School RAW novel - Chapter (74)
74화. 원로들의 밤(2)
“오, 그렇습니까?”
노영국이 관심을 보이며 말을 받았다.
“네. 마침 중앙예고에…… 아. 이거 아직 대회가 진행 중인데 할 소린 아니겠군요.”
그리고 황 화백은 적당한 힌트 정도를 흘리고 입을 다물었다.
지금 중요한 건 김민준이란 애를 소개하는 게 아니다.
이미 그런 재목을 자신이 찾았고, 손에 쥐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게 중요했다.
“오호. 그렇죠. 모름지기 대회는 공정해야 하는 법이니까.”
능구렁이 같은 노영국 사장은 상관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호탕하게 웃었다.
“자자. 어쨌거나, 이 정도면 제 뜻은 잘 전달된 걸로 알고, 남은 일정까지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노영국이 건배를 제의했고, 원로들이 상에 놓인 고급 청주를 잔에 채워 부딪쳤다.
***
한 시간 후.
따뜻한 음식이 계속 서빙되고, 술도 부족하지 않게 채워졌지만 자리는 슬슬 파장 분위기였다.
노영국 사장은 중요한 얘기를 전한 후, 두 잔쯤 술을 비운 후엔 일찌감치 자리를 떴고, 남 화백 파와 황 화백 파는 겸상할 사이가 아니었다.
“황 화백님, 요 근처에 2차 하기 좋은 장소가 있습니다.”
“오 화백님 추천이면 무조건 가야지요. 얼마나 걸립니까?”
“차로 5분이면 갑니다. 일어나시죠. 제가 모시겠습니다.”
“하하. 그럼 시간 되는 분들은 같이 가시죠.”
“아이쿠. 시간이야 안 돼도 내야지요. 갑시다. 얼른.”
“네네. 화장실 갈 분들은 얼른 다녀오시고, 택시 세 대 정도로 나눠가면 되겠지요?”
황 화백 무리는 기세가 등등했다.
솔직히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황 화백의 위세가 전 같지 않아 불안했던 게 사실.
독립예술가협회장 자리를 임기도 채우지 못하고 내려온 데다가 강림대 미술학과장 자리도 아슬아슬하단 소문이 돌았다.
설상가상으로 남 화백 쪽 인재들이 치고 올라오면서 이제 황 화백의 시대가 저무는 게 아닌가, 하기는 해도 너무 오래 해 먹긴 했다는 자조적인 얘기들이 튀어나왔었고.
그런데, 웬걸.
오늘 보니 노장은 건재했다.
세상에 그 JK 노영국 사장을 앞에 두고 저리 당당할 수 있다니.
확신에 찬 얼굴로 이미 스타성을 지닌 신인을 발굴해뒀다 호언장담하다니.
자신감의 근원은 확실하지 않았으나, 뭔가 있는 게 분명했다.
그렇게 황 화백이 다시 승기를 잡는다면 약진했던 남 화백 쪽 사람들도 차츰 사그라들게 될 터.
결국 영원한 승자는 황 화백인 듯했다.
“흐흠. 우리도 자리를 옮기죠.”
반면 씁쓸한 표정의 남 화백 무리.
그래도 이대로 물러날 순 없단 표정으로 자리를 이어가잔 의지를 보이고 있었다.
“하여튼 늙은 여우 같으니. 이번에도 뭔가 일을 꾸민 모양입니다.”
남 화백 측근이 마뜩잖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쉿. 괜히 시비 걸릴 말은 조심하세요. 자리를 옮겨 말해도 늦지 않습니다.”
주눅은 들었으나 약이 잔뜩 오른 얼굴로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났고.
“저는 내일 아침 일찍 일정이 있어서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뜻밖에도 이탈자가 생겼다.
김이 샌 남 화백 쪽 사람은 아니었다. 황정식 화백이 끌고 온 권인호였다.
“아니, 권 교수. 아직 10시도 안 됐는데.”
황 화백 쪽 인사가 민망한 얼굴로 자리를 권했으나 권인호는 허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거 나이가 들어서 그러나. 이제는 10시만 되면 꾸벅꾸벅. 졸게 되더라고요. 내일 아침 회의 준비도 할 게 많고, 아쉽지만 저는 여기서 들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허어.”
“허, 참.”
소매를 잡아끌던 사람들도 권인호를 억지로 끌고 가긴 어렵다 싶었는지 애꿎은 턱만 자꾸 쓸어내렸다. 결국 황 화백이 나섰다.
“권 교수, 아직 시차 적응 못 했어?”
“하하. 그런가 봅니다. 오랜만에 들어와 그러는지.”
권 교수가 뉴욕에 있다 한국에 들어온 지, 벌써 8개월이었다.
아직도 분위기 파악이 안 되느냐는 말에 이 판이 영 적응이 안 된다고 응수하는 권 교수.
둘의 말뜻을 알아들은 구경꾼들은 잠시 긴장으로 숨을 죽였다. 그러나,
“하하! 이 사람 능청도 참. 그럼 오늘은 조심히 들어가시고, 조만간 한번 봅시다.”
황 화백이 호방하게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권인호가 황 화백의 퉁퉁한 살찐 손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가볍게 잡고 흔들었다.
그렇게 원로들의 식사 자리가 애매한 분위기 속에 마무리됐다.
***
“그냥 두고 볼 순 없지 않겠습니까?”
남성남 화백 무리는 충무로 방향으로 향했다. 전에 자주 모였던 전집을 찾아 큼지막한 김치전과 해물파전을 상 위에 놓고 막걸리를 부어가며 성토를 벌였다.
“어쩌면 부정행위가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고도 남지요. 전적도 화려하고요. 황 화백 쪽 인사들이 끼어들어 언제 조용한 적이 있었습니까.”
“아까 중앙예고 애를 하나 눈여겨보고 있다고 했죠? 누군지 짐작 가십니까?”
“그야 모르죠. 황 화백 제자들이 세현예고며 중앙예고며, 방귀 좀 뀐다는 학교들은 꽉 잡고 있으니, 거기서 들이밀지 않았겠습니까.”
“에이, 세현은 아닐 겁니다. 작년에 미술과장이 잘려 나갔잖아요. 새로 부임한 이는 해외파 출신이고, 국내엔 이렇다 할 연이 없는 인물이라고 들었어요.”
“흠흠. 그렇군요. 어쨌거나 우리도 어디서 쓸만한 학생들을 좀 찾아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조각난 정보들을 긁어모아 황 화백 쪽 동향을 짐작해보는 남 화백 무리. 똑같이 부정행위를 하는 건 꺼려졌지만 이대로 넋 놓고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JK그룹 노영국 사장은 전국대회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가 원하는 신인을 발굴하기만 하면 크나큰 보상이 따라올 게 분명했다. 그 내용이 궁금하고 탐이 나는 것은 물론, 그걸 황 화백 쪽에서 채 가는 걸 그냥 둬선 안 된다는 생각들이었다.
“어쨌든 화제성을 가진 신인을 이번 대회에서 발굴해야 하겠어요.”
“우리 쪽이면 가장 좋겠고, 적어도 황 화백 쪽에서 미는 애가 대상을 타는 일만은 막아야겠죠.”
“참, 그런데 아까 권인호 교수, 좀 의외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대화는 다시 자연스럽게, 심사위원단 중 꽤 젊은 축에 속하는 권인호 교수를 향했다.
“그러게요. 황 화백 쪽 라인으로 흡수된 건가 싶었는데, 애매한 분위기던데요?”
“맞아요. 아까도 혼자 빠져나가지 않았습니까? 다들 2차 간다고 몰려가는데.”
“저는 애초에 권 교수가 황 화백 쪽 라인이 될 거라 생각하진 않았습니다. 거긴 꽤 올곧은 성정 아닙니까. 황 화백 쪽이랑은 어울리지 않지요.”
“흐음. 그렇다면 권 교수를 우리 쪽으로 끌어오는 건 어떨까요?”
“나쁘지 않은 생각이겠는데요? 민 화백님이 권 교수랑 좀 안면이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네. 홍콩 전시 때 인사를 나눈 일이 있었습니다. 같이 식사도 했었고. 연락처도 있고요. 제가 한 번 연락해보겠습니다.”
당장 대책이 없는 남 화백 무리는 이렇게 대항마로 내세울 신인을 발굴하자거나, 황 화백 무리라고 보기엔 애매한 교수 하나를 우리 쪽으로 끌어들여 수적 우위를 점하자는 이야기 정도만 늘어놓다가 슬슬 자리에서 일어났다.
***
한편.
과거에 있던 결과라면 모를까, 전국대회를 중심으로 수많은 이해관계가 얽히고설켰다는 걸 알 리 없는 수현은 그 시각 일선화랑 작업실을 향하고 있었다.
마침 주말이라 기숙사를 지키고 있을 필요도 없고, 2차 시험 주제 후보인 100개의 오브제를 보고 있자니 어쩐지 답답해져 환기가 필요하기도 했다.
“수현, 왔어?”
아뜰리에엔 언제나처럼 스티브가 있었다.
“대회 준비가 복잡하다며?”
수현과 박선화, 차윤희를 통해 전국대회 소식과 세현예고 이야길 자주 들어선지, 스티브는 전국대회 안부부터 물었다.
“이것 좀 볼래?”
수현이 싱긋 웃으며 오브제 리스트를 내밀었다.
“히익. 이게 다 뭐야?”
“2차 시험에 나올 주제들이래.”
“와. 이중에 하나가 나온다는 거지?”
“아니, 두 개.”
“오. 랜덤이야?”
“투표로 정한대.”
“투표?”
수현이 짧은 한숨을 내쉬고는 전국대회 룰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복잡하네.”
“심리전 같기도 하지?”
“그러게. 되게 짓궂은 사람이 만든 규칙 같은데, 왜 그런 룰을 만든 거지?”
“그야 모르지. 어쨌거나 1차 통과자 300명은 전부 이런 걸 받았어.”
수현이 오브제 리스트를 가리키자 스티브가 질린단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이거 낱말카드야? 눈, 나무, 씨앗, 사다리, 반지…… 아무 연관성도 없어 보이는 것들인데, 무작위로 막 뽑아낸 건가?”
황당해하는 스티브.
그럴 만도 했다.
100개의 오브제 리스트는 카테고리가 각각인 데다가 불친절했다.
한글을 처음 배우는 애들이 보는 단어 카드처럼 단어와 그를 설명하는 예시 그림을 덜렁 던져놨을 뿐. 어디까지 표현해도 좋은지, 정확한 의미가 뭔지 아무 설명이 없었다.
좋게 보자면 자유로운 해석의 여지를 남겨준 거였고, 나쁘게 보자면 혼란을 일으킬 지뢰들을 잔뜩 심어둔 것이었다.
“뭐, 대회 취지를 보면 그래도 대충 감이 잡히긴 해.”
그러나 수현은 출제 의도가 어느 정도 읽힌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올해 만들어진 대회 포스터를 다시 살펴봤더니, 한국 미술계에 새바람을 만들 역량 있는 신인 발굴이 목적이라 하더라고.”
“역량 있는 신인?”
“응. 전에도 그랬지만 전국대회는 입시미술과는 완전히 결이 달라.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지만, 작가로 성장할 가능성이 보이는 인재를 발굴해 지원하겠다는 목적이 분명하거든.”
“흐음. 그래서?”
“단순히 이 오브제를 잘 그려내는 걸 원하진 않을 거야.”
“그렇다면…….”
“해석. 작가의 시선으로 어떻게 해석하느냐, 그게 핵심이지 않을까?”
“정말? 그렇게까지 간다고?”
수현의 결론에 스티브가 눈이 번쩍 뜨며 물었다.
“1차 시험에선 이미 기초적인 드로잉 실력을 확인했어. 세 차례로 시험을 나눈 이유가 단순히 드로잉 실력을 이지, 노말, 하드 버전으로 확인하기 위해서는 아닐 거 아냐. 2차나 3차에선 분명 다른 걸 볼 거라고. 그러니까 심사 기준도 달라질 거야.”
“일리는 있네.”
스티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기교보다는 주제 의식이 더 중요할 수 있다는 거잖아?”
“맞아, 바로 그거야. 이 리스트에 굳이 얽매일 필요는 없다는 거지.”
1차 시험 발표 후, 2차 시험이 열리기까지 주어진 시간은 고작 2주.
보름도 안 되는 기간에 100개의 오브제를 그리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미션이었다.
하나씩 그리려면 하루에 일곱 개 이상 소화해야 하는 일정인데다가 시험에 나오는 주제는 2개라는 것도 함정이었으니까.
어떤 주제가 어떤 주제와 짝을 이룰지 모르니 경우의 수는 무한정 늘어났다.
대회는 참가자들을 골탕 먹이려는 목적으로 준비된 게 아닐 거다.
그렇다면 이런 시험을 들이민 이유가 뭘까.
대회의 취지를 다시 끌어와 고민해보니 희미하게 방향이 보였다.
그게 수현이 그릴 다음 그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