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Renowned Genius At My Arts High School RAW novel - Chapter (76)
76화. 응원(2)
“대상의 형태를 보지 말고, 공간을 인지해보도록 해봐.”
“어?”
“그러니까, 저 석고상을 예로 들어보자.”
수현이 의욕에 찬 눈으로 오유나를 바라보았다.
“자, 아그립파로 할까? 뭐가 좋겠어?”
“음. 그보단 비너스?”
“그래. 비너스의 형태를 잡을 때 지금까진 윤곽선, 그러니까 머리카락의 형태나 얼굴이 얼마나 갸름한지, 광대와 볼이 어떤 각도로 꺾여 내려와서 턱에서 만나고 다시 목이랑 연결되는지 그런 걸 봤을 거야.”
“그렇지.”
“지금부턴 석고 바깥, 그러니까 외곽의 공간을 같이 보도록 해봐.”
“외곽의 공간?”
오유나가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이젤에 놓인 직사각형의 종이처럼 허공에 가상의 직사각형을 그려보는 거야. 그리고 그 사각형 안에 석고상을 집어넣는 거지. 그러니까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을 때처럼 프레임을 짠다고 생각해봐. 액자를 만든다고.”
“으음. 알았어.”
오유나가 눈을 가늘게 뜨고 비너스를 한참 노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만들었어.”
“자, 그럼 비너스 말고, 사각형에서 비너스를 뺀 나머지 공간을 보는 거야.”
“어?”
오유나가 눈을 끔뻑이더니 되물었다.
“비너스를 보지 말라고?”
“맞아. 네가 그린 가상의 사각형에서 석고를 오려내고 남은 공간. 그걸 보란 거야. 그러니까 종이 인형 같은 걸 생각해봐. 프린트된 종이에서 인형을 오려내고 남은 쪼가리. 그 조각을 보잔 거지.”
“아…….”
종이에 그려진 화려한 종이 인형이 아닌, 종이 인형을 오려내고 남은 쓸모없는 종이를 보라는 것.
그건 전환과 환기가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복잡한 형태를 정확하게 그려내는 건 원래도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그리는 사람이 그 형태에 부담을 느끼면 배로 힘들어지고.
그런데 대상이 빠져나간 나머지 공간에 거꾸로 주목하면 그림은 놀랍게도 쉬워진다.
개념화되지 않은 불규칙한 형태는 눈도, 코도, 머리카락도 아닌 의미 없는 것이니 선의 기울기와 덩어리의 크기 같은 게 오히려 눈에 선명하게 들어오기 때문.
어쨌거나 이렇게 시선을 전환하면 발목을 잡았던 것들이 의외로 쉽게 해결되기도 한다는 걸 수현은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와, 이거 매직아이 같다.”
오유나의 입에서 곧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되게 신기하네? 그러니까 한 번은 비너스를 보고, 한 번은 비너스를 뺀 나머지 공간을 보고, 번갈아 보니까 형태가 좀 더 확실히 보이는 것 같아!”
“응. 그럴 거야. 강제로라도 이렇게 전환을 시켜주면 내가 착각하거나 개념화한 바람에 주관적으로 보게 된 대상이 다시 객관적으로 또렷하게 보이거든.”
“호오. 괜찮다. 이거 괜찮아. 한번 연습해봐야겠어.”
오유나가 흡족한 얼굴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와, 근데 10분도 안 걸렸네?”
그리고 오유나는 교실의 시계를 확인하고는 헛웃음을 짓더니,
“좋아. 기브 앤 테이크는 확실해야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기브 앤 테이크?”
“응. 네가 나한테 도움을 줬으니까, 나도 너한테 도움이 될 만한 걸 주려고.”
“아까 선물 받았잖아.”
“아이, 그건 그거고. 그리고 그게 정 걸리면 너도 나중에 또 기브 앤 테이크 하면 되잖아. 너 자꾸 나한테 선 긋는 거야?”
“하하. 아니야. 알았어.”
수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오유나가 괜히 복도 쪽 창문을 한 번 살피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이번 전국대회 말이야. 너, 웬만하면 꼭 대상을 타는 게 좋을 거야.”
“어?”
어딘지 황당한 말에 수현이 멍청한 얼굴을 했다.
“그건 누구나 바라고 생각하는 부분이 아닐까?”
“아, 물론 대상을 목표로 한 애들이야 많겠지. 그러니까, 내 말은.”
오유나가 속으로 생각을 정리하더니 다시 제대로 된 문장을 꺼냈다.
“JK그룹에서 이 대회로 큰 사업을 벌이려고 계획하고 있거든. 그러니까 너, JK식품 노영국 사장님 알아?”
“어?”
오유나에겐 익숙한 이름인 듯 했으나 평범한 수현은 알 리 없는 이름이었다. 신문에서 봤다 해도 그분을 안다고 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고.
“되게 번드르르한 말 잘하고 엉큼하고, 욕심 많은 아저씨 있어. 어쨌든 그 아저씨가 경매 사업을 시작한다는 소문이거든. 그래서 전국대회 후원에도 나선 거래.”
“경매라면, 미술품?”
“어. 대충 각이 나오지?”
수현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과거 고등학교 시절 이런 얘길 들었다면 아무런 맥을 짚어내지 못했을 거다. 그러나 수현은 성인이 된 후, 미술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질리게 봐왔다.
오유나의 몇 마디 말로도 JK그룹이 전국대회에 뭘 기대하는지, 그리고 대회 규모를 갑자기 키운 이유가 뭔지 단박에 짐작됐다.
“흐음. 역시 똑똑하네, 한수현. 어쨌든 문제는 이번 대회에 이권이 크게 걸렸단 거야. 대상을 누가 가져가느냐에 따라 누군가는 전폭적인 지지를 받게 될 거고, 그래서 심사위원단 내부에 분열이 엄청나다고 하더라고.”
집안의 어른들이 나누는 이야길 주워듣고 와 전해주는 걸까? 어쨌거나 귀한 정보였다.
100% 확실하지는 않더라도 상당 부분 도움이 되는. 그리고 한편으론 무척이나 씁쓸해지는 이야기기도 했다.
과거에도 이런 움직임이 있었다면, 김민준은 기회에 잘 올라탄 것이었겠구나.
그리고,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전국대회에까지 이런저런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부정행위가 판을 치다니, 대체 이 바닥은 어디까지 고이고 썩어있는 걸까.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그래도 하나 희망을 걸어볼 만한 건.”
오유나가 눈을 반짝였다.
“노영국 아저씨가 좀 음흉하고 속을 알기 어려운 사람이긴 한데, 되게 기준이 높고 깐깐하거든.”
어쩐지 좀 신이 나 보이기도 했다.
“심사위원들이 들이민다고 그냥 받을 사람이 아니야.”
오유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겸손한 척하지만 예술에 조예도 깊어. 그니까 어느 정도 실력을 갖추어야 그 아저씨 눈에 들 거라고.”
“아, 그래.”
“그러니까 확실한 실력 차이를 보여줘.”
“어?”
“난 이왕이면 네가 대상을 탔으면 좋겠거든. 그래도, 네가 우리 세현의 신의 손인데. 어디 가서 맞고 들어오는 걸 보고 싶지도 않고.”
거기까지 말하더니 오유나는 상큼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쨌든 오늘 레슨 고마워.”
“그래. 더 연습해봐. 분명히 좋아질 거야.”
“흐응. 그래. 그리고 너.”
“응?”
“대회 끝나고 한번 제대로 놀자.”
“아. 그래. 좋아.”
“응. 좋아. 그럼 간다?”
오유나가 후다닥 가방을 챙겨 실기실 문을 나섰다.
혼자 남은 수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과거 전국대회의 우승자는 김민준이었다.
그 애가 고등학교에 올라오면서부터 두각을 나타낸 건 사실이었지만, 세현예고가 아닌 중앙예고에서 우승자가 나온 게 이례적인 일이라 생각했는데, JK 노영국 사장의 개입도 연관이 있던 걸까.
물론 과거 세현예고에선 전국대회에 큰 관심이 없어 참가 자체가 저조하기도 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김민준이 발탁된 건, 실력과 화제성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노영국의 노선에 그가 어울렸기 때문인 듯했다.
“후…… 모르는 게 약이란 말이 이럴 땐 딱 맞지.”
수현이 쓰게 웃다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딱 여기까지.
대회의 배경과 정보를 알았으니, 휘둘리지 않고 나는 내가 준비할 걸 해야겠다고 마음을 다시 다잡으면서.
그러나, 일이라는 게 항상 마음먹은 대로 흘러가진 않는 법이다.
***
그날 저녁 일선화랑.
어쩐지 심란해진 수현은 기숙사에 외박을 허가받아 일선화랑으로 향했다.
전국대회 2차전은 내일 오전 10시에 시작된다. 강유진 관장이 아침 일찍 대회장까지 수현을 태워주기로 해 겸사겸사 마지막 준비를 일선화랑에서 하기로 했던 거다.
“컨디션은 어때?”
새 작업에 들어가 활기가 넘쳐 보이는 스티브가 여느 때처럼 수현을 가장 먼저 반겼다.
“괜찮아. 잠도 잘 잤고. 기분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고.”
“흐음. 오브제들 연구는 끝났고?”
“어. 사실 형태적으로 크게 복잡한 건 없어서, 뭐가 나와도 비슷하게 그려낼 것 같긴 해.”
“크으. 좋구나. 자신감 넘치는 모습, 아주 보기 좋아.”
그리고 스티브는 자기 옆자리에 이젤을 펼치며 손짓했다.
“앉아.”
“어, 고마워.”
“잠도 푹 자야 하니까 오늘은 손만 좀 푸는 정도로 해.”
“좋아. 그럼 한 10시까지?”
“흐음. 도구는 다 챙긴 거지?”
“응. 가방만 들고 가면 돼.”
“그럼 뭐, 여유 있네. 딱 10시까지만 그리자, 오늘은.”
스스슥.
사각사각.
탕탕.
톡톡톡.
그리고 수현과 스티브는 얼마간 아무 말 없이 자기만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이 세상에 캔버스와 나만이 존재하듯. 그러다가 나는 어디로 갔는지 모를 정도로, 그리고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싶을 정도로 그림의 세계로 풍덩 빠지는 거다.
‘좋아. 이런 기분.’
완벽하게 몰입에 빠져들며 수현은 행복감을 느꼈다.
연필과 붓을 잡으면 잡념이 사라진다.
저 멀리 내가 그려내고 싶은 대상이 보이면, 나비를 쫓는 어린아이처럼 뜨거운 열망을 품고 그곳을 향해 달려간다.
그리고 마침내 그려내고 싶은 대상을 붙잡아 그걸 캔버스 위에 펼쳐내는 기분은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가슴 벅찬 것이었다.
왜인지 설명하긴 어렵지만, 이런 일련의 과정이, 이런 그리기가 수현은 너무나도 좋고 또 좋았다.
그런데,
“더는 드릴 말씀이 없다니까요?”
복도에서 강유진 관장의 격앙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세요. 이렇게 오시는 게 우리 쪽에 피해가 될 수도 있다는 거 모르세요?”
순간 수현과 스티브가 토끼 눈을 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일이지?”
“관장님 목소리잖아?”
“나가봐야 하나?”
“그러게. 그래도 되나?”
어른들의 복잡한 일일 수도 있고, 드러내고 싶지 않은 모습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 일단 멈칫하고 있었으나, 여차하면 튀어나가야겠다고 스티브와 수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강 관장.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이렇게 온 게 아니에요. 물론 강 관장 입장도 이해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수 없는, 아주 심각한 비상사태라니까?”
“무슨 비상이요?”
“돌아가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요. 황 화백 라인들이 전국대회를 쥐락펴락하는데, 그걸 가만히 보고 있을 수만은 없는 거 아니요.”
“그래서,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인데요?”
“하아, 우리도 여기까지 찾아오고 싶지 않았어요. 근데, 세현 쪽 새로 온 미술과장이 아주 밥통 같은 인사라 말이 통하질 않으니.”
“그래요. 그렇다고 우리도 우리 패를 다 까서 보여줄 수도 없고. 좀 눈치가 있는 인사면 분위기를 읽을 텐데, 어찌나 답답하게 굴던지.”
“하아.”
강유진 관장의 깊은 한숨이 스티브와 수현이 있는 아뜰리에까지 번져오는 듯 했다.
그리고,
“왜?”
수현이 깜짝 놀란 눈으로 스티브를 바라봤다.
가만히 들려오는 얘기를 듣던 스티브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아뜰리에 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간 거다.
“아무래도 이거 우리 얘기, 아니지. 수현이 네 얘기 같은데?”
스티브가 턱으로 복도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사실, 수현도 그 생각을 하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