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Renowned Genius At My Arts High School RAW novel - Chapter (78)
78화. 2차 관문(2)
“2차 시험 주제를 발표하겠습니다.”
안경을 쓴 비쩍 마른 남자가 강당 단상으로 올랐다.
투표를 마치고 강당 여기저기에 앉아 있던 애들이 부스스 일어나 중앙으로 모여들었다.
참가자가 대충 모인 걸 확인한 남자가 입을 열었다.
“2차 시험 주제는 ‘나무’와 ‘낫’입니다.”
두 개의 주제가 발표되자, 참가자 전원이 혼란에 빠졌다.
“뭐야? 왜 나무야?”
“헐. 누가 멍청하게 나무에 표를 준 거야?”
“아니, 담합한 애들 숫자가 많았던 걸 수도 있지.”
“열받네, 진짜. 낫은 또 뭐고?”
황당한 얼굴을 한 애들이 항의하듯 질문을 던졌다.
“정말 나무랑 낫이에요? 확실해요?”
“몰표받은 주제가 뭔데요? 몇 표나 나왔어요?”
“와, 말도 안 돼.”
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들고나온 서류를 차분히 살피더니 설명을 덧붙였다.
“가장 많은 표를 받은 오브제는 총 53표를 받은 ‘낫’입니다. 그리고 1표로 가장 적은 표를 받은 오브제는 ‘나무’입니다.”
“……!”
“……?”
짤막한 정적이 흘렀다.
잘못 들은 건가, 왜 이런 결과가 나왔지, 하는 의문이 담긴 얼굴들.
사건의 내막은 이랬다.
중앙예고를 견제한 애들은 ‘나무’에 표를 주지 말자고 또 다른 연합을 만들었다.
그리고 모두가 ‘나무’를 찍지 않은 가운데, 중앙예고 애들마저 ‘나무’를 선택하지 않았던 것.
그 바람에 ‘나무’는 최고 득표가 아닌 최저 득표를 기록하며 2차 시험 주제로 선정됐던 거다.
그리고 ‘낫’.
‘제일 동떨어진 오브제긴 했지.’
수현이 대충 알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눈, 씨앗, 사다리, 가로등, 바구니, 창문, 하마, 컴퓨터…….
덩어리가 확실하고 질감 표현을 하기 좋은 여러 오브제 중 어딘가 꺼려지는 오브제 하나.
임팩트를 드러내긴 부족하고, 재밌는 변형을 주기도 애매하고, 그리는 데 재미를 느끼기도 어렵겠다 싶은 게 바로 ‘낫’이었다.
그러니 상당수의 애들이 100개의 주제 중 ‘낫’을 꺼려 표를 던진 모양이었다.
최저 득표를 기록해 주제로 선정되지 않게, 나라도 한 표 던져보자는 생각이었겠지만, 그런 표들이 모이고 모여 최다 득표를 기록하며 주제로 선정된 듯했고.
물론 수상한 정황은 있었다.
“낫이 제일 별로인 것 같아.”
“그러게, 어떤 주제랑도 매칭이 안 될 것 같아.”
“저건 좀 빠졌으면 좋겠는데.”
노골적이진 않았으나, 수현은 투표 직전 몇몇 애들이 이런 얘기를 나누는 걸 들었다.
‘설마 그게 작전이었나?’
지나쳐 보이지 않게 슬쩍, 의도적으로 불안한 말을 흘린 거라면, 그리고 그게 먹혀 투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거라면…….
내가 너무 과하게 해석하는 걸까?
‘아무래도 상관없지.’
수현이 다시 고개를 흔들었다.
나에게 쉬운 건 다른 애들에게도 쉽고, 나에게 어려운 건 다른 애들에게도 어려울 테니 뭐가 나와도 달라질 건 없다고 생각하면서.
그러나 그 전제는 틀린 것이었다.
수현에게 어려운 건 다른 애들에겐 아주 불가능한 것이었고, 수현에게 쉬운 것도 다른 애들에겐 어려울 수 있었다.
그걸 수현만 몰랐다.
***
“꼭 난민촌 같다.”
“감옥 같기도 한데? 맞아, 수용소 느낌?”
“어떻게 알아? 가본 적도 없으면서?”
“영화에 나오잖아. 어으. 어쨌든 떨린다. 엄청 떨려.”
주제를 받은 참가자들은 다시 짐을 챙겨 들고 시험장으로 이동했다.
시험장은 연수원 1층 끝에 있는 체육관에 마련돼 있었는데, 두꺼운 철문을 열자 무거운 공기가 훅 밀려 나왔다.
“……!”
“……!”
탁 트인 시야.
어마어마한 크기의 체육관 바닥엔 가로와 세로 방향으로 검은 테이프가 여러 줄 반듯하게 붙어 있었다.
마치 바둑 칸처럼 300개의 섹션을 일일이 구분해 번호를 붙여둔 건데, 별도의 설명이 필요 없게 직관적이었다.
참가자들은 좀 전 투표를 마치고 강당에서 받은 고유 번호와 똑같은 숫자가 적힌 칸을 찾아 빠르게 들어갔다.
공간 안에는 이젤과 의자, 화판과 작은 작업대가 하나씩 놓여있었다.
“잠시 후, 10시부터 대회가 시작되겠습니다. 화선지와 도화지, 캔버스, 흙 등. 기본 재료를 배부할 테니 각자 제출할 작품 형태에 따른 배부처를 확인하시고 재료를 받아 가시기 바랍니다.”
진행을 맡은 남자가 마이크를 켜고 안내 방송을 하자 참가자들이 앞쪽으로 슬슬 움직였다.
체육관 맨 앞엔 길쭉한 테이블이 놓여있었다.
그 뒤로 몇 개의 표지판이 간격을 두고 서 있었는데, 큼지막하게 서양화, 한국화, 조소, 도예, 디자인 등 참가 종목이 적혀있었다.
참가자들은 자신이 신청한 종목에 맞게 줄을 선 후, 뒷면에 도장이 찍힌 종이와 화선지, 흙 같은 기본 재료를 차례로 받았다.
그리고 자기 공간으로 돌아와 받은 재료와 준비해온 도구들을 쓰기 좋게 펼쳐 놓았다.
그렇게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이, 어느덧 10시 5분 전이 되었다.
“후우.”
조금 긴장한 걸까.
땀으로 촉촉하게 젖은 손을 수현이 쓱쓱 바지에 문질렀다.
‘작업대에선 에스키스(작품을 구상, 정리할 때 그리는 간단한 밑그림)를 그리고, 이젤로 와서 스케치로 옮기면 되겠구나. 에스키스가 끝나면 자주 쓰는 그림 도구들은 작업대에 올려놓을까? 아, 나중에 간단히 식사할 때도 요긴하겠는데.’
아직 시험이 시작되기 전이니 뭔가를 그리는 건 반칙이었다.
수현은 공간 안의 도구들과 그걸 활용할 최적의 동선을 고민하며 조용히 시뮬레이션을 이어갔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봤던 케이블 TV의 예능 프로그램 같기도 했다.
최고의 셰프를 뽑는 서바이벌 요리 프로그램. 각자에게 주어진 싱크대와 화구, 조리대에서 바쁘게 움직이며 제한 시간 안에 음식을 만들고 평가받는 식이었는데, 일정한 공간 안에서 그림을 그린다는 게 비슷하게 느껴졌다.
물론 조리대 대신 이젤이 주어지고 음식 재료 대신 빳빳한 종이와 캔버스가 주어지고, 카메라 같은 것도 없었지만.
“수현아, 여기!”
그렇게 잠시 딴생각에 빠졌던 수현을 오른쪽 줄 한 칸 뒤에 자리잡은 차윤희가 불렀다.
붕붕, 팔을 세차게 흔들고 있는 걸 보니 아까부터 열심히 수현을 불렀던 모양이었다.
“왜?”
“파이팅하라고!”
차윤희가 주먹을 불끈 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앞치마에 팔토시, 분무기를 손에 들고 비장한 표정을 짓는 모습이 어딘가 우스꽝스러워 수현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너도 파이팅.”
그리고,
“……하.”
차윤희를 보고 지었던 수현의 미소가 단번에 지워졌다.
어쩐지 걸리는 느낌이 들어 시선을 옮겼더니, 차윤희의 바로 옆자리에 김민준이 서 있었던 거다.
생글생글.
이 대회에 긴장감 따윈 없다는 얼굴로 묘한 흥분을 드러내고 있는 김민준.
‘하필이면.’
수현이 미간을 찡그리고는, 재빨리 앞으로 몸을 돌렸다.
수현의 자리에서 오른쪽으로 두 칸, 뒤로 한 칸.
수현은 뒤를 돌아도 김민준의 얼굴만 보이겠지만, 김민준은 자기 자리에선 수현의 모습과 그림을 그대로 볼 수 있었다.
어쩐지 뒤통수가 따가운 기분이었으나, 수현은 곧 고개를 흔들었다.
‘색감을 크게 입힐 땐 이젤을 쓰고 묘사에 들어갈 땐 책상에 눕혀 그리면 돼. 그럼 내가 뭘 그리는지 알 수 없을 거야. 그리고 저도 대회에 욕심이 있으면 다른 사람 그림보단 자기 그림에 집중하겠지.’
마음을 애써 가볍게 했다.
곧 본선이 시작되었다.
사각사각.
스스슥.
휙.
사사삭.
한참 동안 시험장 안에는 종이를 넘기고, 지우개를 문지르고, 연필을 굴리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전국대회 1차 시험이 참가자의 기본적인 드로잉 실력을 확인하는 관문이었다면, 2차부터는 작가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줄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
한국화, 서양화, 조소, 디자인, 도예 등 개인이 참가를 원한 분야의 특성과 개성도 제대로 드러내야 하고.
그러니 재료도, 만드는 과정도 각각이었지만, 기초공사에 해당하는 구상과 스케치의 방식만큼은 동일했다.
짧으면 10분, 길게는 1시간까지.
참가자들은 작업대 앞에 앉아 시험 종료 시까지 완성해낼 작업물의 형태를 심혈을 기울여 구상했다.
“…….”
수현은 잠시 눈을 감았다.
나무와 낫.
바로 떠오르는 건 아주 목가적인 풍경이었다.
푸른 나뭇잎이 드리워진 아름다운 숲. 그리고 탐스럽게 맺힌 과실과 그걸 수확하는 사람들.
그 손에 낫이 들려있거나 한가롭게 땅에 놓여있다면 꽤 평화로운 풍경이 그려질 것 같았다.
‘하지만 너무 1차원적이야. 여기서 멈출 순 없지.’
수현은 생각을 한 번 더 비틀었다.
‘나무를 두고 어떤 해석을 할 수 있지? 성장, 생명, 풍요, 수확, 신성함. 그리고 계절에 따른 여러 가지 표현이 가능해. 계절마다 내어주는 것이 다를 테니까.
그리고, 주기에 따라서도 달라질 거야. 묘목과 그루터기만 남은 늙은 나무는 느낌부터 다르겠지.
그럼 낫은? 어떤 해석을 할 수 있지?’
다이어리에 메모했던 각각의 상징들. 수현은 그 상징을 어떻게 조합해야 의외의 스토리, 신선한 해석이 나올지 골똘히 집중했다.
‘낫은 무기, 수확, 공격, 날카로움, 범죄. 본래의 용도를 벗어나면 무거운 쪽으로 가기 쉬운데…….’
고개를 기울이던 수현의 머리에 뜻밖의 단어가 번뜩 떠올랐다.
‘사신의 낫은 어떨까? 그러니까 죽음. 그럼 나무와 확실한 대비가 되겠는데?’
스스슥.
수현이 저도 모르게 손을 움직였다.
‘뭔가 나올 것 같아. 나무에서 생명, 탄생의 의미를 끌어오고 낫에서 그 반대되는 죽음의 의미를 끌어온다면…… 밝음과 어둠. 기쁨과 슬픔. 시작과 끝. 명확하게 대비되는 두 개의 오브제로 스토리를 만들 수 있어.’
생각은 거기까지였다.
일단 주제가 포착되자 손이 저절로 움직이며 스케치를 해나갔다.
무의식적으로, 본능적으로, 수현은 머릿속에 떠오른 것들을 바쁘게 종이 위에 채워나갔다.
자칫 머리를 잘못 흔들었다간 그것들이 흐트러질까 봐 숨조차 조심조심 쉬면서. 그러나 빠르고 신속하게 놓치는 것 없이 이미지를 구현해 나갔다.
“후우.”
마침내 구상을 마친 수현이 손바닥만 한 에스키스들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괜찮아. 마음에 들어. 빤히 보이는 그림도 아니고, 그렇다고 주제에서 벗어나지도 않았어. 이만하면 나쁘지 않은 해석이야.’
그리고 이제는 이 구상을 캔버스에 가득 채워나갈 시간이었다.
‘몇 시지?’
수현이 고개를 들어 강당 벽시계를 확인했다.
10시 40분.
시간은 충분했다.
휙.
수현이 캔버스를 이젤에 올려 빠르게 스케치해나가기 시작했다.
머릿속에 형태가 분명하니 30분 정도로도 충분했다.
이제 오전 11시 10분.
순식간에 형태를 채운 수현이 쭈우욱- 팔레트에 물감을 올렸다.
탕탕.
물을 머금은 붓을 들어 크게 풀어낸 다음, 대담하게 밑색을 올렸다.
다시 확인한 시각은 12시.
‘대충 말랐으면, 이젠 묘사야.’
캔버스가 적당히 마른 걸 확인한 수현이 작업대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언젠가부터 주변의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커다란 체육관.
가로 세로로 그어진 사각형 안에 있는 수현의 시야엔 캔버스와 자신의 손만이 들어올 뿐이었다.
“후웁.”
수현이 심호흡하며 다시 채색에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