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Renowned Genius At My Arts High School RAW novel - Chapter (84)
84화. 비하인드(3)
“수현아!”
두 달 후인 12월.
김민준은 수현의 남자친구가 되어 있었다.
“뭐야, 추운데 왜 여기에 있었어.”
“너 핸드폰 고장났잖아. 연락 안 되면 헤맬 것 같아서 정문에서 기다렸지. 너희 학교 미대 건물, 작은 거 이럴 땐 좋은 것 같아. 찾기가 쉬워.”
“응. 너희 학교에 비하면 엄청 작긴 하지.”
“아이, 그런 말이 아니라. 시험은 잘 봤어? 이제 종강인 거지?”
“응. 내일이 마지막 시험이야.”
“그래. 그런데, 수현. 너 핸드폰은 언제 바꿀 거야? 연락이 잘 안되니까 엄청 불편해.”
김민준은 해맑은 얼굴로 한 번씩 불편한 말을 할 때가 있었다.
은연중에 수현의 학교를 무시하는 발언을 하거나 수현의 처지를 고려하지 않고 이것저것 돈 드는 일을 하자고 조를 때도 많았고.
그때마다 수현은 어쩐지 죄인이 된 것 같은 답답함을 느꼈다.
중고로 산 핸드폰이 결국 고장 나 먹통이 된 이 시기도 그랬다.
김민준은 새로 나온 CDMA 폰으로 핸드폰을 바꿨다고 자랑하면서, 이참에 수현도 그걸 사라고 말했다. 커플폰이 소원이라면서.
문제는 수현은 그런 비싼 핸드폰을 살 여력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아, 우리 동아리 이번 겨울에 스키 캠프 간다잖아. 너도 가는 거지?”
“어? 스키 캠프?”
“크리스마스 맞춰서 가기로 했는데 못 들었어? 용평으로.”
확실히 IMF 이전보다 썰렁해진 연말. 그러나 살 사람은 또 살았다. 잘 살아남은 애들은 금세 예전의 분위기를 찾았고.
“나 그때 알바야.”
“어? 크리스마스에?”
“빨간 날은 쉬고. 24일은 저녁까지 아르바이트 해야 해. 알잖아. 입시에 크리스마스가 어딨어.”
“어휴. 그놈의 학원 아르바이트. 그거 그만하면 안 돼?”
“하하.”
수현은 그저 어색하게 웃었다.
그런데 이날은 김민준에게도 사정이 있었다.
“나 내년에 군대 가.”
“어?”
“겨울 지나고 다음 학기 올라가기 전에.”
“정말이야?”
2월 말 입대하기로 했다는 김민준은 이제 두 달 반 정도밖에 시간이 없다고 했다. 그러니 겨울 방학이라도 함께 추억을 만들자며 졸랐고.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흔들리긴 했다. 불편한 것과는 별개로 당시 수현은 김민준을 꽤 의지하고 좋아하고 있었던 거다.
그런데, 김민준이 또 다른 제안을 했다.
“대신 내가 다른 아르바이트 자리를 소개할게. 페이도 학원보단 훨씬 좋을 거야.”
친한 형이 출판사업을 한다고 했다. 애들이 보는 그림책 전집을 기획하는데 거기에 그림작가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네 포트폴리오 보면 단박에 좋다고 할 거야. 그 일 하면 시간도 자유롭게 쓸 수 있을 거고, 너도 언제까지 미술학원 강사나 하고 있을 순 없잖아.”
김민준은 자신도 그 회사에서 틈틈이 작업을 하기로 했다며 수현을 설득했고, 결국 수현은 미술학원을 그만두기로 했다.
입시 철, 가장 바쁜 시기. 비교적 부담이 덜한 고 1반을 맡고 있을 때였지만 갑자기 관둔다는 수현을 학원에서 좋게 대할 리는 없었다.
결국 마지막 달 페이를 받지 않기로 하고 물러났는데, 원장은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았는지 수현이 가르치던 애들에게 선생님이 큰 사고를 당해 중환자실에 있어 더는 학원에 나올 수 없다는 거짓 소문을 퍼트렸다.
수현의 험담을 섞어가면서.
황당한 일의 연속이었지만 어차피 다시 돌아갈 일이 없는 세상이었다.
수현은 그냥 참고 넘겼다. 그리고 그 겨울은 김민준과 또 동아리 사람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며, 새로 일하게 된 회사로 출근했다.
2001년 2월.
말했던 대로 김민준은 군대에 들어갔다. 허전함과 서운함도 잠시, 수현은 여러 가지 일로 바빠졌다.
이제 3학년.
학교 수업은 심화로 넘어가 교수들의 평가가 독해질 시기였다.
과제와 작품, 그리고 그림책까지.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그림 그리는 데 보냈다.
그래도 이 시기, 수현은 행복했다.
더는 혼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고민과 상념도 시간이 있을 때 더해지는 건지, 일상이 바빠지자 잡념이 사라졌다.
대신 작품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고, 실력이 늘어가는 게 제 눈에도 보여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쩌다 지도 교수에게 칭찬을 듣는 날이면 며칠이나 기분이 좋았다.
아르바이트도 괜찮았다.
이런 길이 있다는 걸 진작 알았더라면 학원에 매이지 않았을 텐데, 지난날이 후회될 정도였다.
경험 없는 신인이고, 당시 출판사의 관행도 있어 계약은 매절로 진행됐는데, 장당 15만 원에서 20만 원을 쳐줬다.
주 3일 저녁 시간 미술학원 아르바이트가 한 달 30만 원에서 45만 원 사이로 책정됐으니 그에 비하면 꿀알바였다.
무엇보다 내 그림들이 모여 책으로 나온다니, 나중에 보면 얼마나 뿌듯할까.
상상만으로도 미소가 지어졌다.
수현이 맡은 첫 책은 텍스트가 거의 없는 그림책이었다.
‘우리는 자유야’라는 귀여운 가제가 붙은 책이었는데, 그림 한 장에 텍스트는 한 줄, 혹은 두 줄 정도가 전부였다.
덕분에 수현은 마음껏 자유롭게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게다가 김민준의 선배라는 출판사 사장은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그려주기만 하면 된다고 일절 간섭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 수현은 작품집을 만들 듯 그 작업에 애정을 쏟았다.
모든 게 그렇게 수월하고 순탄하게 흘러가는 듯 했다.
그리고 2001년 가을.
청천벽력 같은 사건이 일어났다.
“이게 왜 이렇게 나온 거예요?”
책이 나왔다.
가제의 반응이 좋아, 실제 출판도 ‘우리는 자유야’란 이름으로 됐다.
텍스트가 적어선지 오탈자는 없었고, 편집도 깔끔했다.
원화와 인쇄된 책의 색상도 거의 유사했다. 많이 신경을 쓴 책이었다. 대형 서점에 보란 듯이 홍보를 했고.
다만,
“하, 수현 씨. 이게 우리가 정신이 없다보니까 놓친 모양이야.”
“어떻게 이런 실수를 하세요. 제가 그래도 10달 가까이 같이 작업했는데.”
“그러니까 말이야. 어떡하지?”
수현이 그린 책에 수현의 이름이 누락됐다.
대신 김민준의 이름이 들어갔고.
“알아봤더니, 민준 씨도 이번 전집에 참여했거든? 근데 민준 씨 책 담당자가 실수를 했던 모양이야. 그걸 수정하는 과정에서 수현 씨 이름이 빠지고 민준 씨 이름이 두 번 들어간 모양이고.”
“하아. 무슨 실수를 어떻게 하신 건데요.”
“수현 씨.”
진행을 총괄하던 팀장은 처음 몇 번은 사과했지만, 거기까지였다.
“우리 일이 얼마나 정신없이 바쁘고 많은 프로세스가 들어가는지 알아? 그 와중에 사람이니까 실수도 생기는 법이야. 그리고, 민준 씨가 남도 아니고, 남자 친구라며. 민준 씨 소개로 수현 씨도 들어온 거고.”
“아니, 그게…….”
무슨 논리인지 이해할 수 없는 말. 그러나 팀장은 고개를 저으며 딱 잘라 말했다.
“이미 인쇄가 다 된 책을 이런 이유로 거둬들여서 파쇄할 순 없잖아. 안 그래?”
그리고 팀장은 다시 달래는 듯한 목소리로 대안을 제시했다.
“보상금이 나올 수 있는지 알아볼게. 어쨌든, 이게 수현 씨 그림인 건 우리가 알잖아. 애들이 뭐 그림책 보면서 그림 그린 사람 이름에 관심이나 있겠어?”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나 힘의 격차가 컸다. 수현에겐 이 상황을 바로잡을 힘도 방법도 없었다.
그리고 100만 원.
다음 달에 칼같이 위로금 100만 원이 통장에 꽂혔다.
휴가를 나온 김민준은 민망한 듯 웃으며 어깨를 으쓱 올릴 뿐이었다.
“처음 하는 사업이라 좀 어설프긴 하네. 그 형이 돈은 많은데, 아직 직원 관리는 제대로 못 하는 모양이야. 아유, 우리 수현이 마음 많이 상했겠다. 속상했어?”
그때라도 김민준과 연을 끊어야 했다.
수현은 설마하며, 그래도 김민준의 잘못은 아니니 애꿎은 상대에게 화를 내선 안 된다고 마음을 다독였다. 그래서 김민준이 그 그림책에 나온 소재로 다른 그림을 그려내는 것까지 보게 되었다.
***
“하…….”
다시 떠올려도 불쾌한 기억이었다.
“내가 너무 순진했지. 멍청했고.”
그 후, 김민준의 행태를 봤을 때, 그림책을 도둑맞은 것도 우연이 아닐 가능성이 컸다.
얼버무리며 화를 내던 팀장, 모르쇠로 일관하던 김민준의 선배라는 회사 대표, 별일 아니란 듯 넘어가던 김민준까지. 수상한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과거의 수현은 김민준을 너무 믿었고, 그 애가 자신의 그림을 모두 가져갈 때까지 진실을 파헤칠 생각은 하지 못했다. 어쩌면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이 튀어나올까 봐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이제는 다르다.
마음의 상처를 어쩌지 못해 방황할 일도, 상대가 허튼수작을 부리는 걸 당황하며 두고 볼 일도 없다.
무엇보다,
‘그때 내 그림을 참고해 그린 김민준의 그림, 참 가관이었지.’
아주 나중, 김민준이 한참 더 성장한 후엔 수현의 실력을 훌쩍 뛰어넘었으나, 당시만 해도 수현의 것을 베낀 김민준의 그림은 수현의 기대와 수준에 한참 못 미치는 것이었다.
‘다시는 넘볼 수 없게, 내 걸 가져다 망가뜨릴 수 없게, 이번엔 제대로 된 완성본을 보여줘야겠어.’
수현이 다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10개월을 갈아 넣어 그린 그때의 그림들은 아직 수현의 뇌리에 생생했다. 수현은 그 그림을 한층 더 발전시켜 자유로운 ‘자유’를 제대로 표현해볼 생각이었다.
***
다시 한 달 후.
“이쪽으로 옮겨주세요!”
“파티션 왔습니다. 일단 여기 구석에 쌓아두면 됩니까? 이거 자리가 마땅치 않은데.”
“네, 책상들부터 다 빼서 지하 비품실로 이동할 거니까요,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바닥은 어떻게 할까요?”
“카페트는 뜯어야 할 거예요. 바닥에 물감이며 여러 가지 재료들이 떨어질 거라…… 하이고, 이것도 일이겠네. 어쨌든 거의 비운다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네, 네.”
“아, 저쪽 벽에 책장이랑 캐비닛은 따로 활용한다니, 책상이랑 의자부터 다 치워주세요. 이따가 오후에 새 가구들이랑 비품이 한 번 더 들어오니까 서둘러주세요.”
서울 강남구 JK그룹 본사 사옥.
전국대회 3차 시험이 열릴 장소인 2층 202호는 몹시 분주했다.
어느덧 7월 중순.
약 한 달 후면 본격적인 대회가 치러질 테니, 대회장 준비와 점검에 박차를 가하고 있던 것.
후원사인 JK그룹에서 시험장소를 제공했고, 총괄을 맡은 박 팀장은 땀을 뻘뻘 흘리며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었다.
30명이 한 달간 드나들게 될 시험장엔 철저한 보안장치가 붙어 있었다.
60평 정도 되는 공간은 30명이 동시에 작업을 해도 쾌적하게 꾸려질 예정이었다.
시원한 통창은 환기에 용이했고, 그림 재료 특성을 고려해 환풍 시설도 마련되었다.
허리 정도 높이의 파티션으로 30개의 독립된 공간을 나누어 프라이버시를 보장함과 동시에 답답함이 느껴지지 않게 할 생각이었고, 각 자리엔 이젤과 작업대, 의자,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간이침대도 하나씩 둘 계획이었다.
모든 일이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그리고 참가자들 역시 곳곳에서 마지막 대회에 임하려는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