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Renowned Genius At My Arts High School RAW novel - Chapter (87)
87화. 결선(2)
헉헉.
김민준이 운동장을 가로질러 뛰고 있었다.
좀 전 강성실이 받은 전화는 그가 심어놓은 한 남자로부터 걸려온 것이었다.
JK 그룹 앞 카페에서 매일 죽치고 앉아 시험장에 드나드는 응시생들을 체크하는 남자.
그가 오랜만에 한수현이 시험장에 나타났다는 보고를 해왔고, 강성실이 떨떠름한 얼굴로 그걸 전해준 순간, 저도 모르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시험장을 향해 달리기 시작한 거다.
왜일까. 왜 이렇게 초조한 걸까.
김민준은 불안의 근원을 알 수 없었다. 그러니 그 원인을 어서 가서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한편, 한수현이 어떤 걸 준비해왔을지 기대되는 이상한 기분에 빠져들었으나, 그런 마음을 제대로 살필 겨를은 없었다.
당장은 한수현의 등장이 너무나 신경 쓰였고, 자신의 예측을 빗나가는 행동들이 거슬려 미칠 것만 같았으니까.
같은 시각 JK그룹 본사 사옥 2층.
오랜만에 시험장에 나타난 수현은 초벌 색채가 충분히 마른 걸 확인하고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따로 보관해두었던 나무 조각과 알루미늄 조각들을 꺼내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본격적인 채색에 들어갔다.
‘이제 벽의 질감은 완벽하게 표현했어. 명암을 좀 더 넣고 낙서에 디테일을 주기만 하면 되겠지. 거기에 붙일 인물들을 슬슬 만들 차례가 됐고.’
수현은 그림 속, 담벼락에 서서 낙서를 그린 주체들을 낱개로 떼어내 따로따로 그려낼 생각이었다.
그리고 퍼즐을 맞추듯 그걸 합판 위에 배치해 그림을 완성할 계획이었고.
‘좋아.’
작업의 속도는 어느 때보다 빨랐다. 수현의 손이 빠른 것도 있었지만, 작업 방식이 용이한 까닭도 있었다.
‘만약 모든 과정이 하나의 캔버스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면, 건조에 충분한 시간을 들일 수 없었을 거야. 하지만 이렇게 조각들을 따로 그려 마지막에 배치하는 식이면 각각의 상태를 확인하면서 빠르게 그릴 수 있지.’
수현이 심호흡하며 순차적으로 조각들에 색을 입혀갔다.
수현은 지난 열흘간 그저 쉬거나 논 게 아니었다.
시뮬레이션.
일선화랑에서 여러 형태의 오브제들을 만들고 배치하며 가장 효과적인 형태를 미리 연습했고, 오늘은 그야말로 한 번에 그 과정을 쏟아내는 중이었던 거다.
그러니 모르는 사람이 볼 땐, 어마어마한 기세가 느껴질 일이었다.
한동안 나타나지 않던 참가자가 갑자기 등장해 엄청난 속도로 많은 그림을 단번에 그려내고 있으니.
“대박. 저기 좀 봐.”
“하. 쟤가 걔지? 세현예고 신의 손.”
“다르긴 다르네. 그래, 저런 애가 평범할 리가 없지.”
“근데 뭘 그리는 거야? 되게 궁금하네.”
페이스를 조절하지 못한 참가자 중 성격 급한 이들은 벌써 그림이 거의 완성되기도 한 상황.
그들은 수현이 나타나지 않은 열흘간 자기들끼리 3차전의 당락과 함께 수상자를 점쳐보기도 했다.
그런데 다크호스가 나타나 판세를 흔들고 있으니 다들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고.
탕.
그 어수선하며 불안한 감정적 분위기에 정점을 찍은 건 김민준의 등장이었다.
헐떡거리는 숨소리. 수현의 자리를 찾는 강렬한 눈빛.
조금만 신경 쓰면 누구라도 그가 수현이 나타났다는 걸 알고 쫓아왔다는 걸 알아볼 정도로 다급한 표정이었다.
저벅저벅.
빠르게 시험장 안으로 걸어들어오는 김민준.
그러나 곧 여기가 어디고 어떤 행동을 조심해야 하는지 자각한 건지 호흡을 가다듬으며 자기 자리로 들어갔다.
‘나타났네.’
수현은 그 모든 소리를 귀로 듣고 있었다.
‘얼마나 궁금할까.’
수현의 기억에 김민준은 선택적으로 참을성이 없는 성격이었다.
어떤 일이 자신의 계획에서 벗어나 흘러가는 걸 못 견뎠으니, 수현의 신경을 긁으려던 작전이 실패하고, 수현이 열흘이나 시험장에 나타나지 않은 일에도 크게 영향을 받았을 게 분명하다.
겨우 참을성을 발휘해 자기 자리에 가서 앉았지만,
‘이걸로 멘탈은 무너졌겠지.’
김민준은 3차 시험 내내 시험장에서 수현과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다.
완벽한 우연일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수현이 시험장을 떠나는 대로 나타나 수현의 그림을 살펴보고 일부러 거슬릴만한 행동들을 해놓은 게 빤히 보였으니까.
지금도 헐레벌떡 나타난 걸 보면, 어떤 방법을 써서 수현이 시험장에 드나드는 때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어쨌거나, 그런 계획을 세웠던 거라면 끝까지 밀고 나갔어야지.
수현의 등장이 얼마 만이든 간에 저런 초조한 기색으로 달려오지 말았어야 했다.
그간 수현이 시험장에 머문 시간은 평균 4시간 정도.
김민준은 아마도 그 정도를 각오하고 있을 거다. 최대 4시간만 버티면 수현이 시험장을 떠날 테고, 그럼 수현이 그려놓은 것을 마음껏 훔쳐볼 생각이겠지만,
‘흐음.’
수현은 그 기회를 쉽게 줄 마음이 없었다.
‘오늘은 마감 시간인 10시까지 쭉 달려봐야겠어.’
수현이 잡념을 쫓아내며 다시 그림에 몰두했다.
***
음악을 잘하는 사람은 좋은 귀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먼저 소리를 정확히 구분할 줄 알아야 좋은 소리를 낼 수 있으니까.
그림도 마찬가지다.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은 좋은 눈을 가진 사람이다.
관찰력이 받쳐줘야 좋은 그림을 그려낼 수 있기 때문.
수현이 그림을 잘 그리게 된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물론 수현이 태어났을 때부터 좋은 눈을 가지고 있던 건 아니었다.
타닥타닥. 놀이터를 향해 달려오는 아이들.
까르르르. 숨이 넘어갈 듯 터지는 웃음소리.
무거운 장바구니를 들고 오는 아주머니.
철가방을 들고 계단으로 뛰어오르는 배달부.
고장 난 TV, 냉장고, 세탁기를 사러 다니는 고물 장수.
바람에 나무가 흔들리고, 어디서 왔는지 모를 나비가 팔랑거리고, 계절에 따른 냄새가 공기에 섞여들었다.
어린 시절, 수현은 멍하니 이런 일상의 풍경들을 바라보았다.
원래도 내성적이고 조용한 아이였지만, 동생이 태어나고 더욱 싸늘해진 엄마의 품에 파고들 수 없게 된 다음부터는 아파트 계단에 쪼그리고 앉아 있거나 놀이터 그네나 공원 벤치 같은 곳에서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아졌다.
“수현이 또 나왔네?”
“이거 304호 우편물이야. 이따가 어머니 가져다드리렴.”
“과자 좀 줄까?”
이따금 아는 척을 하거나 심부름을 시키는 어른들이 있었는데, 그럴 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거나 가만히 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얼음땡 하자!”
“다방구 할 건데 너도 와!”
놀러 나온 애들이 같이 놀자고 하면 억지로 끌려갈 때도 있었다.
다만 수현은 넋을 놓고 딴생각에 빠질 때가 많아 전력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하릴없이 흘러가던 시간.
이 지겨운 하루하루가 얼마만큼 쌓여야 어른이 될 수 있을까.
하지만 어른이 되면 뭘 할까.
이 지독한 우울감에선 빠져나갈 수 있을까.
나중, 보는 눈을 의식한 엄마가 밖에 나다니지 말고 혼자 집에 있으란 잔소리를 한 다음부터는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아졌지만, 그때도 다를 건 없었다.
수현은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며 그냥 세상이 흘러가는 걸 지켜봤다.
그리고 그때 보았던 것들.
아무 감정 없이 눈에 담겼던 것들은 이후 수현이 그림을 그릴 때 놀라운 동력이 되었다.
‘팔 길이는 거의 허벅지 중간까지.
관절은 이런 식으로 연결돼서 움직일 수 있는 범위는 여기까지.
아이는 이마를 넓게, 성인은 이마를 좁게.’
인체의 비율을 배우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그려낼 수 있었고,
‘스테인리스는 직선으로 뻗은 선으로 중간중간 진한 선을 그려 넣어주면 질감이 사는구나.
유리는 지우개를 이용해 반사되는 부분을 하이라이트로 표시하면 좋겠어.
나무는 이런 결들이 살아 있으니까 부드럽게 천천히 선을 그으면서 표현하는 거야.’
사물의 질감이 어떻게 다른지, 어떻게 그려낼 수 있는지를 저절로 깨달았다.
그 밖에도 많은 것들을 어렵지 않게 떠올리며 그릴 수 있었다.
멍하니 바라보았던 세상, 그 안에 있던 모든 시간이 수현의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여, 언제든 쉽게 꺼내 볼 수 있는 책처럼 만들어진 거다.
“후우.”
얼마나 집중하고 그렸을까.
뻐근한 어깨를 한쪽 손으로 주무르며 수현이 자세를 바꾸었다.
알루미늄과 나무 조각들을 이용해 만든 오브제.
수현은 거기에 담벼락에 서서 그림을 그리는 다양한 인물들을 하나씩 그려 넣고 있었다.
이조차도 수현이 어린 시절 차분히 관찰하며 담아둔 인상이었다.
이 남자는 자세를 좀 더 구부정하게 그려보자. 자신 없어 머뭇거리는 느낌이 나게. 그럼 그려내는 낙서도 작고 단조로운 게 되어야겠지.
꼬마는 대담하게. 골목대장이던 효중이 같은 느낌으로. 커다란 자동차를 그리게 해볼까. 키는 작으니까 이 정도 높이와 넓이를 구역으로 주면 되겠어.
이 여자는 회사를 그만두고 버킷리스트를 하러 가는 게 소원이야. 꿈꾸는 여행과 낭만을 담벼락에 그려보는 거지.
살면서 만났던 사람들. 그들이 무심코 뱉었던 말들. 특유의 몸짓과 뉘앙스.
수현은 그런 것을 하나하나 기억해 살려내며 인물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재밌어.’
‘좋다.’
‘이 느낌이야.’
일선화랑에서 연습했을 때보다 훨씬 감각적이고 편안한 그림이 손끝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렇게 수현이 구상한 오브제들이 마법처럼 점차 캔버스로 옮겨졌고.
스윽.
마감 시간에 맞춰 퇴장하기 직전, 수현은 반대편 방향에서 넘겨다볼 수 없게 파티션 쪽으로 테이블을 붙인 다음, 그 위에 오브제들을 올려 건조했다.
누군가 봤다면 분명 감탄했을 그림이었겠지만.
시험장의 벽 쪽 끝자리.
게다가 의도적으로 감추어버리고 나니 누구도 수현이 그린 것들을 제대로 볼 수 없게 됐다.
그러니 김민준은 애가 타 죽을 지경이 됐다.
아까부터 불안한 기운을 감지하던 김민준은 마지막까지 시험장을 나서지 못하며 손톱을 물어뜯었다.
달려온 보람도 없이 한수현의 그림을 보지 못하게 된 거다.
그렇게 다음 날, 또 그다음 날, 다시 그다음 날까지.
수현의 그림이 점차 아름답게 완성되어 가는 동안에도 신경전은 계속되었다.
수현은 시험장이 열리는 오전 10시에 칼같이 나타나, 문이 닫히는 오후 10시까지 쉬지 않고 그림을 그렸다.
김민준도 덩달아 바빠졌다.
수현보다 일찍, 수현보다 늦게 나갈 기회를 노려 수현이 그리는 그림이 뭘지 볼 요량이었는데, 뜻대로 되지 않으니 낯빛은 점점 어두워졌다.
그래도 3일째부터는 제법 집중력을 회복했는지 자기 그림을 그리는 분위기가 되긴 했다.
치열한 신경전이 일주일에 접어들던 날.
‘이 정도면 됐을까.’
수현은 다른 날보다 일찍 시험장을 나서기로 결심했다.
3차전 마감까지는 이제 3일.
30명의 참가자 중 절반이 작품을 마무리했고, 일찌감치 제출한 이도 있었다.
시험장은 어수선한 한편, 휑한 느낌이 들었다.
꽉 차 있던 재료들과 작품의 주인들이 하나둘, 떠나며 썰렁해진 거다.
‘다들 고생했네.’
수현이 뭉클한 감정을 느끼며 시험장을 천천히 둘러봤다.
잡음이 종종 생기긴 했으나, 서른 명 모두 각자의 싸움을 끝까지 해냈다. 그 덕분에 30점의 작품이 무사히 나올 수 있었고.
수현의 그림도 이제 마무리만 남겨두고 있었다.
오늘로 수현의 작품은 90%쯤 완성된 상황. 드디어 오브제들을 합판 위에 부착하는 작업까지 모두 끝낸 직후였다.
그리고 그 소감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좋아.’
작년 미술전시회를 준비할 때 느꼈던 희열, 런던에서 그래피티를 할 때의 두근거림, 그리고 런던 전시장에 걸릴 작품을 마침내 완성했을 때 벅차올랐던 환희의 감정과는 또 다른 것이었다.
안도.
수현은 안심하고 있었다.
작품의 완성도가 무척 훌륭한 덕도 있지만, 단지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젠 괜찮겠다. 믿을 수 있겠다.
안심되는 것이었다.
수현은 이번 그림을 완성하며, 여태까지 그린 것들이 그저 운 좋게 우연히 잘 그려진 것들이 아니라, 이번 생의 내가 그릴 수 있게 된 새로운 수준이라는 걸 겨우 인정할 수 있게 됐다.
더는 불안해하지 않고 이대로, 이 방향으로 그저 그려 나가면 되겠구나, 하는 생각에 긴장이 풀리며 슬쩍 미소가 지어졌다.
탁.
마지막 정리를 마친 수현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시험장을 나섰다.
그 뒤에 남겨진 100호 크기의 합판에는 한수현의 오리지널리티, 즉 그만의 세계가 완벽하게 구현돼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