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Renowned Genius At My Arts High School RAW novel - Chapter (94)
94화. 수학여행(2)
과거 수현은 다른 과 애들에겐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예고 3년 내내 같은 과 학생들만 한 반으로 묶이니, 다른 과 애들과는 접점이 없기도 했고, 어쩌다 타과 애들의 공연에 관객으로 동원되더라도, 당장 처리해야 할 과제 생각에 대충 자리만 채우다 돌아오는 식이었던 거다.
그러니 졸업 후, 세현예고 출신 애들이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하거나 TV, 영화에 출연해 이름을 알리는 걸 볼 때도 별 감흥이 없었다.
아, 저런 애가 같은 시기 나와 같은 학교에 다녔구나.
하고 곧 잊어버리는 정도.
하지만 그런 수현도 당시 수학여행 사건의 주역만큼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희찬.
서글서글한 눈매에 뾰족한 턱. 단발에 가깝게 기른 머리에 날렵한 인상을 한 아이였다.
활동적인 성격이었는지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엔 항상 복도와 운동장에 나와 있었고.
“와아아!”
“짱이다!”
주변엔 언제나 환호하는 애들이 가득했다.
“진짜 잘 춘다.”
“와, 한 번 더 해봐!”
아직 대중에겐 낯설던 비보잉.
그러나 1세대 비보이들이 기지개를 켜며 거리로 나와 자기들만의 춤으로 무대를 개척하던 시기.
이희찬은 놀라운 비보잉 실력으로 떠오른 신예였다.
아직은 세현예고 복도와 강당, 그리고 운동장이 무대의 전부였지만, 5년 후 대한민국은 물론 국제대회를 휩쓸며 전 세계를 제패하게 되는.
“저기, 잠시만.”
“잠깐만 지나갈게.”
매점에 가려면 8반 연영과 복도를 지나야 하는 미술과나 음악과 애들도 이희찬의 복도 공연을 힐끗힐끗 보기는 했다. 수현 역시 친구들과 복도를 지날 때, 이희찬이 춤추는 모습을 몇 번 봤었고.
‘반에서도 꽤 인기가 있는 것 같았고, 실력도 좋았는데 미술과 애들한텐 왜 그렇게 각을 세우고 날카롭게 굴었던 거지?’
과거를 떠올리자 더욱 사건의 진실이 궁금해졌다.
사실 이희찬이 미술과 떡대 발언과 모기약 분사를 하지 않았더라면 그날의 다툼은 패싸움으로까지 번지진 않았을 테니까.
세 보이려고 허세를 부리며 말을 거칠게 하는 애들처럼 툭 뱉은 말과 행동이 크게 번진 걸까?
그렇다면 그런 말을 함부로 하지 못하게 할 방법이 있을까?
그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을까? 그건 또 어떻게 알아낼 수 있지?
수현이 콧등을 찡그리며 고민했다.
사실 패싸움이라고 해도 크게 다친 애는 없었고, 비교적 빠르게 진화되긴 했다.
문제는 그 바람에 수학여행이 엉망이 됐고, 돌아와서는 엄청난 강도의 단체 기합을 받아야 했고, 그게 그해 겨울 방학 실기 수업과 시험에까지 영향을 미쳐 한동안 미술과 전원이 생고생을 했다는 데 있었고.
‘다시 겪고 싶진 않네.’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소리소리 지르며 벌을 주던 최형욱 선생은 학교를 떠나 없었지만, 어떤 형태로든 체벌은 피할 수 없을 게 분명했다.
수현은 간만에 찾아온 이 평화로운 시기를 그렇게 어이없는 사건으로 망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뾰족한 수는 없어 괜히 연영과 복도를 슬금슬금 넘겨다보기만 하던 어느 날.
뜻밖의 일을 목격하게 되었다.
“미안. 나 못 들은 걸로 할게.”
“어? 연아야, 혹시 부담스러웠어? 그런 거면 좀 더 두고 봐도…….”
“아니, 난 지금 남자 친구를 사귈 생각이 없어. 내년이면 고3이고, 입시생이잖아.”
“하지만 어려운 시기를 서로 응원하면서 잘 보낼 수도 있지 않을까?”
복도를 돌아 계단을 내려가려던 수현은 한층 아래 계단에 서서 고백 중인 남자애와 그걸 거절하는 여자애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남자애는 연영과 이희찬.
여자애는 무용과 강연아였다.
‘아, 하필이면.’
왜 다니는 애들도 많은 계단에서 저러고 있을까,
수현이 곤란한 얼굴로 슬금슬금 물러나 다시 복도를 가로질러 반대편 중앙계단을 향했다.
그리고 그날 오후.
“이거 받아줄래?”
이번엔 미술과 실기동 뒤편.
깨진 석고상을 버리러 박선화와 창고 쪽으로 가던 수현은 또 한 번 은밀한 고백 장면을 목격하고 말았다.
‘아니, 지금이 무슨 시즌이라도 돼?’
학교란 곳이 으레 인기있는 애가 있기 마련이고, 누가 누굴 좋아한다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지만, 같은 날 두 번이나 사랑 고백 장면을 보게 될 줄이야.
그런데.
“헐, 쟤 박준영이잖아?”
박선화의 말에 고백을 주고받는 애들이 누군지 확인한 수현은 깜짝 놀라 중얼거리고 말았다.
“뭐야, 그리고 쟨 강연아네?”
“어, 그니까. 무용과 강연아다. 대박.”
수현의 머리가 잠깐 어지러워졌다.
몇 시간 전, 강연아가 이희찬의 고백을 거절하는 장면을 목격했는데, 이번엔 그 강연아가 박준영에게 좋아한다는 마음을 고백하고 있었다.
그런데, 강연아는 아까 이희찬에게 남자 친구를 사귈 마음이 없다고 딱 잘라 말하지 않았었나?
“으악.”
그리고 박준영이 뭔가 대답하려는 순간,
콰직-!
박선화가 들고 있던 깨진 석고상을 놓치며 아예 박살이 나는 소리가 났다.
“뭐야?”
“어?”
“왜?”
박준영과 강연아가 놀라며 소리가 난 쪽을 돌아봤고, 박선화와 수현도 놀란 얼굴로 깨진 석고상 조각과 둘을 번갈아 보았다.
“너희 뭐야? 그거 깨먹은 거야?”
그리고 박준영은 성큼성큼 걸어와 석고상 조각을 주우며 혀를 끌끌 찼다.
“하여간, 박선화. 조심성 없기는.”
“아, 내가 왜?”
“이거 하나 못 들어서 깨먹냐?”
“아니거든? 그거 원래 깨져 있던 거거든? 버리러 가던 거고?”
둘이 옥신각신하는 사이, 저만치 혼자 서 있던 강연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하기는, 어렵게 고백을 끄집어낸 순간 생각지도 못한 방해꾼들이 나타나 고백 상대가 아예 자리를 떠버렸으니 민망하기도 부끄럽기도 하겠지.
수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박준영에게 눈짓했다.
“어?”
“쟤, 그냥 저기에 혼자 둘 거야?”
“아.”
“여긴 우리가 알아서 치울 테니까 가봐.”
수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박준영이 난감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너희, 아까…….”
그러나 말을 그대로 삼키더니 어깨를 으쓱 들어 올렸다.
“어, 그럼 잘 치우고 가. 이따가 보자.”
“그래.”
“어, 가봐.”
그렇게 박준영은 다시 강연아가 있는 쪽으로 갔고, 둘이 무용과 실기동 방향으로 천천히 걸어가며 이야기를 더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박준영 인기 좋네.”
그제야 고개를 저으며 이상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박선화.
“왜?”
“쟤 올해만 다섯 번 넘었을걸?”
“뭐가?”
“저렇게 고백받는 거. 미술과뿐 아니라, 연영과, 무용과 여자애들까지 박준영한테 사귀고 싶다고 선물 주고 편지 주고 그랬다잖아.”
“정말? 난 몰랐는데.”
“쟤가 뭐가 매력이 있다고.”
콧등을 찡그리며 고개를 젓는 박선화.
“왜. 엄친아잖아.”
“어? 엄친아?”
“아, 그러니까 엄마가 맨날 나랑 비교하는 엄마 친구의 잘난 아들 같은 존재?”
“……?”
“그냥 잘났다고. 잘 생기고, 공부도 잘하고 실기 성적도 좋고, 성격도 무난하고. 인기가 좋을 만하지.”
“흐음.”
그러자 박선화는 입을 쭉 내밀며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난 이해 안 돼. 박준영 쟤 어릴 땐 진짜 못난이였거든.”
“아, 정말?”
박선화는 깨진 석고 조각들을 줍는 동안 어릴 때 알던 박준영이 얼마나 비실비실했고 볼품없었는지, 몇 가지 일화를 줄줄 늘어놓았다.
수현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생각은 다른 곳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때 이희찬이 먼저 시비를 걸었고, 나중에 남자애들끼리 얘기하다가 박준영이랑도 한판 붙었지? 설마 그게 무용과 강연아랑 관련이 있었던 걸까?
그러니까, 남자 친구를 사귈 생각이 없다고 했던 강연아가, 박준영이랑 사귀었고 그걸 이희찬이 알게 된 거라면?
질투심에 눈이 멀어 이희찬이 미술과 애들에게 시비를 걸었고, 아무것도 모르는 박준영이 화해를 하러 갔다가 오히려 화를 부추긴 거라면? 그래서 이희찬이 돌발행동을 했을 수도 있을까?
잠깐, 근데 박준영이 강연아랑 사귀었나?
그건 기억에 없는데…….
“한수현?”
너무 골똘히 생각에 빠졌는지 박선화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수현을 흔들었다.
“너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어? 아니야. 가자.”
만약 이게 사건의 전말이라면 일단은 박준영이 어떤 선택을 할지도 알아봐야 할 일이었다.
***
“어?”
“아니, 엿들으려고 했던 건 아닌데.”
실기 수업 직전 쉬는 시간.
수현이 우연인 척 미술과 실기동 앞에서 박준영과 마주쳤다. 그리고 아까의 일을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래서, 사귀기로 한 거야?”
“아냐.”
수현의 말에 박준영이 빠르게 부정했다.
“어? 아니야?”
“어. 아니야.”
“왜?”
수현이 고개를 갸웃하다 다시 흔들었다.
“아니다, 그거야 네 선택이지. 어쨌든 아니란 거지?”
“어. 근데 너, 그걸 왜 묻는 거야?”
“어?”
“너 혹시…….”
순간 수현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설마, 얘 내가 자기한테 관심 있나 하는 오해를 하는 건 아니겠지?
“그런 거 아닌데?”
“박선화가…….”
“……?”
“……?”
동시에 튀어나온 말에 고개를 갸웃한 수현과 박준영.
“뭐가 그런 게 아니야?”
“선화가? 선화가 뭐?”
다시 비슷한 타이밍에 둘이 각기 다른 질문을 던졌고.
박준영이 피식 웃으며 먼저 답했다.
“혹시 박선화가 물어보라고 했어?”
“아니?”
수현이 단박에 답했다.
“선화가 왜?”
“아냐. 어쨌든 박선화가 물어보면 전해줘. 난 강연아 같은 애 별로라고.”
“……어?”
수현이 눈을 끔뻑이자 박준영이 몇 마디를 더 보탰다.
“강연아, 내 스타일 아니거든. 그러니까 오해할 거 전혀 없어.”
“어. 그, 그래. 나도 괜한 걸 물어봐서 미안.”
“아냐. 그럼 들어갈까?”
박준영이 먼저 실기동으로 들어갔고 수현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그러니까 박준영이랑 강연아는 사귀지 않았다는 거네. 그럼 이희찬이 둘 사이를 혼자 오해했던 건가? 잠깐. 근데 박준영은 왜 또 수상하지? 왜 박선화한테 이 얘길 굳이 전해달라고 하는 거야? 쟤 설마…… 선화한테? 하.’
피식, 웃음이 터졌다.
전엔 하나도 모르고 지나갔는데, 이 당시 애들 사이에 이런 감정선들이 씨줄 날줄로 얽혀 있었구나.
훨훨 나는 암수 꾀꼬리만 정답다고 노래할 게 아니었다.
청춘은 그리고 사랑은 전쟁 같은 입시 속에서도 맹렬히 타오르고 있었다.
어쨌거나 가능성 있는 추론이 하나 완성된 셈.
수현은 연영과 이희찬이 박준영을 오해해 미술과 애들을 전원 분노하게 할 ‘떡대’ 발언을 한 거라면, 그걸 막을 수 있을 방법이 뭔지 다시 고민했다.
그리고 일을 해결할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다음 날 점심시간.
“와아!”
“잘한다!”
“진짜 멋지다!”
휘익- 휘파람을 불고 박수를 보내며 복도를 에워싸고 있는 무리.
물구나무를 서고 봐도 분명했다.
오늘도 복도에서 이희찬이 비보잉을 하고 있었다.
휘익. 타앗.
땀을 뻘뻘 흘리며 몸을 흔드는 이희찬. 환하게 웃는 얼굴이 서 있는 애들 사이로 한 번씩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한참 음악도 없이 격렬한 춤을 추며 스핀을 보여주던 이희찬이 마침내 탁! 멋지게 착지하며 마무리 동작을 지었다.
“꺄아!”
“한 번 더!”
자지러지는 구경꾼들.
이희찬은 그 시선을 즐기면서도 자꾸만 시선을 7반 쪽으로 돌렸다. 아무래도 무용과 강연아가 어디에 있는지 찾는 눈치였다.
‘쟤 진짜 짠해서 못 봐주겠네.’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모습을 보던 수현이 친구들과 함께 성큼성큼 연영과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와! 최고다!”
그리고 수현이 모두의 평화를 위한 혼신의 연기를 펼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