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Renowned Genius At My Arts High School RAW novel - Chapter (98)
98화. 진실게임(3)
누군가 말했다.
늦었다고 생각될 땐 정말 늦은 거라고.
그리고 수현은 직감했다.
바로 지금이, 그 돌이킬 수 없게 늦어버린 순간이라는 것을.
일이 어쩌다 이렇게 흐르게 된 걸까.
“받아줄래?”
이희찬이 심각한 얼굴로 수현에게 선물상자를 내밀었다.
“아. 하하. 이게 뭘까.”
수현이 로봇처럼 어색하게 웃었다.
“별 건 아니야. 받아줘.”
“별 게 아니더라도, 뭔지 말해주면 좋을 것 같은데. 하하.”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기도 했다.
수현은 이 상황을 어떻게 타파할 수 있을지 바쁘게 머리를 굴렸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그러나 이희찬은 물러날 생각이 없는지 수현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나, 사실 얼마 전부터 수현이 너를 마음에…….”
“어! 잠깐만!”
수현이 벌떡 일어났다.
이대로 이희찬이 고백하게 둘 순 없겠다. 어차피 받아줄 일은 없을 테니까.
그런데,
“내가 너무 성급했나?”
이희찬은 오히려 당황하는 수현이 귀엽다는 듯 꿀이 떨어지는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시간을 좀 두고 생각해볼까? 사실 우리가 안 지 얼마 되진 않았으니까. 그래도 수현이 너, 내가 싫은 건 아니지?”
부러운 자신감과 추진력이었다.
그러나 이대로 이희찬의 분위기에 끌려가선 안 될 일이었다.
“그, 우리가 안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게 문제가 아니라…… 나는 너를 이성적으로 보는 게 아니었거든.”
수현이 다시 계단에 앉으며 차분하게 말했다. 잘 알아듣게, 상처받지 않게 얘기해야 이희찬도 마음을 다치지 않을 테고, 연영과와 미술과의 대격돌도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그런데 수현의 말을 듣던 이희찬이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이성적으로 본 게 아니었다고?”
“혹시 너…… 지난번에 내가 복도에서 칭찬했던 것 때문에 그래? 야, 그건 네가 진짜 춤을 잘 춰서 정말 감탄해서 했던 말이야. 난 정말 그렇게 춤을 잘 추는 애는 본 적이 없거든.”
“……어?”
이희찬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고백을 거절하는 말이 분명한데 칭찬이 더해지니 기분이 안 좋기도, 좋기도 한 얼굴.
“너, 비보잉 하는 거지? 그거 지금은 사람들이 잘 몰라도 곧 엄청나게 인기를 끌게 될 거야. 그리고 너 정도 실력이면 국내 제패는 물론이고 세계 무대에서도 손꼽히는 댄서가 될 거고.”
“……정말 그렇게 생각해?”
“당연하지! 야, 나 눈 엄청 높아. 그러니까 이성을 보는 눈 말고, 예술을 바라보는 눈? 재능을 알아보는 눈? 그런 게 정말 높고 정확하다니까? 믿어도 돼!”
“그래…….”
이희찬이 평소 반항적이던 눈을 순하게 바꿔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너. 지금이 너한텐 정말 중요한 시기일 수 있어.”
“중요한 시기라니?”
“세계 무대를 목표로 준비해야지! 크루들도 모으고. 비보잉은 또 팀으로 출전하잖아. 어쨌든 본격적으로 준비해! 그러다 보면 분명히 좋은 기회가 올 거야. 국내에도 큰 대회가 곧 생길 거고.”
“정말 그럴까?”
“당연하지!”
적어도 수현이 아는 미래에선 그랬다. 수현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이희찬을 설득했다.
“학창 시절을 마음껏 즐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미래를 생각해야지. 희찬아. 친구야! 우리 목표를 크게 잡자. 어?”
이희찬이 멍한 얼굴로 수현을 바라보았다.
“와. 근데 수현이 넌 어떻게 비보잉까지 그렇게 잘 아는 거야?”
“어?”
“진짜 한 번 더 반하겠네.”
그 말에 수현은 식겁했으나, 이희찬이 두 손을 들어 보이며 하하 웃었다.
“놀라지 말고.”
“아니. 놀란 건 아닌데? 평정심 제대로 유지하고 있는데?”
“하하. 그래.”
잠시 침묵이 흘렀고, 마침내 이희찬이 한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그럼 우린 친군가?”
“친구지!”
“오래오래 볼 친구?”
“그럼! 서로 응원하는 동지애 넘치는 예술가 친구! 우리 그거 하자.”
“좋아. 뭐, 사람 일이야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거니까.”
“어?”
“또 알아? 나중엔 수현이 네가 나한테 좋아한다고 고백할 수도 있는 거잖아.”
“와…….”
“정색하진 말고. 상처받으니까.”
“아냐. 그냥 감탄이야. 너 진짜 자존감 하나는 대단하다. 배우고 싶다. 정말.”
수현이 깔깔 웃으며 일어났다.
이만하면 그래도 나쁘지 않은 봉합이었다, 생각하면서.
“이건 가져가.”
그런데 이희찬이 아까 선물상자에서 편지를 쏙 빼더니 다시 내밀었다.
“어?”
“별거는 지금 뺐고, 나머진 평범한 거야. 너 음악 듣는 거 좋아하지? 맨날 이어폰 꽂고 있던데.”
“아, 좋아하지.”
“내가 좋아하는 음악 테이프랑 초콜릿이야. 그러니까 부담 갖지 말고 받아. 나 이거 다시 들고 방에 들어가면 애들 때문에 귀찮아져서 안 돼.”
“애들? 애들이 알아?”
“알지. 너, 수학여행 전에 땅콩 빵이랑 딸기 우유도…….”
“헐. 그것도 너였어?”
“와.”
이희찬이 어이없다는 눈으로 수현을 바라보았다.
“너 생각보다 둔하구나?”
“어?”
“됐어. 어쨌든 가져가.”
“어, 알겠는데. 잠깐. 내가 이걸 가져가면 가져가는 대로 애들이 다른 오해를 하는 상황이 생기는 건 아닐까?”
그 말에 이희찬이 잠깐 고민하더니 싱긋 웃었다.
“그건 뭐, 내가 대충 둘러댈게. 어쨌든 고맙다.”
“뭐가?”
“응원.”
“아…….”
“우리 다 같은 시기를 지나고 있긴 하지만, 나 요즘 진로에 대한 고민이 엄청 많았거든.”
“그래. 그럴 수 있지.”
“그런데 너랑 얘기하다 보니까 뭔가 뻥 뚫린 기분이야. 속이 시원해.”
“다행이네.”
“나, 열심히 할 테니까 너도 좋은 그림 그려서 꼭 세계적인 작가가 돼라.”
“그래.”
수현이 그제야 이희찬에게 편안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
잠시 후 3시. 리조트 앞 야외공간.
“영차, 영차!”
“뒤로! 조금만 더 힘내자!”
“영차, 영차!”
과거와 똑같이 진행된 레크리에이션 시간.
강사의 진행으로 미니게임 몇 개를 한 후, 줄다리기 시합이 이어졌다.
그리고 마지막, 결승에서 붙은 건 그때와 똑같이 연영과와 미술과였고,
“와아!”
“이겼다아!”
“이겼어!”
이번에도 승리는 미술과였다.
꿀꺽.
수현이 마른침을 삼키며 미술과 애들과 연영과 애들의 표정을 스캔했다.
오래전 일이라 자세한 것까진 기억나지 않았지만, 기뻐하는 얼굴과 실망하는 얼굴의 교차는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게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괜찮아. 우리도 잘했어.”
“그래. 다들 고생했다.”
“와, 미술과 세네.”
“그러게. 미술과 진짜 세다.”
연영과 애들은 전과 다르게 부드러운 말로 승리를 인정하며 미술과 애들의 우승을 축하했고,
“너희도 잘했어!”
“그래, 사실 우리가 유리한 게임이지. 우린 138명 중에 30명을 고른 거고 너흰 그대로 나온 거잖아.”
“맞아. 그리고 원래 미술과가 힘이 좀 세. 우리 평소에 힘쓰는 일을 많이 하거든.”
미술과 애들도 인정할 건 인정하며 연영과 애들을 격려했다.
“와…….”
그 모습을 본 수현은 그간의 맘고생이 떠올라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그래, 내가 이 평화를 지키기 위해 이너피스를 포기했던 거지.
툭.
그리고 감상에 잠긴 수현의 어깨를 누군가 두드렸다. 차윤희였다.
“왜?”
“야, 저기 좀 봐.”
“어?”
차윤희의 시선을 따라가자, 줄을 잡다가 손이 까졌는지 울상을 짓고 있는 박선화의 모습이 보였고, 맞은편으로 맥가이버라도 되는지 작은 가방에서 주섬주섬 밴드를 꺼내 붙여주는 박준영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대박.”
“쟤들 사귀는 거지?”
“그런가?”
“야, 저게 사귀는 거지. 안 사귀는 거야?”
“그냥 모른 척하자. 뭔가 정해지면 선화가 말해주겠지.”
“아니, 저럴 거면 나도 박준영이 좋다고 말하고 그냥 당당하게 사귈 것이지. 뭘 모른다 그러고 빼고 그래? 박선화, 웃겨.”
“윤희야, 너 화난 거 아니지?”
“화? 화났나? 나 화났어?”
“어. 화나 보여. 왜그래. 요즘 종현 선배랑 잘 안돼?”
“종현 선배야 뭐 고3이니까. 이제 학생회도 안 나오고 그렇지.”
“하하. 바쁘긴 하겠네. 곧 수능이잖아. 입시가 코앞이고.”
“힝. 그러니까. 내년이면 선배는 대학 갈 건데, 가서 여자친구 만들면 어떡하지? 어? 나 어떡해, 한수현.”
차윤희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고, 수현이 가만히 윤희의 등을 몇 번 툭툭 두드려주었다.
몇 시간 후, 저녁 시간.
식사를 마치고 곧 있을 장기자랑 대회를 준비하느라 애들이 부산을 떨 무렵.
수현은 방에 올라가 잠시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들어볼까?”
수현은 아까 이희찬에게 받은 상자를 열어 테이프를 꺼냈다.
좋아하는 음악 테이프라더니 손수 녹음이라도 한 모양이었다.
테이프 앞뒷면에 어떤 노래가 들어있는지 알리는 리스트를 삐뚤빼뚤한 손글씨로 적어두었던 것.
‘하. 그래. 이 시절엔 이게 또 유행이었어. 카세트에 공테이프를 넣고, 라디오 음악이나 다른 테이프의 음악을 녹음해 나만의 테이프를 만들곤 했었지.’
수현이 싱긋 웃으며 테이프를 내려다보다가 가져온 워크맨에 넣고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치지직-.
이어폰을 꽂고 벽에 기대 눈을 감던 수현이,
“뭐야?”
번쩍 눈을 뜨곤 화들짝 놀라며 일어났다.
“이게 뭐야?”
수현이 황당한 얼굴로 워크맨을 내려다보았다.
“이거 노래방 테이프야?”
어쩐지 전주가 뭉개지고 살짝 싸구려 느낌이 난다 했는데, 첫 소절이 시작되자 분명해졌다.
이건 이희찬이 노래방에서 직접 부른 노래를 녹음한 테이프였다.
“와…….”
수현이 한쪽 이어폰을 빼고 어이없는 표정을 짓다가 푸핫 웃음을 터트렸다.
“와, 얘 진짜 웃기네. 이희찬. 엄청 웃겨.”
수현이 깔깔 웃었다.
어쩐지 사랑을 노래하는 애절한 발라드로만 구성돼 있더라니, 그건 그렇고 이 오글거리는 테이프는 그대로 주면서 편지를 뺀 걸 보면 편지의 내용은 얼마나 더 오글거리고 셌던 걸까, 짐작도 되지 않았다.
어쨌거나 모든 게 그저 웃기기만 했다.
“뭐, 감정이 과잉인 것만 빼면 노래도 잘하는 편이네. 비보잉 말고 가수 준비도 해보라고 해야겠다.”
수현이 싱긋 웃으며 조용히 정지 버튼을 눌렀다.
***
그날 저녁 반별 장기자랑은 성황리에 끝났다.
줄다리기 시합에 별일이 없던 덕에, 모기약 분사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고, 미술과 전원이 흥분하며 연영과 차례에 욕을 섞은 응원가를 부르는 일도 없었다.
당연히 패싸움도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여기저기서 기한을 장담할 수 없는 청춘 커플이 탄생하며 화제를 모았고, 거기엔 아무래도 박준영과 박선화가 끼어있는 듯했다.
수현은 미술과 외에도 연영과 애들과 친해지며 점점 인싸의 길에 들어섰다.
애들은 수현과 마주치면 반갑게 이름을 부르며 말을 걸어왔다. 가끔 이희찬과도 마주쳤는데, 오버하며 ‘헤이, 친구!’를 외치는 걸 보니 그 애 역시 두 마리의 흑염룡을 키우고 있는 게 분명했다.
모든 게 즐거웠고, 모든 게 충만했다. 모든 게 과거엔 없던 일이었다.
그러나 모든 게 달라진 건 아니었다. 과거와 똑같이 다가오는 일도 분명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