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n Academy Spearman RAW novel - Chapter (75)
글레시아랑 내가 뭘 한다고 정하고 만나는 건 아니었지만, 오늘은 유독 내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 수련장에도 가질 못했다.
약속 시간에도 늦었고, 해준 것도 없이 그저 같이 보낼 뿐인 시간. 그런데도 글레시아는 별 불만 없이 나와 있어 주었으니까.
또각. 또각.
걸음 소리마저 서서히 멀어져가던 차, 마음속에 남은 미련을 털어냈다.
‘다음에 더 잘해주자.’
이번 주에 하루 더 만나기로 했으니까. 그때 조금 더 잘해주면 될 것 같았다.
그러다, 돌연 글레시아가 몸을 돌렸다.
“한천성.”
거리가 떨어져 있음에도 선명히 들린 음성에 시선을 마주쳐가자, 글레시아는 갑자기 내게 손을 흔들었다.
“…”
그 모습에 순간 멍하니 눈을 깜박이던 저도 모르게 같이 손을 흔들었다.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며 손을 흔드는 시간은 정말 몇 초도 되지 않았다.
씨익.
그러다 글레시아가 미소 짓곤 다시 몸을 돌려 기숙사로 들어가는데. 손을 내리면서도 정신이 좀 멍했다.
글레시아가… 갑자기 좀 변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뭐가 달라졌느냐고 하면 설명하긴 힘들지만, 분명 무언가가 달라졌다.
나는 직감적으로 그렇게 느껴졌다.
“대체 계기가… 뭐지?”
오늘 나는 잘해주지도 못한 것 같은데. 글레시아가 갑자기 좋은 방향으로 변한 느낌을 주니까.
그러다 불쑥. 불과 2주 전이 떠올랐다.
아카데미 입학시험을 치렀던 그 날. 그때도 난 글레시아를 의식하긴 했지만, 그녀의 냉랭한 분위기에 차마 말조차 걸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글레시아가 불현듯 날 바라봤을 때.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었다.
시선을 피하기도 그렇고, 마주치기만 하는 것도 그래서 무심코 손을 흔든 거였지만, 그때 내게 보였던 글레시아의 반응만큼은 지금도 기억하고 있었다.
차갑게 내게서 시선을 돌렸던 그 모습을.
그리고 오늘.
완전히 서로의 관계가 바뀌어 글레시아가 이번엔 나를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다.
…그것도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걸 자각하자 순간 웃음이 새어 나왔다.
“정말 사람 일은 모른다더니.”
그녀와 친해지면 좋겠다고 막연히 생각했었는데. 아카데미 입학 후 어느새 나는 그녀와 자연스레 어울리고 있었다.
저벅.
기숙사로 돌아가기 위해 반대편으로 몸을 돌리면서도 새삼 신기했다.
“이젠 친구라고 할 수 있는 관계가 됐으니….”
서로를 바라보며 대화하고 이렇게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것에 거리낌이 없어졌다.
뭔가 일이 잘 풀리는 기분이었다. 창술 특성을 부여받은 첫날만 해도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싶었는데.
지금은 그때만큼 미래가 어둡지 않았다. 아니, 이 정도면 꽤 밝게 느껴질 정도로 환히 보였다.
저벅.
그렇게 걸어가면서도 불현듯 제 뺨에 손을 가져가게 됐다.
내 손이 아닌 다른 손이 닿았던 그 순간의 온기가… 아직 남아있는 것 같았다.
ㅡ그래. 지금도 널 이렇게 바라보고 있는데, 나는 조금도 널 이해하지 못하겠어.
내 뺨에 손을 가져다 댄 글레시아가 묘한 음성으로 말해왔던 그 순간을 떠올리다 그만 고개를 저었다.
“이제는 내가 널 이해하지 못하겠어.”
정말…그런 마음이었다.
그녀와 내 사이가 단순한 친구 사이로 남을 수 있을지, 아닐지조차….
이젠 그것조차 모르겠다.
***
쏴아아아ㅡ
쏟아지는 따스한 물줄기에 몸을 맡겨가던 글레시아는 서서히 그 입을 열었다.
“날 잊어버린 게… 아니었어.”
나와의 약속을 잊어버린 거라 생각했지만, 그건 지금 생각하면 그저 헛된 생각이었다.
한천성은 그럴 리 없는데, 그 남자는 그럴 사람이 아닌 걸 아는데.
나는 왜 그렇게 생각하고, 혼자서 실망했던 걸까.
내가 공원에서 조금 더 기다렸으면 한천성은 알아서 왔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바보같이 망설였던 게 지금 생각하면 너무 다행스레 여겨졌다.
한천성은 나와의 약속을 잊은 게 아니었다.
불현듯 그때 몸을 돌려 바라본 순간이 떠올랐다.
한껏 붉게 물든 얼굴, 가쁘게 숨을 내쉬면서도 거듭 말을 잇는 그 입술. 그러면서도 진정성 있게 상황을 설명했던 한천성의 모습…….
몇 시간이 지난 지금조차 그건 너무 선명히 떠올랐다.
그리고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마음에 가득찼던 설움은 쉽게 풀려 버렸다.
그 순간엔 날 보러 와줬다는 게 그저 고마웠다.
나와의 관계를 제대로 생각해주고 있다는 것 역시,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느껴져서. 나는 그냥 그를 받아들이게 됐다.
“역시, 친구…맞는 것 같아.”
이제는 정말 친구라고 생각하게 됐다.
나만 그 남자를 생각하는 게 아니고, 그도 날 제대로 생각했으니까.
그러니까. 우린 친구가 맞다고….
“…”
다시금 웃음이 새어 나왔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웃음이 자주 새어 나오는지 몰랐다. 그런데… 그냥 내 기분이 좋았다.
‘이래서 사람과 관계를 맺는 걸까.’
왜 다른 사람과 친해져야 하는지도 알 것 같았다.
혼자 있을 땐 느끼지 못한 기분이 느껴졌다. 이렇게 같이 있어야 비로소 느낄 수 있는 충족감 같은 묘한 감정이 있었다.
더불어 서로의 관계를 제대로 확인한다는 것도 내 생각보다… 기분 좋은 일이었다.
ㅡ나도… 너를 이해하지 못하겠어.
불쑥 내게 건넨 그의 멍한 말마저 떠올랐다.
나처럼 그도 나를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말한 순간. 이상하게 그 말이 너무 듣기 좋았다.
비단 나만이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게 아니었으니까, 그도 날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면…”
한천성도 앞으로 나와 같이 있으려고 할 테니까. 내가 그와 함게 있고 싶은 만큼 분명 그도 날 필요로 할 것이다.
스륵.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다음에 만날 날이 기대됐다.
“그래서 친구끼리는 보통… 뭘 하고 시간을 보내는 거지?”
불현듯 그런 생각에 미쳤다.
이제 나랑 한천성은 친구라고 할 수 있으니까.
다음에 만났을 땐 친구끼리 할 수 있는 걸 해도….
되는 게 아닌가 하고.
***
날이 지나 다음 날 오후.
나는 C1 강의실에 있지 않았다.
그랜드 로얄 아카데미의 강의란 평이한듯하면서, 생각보다 다채로운 부분이 있었다.
제국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명성 있는 교관과 강의 일정까지 모두 정밀하게 계획하에 이뤄진다.
생도들에게 인성, 도덕관, 윤리에 관해 철저하게 교육하지만, 그 이상으로 생도의 특성에 걸맞게 다른 강의를 들을 수도 있게 일정 조율이 가능했다.
그래서 담당 교관에 한해서만 강의를 듣는 게 아니라 클래스 내에 이렇게 이동 수업이 있었다. 수, 목요일에 한해 그런 강의가 이뤄지며 당장 이번 주부터 같은 동 클래스 내에서 다른 생도들과의 합동 강의를 받게 되는 거였다.
각자 특성에 맞게. 예로 원소 계열, 원거리 계열, 근거리 계열, 그 외 마도 계열에 드물게는 초현상 계열까지. 세부 분야로 나누면 정말 끝이 없었다.
나는 당연하게 근거리 계열 특성이었다.
스륵.
현재 C3 클래스 강의실에 자리하면서도 불현듯 다른 생도들에게 시선이 갔다.
당장 같은 근거리로 취급받는 다비드 역시, 나와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다만 그 외에는 나와는 생면부지 또는 말을 나눠보지 않은 생도들로 강의실이 가득했다.
저벅.
조금은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강의실에 들어선 남성 교관에게 시선이 갔다.
다부진 육체, 짧은 금발 아래 강인한 인상이 눈에 띄었다.
착!
교단에 선 교관은 단숨에 교재를 내려놓았다.
“먼저 이렇게 만나서 반갑구나, 강의실 내엔 나를 아는 생도도 있고, 처음 보는 생도도 있을 것이다. 가볍게 소개하도록 하지, 근거리 계열 강의를 담당하게 된 교관 버몬트라고 한다.”
남성 교관이 씨익 미소 지으며 둘러보자, 대다수 생도가 긴장했다.
하지만 칼리의 시선을 견딘 나로선 꽤 견딜 만했다. 이내 버몬트는 이내 작게 헛기침하곤 말을 이었다.
“이번 주 강의까진 이론에 대해 철저하게 교육한 후, 다음부턴 모두 실전 강의로 대체될 것이다. 오늘은 조금 지루할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모두 귀 기울여 강의를 듣도록.”
“예. 알겠습니다.”
강인한 어조로 말을 잇자, 다른 생도와 함께 답하면서도 이어진 강의에 집중했다.
솔직히 나는 이 세상에서 강의를 들으며 지루하게 느껴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신기하다고 할까. 내가 직접 힘으로 사용할 수 있는 지식이라서 강의를 들으면서 재밌기까지 했다.
“먼저 근거리 계열로 이곳에 있다는 건 가장 먼저 위험이 크지. 너희들이 얼마나 좋은 특성을 가졌든 간에 첫 번째로 인지해야 할 것은 위험성이다. 왜 이것을 먼저 말하느냐. 너희들이 전장에 서게 되든, 서지 않든, 살아가면서 몬스터를 단 한 번도 마주치지 않는 건 불가능할…….”
…
버몬트 교관의 강의는 대략 3시간에 걸쳐 이어졌다.
이론적이며 주의사항 혹은 마음가짐에 관한 것이었는데. 나는 그 말 하나하나를 모두 집중해서 들었다.
‘교관’이란 위치 하나만으로 내가 우러러볼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이 세상에서 교관으로 저 교단에 서기까지 얼마만한 위험을 감수하며, 전장에서 큰 활약을 세워야 하는지 나는 아니까.
그로아 소설을 완독한 나로선 그들을 가볍게 볼 수가 없었다.
전장에 서보지 않은 사람 중 내가 그들의 헌신을 가장 잘 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나는 교관의 입에서 나온 작은 말조차 허투루 듣지 않았다.
“…”
그런 내 태도가 마음에 든 건지 교관도 내게 시선을 주며 고개를 끄덕이는 빈도가 꽤 있었다.
“생각보다 다들 강의 태도가 꽤 좋구나. 충분히 만족스러워. 그럼 오늘 강의는 여기서 마치도록 하지. 대신 다음 주 강의는 바로 아카데미를 나가게 될 것이니. 다들 만반의 준비를 하고 오도록.”
그리 말한 버몬트 교관이 그대로 자리를 떠나자, 생도들도 하나둘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한천성.”
“어?”
“나. 앞으로 네 옆자리엔 못 앉겠다.”
그러다 다비드가 고개를 묘한 말을 하는데, 왜 그러나 싶었다.
“갑자기 무슨 말이야?”
“아니, 대체 어떻게 너는 어딜 가든 교관의 주목을 받는 거냐? 네 옆에 있던 나까지 괜히 긴장하게 되잖아.”
다비드가 픽 웃으며 말하자, 나도 덩달아 웃음이 나왔다.
“같이 집중하면 좋은 거잖아.”
“…됐다. 내가 우등생의 마인드를 어떻게 이해하겠어.”
“우등생은 무슨.”
실없는 소리에 서서히 자리에서 일으키던 차.
무심코 앞 좌석 한편으로 시선이 갔다.
강의에 집중하느라 의식하지 않았지만, 뒤늦게 한 여성이 눈에 띄었다.
연하늘빛 머리칼 아래, 침울한 안색. 근심 걱정이 너무나 가득한 기색인데. 그게 너무 이질적이었다.
‘대체 왜 저런 표정을 짓고 있지?’
강의가 어렵지 않았고, 이제 아카데미 초반일 뿐인데 마치 세상이 망한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다비드.”
“어?”
“그럼 오늘 수련이나 하자.”
“바로 수련장으로 가자고?”
“그전에 카페 들렀다 가도 되고, 나야 상관없어.”
대수롭지 않게 여생도에게서 시선을 떼어가며, 오늘은 다비드 수련이나 좀 도와줄 생각이었다.
지난날 제라드에게 얻어터지는 걸 보니까, 친구가 얻어맞는 건 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럼 카페 들렀다 가자.”
“그래.”
그렇게 다비드와 걸음을 옮겨가면서도….
무심코 다시금 시선이 갔다.
160은 될까 싶은 작은 체구로 걸음을 옮기는 여생도에게.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뭐, 내가 딱히 신경 쓸 생도는 아니겠….’
그러다 보인 여생도의 명찰에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춰 세웠다.
툭.
“응? 한천성. 왜 그래?”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다비드의 말에 어색하게 답하면서 순간 시선이 흔들렸다.
ㅡ카리테 에실데른.
그 이름은 분명 내 기억에 있었다.
머지 않아 터질 첫번 째 사고. 바로 그 희생양이 될 생도의 이름이었으니까.
저벅.
다비드를 따라 걸음을 옮겨가면서도 기분이 이상했다.
이미 뒤틀려 버린 그로아의 미래. 여기서 더 이 세상의 미래가 뒤틀리지 않게 하려면 나는 최대한 순응해야 했다.
‘하지만…….’
바로 눈앞에서 죽음을 앞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걸 방관해야 하는 게 옳은 걸까. 이 세상의 미래가 더 바뀌지 않았으면 한다고, 내가 정말… 그래도 되는 걸까.
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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