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Hitler RAW novel - Chapter (364)
364
아돌프 히틀러
Adolf Hitler
1889 – 1972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태생의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 제22대 총리이자 제3제국의 초대 총통.
***
생애
아돌프 히틀러는 1889년 4월 20일, 독일 국경과 인접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브라우나우암인에서 아버지 알로이스 히틀러와 어머니 클라라 히틀러의 넷째로 태어났다. 히틀러에겐 이복형을 비롯해 여러 형제가 있었는데, 그가 태어나기 무렵 친형들은 모두 사망한 상태였다. 아돌프가 태어난 직후 히틀러 가는 브라우나우암인을 떠나 린츠로 이주했다.
아돌프 히틀러의 아버지 알로이스 히틀러는 지방 세무서장으로 자수성가한 모범적인 공무원으로 인정받았지만, 정작 가정에서는 걸핏하면 술에 취해 폭력을 행사하는 폭력가장이었다. 알코올중독자에 폭력가장이기까지 했던 아버지 알로이스 때문에 어린 시절 아돌프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여기에 화가가 되기를 희망한 아돌프와 다르게 알로이스는 아돌프가 공무원이 될 것을 강요했고, 둘은 자주 마찰을 빚었다. 말이 마찰이지 일방적으로 알로이스가 아돌프에게 폭력을 휘둘렀고 아돌프는 얻어맞기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로이스는 아돌프의 화가를 향한 열정을 꺾지 못했다.
다만, 알로이스가 아버지에게 남긴 여러 영향 중에는 긍정적인 것도 있었다. 다민족 국가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관료였던 알로이스는 자식들에게 자주 제국이 표방하는 다민족, 다문화적 가치를 주입했고, 그들이 사는 곳 린츠 또한 오스트리아인과 체코인을 비롯한 여러 민족이 사는 도시였다. 그렇기에 훗날 히틀러가 독일의 총통이 된 이후로 독일에 만연하던 인종차별의 철폐에 심혈을 기울인 것에는 어린 시절에 배운 인종 간의 화합이 상당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1905년, 16살의 히틀러는 빈으로 상경해 국립미술학교에 지원했지만 낙방했다. 이듬해 그는 재수까지 했지만, 이번에도 실패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당시 학교 교장에게 찾아가 이에 대해 항의했지만, 교장은 “자네의 그림은 예술보다 건축에 가까우니 건축 학교로 가는 게 어떤가?”라며 건축을 권유했다.
공교롭게도 교장은 유대인이었다. 훗날 히틀러가 독일에 만연한 반유대주의 척결에 앞장섰다는 것을 생각하면 참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한편으로는 ‘만약 이때 히틀러가 시험에서 통과해 미술학교에 진학하는 데 성공했다면?’이라는 가정은 오늘날까지 역사가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쉽게 회자되는 이야깃거리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독일인들 사이에선, 그 교장이 독일을 구했다는 농담 아닌 농담이 돌고 있다.
.
.
.
국립미술학교 진학에 실패한 후 거리의 화가로 살아가며 방황하던 히틀러는 1913년 무슨 이유에서인지 독일 뮌헨으로 건너갔다. 이를 두고 현재까지도 학자들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한데,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징집을 피하고자 독일로 간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 제기된 적 있었다. 실제로 히틀러는 뮌헨으로 이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군의 징집을 피해 도망갔다는 혐의로 오스트리아 수사관들의 심문을 받았다. 이때 히틀러는 심신미약으로 복무 부적합 판정을 받았다.
그러나 막상 1년 뒤 1차대전이 발발하자 히틀러는 독일군에 자진 입대했다. 또한, 훗날 그가 거둔 전공을 감안한다면 군대에 가기 싫어 도피한 것이라기보다는 정말로 한때의 방황으로 입대를 하지 않은 것이라는 설에 무게가 실린다.
히틀러와 함께 복무한 히틀러의 전우들이 전후 증언하길 히틀러는 다른 보통의 병사들과 다른 면모가 있었다고 한다. 술, 담배를 하지 않는 것은 기본이고 창녀촌에 가는 것에도 관심이 없었으며 남는 시간에 가끔 그림을 그리거나 독일의 운명과 미래에 관해 토론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히틀러를 두고 그의 전우들과 상관들은 히틀러를 몽상가 기질이 있는 괴짜 정도로 여겼었다. 하지만 훗날 히틀러의 업적을 본 이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말했다.
“영웅은 뿌리부터 다른 모양이다. 허나 우리 같은 일반인들은 그 사실을 몰랐다.”
1918년, 평소처럼 전령 임무를 수행하던 히틀러는 영국군과의 전투에서 홀로 2대의 전차를 격파하고 60여 명의 적군을 사살해 영국군의 격퇴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러한 영화 같은 활약 덕에 히틀러는 1급 철십자훈장 수훈 추천자로 선정되었으며 상병에서 하사로 특진했다. 만약 히틀러가 장교였다면, 그는 마땅히 푸르 르 메리트 훈장을 수여받았을 것이다.
이때 히틀러는 후방의 야전병원에서 의 작가 에리히 파울 레마르크와 만났으며 훈장 수여식에서 파울 폰 힌덴부르크 원수와 처음으로 만나게 되었다. 훗날 힌덴부르크는 이날 만났던 ‘용감한 병사’를 다시 만나게 되자 매우 놀라워했다고 전해진다.
.
.
.
안톤 드렉슬러가 세운 독일 노동자당에 입당한 히틀러는 당명을 국가사회주의노동자당-줄여서 나치당-으로 바꾼 뒤,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탁월한 연설 능력 덕에 순식간에 많은 지지자가 모였다. 어느 정도 세력을 확장했다고 판단한 히틀러는 1923년 11월 뮌헨 맥주홀 봉기를 일으켰다. 허나 봉기는 대단히 미흡하여 실패로 끝났고 히틀러는 체포되어 란츠베르크 감옥에 수감되고 말았지만, 재판에서의 활약상으로 일약 유명인사로 떠올랐다.
감옥에서 자서전 나의 투쟁을 저술한 히틀러는 석방된 이후 다시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나의 투쟁은 처음에는 사람들의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그가 책에서 예언한 세계 대공황과 일본의 만주 침략이 현실에서 일어나자 책은 일약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특히, 전 세계적으로 덩치만 큰 호구로 인식되던 중국의 비상을 예측하여 중국과 아시아인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히틀러의 예언대로 중국은 일본에서 승전하였고 이후로도 성장을 거듭해 현재는 세계 경제 3위, 군사력 3위의 초강대국으로 부상했다.
독일을 넘어 전세계적으로 유명해진 히틀러는 힌덴부르크의 천거를 받아 1932년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22대 총리로 취임했다. 1933년에는 수권법을 통과시켜 독재 체제를 구축하였으며 1934년 힌덴부르크의 사망 이후 스스로 총통의 자리에 올라 본격적으로 독일을 개혁해나가기 시작했다.
.
.
.
1938년 오스트리아와의 통일과 영독 정상회담을 통해 주데텐란트 할양을 끌어낸 히틀러는 1939년 3월 체코를 전격 합병하였고 같은 해 9월 1일, 폴란드를 침공하여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8월 31일에 폴란드군 일부가 폴란드 국경에 자리한 독일 도시 글라이비츠의 방송국을 습격한 글라이비츠 방송국 습격 사건이 2차 세계대전의 진정한 시작이라고 보는 학자들도 상당하며, 이러한 이유로 9월 1일이 아닌 8월 31일이 2차대전 발발일로 간주해야 한다는 주장도 크다).
폴란드의 안전을 보장한 영국과 프랑스는 이틀 뒤 독일에 선전포고했다. 영국과 프랑스의 선전포고 소식이 전해지자, 독일 상층부는 일동 패닉에 빠졌다. 폴란드 침공 건으로 영프가 선전포고하리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직 히틀러만이 모두가 패닉에 빠진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했다. 그는 영프군이 결코 독일을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 주장했고 설렁 그러더라도 아주 소규모 공격에 그칠 것이라 확신했다.
히틀러의 예언은 적중했고 폴란드가 무너진 이후에도 영국과 프랑스는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프랑스군 일부가 국경을 넘어 자르로 진군했지만, 독일군의 저항에 부딪히자 곧바로 철수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5월 10일, 독일은 낫질 작전을 개시하여 베네룩스와 프랑스를 정복하고 이탈리아까지 굴복시켰다.
.
.
.
2차대전 종전 이후 유럽은 완전히 독일의 통치하에 놓였다. 유럽을 정복한 히틀러는 유럽연합을 창설해 유럽의 통합을 추진하는 한편 대(對)아시아 외교를 통해 중동, 인도, 중앙아시아 등 여러 아시아 국가를 친독 내지 우호적인 중립국으로 만드는 성과를 보였다.
또한, 오늘날 맥도날드와 더불어 세계적인 패스트푸드 프랜차이즈가 된 라이히스부르거를 창설하였으며 여러 과학 분야에도 지속적인 관심을 보여 이에 대한 투자를 이끌어냈다. 그 결과 독일은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과 달, 화성 유인 착륙선을 쏘아 올리는 데 성공하였다.
달 착륙 이후 총통직에서 사임한 히틀러는 베를린 외곽에 마련한 저택에서 기거하며 조용한 여생을 보내다 1972년 4월 30일에 숨을 거두었다. 향년 83세의 나이였다.
히틀러가 사망하자 2대 총통 헤르만 괴링은 3주간의 국가 애도 기간을 선포하였다. 덴마크, 노르웨이, 크로아티아,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우크라이나에서도 2주간의 애도 기간을 선포했다. 알바니아와 에티오피아는 독일처럼 3주간의 애도 기간이 선포되었다.
“삶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천재와 같은 시간대의 세상에 사는 것에 익숙해져 있습니다마는 이제 다시 평범한 세상에서 사는 것에 적응해야 합니다.” – 헤르만 괴링
“지난 40년간 독일이었던 분이 하늘의 부름을 받으셨다.” – 푈키셔 베오바흐터
“전설이 영원한 역사가 되었다.” – 뉴욕 타임스
히틀러는 이미 1966년에 은퇴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부고 소식이 전해지자, 독일은 충격에 휩싸였다. 전국 곳곳에서 이날 독일 전역에서만 4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소식을 듣고 졸도한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이것이 오보인지를 묻는 문의 전화가 방송사와 신문사로 폭주하여 업무가 마비될 정도였다. 독일의 모든 방송사는 정규방송을 모두 중단하고 ‘신들의 황혼’과 ‘내겐 한 명의 전우가 있었다’ 그리고 히틀러가 생전에 좋아했던 노래인 ‘릴리 마를렌’을 내보냈다.
장례 기간 내 베를린은 문자 그대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베를린의 거리란 거리는 독일 전역에서 몰려든 추모객들과 히틀러의 장례식을 중계하러 온 기자들로 가득했다. 사람이 너무 많이 몰린 나머지 심각한 교통체증이 발생했으며 베를린의 대중교통은 거의 마비되어 택시를 타고 가는 것보다 걸어서 목적지까지 가는 것이 더 빠를 지경이었다.
장례 기간 내 대략 3천만 명의 조문객이 베를린을 다녀간 것으로 파악되며 이 기록은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다.
총 150개 국가에서 조문 사절을 파견했으며, 독일에 주재 중이던 세계 각국의 영사 및 대사 역시 국장에 참여했다. 캐나다 정부와 영국, 프랑스, 베네룩스 망명정부 및 소련, 몽골, 베트남 정부는 조문하지 않았지만, 미국 대통령 로버트 A. 태프트는 베를린으로 날아가 장례식에 참석했다.
많은 나라에서 히틀러의 장례식을 생중계하여 8억 명 이상이 장례식을 시청한 것으로 추정한다. 특히 유럽에서는 모든 나라가 장례식을 생중계했다.
히틀러는 유언장을 통해 자신이 죽으면 유해를 베를린 전사자 묘지에 매장해달라고 했지만, 그의 직위와 그가 세운 업적을 고려하여 특별 기념관을 설립하기로 결정되었다. 공식적으론 그를 베를린 전사자 묘지에 매장할 경우 다른 추모객들이 추모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는 이유였다.
또한, 히틀러가 말년을 보냈던 집과 그가 태어난 생가는 기념관으로 지정되었다. 현재 히틀러가 태어난 생가와 그가 살았던 집, 그리고 그의 묘비에는 그가 평소에 남긴 말에 따라 간결한 글귀만 적혀 있다.
“아돌프 히틀러, 1889-1972”
***
평가
“독일 민족의 메시아” – 파울 요제프 괴벨스
“신이 독일을 구원하기 위해 보낸 사람” – 헤르만 괴링
“전무후무한 시대의 거인” – 루돌프 헤스
“기적의 또 다른 이름” – 에르빈 롬멜
“진정한 철인이자 모든 희망의 상징” – 쿠르트 발트하임
“20세기가 낳은 위대한 지도자이자 독일 민족의 영웅” – 요아힘 페스트
“20세기를 격변시킨 가장 위대한 운동가이자 독재자” – 이언 커쇼
20세기를 독일의 시대로 만든 주역이자 영웅, 독재자로 정의할 수 있다.
그가 이룩한 업적은 칭기즈칸에 비견되는 것으로 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누구도 해내지 못한 유럽 통일을 실현한 점에서 이미 비교 불가라는 평가를 받는다.
히틀러에게 붙은 별명만 하더라도 대독일의 아버지, 독일의 구원자, 제2의 비스마르크, 프리드리히 대왕의 후예, 칭기즈칸의 환생, 유럽의 정복자, 살아있는 기적, 세기의 예언가, 철인(哲人), 위버멘쉬, 초월자, 유럽연합의 창시자, 위대한 독재자 등 여러 개가 있다. 그만큼 히틀러가 이룬 업적이 전무후무하다는 것과 더불어 그가 독일인들에게 어떤 존경을 받는지 보여주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
.
.
히틀러는 정치적 능력도 상당했지만, 군사적으로도 상당한 식견이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가 전쟁을 우려해 움직이지 않으리라 확신하고 라인란트 재점령을 진행시켰으며 폴란드 침공에서도 영프의 선전포고로 독일 수뇌부 모두가 패닉에 빠졌을 때 홀로 평정심을 유지했다. 또한, 1차대전 슐리펜 계획의 복제판이라 할 수 있는 황색 작전을 거부하고 만슈타인이 세운 낫질 작전을 채택해 프랑스를 4주 만에 굴복시켰다.
낫질 작전을 수립한 이는 만슈타인이지만 그가 세운 작전이 너무나 무모하고 불가능하다고 육군 상층부에서 평가절하되던 것을 무시하고 이를 실행에 옮긴 것은 오직 히틀러의 공이다. 히틀러의 이러한 결정으로 4년간 서부전선에서 질질 끌다가 결국 패전한 1차대전과는 달리 2차대전에서는 불과 4주 만에 서부전선을 마무리 짓는 엄청난 성과를 거두었다. 만약 히틀러가 낫질 작전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지금쯤 우리가 아는 히틀러는 제2의 빌헬름 2세 정도로나 기억되고 있을 것이다.
히틀러는 무기에도 관심이 상당히 많았다. 단순히 관심이 많은 수준을 넘어 본인이 직접 무기의 효율성에 관해 연구하고 이런저런 조언을 남기거나 개발 방향성을 잡기도 했다. 그 결과 독일은 고성능의 무기를 대량으로 생산하여 전쟁 기간 내내 연합군을 압도할 수 있었다.
이외에도 소련의 강추위에 대해 지속적으로 강조하며 전방의 병력에 동계장비 보급을 신경 썼다는 것, 조금 신기한 장난감 정도로 치부되던 로켓 분야가 가진 잠재성을 눈여겨보고 베르너 폰 브라운과 발터 도른베르거의 로켓 연구진에게 막대한 투자를 한 것 역시 히틀러의 식견이 상당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
.
.
이렇듯 히틀러는 어느 누구도 감히 따라 할 엄두조차 내지 못한 업적을 세웠다. 허나 빛이 있으면 어둠도 있는 법. 그는 수권법을 제정해 독일 국민의 권리를 제약했고 강력한 독재 체제를 만들어 전례 없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히틀러가 만든 독재 체제는 독일에 깊게 뿌리를 내려 독일을 철저한 전체주의 사회로 만들었다. 5대 총통 쿠르트 발트하임의 부분적 개혁 이후에도 독일이 이전의 정치 체제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감안하면 히틀러가 독일 사회에 드리운 그림자는 세계정세가 급변하지 않는 한 영원히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그는 자신에 반대하는 정적들을 무자비하게 숙청, 처형하였다. 히틀러 치하에서 몇 명의 정치적 반대파들이 희생되었는지 독일 정부가 공개하지 않아 자세한 수치를 알 수는 없지만 대략 4만 명가량이 처형된 것으로 추정된다. 직접적인 처형 외에도 형벌부대와 같은 간접적인 방법으로 죽음을 맞이한 정치적 반대파들까지 합하면 그 수는 15만 명에서 최대 20만 명에 이를 것으로 학자들은 추산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론 그는 자신에 반대하는 이들 중에서 자신과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이들을 보호하기도 했었다. 레마르크가 그 대표적인 예로 그는 두 차례에 걸쳐 히틀러와 나치당에 대해 비판적인 언사를 하여 게슈타포에 체포되었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히틀러의 도움으로 풀려났다.
히틀러가 자신의 집무실 탁자 밑 서랍에 레마르크가 시민들에게 뿌린 반히틀러 전단지를 보관하고 있었던 것과 그가 평소에 레마르크가 쓴 서부전선 이상없다는 자주 읽었다는 증언으로 미루어볼 때 히틀러는 이 ‘철없는 옛 전우’에게 친밀한 감정이 있었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레마르크는 미국으로 건너간 이후에도 반나치 활동을 계속하였고 독일에서 그의 존재는 철저한 매국노이자 패배주의자로 낙인찍혔다. 괴링은 레마르크의 저작들을 금서로 지정하였으며 훗날 발트하임에 의해 이 조치는 해제되었지만, 여전히 레마르크의 저작들은 독일인들에게 금기시되고 있다.
히틀러가 사망하고 3년 뒤 레마르크는 자신의 생일날에 사망했다.
히틀러는 여러 가지 의미로 역사상 가장 전무후무한 사람이었다. 그는 1차대전 패배에 젖어있는 독일을 수렁에서 끄집어내 단 5년 만에 가난한 패전국에서 전쟁할 수 있는 강대국으로 탈바꿈시켰으며 나폴레옹도 해내지 못한 유럽 통일을 이루어냈다. 그가 제창한 국가사회주의, 일명 히틀러주의는 수많은 국가와 그 구성원들의 삶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동시에 그는 독일의 민주주의에 회복이 불가능한 치명상을 입혔다. 그는 자신의 반대파와 정적들을 무자비하고 잔인하게 탄압했으며 살인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소련 강제수용소 문을 열어 수백만 명을 풀어주었고 이탈리아의 통치에 고통받는 알바니아와 에티오피아를 해방시켰으며 레마르크의 《서부전선 이상없다》를 금지해야 한다는 측근들의 건의를 물리쳤다. 그는 핵무기를 개발하고 냉전의 첫 문을 열었지만, 미국과의 화해와 공존의 시대를 열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잔인하고 독선적이었으며 무자비했지만, 너그러웠고 대중적이었으며 용서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 이언 커쇼
독재 체제를 구축했지만, 민주주의 체제와 타협했고, 독일 우선주의를 외치면서 인종주의를 혐오했고, 전쟁광인 동시에 평화주의자였고, 무자비한 독재자인 동시에 모든 이들의 우상이었다. – 로버트 서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