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Hitler RAW novel - Chapter (365)
365
-삐삐삐삐…….
오늘도 어김없이 핸드폰 알람음이 울렸다.
직장인들이라면 다 공감할 거다. 기상 시간을 알리는 핸드폰 알람음이 얼마나 X같은지를.
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왜냐고?
오늘은 그토록 고대하던 독일 여행일이거든.
아돌프 히틀러로서 눈을 감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우리 집에 있었다.
마침내, 마침내 돌아온 것이다!
아직도 그때 느꼈던 전율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운전면허시험에서 최종합격했을 때, 그리고 군대에서 제대했을 때 느꼈던 감정과 비교 불가능한, 최고로 짜릿한 기분이었다.
동시에 나는 내가 눈을 뜬 이 세상이 내가 알던 세상이 맞는지부터 확인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바로 핸드폰을 들어 인터넷에 접속했다.
내가 눈을 뜬 이곳은 내가 알던 본래 역사의 세상이 아닌, 내가 히틀러가 되어 역사를 바꾼 세상이었다.
나 자신도 많이 변했다. 히틀러가 되기 이전의 나는 흔하디흔한 평범한 방구석 백수 1에 불과했지만, 이 세상에서의 나는 직장인이었다. 그것도 제법 번듯한 직장에 다니는 직장인.
부모님 눈에 나는 여전히 그다지 믿음직스럽지 못한 아들내미에 불과했지만.
밖으로 나왔을 때 보이는 풍경은 내가 기억하는 빙의 전 우리 동네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생전 처음 보는 건물들이 들어서 있거나 원래 알던 길이 없어지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역시 동래구는 동래구인 것인가.
하지만 대한민국 전체는 달랐다.
일단, 분단과 6.25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기에 북한이라는 존재 자체가 없었고 우리나라도 징병제 국가가 아닌 모병제 국가였다.
그런데 이 세계에서의 나는 원래 세계에서처럼 군필자였다. 대학등록금 마련 및 취직 혜택을 위해 단기사병으로 2년간 복무한 군필자.
참고로 지금의 대한민국 국군은 육해공군을 다 합쳐 12만 명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요즘 군에 입대하려는 사람들이 없어 정부가 골머리를 썩이는 중이라고 한다.
내가 알던 원래 한국도 저출산 때문에 군대가 난리였는데 여기서도 상황이 비슷한 게 아이러니했다.
그래도 숫자 부족하다고 암 환자나 장애인을 입대시키는 일은 없단다. 공익제도랑 예비군 제도도 없는 모양이고.
그거 하나는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서울 역시 내가 아는 모습과 크게 달랐다.
김구에 이어 3대 대통령이 된 이범석의 영향으로 서울을 재개발할 때 베를린을 많이 참고했다는데, 말이 서울이자 베를린 축소 버전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사방에 즐비한 브루탈리즘 양식의 건물들 사이에 홀로 있는 숭례문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묘해졌다.
국회의사당도 내가 아는 모습이 아닌 독일 제국의사당과 유사한 모습으로 지어졌고.
의외로 원래 역사에서는 문민정부 때 철거된 조선총독부 청사도 남아있었다.
단, 위치는 옮겨진 채로. 여기서도 총독부 청사를 철거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지만, 역사의 교훈을 후세에 전해야 한다는 이유로 보존이 결정되어 위치만 이전한 채 역사박물관으로써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조선총독부 청사가 철거된 관계로 책과 인터넷에서 사진으로만 본 게 전부였기에 직접 눈으로 보고픈 마음이 들어 주말에 시간을 내서 서울로 올라간 적이 있다.
“오옹. 이렇게 생겼구나…….”
총독부 청사 내부에는 당시 조선총독부 청사를 유리 한 장, 타일 한 조각까지 완벽하게 옮겨서 만든 것이라는 설명문이 붙어 있었다. 청사 내부는 의외로 한산해서 구경에 어려움이 없었다.
구경을 마치고 청사를 나온 김에 서울 구경에 나섰다. 미국 대사관은 원래 위치에 그대로 있었지만, 독일 대사관은 미 대사관에 준할 정도로 무척 크고 견고했다.
국기도 기억 속의 흑적금 삼색기가 아닌 하켄크로이츠기라서 감회가 새로웠다. 중국 대사관에 걸린 국기 역시 오성홍기 따위가 아닌 청천백일만지홍기였다.
참고로 소련 대사관도 존재는 하는데 워낙 구석진 곳에 자리한 데다 크기도 무척 작아서 엄청 초라해 보였다.
서울 구경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후 다시 이 세계에서 내가 죽은 뒤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궁금한 게 한둘이 아니어서 말이지. 알아야 할 것들도 많았고.
우리나라, 대한민국은 여기서도 세계 GDP 13위의 잘사는 선진국이었다.
국제사회에서의 위상도 분단과 전쟁이 없었고 주변국들의 사정도 크게 변한 덕에 조오금 더 커졌다. 역사를 바꾼 보람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재밌는 건 일본이었는데, 세계 GDP 4위의 경제강국이었던 현실과 비교하면 초라한 성적이지만, 그래도 GDP 15위라는 상당히 준수한 축에 속했다.
6.25 전쟁이 없었기에 경제발전도 역사보다 훨씬 뒤로 미뤄지긴 했어도 이만큼이나 올라온 것을 보면 역시 난 놈은 난 놈이긴 하다.
6.25 전쟁도 없고 냉전도 아시아가 아닌 대서양을 중심으로 벌어졌기에 일본에는 현재 자위대가 없고 경찰과 해상보안청만 존재하며 연합군이 상시 주둔 중이다.
맥아더가 아주 철저하게 일본인들을 교육한 덕에 역사 관련 문제로 타국과 마찰을 빚는 일도 없고.
중국 역시 공산당이 아닌 국민당의 중화민국인 덕에 주변국들과 관계가 원만하다.
국경 문제로 자주 충돌 중인 소련, 몽골, 베트남을 제외하면. 그래도 동북공정이니 뭐니로 툭하면 시비를 걸어대는 일도 없고 내정간섭도 일절 없다(어디까지나 우리나라 한정으로).
국군과 국민혁명군이 미군과 합동으로 군사훈련까지 하는 세상이니 말 다 했지.
수도는 여전히 난징이고, 베이징을 베이핑이라 부르는 것 역시 그대로였다. 천안문에는 지금도 장제스의 초상화가 대문짝만하게 걸려 있다.
여기서도 위구르인들이 분리독립을 시도 중이고 국민당 정부는 이에 반대하는 입장이지만, 그래도 현실에서처럼 강제수용소를 굴리거나 그러지는 않고 대화를 하려고 노력하는 중이라곤 한다.
***
내가 아는 역사에서 베를린 템펠호프 공항은 여러 현실적인 문제로 2008년에 문을 닫고 시리아 난민수용소로 변했지만 여기서는 수년에 걸친 재개장을 거쳐 지금도 멀쩡히 제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다.
다만 이름 자체는 바뀌었다. 베를린 템펠호프 공항에서 아돌프 히틀러 국제공항으로. 이름을 바꾼 이는 괴링. 내가 죽은 해에 바로 개명했단다. 나는 딱히 이런 걸 하라고 시킨 적이 없는데. 하여간 그놈의 과잉 충성은 알아줘야 해.
여담으로 뮌헨 국제공항은 헤르만 괴링 국제공항으로 불리고 있다.
현실 세계에서는 소음, 배기가스, 비싼 유지 보수 비용 같은 현실적인 한계로 사장된 초음속 여객기가 이 세계에서는 초음속 여객기가 여전히 잘만 사용되고 있었다.
여기서도 초음속 여객기가 퇴역할뻔했지만, 관련 기술에 투자를 아끼지 않은 덕에 현재까지도 널리 쓰일 수 있었다고 인터넷에서 읽었다. 난 평범한 여객기를 타고 왔지만, 기회가 되면 한 번 타봐야지.
공항에 내리자, 세계 각국 언어로 쓰인 환영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맨 위는 당연히 독일어였고 그다음이 영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중국어, 아랍어 순으로 쭉 이어졌다.
“한국어도 있네?”
표지판에는 한국어도 있었다. 의외로 키릴 문자도 있었고. 아무래도 우크라이나와 자유 러시아에서 온 방문객들을 고려한 것이겠지?
소련인 방문객들을 위해 만들었을 리는 없을 테니 말이다. 그렇다고 독일을 찾는 소련인 방문객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독일을 여행하면서 또 하나 놀랐던 것은 한식당이 생각 이상으로 무척 많다는 것이다.
히틀러, 그러니까 내가 과거에 한식을 즐겨 먹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독일인들 사이에서 한식 열풍이 불었던 게 그 이유였다.
그 여파가 지금까지 이어진 것이고.
원래 나는 해외여행 가서도 한식만 고집하는 사람들을 좀처럼 이해하지 못하는 편이었지만 솔직히 호기심을 이기기 어려웠기에 가장 먼저 눈에 띈 한식당에 들어가 봤다.
요리사와 종업원들은 당연히 독일인이었고, 손님들도 대부분 백인이었다. 흑인이나 히스패닉 몇 명이 보였지만 식당에서 동양인은 나밖에 없었기에 솔직히 조금 당황스러웠다.
아무튼, 안내를 받아 자리에 앉았더니 종업원이 메뉴판을 가져다줬다. 불고기, 양념갈비, 두부김치, 김치 그라탕 등등. 외국인 입맛에 맞을만한 것들은 다 있었다.
맛도 나쁘지 않았고. 가격이 조금 불친절했지만, 그래도 한 번 정도는 먹어볼 만하다고 생각한다.
식사를 마치고 다시 길을 걸었다. 내가 총통으로 재임하던 중에 지어진 브루탈리즘 건물들과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무덤을 연상케 하는 하켄크로이츠와 국가수리 기념탑들 사이로 유리창으로 이루어진 현대적인 건물들을 보고 있자니 이 베를린이라는 도시 전체가 거대한 예술품처럼 느껴졌다.
거리를 걷는 사람들도 무척 다양했다.
나처럼 배낭과 메고 카메라를 목에 건 관광객들부터 오늘도 일상을 영위하는 직장인들과 주부들, 히틀러 유겐트 제복을 입고 아이스크림을 먹는 소년들, 삼삼오오 모여 재잘거리며 지나가는 BDM 단원들.
자판기 옆 벤치에는 SS 중위 한 명이 한 손엔 코카콜라를 들고 스마트폰을 열중해서 보고 있었다.
이것이 오늘날 독일의 모습이었다.
세계 각국에서 온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자유롭게 거리를 노닐며 일상을 영위하는 모습이.
실제 히틀러가 꿈꾼 베를린의 이상적인 모습과는 많이 거리가 먼 모습이겠지만. 내 알 바인가. 꼬우면 전쟁 이겼어야지. 아니, 내가 전쟁에서 이기게 해줬으니, 나한테 고마워해야지.
오늘날의 독일, 그러니까 제3제국은 세계 GDP 2위, 세계 군사력 1위의, 미국과 더불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초강대국으로 군림하고 있다.
우리 집으로 돌아왔을 때 든 생각 중 하나가 ‘독일이 어떻게 변했을까’였는데, 내가 없는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져서 독일이 소련과 비슷한 꼴이 나거나 그러지는 않을까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내가 우려한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내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도 내 후임자들은 내가 이뤄낸 독일을 열심히 경영하고 잘 가꾸어나갔다.
그 유명한 브란덴부르크 문을 지나 계속 걷자, 독일 전쟁박물관이 나왔다.
내가 괴링에서 직위를 물려주고 난 뒤 괴링이 설립을 주도했는데 내가 죽을 때까지 완성되지는 못했다.
바로 표를 구입하고 안으로 들어가 봤다. 박물관을 구경하는 데 참고하라고 쌓아둔 팸플릿 중에는 한국어로 된 팸플릿도 있었다.
팸플릿치곤 두께가 상당했는데 의외로 입장권을 구입하면 팸플릿은 무료라고 매표소 직원이 알려줬다. 어째 푯값이 살짝 비싸다 했는데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팸플릿의 설명에 따르면 전쟁박물관은 1968년에 공사를 시작해서(이건 나도 아는 내용이었다) 1974년에 완성했다고 한다.
총 6년에 걸쳐 만든, 세계 최대의 군사박물관이라는 설명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그 거대한 Ju590 폭격기가 옥외도 아니고 박물관 내부에 통째로 들어있으니 말이지.
미국에서 B-52가 아직도 현역이듯 독일에서 Ju590은 여전히 현역으로 뛰는 중이라고 팸플릿에 적혀 있었다.
21세기에도 당당하게 현역으로 쓸 수 있는 놈이라고 베버가 그렇게 자랑했는데, 그 말이 정말로 현실이 된 것이다.
박물관 내부에는 갖가지 장비들이 번쩍거리는 광을 내며 전시되어 있었다. 작은 승용차만 한 크기의 1호 전차부터 비트만과 카리우스가 탔던 티거, 레오파르트 3까지 없는 게 없었다.
항공기의 경우 전차처럼 Bf109, Me262, Ju88처럼 2차대전에 사용되었던 놈들부터 앞서 언급한 Ju590을 비롯, 지금도 독일군에서 현역으로 사용되고 있는 물건들이 저마다 한자리씩 차지한 채 그 위용을 내뿜고 있었다.
개중에는 아들러, 발퀴레처럼 생전 처음 보는 것도 있었고(팸플릿에 적힌 설명에 따르면 각각 F-35, F-22와 대등하거나 그 이상의 성능이라고 하는데 진짜인지는 모르겠다), 반대로 EADS 마코(Mako)나 MBB 람피리데(Lampylidae, 반딧불이), A400M처럼 실제 역사에서도 존재했던 물건들도 있었다.
박물관이 어찌나 넓은지 다 둘러보는 데만 하루가 훌쩍 지났다. 분명 박물관에 들어갈 땐 해가 중천이었는데 밖으로 나왔을 땐 하늘에 달이 떠 있었다.
정신없이 돌아다니고 구경하느라 무리를 해서 그런지 다리가 쑤셨다. 여행객용 숙소에 들어가 방값을 지불하고 침대에 누워 내일 일정을 곱씹으며 잠이 들었다.
***
-오늘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멕시코 내전에 개입할 것이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대해 아직 검토 중이라 대답하며 말을 아꼈습니다. 그리고 최근 남미에서 히틀러주의를 표방하는 정당들이 잇달아 선거에서 승리한 사례에 대해서도 예의주시하는 중이라고 밝혔으며…….
-올라프 숄츠 독일 총통은 드미트리 우트킨 러시아 대통령과 만나 러시아와 소련 사이에서 일어난 국경분쟁의 해결 방안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겐나디 주가노프 소련 서기장은 소련을 무너뜨리려는 두 전쟁광의 야합이라며 회담 자체를 맹비난했습니다.
-1982년, 독일의 우주비행사 지그문트 얀이 화성에 인류 최초로 발자국을 남긴 날이 바로 오늘입니다. 이를 기념하여 독일은 현재 화성에 건설을 추진 중인 유인 우주기지의 이름을 지그문트 얀으로 최종확정했다고 발표했습니다.
라이히스부르거에서 햄버거를 먹으며 핸드폰으로 뉴스를 시청하며 독일에서의 두 번째 아침을 맞이했다.
내가 설립한 라이히스부르거는 꾸준히 성장을 지속해 지금은 맥도날드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초거대 프랜차이즈로 거듭났다. 우리나라에는 라이히스부르거보다 맥도날드가 더 많지만, 유럽에선 라이히스부르거가 워낙 압도적으로 맥도날드 매장은 독일 전체를 놓고 봐도 한 손에 꼽을 정도였다.
경제적으로 궁핍한 사람들도 부담 없이 맛있는 식사를 즐길 수 있도록 가격은 낮추고, 품질은 유지하라고 지시를 내린 덕에 라이히스부르거는 현재까지도 매우 착한 가격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매장 안에는 싼값에 식사를 해결하러 온 관광객, 직장인, 학생들로 가득했다.
둘째 날에는 어디로 갈지 정해뒀다. 나는 국가사회주의기념관으로 향했다. 독일 역대 총통들과 초대 나치당 고위층들의 개인 소장품들과 그들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기념관이 있는 포츠담으로 가는 열차 안에서 나는 핸드폰으로 전에 봤던 영상을 시청했다. 내 장례식을 촬영한 영상이었다. 볼 때마다 참 묘한 기분이 든단 말이지.
멀쩡히 살아있는 내가, 죽은 과거의 나를 장례 치르는 것을 보고 있다니.
베를린의 전사자 묘지에 묻어달라고 말했건만, 괴링 이 녀석은 내 말을 무시하고 총통기념관이라는 곳을 따로 만들어 그곳에 나를 매장했다.
베를린 전사자 묘지에 나를 매장할 경우 내 묘지를 보러 온 사람들로 다른 추모객들이 추모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는 이유라고 하는데, 이게 또, 그럴듯해서 뭐라 욕은 못하겠단 말이지.
독일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찾는 곳답게 기념관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이 모든 사람이 과거의 나를 보러 온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자 다시 한번 기분이 묘해지면서 가슴이 벅차올랐다.
나, 진짜 열심히 살긴 했구나.
괴링은 1974년에 슈페어에게 총통직을 넘기고 은퇴하여 3년 뒤인 1977년에 사망했다.
영원한 오컬트 덕후 힘러는 괴링이 죽고 이듬해인 1978년에 죽었다.
누가 오컬트 덕후 아니랄까 봐 죽기 직전까지 예수의 마지막 성배를 찾기 위한 탐사대를 직접 꾸려 세계 방방곡곡을 돌아다녔는데, 죽을 때도 그것을 찾지 못해 아쉬워했다고 한다. 참 힘러다운 마지막이랄까.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쓰던 괴벨스는 그래도 늘그막에는 버릇을 고쳤는지 가족과 단란한 노년을 보냈다.
1984년, 아내 마그다가 세상을 떠나고 정확히 다음 날에 괴벨스도 숨을 거뒀다.
리벤트로프는 말년에 와인 산업에 뛰어들어 상당한 성과를 냈다. 현재도 그가 설립한 와인 브랜드 ‘리벤트로프’는 유럽에서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는 중이다. 리벤트로프는 1986년에 눈을 감았다.
힘러와 더불어 오컬트라면 사족을 못 썼던 헤스도 힘러를 따라 아리아인 유적을 찾아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말년에는 무리하지 말라는 주치의의 권고를 받아들여 집에서 가까운 농장에서 원예 일을 하며 시간을 보냈는데 이 일에 진심이었는지 관련 책도 3권이나 내고 농부를 꿈꾸는 청년들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하며 다녔다고 한다.
헤스는 1995년, 무려 10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3대 총통 슈페어는 총통으로 재임 중이던 1981년에 심장마비를 일으켰다. 목숨은 건졌지만, 더 이상의 업무 수행이 힘들다고 판단했는지 후임자를 물색하다가 때마침 한창 급부상 중이던 파이퍼에게 총통 직위를 양도했다.
그리고 자택에서 요양하며 지내다가 1983년에 세상을 떠났다. 사인은 심장마비였다.
파이퍼 다음 총통은 발트하임이었다. 그 뒤로 헬무트 콜이 자리를 받았다가 올라프 숄츠가 콜의 뒤를 이었다.
이들 외에 롬멜, 되니츠, 만슈타인, 디트리히, 마우리스, 갈란트 등등 내가 알고 지냈던 수많은 이들의 생애를 설명한 현판과 그들이 남기고 간 유품들을 보며 걷다가 마침내 그 장소에 이르렀다.
나,
아돌프 히틀러의 무덤이었다.
눈에 보이는 단단히 밀봉된 관 안에 내 과거의 육체가 잠들어 있었다. 장례식 영상에서 본 모습 그대로였다.
‘내’ 무덤 앞에는 많은 사람이 놓고 간 꽃으로 가득했다. 꽃이 얼마나 많은지 자리에 놓인 꽃들만 가져가도 꽃집 하나는 차릴 수 있을 정도라 생각될 정도였다.
앞의 무덤들 앞에 놓인 동판에 여러 설명이 빼곡하게 가득 찬 것과 다르게 내 무덤에 놓인 동판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었다. 그것을 보며 나는 얼굴에 미소가 번지는 것을 느꼈다.
‘아돌프 히틀러, 1889-1972’
감사의 말
반갑습니다. 작가 종이호랑이입니다.
길고 길었던 ‘히틀러가 되었다’가 드디어 끝났습니다.
이 작품을 처음 구상하고 메모장에 끄적거리기 시작했던 시기까지 치면 완결까지 꼬박 2년이 걸렸군요.
제 보잘것없는 글을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보통 글을 다 쓰고 나면 후련한 감정과 뿌듯함이 들곤 한다는데 제 경우에는 후련함은 있어도 뿌듯함은 느끼기 힘드네요.
뿌듯함보다는 회한이 더 진하게 남아있습니다.
‘이것보다 더 잘 쓸 수 있었는데…’나, ‘아, 내가 왜 이렇게 썼지?’ 같은 그런 감상들 말입니다.
다 저의 어리석음과 불필요한 욕심 때문에 생긴 일들입니다. 독자님들께 참 면목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미숙한 글을 끝까지 읽어주신 여러분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의 성원이 없었더라면 이 글이 세상에 나오는 일도 없었을 겁니다.
작품을 연재하는 동안 많은 분의 관심과 응원, 따끔한 지적과 진심 어린 충고를 받았습니다. 저 같은 작가 호소인 나부랭이에겐 너무나 과한 사랑이었습니다.
지난날의 실수와 후회를 반성의 거울로 삼아 더욱 정진하여 전보다 더 나아진 글로 돌아오겠습니다.
차기작은 아마 전쟁광 체임벌린이 우리 시대의 전쟁을 외치는 내용이 될 것 같습니다.
다시 한번 고개 숙여 여러분의 관심과 사랑에 감사드리며 차기작에선 지금보다 발전된 모습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의 무료함을 달래고 작가를 꿈꾸는 이들에게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는 것이야말로 작가의 본분이니까요.
지금까지 감사했습니다. 올해 안에 차기작으로 찾아뵙겠습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