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Academy's comedic character RAW novel - Chapter 10
제10화
“와하하하!”
웃음소리가 참으로 우렁차다.
저 정도면 숲속에 숨는다고 해도 위치가 전부 들켜 버릴 거다.
애초에 본인은 그걸 바라고 있겠지만 그런 그녀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두통이 생기는 것도 어쩔 수 없으리라.
“오즈 왕자. 저는 당신에게 상당히 존중을 보였다고 생각합니다.”
선도부는 제법 정중한 대응을 취해 줬다. 처음 나를 포위하고 위협했을 때를 제외하고서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 지금에 와서 올리비아가 흉악하게 생긴 메이스를 들어 올리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그녀의 존중을 무시한 건 나니까.
“그러니 이 이상은 저희를 곤란하게 만들지 말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마나의 지배자]를 믿고 싸우기에는 거리가 너무 가깝다.더군다나 엘레노아를 쫓아가지 않고 남아 있는 선도부들도 있다.
싸움을 걸어 봤자 지금의 내 실력으로서는 괜히 얻어맞을 거다.
그보다 애초에 싸울 이유도 없다.
어차피 목적은 달성했지 않은가?
엘레노아는 지금쯤 즐거운 술래잡기를 즐기고 있을 거다.
“그래, 순순히 따라갈게.”
양손을 들어 올리며 항복 의사를 보내 보지만 올리비아와 선도부들의 경계심은 낮아지지 않았다.
아직 나를 경계하고 있는 걸까? [관조]도 비활성화했는데?
그렇다면 어쩔 수 없다. 여기서는 만능 치트키를 쓸 수밖에.
“아직도 믿지 못하겠다면 마나에 맹세를…….”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괜찮습니다.”
조금 전까지 무기를 만지작거리며 경계하고 있던 선도부들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손을 내린다.
마나의 맹세, 도대체 효과가 얼마나 좋은 거냐?
이 정도로 신뢰를 얻을 수 있다는 게 이제는 무서울 정도다.
“오즈 왕자……. 당신이 뭘 꾸미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부디 앞으로 만날 분에게는 존중을 보여 주셨으면 좋겠군요.”
“그래. 명심할게.”
선도부에는 그 사람이 있다.
성기사와 사제들로 대부분의 인원이 채워진 선도부다.
그렇다면 그 머리 위에 누가 앉아 있을지는 안 봐도 뻔하다.
[희망의 성녀] 아리에타 도미네가 있을 거다.“……2학년인 제게 반말로 대하는 건 지위가 있으시니 별로 상관하지 않겠지만 성녀님에게까지 그런 태도를 보인다면 저희 역시 장담하기 힘듭니다.”
노골적인 협박이다.
하긴 당연한 일이다.
애초에 그들이 에 있는 이유도 성녀 한 명을 보호하기 위해서였으니까.
“그보다 당신, 2학년이었나?”
“그럼 아직 학기가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선도부에 들어와 있다고 생각하신 겁니까?”
“아니…….”
사실 그냥 별생각 없었다.
[희망의 성녀] 아리에타 도미네는 분명 1학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그러니 그런 성녀의 호위에 해당하는 [빛의 방패]들 역시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했다.
“음? 잠깐, 그럼 희망의 성녀도 2학년인 건가?”
“아뇨, 그분은 출석 일수를 못 채웠기에 한 학기를 낙제했습니다.”
“아, 그, 그래.”
다소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출석 일수가 부족했다는 건 그녀가 평소에 바쁘게 돌아다녔기 때문일까? 아니, 그것도 이상하다.
그녀가 바빠야 할 일이 있었다면 [빛의 방패]들이 따라나서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들은 성녀의 호위가 아닌가?
“그런데 너희들은…….”
“성녀님은.”
“…….”
“출석 일수가 부족했던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오즈 왕자. 출석 일수가 모자랐던 거라고요.”
“어…….”
물으면 안 되는 무언가가 있나 보다. 하지만 저렇게 노골적으로 말한다면 오히려 모를 수가 없다.
희망의 성녀 아리에타는 머리가 나빴던 걸지도 모르겠다.
“이해했어.”
“정말 이해하신 거 맞습니까?”
“그래, 내가 누군지 잊었어?”
“……믿겠습니다.”
성녀님의 아픈 상처를 건들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거잖아?
나도 괜히 그녀 앞에서 성적 얘기를 들먹이며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는 않다.
“그럼, 가시죠. 수업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될 수 있으면 돌려보내 드리겠습니다.”
“그래.”
마나의 맹세를 들먹였기 때문인지 선도부들은 한결 가벼운 발걸음으로 나를 안내했다.
내가 도망칠 거라고는 생각 자체를 안 하는 것 같다.
어차피 도망갈 생각도 없으니 상관없지만 뭔가 김이 샌다.
“그럼, 들어가시죠.”
선도부들이 안내한 장소는 의외로 교회였다. 선도부실이 있어야 할 장소에 교회가 있었다.
왜 선도부실이 교회가 된 건지 모르겠다.
곁눈질로 올리비아를 포함한 선도부들을 살펴보니 굉장히 무덤덤했다. 이 상태가 된 게 하루 이틀이 아니라는 소리다.
이거 권력 남용 아닌가……?
그런 의문이 섞인 눈빛을 보내 봤지만 돌아온 건 무표정이었다.
“들어가시죠.”
그렇게 반쯤 등이 떠밀리듯이 교회 안쪽으로 발을 디디자 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딱히 기분이 나쁘다거나 불편하지는 않다.
오히려 갑자기 따뜻한 이불 위로 누운 것같이 편안한 느낌이다.
그렇다면 이게 신성력인 건가?
그러고 보니 마나는 지긋지긋하도록 보고 느꼈지만, 신성력을 마주하는 건 처음이다.
“오즈 왕자? 무슨 일 있습니까?”
“아니, 들어가지.”
낯선 감각에 잠깐 멈춰 서 있자 올리비아가 나를 재촉했다.
왜 이렇게까지 나를 교회 안으로 들여보내려는 거지?
너희들 이거 조사하는 거 맞지?
“여깁니다.”
올리비아가 한쪽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아까부터 느껴지던 신성력은 모두 저 문 안쪽에서 새어 나오고 있었으니까. 저게 모두 한 사람에게서 나온 신성력이라는 거다.
덜컥 나무 문이 열리고 올리비아가 나를 문 안쪽으로 안내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산뜻한 애플민트의 향이 은은하게 느껴졌다.
그 공간의 한가운데에는 배경과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회장님 의자가 있었다.
“어서 오세요.”
회장님 의자에 가려져 있던 건지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듣기만 해도 편안해지는 목소리다.
휘릭.
의자에 앉아 있던 소녀가 몸을 한순간에 회전시켰다.
“앗…….”
조금 많이 회전시켰다.
그녀는 바라보고 있던 방향으로 다시 돌아갔다. 보인 건 잠시였지만 [관조]는 그걸 놓치지 않았다.
[SSR 희망의 성녀]아리에타 도미네
예상대로 게임 내 최고의 성능을 자랑하는 힐러 캐릭터인 [희망의 성녀] 아리에타 도미네가 있었다.
“성녀님, 너무 돌아가셨습니다.”
“아, 고마워. 올리비아.”
올리비아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회장님 의자를 나와 마주 보는 방향으로 돌려 줬다.
나와 대조되듯 색을 빼앗긴 듯한 순백의 머리카락이 눈에 띄었다.
그다음에 보인 건 지그시 감고 있는 눈이었다.
뭔가 포근한 인상이기도 하지만 마냥 좋게 볼 수만은 없었다.
그녀는 맹인이니까.
그렇기에 그토록 강력한 신성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누군가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거다.
게임에서는 캐릭터 랭크에 따라 눈을 뜬 모습도 나오지만, 그 역시 초점은 흐릿했다.
잘린 팔다리까지도 붙이는 신성력이 있건만 정작 자신의 눈은 고칠 수 없다.
사람에게 희망의 빛을 보여 주는 성녀지만 막상 그녀는 아무것도 볼 수가 없는 거다.
“처음 뵙겠습니다. 희망의 성녀, 아리에타 도미네 님. 저는 오즈 쿼바디스라고 합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돼서 영광이군요.”
“처음……?”
“……?”
한순간 탄식하는 듯한 소리가 들려와 인사하기 위해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려 봤지만 아리에타의 표정에는 아무 변화가 없었다.
잘못 들은 걸까?
“…….”
아니, 잘못 들은 게 아니다.
아리에타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지만 선도부들이 노골적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실수한 건 확실한 것 같다.
“아, 그, 저기 오즈…… 님은 무슨 일로 선도부에 오신 건가요?”
“학사에서 자그마한 소란을 피우다가 참고인 삼아 오게 됐습니다. 안타까운 일이군요.”
“……오즈 왕자는 머리가 이상한 여학생과 함께 학원장의 동상을 파손시켰기에 그 자리에서 현행범으로 바로 구속했습니다.”
“네?”
아직도 나를 향해 노골적인 적대감을 흘리고 있는 올리비아가 옆에서 쓸데없는 참견을 해 왔다.
그 말에 아리에타가 한순간에 말문을 잃었다.
어색한 침묵이 흐르기 시작했다.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하지?
아까처럼 조심성 없이 주둥이를 놀렸다가는 나를 노려보고 있는 선도부들에게 뒤지지 않을까?
그렇게 고민하고 있던 도중.
“올리비아 씨, 도망쳤던 노아 양을 잡아 왔습니다.”
“……예, 그녀도 이곳으로.”
이 상황을 타파해 줄 구세주가 나타났다. 사실 구세주인지 또 다른 트롤러인지는 잘 모르겠다.
잠시 후 내가 도망치라고 풀어 줬던 엘레노아가 포승줄에 묶인 채 끌려왔다. 도대체 뭔 짓을 했기에 포승줄에 묶여 온 걸까?
그녀는 왠지 아깝다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시간을 생각해 보면 얼마 버티지도 못했다.
여러모로 무능한 녀석이다.
“훗……. 이렇게 만나 뵙게 되는군요. 성녀님.”
“어어……. 아, 네, 안녕하세요?”
아리에타가 엘레노아의 당당한 태도에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하긴 나라도 잡혀 온 주제에 저런 태도를 하는 걸 보면 당혹스러울 거 같다. 도대체 뭐가 너를 그렇게 자랑스럽게 만드는 거니?
“그, 일단 두 분 모두 고해 성사를 시작할게요…….”
아리에타는 뭔가 신경 쓰이기라도 하는 게 있는지 쭈뼛거리는 태도로 말했다.
“고해 성사요? 어쩌죠. 스승? 뭔가 재밌을 거 같아요.”
“……도대체 어디에 재밌을 거 같은 요소가 있다는 건지 나는 잘 모르겠는데.”
성녀가 진행하는 고해 성사는 특별하다. 이미 게임에서도 몇 번 나온 적이 있었다.
그녀가 정한 룰 아래에서 시작되는 고해 성사에서는 침묵은 할 수 있더라도 거짓말만큼은 내뱉을 수가 없다는 것 같다.
그리고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내 목 바로 밑에 있는 선도부들의 무기를 보면 거짓말을 할 수 없는 것도 이해가 갔다.
이건 다른 의미로 거짓말을 할 수 없는 구조다.
“그럼, 먼저 오즈…… 님에게 질문할게요.”
“……예.”
“어째서 학원장님의 동상을 파손시키려고 한 건가요?”
“착오가 있군요. 저는 동상을 파손시키지 않았습니다. 저는 창문을 조졌지요.”
내 입에서 자연스럽게 튀어나온 말에 한순간 소름이 끼쳤다.
선도부의 위협 때문이 아니었다.
정말로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교묘하게 말을 돌리는 것도 불가능했다.
오로지 진실만을 입에 담아야 할 거 같은 감각에 지금까지 중에서 가장 섬뜩한 위화감을 느꼈다.
“도대체 왜 그런 짓을 한 건가요? 호, 혹시 창문에 유령이 보였다던가?”
“유령이 무서우신 겁니까?”
“아, 아닌…… 읏?!”
아리에타가 돌연 고개를 숙인다.
성녀는 거짓말을 하면 죄책감을 넘어 육신의 고통을 느낀다.
유령이 무서우신가 보다.
“저기, 제가 질문하는 거에만 대답해 주시면 안 될까요?”
“오즈 왕자. 성녀님을 괴롭히지 마시죠. 보시다시피 성녀님은 상당히 여린 사람입니다.”
“그래…….”
올리비아의 촌철살인에 아리에타가 다시 고개를 숙인다.
많이 수치스럽나 보다.
“그, 그래서, 어째서 그런 짓을 하신 건지 말해 주실 수 있나요?”
“노아가 학원장의 동상을 부수려는 걸 보고 말려야겠다는 생각에 그리 행동하게 됐습니다.”
“그럼 오즈 님에게는 역시 잘못이 없으신 거네요? 제 사람 보는 눈이 틀리지 않은 거 같아서 다행이에요. 후훗.”
“…….”
뭐지 저건? 블랙 유머인가?
눈이 보이지 않는 그녀가 ‘사람 보는 눈’ 같은 단어를 쓰는 걸 어떻게 반응해 줘야 할까?
웃어 줘야 하나? 아니, 그런데 실수면 어떻게 하지? 나만 이상한 사람 되는 거 아닌가?
다행히 별다른 반응을 하기 전에 아리에타는 고개를 돌렸다. 심문의 대상이 바뀐 거다.
“그럼…….”
“노아예요.”
“네, 그럼 노아 님은 왜 학원장님의 동상을 파손하려 한 건가요?”
“그런 적 없는데요?”
“어……?”
아리에타가 멍한 표정으로 우리 둘을 번갈아 쳐다본다.
서로의 말이 완벽하리만치 갈릴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나 보다.
솔직히 나도 어처구니가 없다.
거짓말을 할 수 있다고?
“저는 동상을 파손시키려 하지 않았어요. 그저 철거하고 새로운 동상을 세우려던 과정에 우연히 그런 흠집이 생긴 것뿐이죠!”
“아, 네……. 이해했어요.”
아리에타의 적응력은 상상 이상으로 뛰어났다. 벌써 엘레노아가 어떤 사람인지 이해한 것 같다.
그녀의 질문 방향이 내게서 멀어진 채 온전히 엘레노아만을 향하기 시작했다.
이미 반쯤 설교에 가까웠다.
“성녀님. 그 문제도 그렇지만 오즈 왕자와 그쪽의 노아 양이 뭔가를 꾸미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가요?”
올리비아가 중간에 또다시 치고 들어왔다. 아직 기분이 나아진 것 같지 않다. 상당히 적대적이다.
“두 분이 뭘 꾸미고 있는 건지 말해 주실 수 있을까요?”
“딱히 아무것도.”
“이 학원을 난장판으로 만들어서 저희 이름을 퍼트릴 거예요.”
나는 진실을 말했고 엘레노아가 허언을 말했다.
저 허언이 그녀에게 있어서는 거짓말이 아니라는 점이 두렵다. 참으로 원대한 야망이다.
역시 엘레노아는 주인공보다는 빌런 쪽에 가깝지 않을까?
“……심문해야 할 쪽이 완전히 정해진 것 같네요.”
당연히 그 대상은 내가 아닌 엘레노아였다.
* * *
“피, 피곤해요…….”
심문이 끝난 후 나와 엘레노아는 선도부실을 빠져나왔다.
정말 수업이 시작되기 전에는 끝났다. 문제는 거리상 전력 질주해 봤자 지각이라는 점이다.
어쨌든 거짓말은 아니라서 화를 낼 수도 없다.
그보다 돌아가는 건 알아서 하라는 걸까? 숲 한가운데로 끌고 왔으면서 데려다주지도 않는다.
“지각은 확정이네. 그냥 마음 편하게 가자.”
“그럼 이렇게 된 거 어떤 식으로 등장할지 정하는 건 어떨까요? 저는 화려한 게 좋아요.”
“……나는 가끔 너의 긍정적인 면모가 부러울 때가 있어.”
“역시 저는 타인의 부러움을 사는 존재군요.”
학기 첫날부터 선도부에게 끌려갔는데도 저렇게 긍정적일 수 있다니 대단하다.
나라면 어떤 소문이 퍼지고 있을지 두려워서 교실 문을 여는 것조차 망설일 거다.
“성녀님, 예쁜 사람이었죠?”
“응? 그건 그렇지…….”
말없이 숲을 터벅터벅 걷고 있자 엘레노아가 말을 걸어왔다.
하긴 관심 종자인 그녀로서는 아무 말도 안 하는 지금 상황이 기꺼울 리가 없다.
뭐라도 대화하고 싶겠지.
“머리카락을 만지면 밀가루가 묻어 나올 거 같았어요.”
“그건 칭찬 같지가 않은데.”
하다못해 새하얀 대리석 같다고 하는 게 좋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성녀님도 저희랑 같은 1학년이라던데 수업은 안 들어도 되는 걸까요?”
“작년에 들었으니까 오리엔테이션 정도는 상관없겠지. 애초에 별로 볼 일도 없을 거 같은데.”
올리비아가 말한 것처럼 출석 일수가 부족했던 거라면 부족한 며칠만 채우면 될 거다.
낙제점을 받은 거라면 해당 과목만 들어도 상관없을 테고.
애초에 졸업할 생각이 있는 건지도 의문이긴 하다.
“그런데 말이에요……. 사실 이런 말 하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눈동자 색은 어땠을지 궁금하네요.”
“민트색이야.”
마치 여름이 연상되는 듯한 밝은 청록색이었다
“……?”
엘레노아가 갑자기 멈추더니 자신의 양쪽 관자놀이에 검지를 올린 채 고민하기 시작했다.
내가 어떻게 아리에타의 눈동자 색을 알고 있는지가 의문인 것 같다.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던 엘레노아가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혹시 서로 아는 사이였나요?”
“……글쎄.”
어차피 설명한다고 해도 이해할 수 없을 테니 얼버무리기로 했다.
그녀 역시 크게 관심은 없는지 파고들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지 않나요? 신성력의 화신이나 다름없는 성녀님인데 자신의 눈은 고칠 수 없는 걸까요?”
엘레노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내 이상하다는 듯이 말했다.
“아리에……. 아니, 성녀님의 눈이 멀게 된 건 신성력 때문이야.”
“신성력이요?”
“너무 밝은 빛은 눈을 멀게 하는 법이니까.”
“그런 은유. 뭔가 내면의 어둠을 자극하는 느낌이라 싫지 않아요.”
“……나는 네게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치가 떨리고 소름이 돋아서 싫어.”
잠깐의 침묵.
그 후 엘레노아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말을 이어 갔다.
“그보다 스승은 성녀님에 대해 잘 알고 계시네요.”
“……그렇긴 해.”
잘 알 수밖에 없다.
내가 라는 개돼지용 게임에 유입된 계기가 아리에타였으니까.
그녀는 내 최애캐였다.
“그런데 아무래도 인연은 아니었나 보더라고.”
한 300만 원 정도 꼬라박아 봤는데 안 나오더라고.
빌어먹을 확률 조작 같으니.
* * *
성녀 직속 호위 부대 [빛의 방패] 소속의 성기사.
올리비아 블루는 처음 보는 순간부터 오즈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위에서 군림하는 자가 가지는 전형적인 오만함을 품고 있는 존재였다.
그런 눈빛을 지니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오즈에게 존중을 보였다. 그녀가 모시는 성녀, 아리에타가 그걸 바랐으니까.
그녀는 [희망의 성녀] 아리에타의 호위인 다.
그녀를 늘 가까이에서 지켜봐 온 사람이다.
그렇기에 그녀가 생각보다도 연약하다는 걸, 그저 상냥하고 상처받기 쉬운 소녀에 불과하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 그녀에게 있어서 아리에타는 여동생 같은 존재였다.
“감히…….”
그리고 그런 아리에타가 늘 입에 담는 존재가 있었다.
자신과 같은 수도원 출신이었다는 오즈 쿼바디스에 대해서였다.
그와 다시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리던 아리에타는 오즈가 에 입학하게 될 거라는 소문에 곧바로 2학년 진급을 포기할 정도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희망의 성녀, 아리에타 도미네 님. 저는 오즈 쿼바디스라고 합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돼서 영광이군요.
그런데 오즈는 그 기대를 배신했다. 둘 사이에 명확한 선을 그으며 거절의 의사를 내보였다.
그 점이 용서가 되지 않았다. 만약 그 자리에 아리에타가 있지 않았다면 즉시 메이스를 휘둘러 머리통을 깨부쉈으리라.
“성녀님…….”
“괘, 괜찮아 올리비아.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잖아. 어렸을 때 일을 기억하는 건……. 읏!”
오즈와 엘레노아가 시시덕거리며 떠나간 뒤 아리에타는 책상 위로 축 늘어졌다.
겉으로는 그저 지쳤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그녀가 얼마나 상심했는지 알 수 있었다.
“……잠시 나갔다 오겠습니다.”
“응.”
빠드득──!
올리비아는 이를 갈며 되돌아간 오즈를 찾았다.
아리에타의 말대로 어쩔 수 없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용납할 수가 없었다.
적어도 한 마디. 그래, 한 마디라도 좋으니 비난을 쏟고 싶었다.
“머리카락을 만지면 밀가루가 묻어 나올 거 같았어요.”
“그건 칭찬 같지가 않은데.”
머지않아 오즈를 찾아냈을 때 그가 옆에 있던 노아라고 불리는 소녀와 시시덕거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보던 올리비아가 메이스를 움켜쥐었다.
“그런데 말이에요……. 사실 이런 말 하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눈동자 색은 어땠을지 궁금하네요.”
“민트색이야.”
하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메이스를 움켜쥔 손아귀에서 다시 힘이 빠져나갔다.
그가 진정 아리에타를 잊었다면 알고 있을 리가 없는 정보였다.
그래, 그는 적어도 아리에타를 잊은 건 아니라는 소리였다.
‘그럼 왜…….’
어째서 선을 그었는가. 올리비아가 그런 의문을 품는 가운데 오즈가 아련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아무래도 인연은 아니었나 보더라고.”
올리비아는 전율하듯 움찔거리더니 이내 메이스를 떨어트렸다.
그가 한 말의 의미를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오즈는 지금 마도왕국 에 쫓기는 몸이다.
에서 벗어나는 순간 언제 다시 암살의 위협에 노출될지 모를 정도로 위태로운 상태다.
그리고 아리에타는 그걸 내버려 둘 만큼 매정하지 않다.
아마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오즈를 지키려 할 터, 그렇다면 교단과 사이에 커다란 균열이 생길 거다.
“그랬나…….”
그는 아리에타를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었다.
올리비아는 그런 결론을 내리며 발을 돌렸다.
이 얼마나 가혹한 운명의 장난인지. 올리비아는 끝내 이어질 수 없는 둘의 처지에 연민을 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