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Academy's comedic character RAW novel - Chapter 11
제11화
“딴! 따다단! 따다단! 따다단따! 뚠따따 뚠따따~”
“…….”
학사에 들어서 복도를 거닐고 있으려니 엘레노아가 자신의 입으로 효과음을 넣기 시작했다.
그것도 아주 우렁차게 소리치고 다니는지라 다른 반을 스쳐 지나갈 때마다 안쪽에서 폭소하는 목소리들이 들려온다.
도대체 어째서 부끄러움은 내 몫이어야 하는 걸까?
[1-4]엘레노아와 내가 속해 있는 반에 다다랐다. 이제 와서 같은 반이라는 사실에 딱히 놀랄 것도 없었다.
게임에서도 같은 반이었으니까.
“좋아요, 스승. 준비는 되셨나요?”
“그래…….”
한참 효과음을 넣고 있던 엘레노아가 내게 속삭이기 시작했다.
당연하지만 관심종자인 그녀는 평범한 등장을 거부했다.
정말이지 환장할 노릇이지만 어쩔 수 없다. 그녀는 관심이 없으면 죽어 버리는 캐릭터인 거다.
“네가 문을 여는 순간 폭발을 일으켜 주면 되는 거지? 정말 나는 그것만 해 주면 되는 거지?”
나는 그녀의 관종 기질을 채워 주기 위해 타협을 맺었다.
만약 거절했다면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그녀의 행동에 말려들게 될 테니 지금은 순순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
“맞아요. 이걸로 모두에게 저라는 존재를 각인시킬 수 있겠네요. 기대되네요. 흠, 흠.”
엘레노아가 근엄한 표정을 연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쪽 입꼬리가 계속 올라가고 있는 걸 보면 안쓰럽다고밖에 생각할 수가 없었다.
엘레노아는 머리가 많이 안 좋은 아이구나.
“그럼 시작할까요?”
“잠깐, 노아.”
“……?”
일을 저지르기 전에 엘레노아를 붙잡았다.
엘레노아가 무슨 일이냐는 듯 순수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기 시작했다.
조금 죄책감이 느껴지지만 어쩔 수 없다.
“……뒷문을 여는 것보다는 앞문을 여는 게 더 이목을 집중시키기 좋을 거야.”
“오오……. 그 말이 맞아요. 역시 스승이네요.”
“그래, 그럼 준비됐지? 네가 문을 열면 내가 조금 떨어진 장소에서 마법을 쓰면 되는 거지?”
“네!”
엘레노아가 심호흡을 하더니 앞문에 서서 자세를 잡기 시작했다. 보고 있는 내가 다 창피하다.
쾅!
당당하다. 지각한 사람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당당하게 문을 열어젖혔다.
누가 보면 교수님인 줄 알 거다.
아무튼, 계획한 대로 엘레노아가 문을 열며 선언하는 순간에 맞춰 전개해 뒀던 마법을 그녀의 등 뒤로 격발시켰다.
초급 마법
[리틀 봄]이상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그녀의 뒤로 폭발이 일었다.
뭔가 병신 같지만, 블록버스터의 한 장면 같기도 하다.
아이라 교수를 포함한 모두의 시선이 엘레노아에게 꽂힌다.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4반의 주인공이 될 노아의 등장이에요!”
와, 사람이 어떻게 제정신으로 저런 소리를 할 수 있는 걸까?
아무튼, 나는 엘레노아가 거만하게 미소 짓는 사이 뒷문을 열고 조용히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음?”
그리고 자연스럽게 인파에 섞여 들어가 숨죽인 채 엘레노아의 상태를 살폈다.
그녀는 갑작스럽게 사라진 내 존재에 의문을 품고 있었지만 이내 관심을 독차지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오히려 미소 짓기 시작했다.
덕분에 내게로 쏟아질 시선을 완전하게 없앨 수 있었다.
2
머리가 이상한 엘레노아라는 존재의 출현이라는 사소한 사건을 제외하면 오리엔테이션은 안정적으로 마무리될 수 있었다.
모두가 다음 날을 준비하거나 놀러 갈 계획을 세우고 있는 가운데 불만스러운 표정의 엘레노아가 내게 다가왔다.
“스승, 뭔가 이상하지 않나요?”
“뭐가?”
“왜 저는 반성문을 써야 하는 걸까요?”
“반성할 짓을 했으니까 반성문을 쓰지.”
“스승도 같이 지각했잖아요.”
“지각이 문제가 아닌데.”
그냥 지각한 건 문제가 아니다. 그다음에 저지른 행동들이 문제지.
반성의 태도가 안 보이는 건 둘째치고 그 정도의 소란을 일으킨 걸 생각해보면 오히려 당연한 형벌이 아닐까?
“……도와주실 거죠? 저희 공범이잖아요.”
“내 명예를 모욕할 생각인 건가? 감히 서민 따위가?”
“이제 와서 왕자 행세하려고 해도 늦었어요. 안 어울리거든요? 스승. 계속 그러시면 스승이 아까 창문 앞에서 포즈 잡고 있던 걸 전부 소문내 버릴 거예요.”
“너, 그걸 어떻게…….”
[관조]를 숨기면서 사용할 수 있는지 실험하는 단계를 말하는 거다. 이 자식 그걸 보고 있었어?더군다나 그걸로 협박을 한다고?
“……반 줘.”
“1/3이면 돼요.”
“고맙……. 아니, 그래.”
1/3이면 된다는 말에 순간 감사를 느낄 뻔했다.
이건 생각 없이 한 말일까? 아니면 그녀가 영악한 걸까?
반성문을 적어 보기는 처음이다.
그래도 자기소개서를 쓰던 걸 생각해보면 별것 아니다.
더군다나 내게는 이치를 꿰뚫어 보는 [관조]가 함께 있다.
[관조 – 활성화]하지만 시험 때와 마찬가지로 [관조]는 도움이 안 됐다.
이치를 꿰뚫어 본다고 해도 반성문을 적어 줄 수는 없나 보다.
[관조]는 생각보다 쓸모가 없다.어찌 됐든 겨우겨우 완성된 분량을 엘레노아에게 건넨다.
“자, 이대로 적으면 될 거야.”
“빠르네요……. 과연 스승이에요.”
“뭐?”
[관조]의 도움도 의미가 없었기에 평범한 시간이 걸렸다.혹시나 해 엘레노아의 종이를 힐끔 쳐다보자 예상대로의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왜 하나도 안 적혀 있지?”
“사실은요. 제가 뭘 잘못한 건지 모르겠어요.”
“정말 무시무시한 대답이구나.”
엘레노아가 만약 주인공이 아니었다면 쾌락 범죄자가 되지 않았을까? 걱정이다.
“어라? 노아! 여기서 뭐 해?”
그때 또다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껏 상기된 목소리가 기분 나빠서 [관조]까지 활성화해서 확인해 봤지만 틀림없었다.
“아, 루시아.”
“무슨 일 있는 거야?”
제국 첩보부 소속.
[SR 섞여드는 고양이]루시아 퍼니셔
그녀가 벌써 엘레노아의 주변에 섞여 들어 있었다.
그보다 상당히 낯선 모습이다.
엘레노아의 관종 취향에 맞췄는지 상당히 애교 있고 상대를 띄워 주는 화법을 구사하고 있다.
안 어울리는 건 둘째치고 현실감이 없어서 기분 나쁘다.
오늘따라 손발이 오그라들어서 남아나질 않는다.
“이거 봐! 아이라 교수님이 나한테 반성문을 이만큼이나 쓰라고 했다니까? 너무하지 않아?”
“진짜? 너무했다. 그래도 걱정하지 마! 내가 도와줄게, 반 줘.”
“응, 응. 도와줘서 고마워 루시아. 역시 너밖에 없네.”
“…….”
환장의 조합이다.
목소리 톤 자체가 높으니 대화에 참여하기도 거북하다.
그보다 은근슬쩍 반성문을 전부 넘겨 버리는 엘레노아의 자연스러운 행동에 소름 돋는다.
엘레노아의 앞에는 8장의 종이가 있었다. 1/3만 도와달라고 내게 넘긴 게 2장이었다.
그 2장과 그걸 베낄 2장. 그리고 그녀가 써야 했던 4장이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그 4장을 반이라고 넘김으로써 1장의 반성문조차 쓸 필요가 없어졌다.
“히힛.”
혐성.
엘레노아가 짓궂게 미소 짓는다.
그래 뭐……. 영악하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장난에 해당하는 수준이다.
나한테 한 것도 아니고, 루시아 역시 엘레노아를 속이고 있으니 그냥 넘어가도록 하자.
그래도 앞으로는 경계해 둬야겠다.
이 관심 종자의 속이 내가 상상하던 것 이상으로 새까맣다는 걸 알 수 있었으니까.
“자, 엘레노아! 이렇게 베껴 쓰면 완벽할 거야!”
“와아~ 고마워! 역시 루시아야! 오즈 스승보다도 빨라!”
연극 조로 대화하는 둘이 너무나도 기분 나쁘다.
말로만 고마운 듯한 엘레노아가 루시아가 적어 준 반성문을 자신의 필체로 옮겨 적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사이 루시아가 내게 눈짓을 보내오기 시작했다.
상당히 사나운 눈빛이다. 나한테 불만이라도 있는 걸까?
네가 연기를 못하는 게 내 잘못은 아니지 않나?
[관조 – 활성화]루시아의 눈빛에 대응하듯이 [관조]를 활성화했더니 루시아의 꼬리가 찌르르거리며 뻣뻣해졌다.
그녀가 양손으로 자신의 꼬리를 매만지며 아까와는 조금 다른 표정으로 나를 노려본다.
패배자 녀석 같으니.
꼬리가 통제가 안 되는 건 여전한가 보구나.
“그럼, 노아. 나는 먼저 가 볼게.”
“네! 스승. 고마웠어요.”
엘레노아를 뒤로 한 채 교실을 나가자 루시아 역시 엘레노아에게 급한 일이 있다는 듯이 말을 걸기 시작했다.
“아! 노아! 그러고 보니 나도 교무실에 볼일이 있었어! 나중에 기숙사에서 보자!”
아무리 봐도 어색하다. 저런 과장된 연기로 정말 괜찮은 건가?
천하의 제국의 첩보부인데 저걸로 괜찮은 거 맞아?
“응! 나중에 봐, 루시아.”
뭐, 엘레노아에게는 별로 상관없는 문제인가 보다.
말로는 고맙다고 하면서도 반성문을 옮겨 적느라 눈을 떼지 않는 엘레노아를 마지막으로 확인한 채 먼저 교실을 나갔다. 아마 루시아가 곧 따라붙을 거다.
* * *
교실을 나가자마자 적당한 기둥에 기대 그럴싸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자 루시아가 나타났다.
“놀랐어, 오즈 왕자.”
“어, 나도 놀랐어. 대단한 연기던데. 제국 첩보부는 정말 그따위로도 돌아가나?”
“…….”
루시아가 말없이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창피한가 보다.
아마 은밀한 취미를 지인에게 들켜 버린 느낌일 거다.
그녀의 꼬리가 빙글빙글 오그라들고 있다.
손발로는 부족했던 걸까? 감정표현이 참으로 풍부하구나.
“이, 이거 참 우연이 다 있지? 오즈 왕자. 설마 같은 반이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어.”
“그래? 우연일 리가 없는데? 제국은 어차피 노아에게 접근할 생각이었던 거잖아?”
루시아가 에 잠입하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 있었지만 그중 하나가 엘레노아의 감시 및 보호였다.
제아무리 정체를 감추려 하고 있다지만 엘레노아는 한 왕국의 공주님이다.
크리소스에서 탈출하기도 힘들었을 그녀가 자신의 뒷수습까지 할 여유가 있었을 리가 없다.
결국, 그녀를 보호하며 지켜보기로 한 제국의 영향 덕에 그녀가 평범하게 있을 수 있는 거다.
세상 물정 모르는 엘레노아를 대신해서 그녀의 정보도 제국이 대신 지워 줬겠지.
……사실 제국조차도 자신들을 위한 밑 작업에 불과했을 테지만 그 호의가 엘레노아에게 평화를 가져다준 건 사실이다.
“역시 당신도 그녀가 누군지 알고 있었던 건가?”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을 전하자 루시아가 예상한 일이었다는 듯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얼굴에 수치심이 남아 있었기에 딱히 위압적이지는 않았다.
꼬리도 여전히 오그라들어 있고 말이지.
“그래, 오즈 왕자도 노아가 목적이었다 그거군. 참고로 그녀의 정체는 알고 있나?”
“나를 상대로 떠볼 생각은 그만두는 게 좋지 않을까? 루시아 퍼니셔. 내가 설마 엘레노아라는 이름도 모를까 봐?”
“여, 역시 잘 알고 있군.”
무덤덤한 척 해 봤자 꼬리가 쭈뼛거리는 게 보인다.
[관조]가 그렇게까지 위협적인 걸까? 제국의 첩보원조차 감정을 숨길 수 없게 만들 정도로?엘레노아는 별로 신경 안 쓰던데 이상한 일이다.
“그럼 그 사실은 알고 있나?”
루시아가 정보의 대조를 하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내게 정보를 끌어내기 위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엘레노아와 크리소스에 대해 늘어놓기 시작했다.
어딘가 자신만만한 표정이다.
[침식도 20%]그녀는 객관적인 사실만을 전달하고 있을 뿐이지만…….
“엘레노아 공주의 고향인 크리소스 왕국이…….”
“멸망했다는 걸 말하나?”
그 야박함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도 조금 전까지는 친구처럼 지낸 대상이 아닌가?
어떻게 저리 남 일인 것처럼 말할 수가 있는 걸까?
어째서 친구가 모든 걸 잃었다는 사실을 저렇게 무덤덤하게 늘어놓을 수 있는 걸까?
“아니면 크리소스의 왕족 중에 그녀 외의 생존자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하나?”
소속이니까?
결국에는 잠시 섞여 들어가 있을 뿐인 가짜 관계에 불과하니까?
일이기에 가까이 있을 뿐이라면 어째서 엘레노아에게 그리 친근하게 굴고 있는 걸까?
단지 정보를 더 끄집어내기 쉽기 때문이라는 건가?
“경고하건대 호기심에 허튼수작을 부릴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메인 스토리 1장부터 12장까지 엘레노아는 계속해서 성장한다.
물리적인 강함만이 아니다. 정신적인 강함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건 역설적으로 이렇게 말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내가 늘 노아를 지켜보고 있다는 걸 명심해.”
엘레노아 폰 크리소스는 그토록 연약한 존재였다고.
* * *
엘레노아는 생각 이상으로 타인의 시선을 살피는 편이었다.
자신에게 향하는 시선만이 아니다. 그녀는 타인이 향하고 있는 시선의 방향에도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게 아니라면 부서진 하늘 바로 아래에 있던 크리소스에서 탈출하는 것도 불가능했을 터다.
“흐음…….”
엘레노아는 반성문을 옮겨 적느라 집중하고 있었지만, 루시아와 오즈 사이에 흐르는 기묘한 기류는 눈치채고 있었다.
그녀는 루시아가 말을 걸었을 때 일그러지던 오즈의 표정을 봤다.
‘저래도 잘생긴 편이구나’라는 시답잖은 감상과 함께 엘레노아는 일단 둘 사이를 파고들지는 않기로 했다.
친구의 친구는 친구.
그런 웃기지도 않는 주장을 할 생각은 없었다.
엘레노아는 바로 어제까지 친구, 아니 가족이라고 생각했던 존재에게 배신당한 전적도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있어서 타인을 믿는다는 건 생각보다도 어려운 일이었다.
“둘은 무슨 관계일까…….”
엘레노아는 자신이 저지르는 일들이 타인에게 어떤 식으로 비치는지 알고 있다. 대부분은 민폐라고 생각하고 있으리라.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나를 기억해 주기만 한다면 싫어해도 괜찮으니까…….’
하지만 그런 그녀조차도 자신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는 사람을 좋아하는 법이었다.
루시아 퍼니셔와 오즈 쿼바디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모종의 관계가 의심되는 그 두 사람이었다.
‘스승은 나를 배려해 주고 있고.’
소문으로 듣던 것과는 달랐다.
굉장히 오만하고 능력 없는 사람과는 말도 섞지 않는다고 들었던 것에 비해 생각보다 친절했다.
무엇보다 그녀 자신과 동류처럼 보여서 편했다.
‘루시아는 내게 맞춰 줘.’
루시아는 속을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그녀가 자신에게 많은 걸 양보해 주고 있다는 건 안다.
더군다나 밤에 같이 있어 줄 수 있는 건 같은 방을 쓰고 있는 그녀밖에 없었다.
“여, 엿보러 갈까……?”
범죄 의식이 상당히 얕은 소녀.
엘레노아는 두 사람 사이에 뭐가 있는지 염탐하러 가기로 했다.
그녀 역시 지금 자신의 행동이 좋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확인하지 않으면…….”
그녀는 이제 그런 식으로밖에 살아갈 수 없었다.
-공주님, 이 드레스 어떠세요? 공주님은 뭐든 잘 어울리지만 역시 눈동자와 비슷한 파란색이 어울리는 거 같아요.
자매처럼 여길 정도로 가깝게 지낸 시종이 있었다.
이름은 ‘디센트라 헤로스.’
지금의 엘레노아의 모습은 그녀를 참고해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늘 활기차고 긍정적이었던 그녀야말로 지금의 엘레노아가 바라던 이상의 모습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디센트라는 엘레노아의 존재를 잊었다.
-누구셨죠?
처음에는 장난인 줄 알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알 수 있었다. 잊혀 버린 거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둘 엘레노아를 잊어 가는 사람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그녀는 혼란에 빠졌다.
평생을 가족처럼 지냈던 관계가 하루아침 사이에 파탄이 났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나를 봐.’
그녀가 보지 못한 장소에서 뭔가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두에게 잊혔다.
그런 경험을 겪으며 버텨 왔다. 하지만 더 이상은 버틸 수가 없었다.
존재 자체가 사라져 버린 게 아닌지 헷갈리기 시작한 무렵 엘레노아는 크리소스를 탈출했다.
‘제발 나를 봐 줘.’
하지만 도망쳐 나온 세상에도 악의(惡意)가 가득했다.
아직 아무것도 밝혀진 게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지탄하고 원망 섞인 목소리를 내뱉는 자들이 많았다.
결국, 그녀는 모두에게서 자신의 존재를 숨길 수밖에 없었지만…….
‘부탁이니까 다들 나를 봐 줘…….’
그때는 이미 소실의 공포가 그녀를 집어삼킨 뒤였다.
엘레노아는 혼자라는 사실을 참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모르는 장소에서 또 뭔가가 일어날까 두려웠다.
또 그녀의 존재가 모두에게 잊힐까 두려웠다.
“아…….”
엘레노아는 어느새 교실 문 뒤에 몸을 숨긴 채 오즈와 루시아의 모습을 훔쳐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눈치챘다.
한순간 자신에게 혐오감이 올라왔지만 참아 냈다.
참아 내야 했다. 이제 그녀는 그런 식으로 살아야 했으니까.
타인의 관심을 바라면서도 타인을 의심하는 그런 역겨운 방식으로밖에 살아갈 수 없었으니까.
“경고하건대 호기심에 허튼수작을 부릴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움찔!
엘레노아는 싸늘하게 들려오는 오즈의 말에 한순간 몸을 둥글게 움츠리며 떨었다.
들어 본 적 없는 목소리였다.
명백하게 분노가 서려 있는 그 목소리가 한순간 자신을 향한 게 아닌지 엘레노아는 몸을 떨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걸 눈치채고서는 안도했다. 그리고 그런 자신에게 다시금 혐오를 느꼈다.
‘이런 짓은 그만둬야 하는데.’
타인이 다투고 있는 장면을 훔쳐보는 건 좋지 않다. 그들 사이에 있을 일에 엘레노아가 함부로 고개를 들이밀어도 좋을 리가 없다.
알고 있는 일이다.
그렇게 다시 돌아갈까 고민하던 엘레노아는.
“내가 늘 노아를 지켜보고 있다는 걸 명심해.”
한순간. 그 별거 아닌 한 마디에.
둘이 나누고 있던 대화도.
자신이 저지르고 있는 철없는 행동도.
자신을 봐 줬으면 하는 그 아집도.
멸망한 크리소스 왕국을 재건하고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야 한다는 사명감도.
또다시 타인에게 잊힐까 떨었던 그 두려움조차도.
그래, 그 별거 아닌 말 한마디에.
“읏…….”
모두 잊어버릴 수 있었다.
그 무거운 짐들을 잠시나마 내려놓을 수 있었다.
“으으윽…….”
그리고 그녀는 홀로 오열했다.
엘레노아 폰 크리소스가 아닌 그저 노아일 뿐이었지만, 그녀가 이곳에 있다는 걸, 누군가는 지켜봐 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