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Academy's comedic character RAW novel - Chapter 15
제15화
오즈가 떠나간 후 아리에타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책상 위에 머리를 기댔다.
그리고 그런 그녀에게 다가가는 사람이 있었다.
푸른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묶어 내린 소녀, 올리비아 블루였다.
“성녀님.”
“기다려 줘서 고마워, 올리비아.”
“아뇨, 그보다 괜찮으신 겁니까?”
“응, 괜찮아. 언제까지고 과거의 관계에 목매달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
아리에타는 기대고 있던 고개를 다시 들어 올렸다.
그 얼굴에는 아쉬움은 있을지언정 후회는 없었다.
하지만 고통은 남아 있었다.
괜찮다는 건 거짓말. 괜찮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러니까 그냥 처음부터 다시 하면 되는 거잖아. 애초부터 우리가 너무 달라져 버린 거니까.”
[희망의 성녀], 아리에타 도미네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희망만큼은 잃지 않았다.그녀는 누군가의 희망이어야 했다. 가장 앞에 서서 남들을 이끌어 줘야 할 길잡이가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처음부터 다시 하면 될 뿐이야.”
“……성녀님.”
올리비아는 잠시 고민하듯 머뭇거리며 아리에타에게 말을 건넸다.
“죄송하지만 잠시 바람 좀 쐬고 와도 되겠습니까?”
“응, 괜찮으니까 다녀와.”
“최대한 빨리 돌아오겠습니다.”
올리비아는 아리에타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더니 조심스럽게 방을 빠져나갔다.
하지만 바람을 쐬러 간다는 말과는 달리 아리에타의 집무실에서 빠져나온 올리비아는 문을 두고서는 주저앉았다.
선도부실 안이라면 누구든 눈치챌 수 있는 아리에타였지만 올리비아는 그 점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거짓말쟁이…….
잠시 후 문의 건너편에서부터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 데리러 와 준다고 했으면서.
과거의 관계를 정리했다고 해서, 현실을 받아들였다고 해서 그게 힘들지 않은 건 아니다.
주저앉은 올리비아는 그 소리를 애써 못 들은 척하며 작은 문을 하나 둔 채 아리에타를 지켰다.
-오즈는 거짓말쟁이야.
그녀가 섬기는 주인은 결코 타인 앞에서 눈물을 흘려서는 안 됐다.
그녀는 이따금 이런 형태로 아리에타에게 시간을 주고는 했다.
남들 앞에서 눈물을 흘릴 수 없는 그녀였지만 홀로 모든 걸 감내하기에는 너무 무겁다.
그렇기에 작은 문을 하나 두고 그녀는 감정을 토해 냈다.
“하아…….”
차라리 오즈가 행방불명이 됐으면 좋았으련만.
올리비아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
오즈는 아리에타와 대화할 때 이미 숨어 있는 올리비아의 존재를 눈치채고 있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굳이 오즈가 아니더라도 눈치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아무리 의 안이라고 해도 성녀인 아리에타의 곁에 호위가 없을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선도부 건물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아리에타 혼자 있었다면 굳이 불이 켜져 있을 필요도 없었다.
“지치는군.”
오즈는 모든 걸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을 했다. 아리에타와의 관계도, 올리비아의 경계도.
그는 온전히 아리에타만을 상대했다. 그건 그가 보낼 수 있는 마지막 배려였지만 줄곧 그를 기다리기만 했던 아리에타에게 있어서는 너무나도 담백한 대응이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아리에타는 오즈에게 간섭하고자 했다. 그녀는 과거의 관계를 청산할지언정 오즈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게 그녀의 천성이었다.
반면 오즈는 아리에타에게서 멀어지려고 했다. 그는 지뢰밭을 걷고 있는 자신의 상황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아리에타를 끌어들이지 않으려고 했다.
그는 그런 천성을 가지고 있었다.
인연을 결코 잘라 낼 수 없는 아리에타와 필요를 위해서는 모든 인연을 잘라 낼 수 있는 오즈.
“너무 어렵구나…….”
올리비아는 두 사람 중 그 누구의 편도 들 수 없었다.
마음이 향하는 방향은 아리에타를 돕는 것이었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는 오즈의 뜻을 존중하는 쪽이 맞았다.
그렇기에 그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 * *
어딘가 찝찝한 기분으로 선도부실을 나왔다.
한계치를 돌파해 버린 침식도와 아리에타의 미소를 본 순간부터 피어난 낯선 감정이 심장을 옥죄듯 괴롭게 만든다.
“쯧…….”
밥이나 먹으러 가자.
이미 밤이 늦었지만 내부에는 늦게까지도 장사를 하는 장소가 많았다.
개중에는 요리사 지망인 학생들도 있었고 단순히 돈벌이 목적으로 들어온 외부인도 있었다.
근처에 아직 불이 켜져 있는 가게 한곳을 적당히 골라 들어간다. 게임에서 봤던 NPC가 있었다.
별다른 비중은 없었지만 스태미나 회복 아이템을 사러 갔을 때 가끔 볼 수 있었던 캐릭터다.
하지만 그런 게임적인 요소를 봐도 20%를 돌파해 버린 [침식도]는 내려가지 않았다.
“주문하시겠습니까? 손님.”
“……이걸로.”
초면인 사람에게 반말하는 건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일단 쫓기고 있는 몸이라고 해도 [마도왕의 후계자].
평민들에게는 존대하는 게 오히려 그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걸 수도 있다. 그렇기에 어지간하면 오만한 어투를 유지하는 게 좋다.
나는 그런 세상에 떨어졌으니까.
하지만 생각보다도 그런 말투를 유지하기 힘들었기에 대부분의 대화에서 말끝을 흐리고 만다.
“주문 확인하겠습니다. 등심 스테이크 1인분. 맞으실까요?”
“그리고 혹시 포장 가능한 음식이 있을…… 까? 내일까지는 버틸 수 있는 게 있으면 좋겠는데.”
“음……. 사장님에게 물어보겠습니다. 잠시 기다려 주세요.”
잠깐 고민하는가 싶더니 갈색 머리의 종업원이 떠나갔다.
역시 반말로 묻는 게 힘들었다.
조금 전의 나는 어땠을까? 오즈에 걸맞은 행동거지였을까?
잠시 후 나온 스테이크를 무슨 맛인지 모르게 적당히 속으로 밀어 넣고 포장으로 나온 음식들을 챙겼다. 상하기 쉬운 채소를 뺀 음식들이었다. 고기 좋지.
사치스러워서 마음에 드네.
“안녕히 가세요!”
그렇게 학사를 거닐고 있으려니 문뜩 세상이 어둡다고 느껴지기 시작했다.
가로등의 불빛도, 선명하게 빛나는 별빛들도 있었지만 마치 먹구름이 낀 듯한 기분이 들었다.
* * *
[침식도 21%]꿈. 그래, 이건 꿈이다.
한계치였던 20%를 마침내 돌파해 버린 [침식도]가 내게 꿈을 보여 주고 있는 거다.
그렇기에 나는 꿈을 꾸고 있다. 하지만 내 꿈이 아니다.
이건 오즈의 꿈이었다.
별다른 특색도 없는 수도원에서 특색 없는 인생을 구가하고 있는 꿈이었다.
“오즈!”
누군가가 가만히 앉아서 책을 읽고 있던 나를 불렀다. 아니, 내가 아닌 오즈를 부른 거다.
그렇게 뒤를 돌아보니 새하얀 머리카락에 민트색 눈동자를 반짝이고 있는 소녀의 모습이 보였다.
“아리에타, 시끄러워.”
수도원에 있는 아이들이라고는 오즈와 아리에타 그리고 붉은 머리의 남매들을 포함해서 고작 4명.
그들에게 있어서 삶이란 건 특별할 게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 기도를 하고 아침을 먹는다.
수도원을 청소하고 간단한 교육을 배우고 또다시 기도를 올리며 점심을 먹는다.
각자가 맡은 일들을 처리하고 남은 시간 동안 놀다가 저녁이 되면 기도를 올리고 저녁을 먹는다.
책을 읽고 잠이 든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반복된다.
어떻게 보면 무미건조하고 특색 없다고도 할 수 있는 인생이었지만 그들은 분명 행복했을 거다.
오즈는 어려서부터 저런 성격이었는지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반면 아리에타는 밝고 활기찼다.
지금의 다소곳한 모습과는 상당히 괴리가 있었다.
“이 아이군요.”
“예, 이 아이가 분명…….”
“지금부터는 저희가 맡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 영원할 것만 같았던 특색 없는 세상은 어느덧 특별함에 물들어 버리기 시작했다.
원하지도 않았는데도 특별함은 그들을 침식해 버렸다.
아리에타는 그 특별함으로 인해 모두와 이별하게 됐다.
그녀를 데리러 온 것은 다름 아닌 교황. 작은 수도원의 원장으로서는 거부할 수도 없었으리라.
“저기, 오즈.”
“……왜.”
“나, 내일이면 가야 한데. 신님이 나를 선택한 거라서 꼭 가야 한다고 그랬어.”
“그래.”
“오즈, 나 잊으면 안 돼?”
“…….”
“꼭이야? 나중에 잊지 말고 꼭 나 데리러 와 주기다?”
오즈는 무미건조했다.
내일이면 떠나갈 아리에타의 말에도 그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야박해 보였다.
그는 그저 짧고 성의 없게 답할 뿐이었다.
“응.”
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그 당시 오즈가 품고 있던 오만함이 무엇인지, 그야말로 오즈답다고 할 만한 감상이 뭐였는지, 나는 알아 버리고 말았다.
오즈는, 그 오만하고 재능 있던 소년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책에 열중한 채로 대답했다.
담담한 척하며 격렬한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아리에타와의 작별 인사를 마친 이후 오즈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의 눈은 마치 그 안에 담긴 모든 걸 머릿속에 집어넣겠다는 듯이 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너를 꼭 데리러 갈 테니까.”
아리에타를 데려가는 존재가 신이라면.
그는 신을 넘어서고자 했다.
[침식도 20%]* * *
어김없이 아침은 찾아왔다.
예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피로감이 없다는 걸까? 오즈의 몸은 상상 이상으로 튼튼했다.
“하……!”
방금 전에 꿨던 꿈.
이딴 방식으로 게임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알고 싶지는 않았다.
너무 늦어 버리지 않았나.
[침식도 15%]꿈을 보여 줬기 때문일까?
[침식도 10%]아리에타와의 일 이후로 줄곧 내려가지 않았던 [침식도]가 다시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침식도 10%]그렇다고 해도 일정 수치로는 내려가지 않았다.
최저치가 달라져 버린 건지 아직도 내가 헤매고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하아…….”
적당히 교복을 입고, 적당히 선도부 완장을 걸치고, 어제 포장해 온 음식들을 적당히 처리한 후 기숙사를 나섰다.
이제 와서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혼자라는 사실에 소외감이 느껴졌다. 나는 어느덧 이 세상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거다.
그렇게 적당히 학사를 거닐고 있으려니 익숙한 사람이 보였다.
우리의 관심 종자 엘레노아다.
“합!”
엘레노아는 드물게 대검을 휘두르며 연습을 하고 있었다.
평소에는 어떻게 행동해야 관심을 받을 수 있을지 생각하고 있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려 보니 위화감이 들었다.
“노아, 무슨 일이야? 답지 않게 아침부터 훈련을 다 하고.”
“아, 오즈 스승……. 어? 스, 스승 선도부에 들어갔어요?”
엘레노아가 방실방실 웃으며 다가오다가 내 어깨에 걸쳐져 있는 새하얀 완장을 보며 경직됐다.
어쩐지 도둑이 제 발 저리는 광경 같은 건 기분 탓일까?
“순순히 불어, 너 아침부터 무슨 사고를 친 거야?”
“아무 사고도 안 쳤어요.”
“……나중에 치려고?”
“스승은 저를 범죄자처럼 보는 경향이 있네요.”
전과가 화려하잖니.
평소에는 사람의 이목을 집중시키려고 노력하는 그녀가 드물게 검을 휘두르고 있는 것만으로도 간담이 서늘해진다.
이런 말은 미안하지만 그녀의 행동은 훗날 사고를 치기 위해서 준비하고 있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
“그럼, 왜 훈련을 하는 건데?”
“이제 곧 신입생 환영 파티가 있잖아요?”
“그렇지.”
“하지만 파티쯤 되면 모두가 주역이 되고 싶겠죠?”
“굳이 그럴 것 같지는 않지만 일단 그렇다고 해 두자.”
“귀족인 아이들은 분명 예쁜 드레스도 입고 올 거고…… 아무튼 화려하게 올 게 분명하단 말이죠? 치사하지 않나요?”
“아니 넌…….”
한순간 너는 왕족이지 않냐고 말할 뻔했다.
대단한 위장 능력이다. 자신조차 속일 정도의 연기라는 걸까? 왜 다름 아닌 네가 귀족을 싫어해?
생각해 보면 안타깝기도 하다.
그래, 분명 엘레노아는 아마 크리소스 왕궁에서 파티를 즐겼던 순간을 생각해 냈던 것이리라.
그녀는 만민의 사랑을 받는 공주님이었으니까 아마 행복했겠지.
결국, 이런 파티가 그녀의 과거를 생각나게 한 걸지도 모르겠다.
지금 그녀의 입장으로는 드레스를 구하는 것도 힘들다.
그리고 구할 수 있다고 해도 주변인들 때문에 무대의 주역이 되긴 힘들 거다.
그렇기에 그녀는 하루라도 빨리 크리소스 왕국을 재건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게 아닐까? 아침부터 검을 휘두르면서 힘을 기르고 있는 건 그런 이유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가 착각한 걸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분명 관심 종자였지만 숭고한 사명을 품고 있는 왕족이기도 했는데.
죄책감이 든다.
“그러니까 제가 주역이 될 수 없는 파티 회장을 난장판으로 만들 거예요. 그래요! 부숴 버릴 거예요! 그걸 위한 수련이에요. 그때는 스승도 도와주실 거죠?”
아니, 이제 보니 죄책감은 필요 없었다.
엘레노아는 내 상상 이상으로 미쳐 있었을 뿐이다.
“……우리 일단 자세한 얘기는 선도부실에 가서 할까?”
방실방실 웃으며 말하고 있지만 가질 수 없다면 부숴 버리겠다는 그녀의 마음가짐은 일견 섬뜩하기까지 하다.
아침부터 선도부로서의 실적을 올려 버리게 된 나는 엘레노아를 뒤로한 채 조용히 수업에 참석하기로 했다.
* * *
오전 중의 공통 수업이 끝나자 엘레노아가 또다시 내게 불만이라는 듯이 다가왔다.
“오즈 스승 이상하지 않나요?”
“어, 그래. 이상하네.”
주로 네 머리가 말이지.
“전부터 궁금했는데요. 선도부들은 혹시 수업을 안 듣는 게 아닐까요? 왜 항상 지각할 때까지 저를 붙잡는 거죠? 벌써 3번째라고요? 오전, 오후가 전부 지각으로 물들었어요! 벌써 경고를 받기 시작했다고요!”
세 번이라…….
오리엔테이션 날 한 번, 오늘 한 번. 그리고 내가 모르는 장소에서 또 한 번을 조져 버린 걸까?
사실상 오리엔테이션 날은 오전 수업밖에 없었으니 모든 순간을 조졌다는 소리다.
학기가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그런데 벌써 그런 의문을 품을 정도로 선도부의 단골이 됐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가 아닐까 싶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기에 선도부에게 그리 많이 붙잡히는 걸까? 내가 모르는 장소에서 뭘 하고 있는 거야?
“2학년부터는 공통 수업이 없으니까 한가한가 보지.”
엘레노아의 이상한 머리는 둘째치고 그녀가 품고 있는 질문에 대한 답을 해 준다.
“학점은 괜찮은 걸까요?”
“선도부 활동하면 학점 줘.”
“비겁하네요. 이렇게 되면 저만 벌점을 받잖아요.”
“나는 가끔 네 뻔뻔한 마인드가 존경스러워질 때가 있어…….”
벌점을 받을 만한 행동만 골라서 하는 게 문제다.
엘레노아의 말도 안 되는 불만을 뒤로한 채 자리에서 일어난다.
“오늘도 오후 수업은 빼먹고 놀러 가시는 건가요? 치사하네요. 부러워요. 저도 귀족이고 싶어요.”
“…….”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말을 간신히 삼킨다.
나처럼 상징적인 귀족이 아니고 태어날 때부터 왕족이었던 애가 어떻게 저리 자연스러운 적개심을 가질 수 있는 걸까?
저게 연기라면 굉장하다고밖에 생각할 수가 없었다.
“오늘부터는 나도 수업 들으러 갈 거야.”
“그런가요? 그러니까 스승의 오늘 시간표가……. 분명 기초 전투술이었던가요?”
“그걸 네가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에헤헤…….”
[관조 – 활성화]이상한 일이다.
그녀가 내 시간표를 외우고 있을 이유가 없다.
그보다 보여 준 적도 없다.
더군다나 같은 이름의 수업이라고 해도 담당 교수가 다르면 시간표도 달라지기 마련이다.
따로 조사라도 하지 않는 이상 알 수가 없는 거다.
“혹시 신입생 파티 날에 난장판을 치려고 선도부들의 동향을 미리 파악하고 있는 건가?”
침묵하는 엘레노아를 향해 [관조]로 쳐다본다.
지금부터 한 마디라도 말해 봐라. 그 거짓말을 전부 꿰뚫어 줄 테니.
“……에헴.”
“1-4반 노아. 선도부의 권한으로 벌점을 부여한다.”
“앗……!”
* * *
노아의 정보대로 내가 받을 오후의 수업은 기초 전투술이다.
이 수업은 과목이 과목이니만큼 야외 수업이다.
딱히 학생이 많은 편은 아니다.
전투술을 주 무기로 삼는 전사 지망과 수호자 지망의 학생들은 기초를 넘기고 과목이 세분화되기 시작하는 초급이나 중급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마법사 지망의 학생들도 기초를 넘긴 채 초급이나 중급부터 배운다.
물론 나는 초급도 그냥 넘겼다.
카피한 이상 시간을 할애할 이유가 없다.
“하하하하! 그 유명한 오즈 학생이 제 수업을 들으러 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네요.”
“아, 예…….”
대놓고 친한 척 말을 걸어오는 건 기초 전투술과 중급 격투술을 가르치는 교수인 제라드 오렌이다.
근육질에 어딘가 친근감이 느껴지는 사람이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아무리 마법이 강하다고 해도 근접한 거리라면 위험하지 않습니까? 간단한 호신술을 배워 두는 것만으로도 상대의 허를 찌를 수 있을 겁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제라드 오렌에게 배울 수 있는 건 많지 않을 거다.
그의 말대로 호신술 수준에 불과하겠지. 애초에 이 수업을 들으러 온 학생들도 대부분 그런 생각을 지니고 있을 거다.
하지만 내가 이 수업을 들어야 하는 이유는 한 가지가 더 있었다.
“우선 몸부터 풀죠. 근육이 긴장된 상태로 무리한 움직임을 취했다가는 나중에 후회할 테니까요.”
메인 스토리 1장의 보스인 제라드 오렌은 크리소스 왕국 출신이다.
그는 의 교수로 있었기에 상관없었지만, 그의 가족은 크리소스에 고립된 채 몰살당했다.
그 분노와 원망을 엘레노아를 향해 표출하게 되는 게 메인 스토리 1장의 개요.
제라드가 엘레노아를 습격하게 된 이유는 크리소스 왕국의 왕족들이 하늘의 노여움을 사서 그 벌을 받은 게 아니냐는 세간에 퍼져 있는 유언비어 탓이었다.
교수쯤이나 되는 자가 그런 유언비어를 쉽게 믿을 리가 없었지만 제라드는 믿는 쪽을 선택해 버렸다.
그는 자신의 분노와 원망을 쏟아낼 장소가 필요했던 거다.
[관조 – 활성화] [관조]로 제라드를 쳐다보자 친근감 어린 미소 뒤에 타오르는 듯한 분노가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안타깝게도 사전에 작업을 쳐 두기는 힘들 것 같았다.
정황을 봤을 때 그는 이미 엘레노아의 존재를 눈치챘다.
애초에 민중에 섞여 들기를 좋아하는 그녀를 못 알아볼 리가 없다.
머리카락을 조금 자른 정도로는 그녀를 가까이서 본 사람들까지는 속이기 힘들다.
“음? 무슨 볼일이라도 있습니까? 오즈 학생.”
제라드 오렌은 강하다.
애초에 중급 격투술까지 가르치는 교관이기에 강한 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었다.
게임 캐릭터로 치자면 아마 SR등급에 해당하는 실력자일 거다.
이제 막 중급 마법을 배우기 시작한 지금의 나로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기기 힘들겠지.
그러니까 정공법으로는 가서는 안 된다.
“저는 지금도 수많은 암살자들에게 노려지고 있습니다.”
“…….”
“당신에게 배우는 기술들이 과연 제게 유용할지 알고 싶군요. 그럴 가치가 있는지 말이죠.”
애초에 내가 선택한 수업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오만하게, 당연한 의문이라는 듯이, 오즈답게.
나는 제라드 교수에게 선언했다.
“어디, 제게 당신의 실력을 보여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나는 그의 싸움 방식을 미리 알아 둘 필요가 있다.
여기는 게임 속 세상이지만 상대가 게임 캐릭터처럼 움직여 줄 리가 없다는 사실은 당연하다.
단순히 몬스터의 패턴대로 움직일 리가 없는 거다.
“……좋습니다. 오즈 왕자. 지금 당신의 상황을 보면 그런 의문 역시 품을 수 있겠죠.”
호칭이 단순한 학생에서 왕자로 변했다.
[관조]가 다시 한번 제라드의 감정을 읽어 낸다.“하지만 수업을 듣는 게 당신 혼자가 아니라는 건 알아줬으면 좋겠군요. 빨리 끝낼까요?”
친근감 어린 미소 뒤에 숨겨져 있는 감정은 여전히 타오르는 듯한 분노.
“조금 아플 겁니다.”
그리고 경멸이다.
다른 건 모르겠지만 이것만큼은 장담할 수 있었다.
이번에는 내가 연기를 확실하게 했구나. 제라드가 나를 향해 곧바로 달려들기 시작했다.
16화
제라드가 달려들 거라는 건 짐작할 수 있었다.
애초에 타오르는 불에 기름을 부은 게 나였으니까.
하지만 나는 단지 상대의 기분을 알기 위해서만 [관조]를 활성화한 건 아니다.
[관조]를 활성화한 채 집중하면 시간이 느리게 흐르듯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 대응할 수 있었다.“흡!”
어? 그래도 빠르네?
제라드의 주먹을 가드를 올려 가까스로 막아 낸다.
팔에 격통이 느껴진다. 솔직히 가드를 한 의미가 있는지도 의심될 정도로 아프다. 그래도 이것도 아마 가감은 한 거겠지.
그게 아니었다면 가드를 올린 채로 날아갔을 테니까.
“윽……?!”
가드를 올린 팔 사이로 제라드의 얼굴이 보였다.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한 순간 제라드의 표정이 당혹감에 물들었다.
빌어먹을. [관조]의 영향이다.
이 눈은 상대에게 압박감을 준다.
내게 숨겨둔 패가 있다는 것처럼 인식됐을 수도 있다.
대비해야 한다. 제라드가 조금 더 본격적으로 나설 거다.
타─앙!
제라드의 반대쪽 주먹이 날아오기도 전에 뒤로 몸을 꺾어 피했지만 그래도 부족했다.
하지만 가까스로 제라드의 팔목을 손바닥으로 쳐 내 공격을 어떻게든 흘려 낼 수는 있었다.
공격을 중간에 파훼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팔목을 쳐 낸 손바닥이 아릿하다.
이게 스킬에 해당하는 기술도 쓰지 않고 단순한 신체 능력으로 발휘하는 기술이 맞는 걸까?
괴물이 따로 없다.
그럼 이제 다음은 뭐지? 어떤 방식으로 공격을 이을 생각인 거지?
집중한다. 보다 느려진 듯한 세계 속에서 제라드의 오른팔이 나를 향해 뻗어져 오는 걸 직시한다.
지금 내 자세는 안 좋다.
뒤로 몸을 꺾으면서도 제라드의 팔을 쳐 낸 탓에 균형 감각이 완전히 무너진 상태다.
그래, 나는 균형을 잃고 쓰러지고 있다.
그렇다면 상대의 공격은 나를 찍어 누르는 형태가 될 확률이 높다.
어차피 제라드 역시 몸의 중심이 쏠려 있기에 제대로 된 일격을 가할 수는 없을 거다.
다시 한번 가드를 올린 채 몸을 최대한 웅크린다.
이번 공격 역시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다소의 피해를 감수하더라도 다음으로 이어야 할 터.
“흡!”
“뭣……?!”
하지만 달랐다. 제라드는 내 가드 위로 주먹을 날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 제라드는 가드를 올린 내 팔을 붙잡았다.
“어……?”
그리고 나는 하늘을 날았다. 아니, 던져졌다.
그 순간 깨달았다.
지금 상태로는 그 어떤 수를 써도 제라드의 공격을 막을 수 없다.
외통수다, 하지만 제라드는 추가 공격을 하지 않았다.
승부는 이미 났다.
그 사실을 제라드와 나, 그리고 이 자리에 모여 있는 모두가 알 수 있었다.
공개적인 장소에서 이러한 굴욕.
평소라면 지양했겠지만 공략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후……. 역시 천재는 다르군요.”
공중에서 가까스로 착지한 나를 향해 제라드가 친근감 어린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그 걸음걸이에는 여유가 느껴졌고 얼굴에는 여전히 친근한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굳이 [관조]가 아니더라도 그가 당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수고하셨습니다. 방금 전 무례는 사과드리겠습니다.”
“예? 아니요. 방금 일로 열정을 가질 수 있었다면 오히려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감사합니다.”
애초부터 무시할 생각은 없었다.
조금이라도 상대의 역량을 파악하고자 했을 뿐이다.
그 결과 확신할 수 있었던 건 지금의 나로서는 제라드를 이길 수 없을 거라는 객관적인 지표였다.
그러니까 내가 이기기 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하다.
“제라드 교수님. 혹시 앞으로도 종종 이런 대련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예?”
그와 대련을 하다 보면 그가 가지고 있는 버릇과 즐겨 쓰는 기술들을 확인해 둘 수 있을 거다.
물론 실전에서는 생각보다 도움이 안 될 수도 있었다. 그가 가진 버릇들을 알고 있다고 해도 오랜 세월을 단련해 온 당사자가 그걸 모를 리가 없다.
대응책 하나둘 정도는 마련해 놨겠지 더군다나 그는 어찌 됐든 전투술을 가르치는 교수가 아닌가?
짧은 시간 배우게 될 내 조잡한 기술 따위는 의미가 없을 거다.
“지금 제가 처해 있는 상황은 생각보다도 위태롭습니다. 혹시 조금이라도 좋으니 저를 단련시켜 주지 않겠습니까?”
“아! 예, 문제없습니다. 하하하하! 안 그래도 수업 커리큘럼 중에는 대련이 있습니다. 오즈 학생의 신체 능력이 생각보다도 높으니 제가 직접 상대를 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할 행동은 반대다.
나는 끈질길 정도로, 이해가 안 될 정도로
같은 허점을 내보일 거다. 같은 실수를 반복할 거다.
내가 처음부터 제라드라는 인간을 알고 있기에 미리 준비해 둘 수 있는 함정.
그 정도는 되어야 그를 함정에 빠트릴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며 비수가 될 거다.
“감사합니다. 제라드 교수. 그럼 체조부터 시작할까요?”
“하하하하! 이해해 주셔서 다행입니다, 오즈 학생. 몸을 푸는 건 중요한 일이거든요!”
미안한 일이지만.
나는 제라드에게 가장 치명적인 거짓말들을 보여 줄 예정이다.
그가 나를 이해할 수 있는 날은 영원히 오지 않을 거다.
* * *
화요일의 요일 던전이 불 속성이었듯 수요일의 요일 던전은 당연하게도 수 속성의 던전이다.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지하를 향하는 던전의 입구부터 물이 가득 차올라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니 이거…….”
괜찮은 거 맞지?
화요일의 요일 던전은 용암 지대였지만 뜨겁지는 않았다.
그러니 이곳도 마찬가지일 거다.
물이 고여 있다고 해도 움직임이나 호흡에는 문제가 없을 거다.
“흡!”
숨을 크게 들이쉰 채로 던전 내부로 진입했다. 배경이 물속이긴 하지만 움직이는데 저항감은 없다.
아마 숨도 쉴 수 있겠지만 그래도 거부감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푸하!”
한계까지 숨을 참다가 일단 던전 밖으로 나왔다. 나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덜 됐었나 보다.
칼에 찔리거나 마법에 당한다는, 지금까지 실제로 경험해 본 적 없는 미지의 공포보다 코에 물이 들어가서 생길 고통이 더 걱정됐다.
새로운 사실을 알았네.
“후욱…… 후욱…….”
한동안 숨을 몰아쉰 다음 옷을 확인해 봤다. 축축하기는커녕 물기 하나조차 없다.
그러니까 던전에 고여 있는 저 물은 환각이나 다름없다는 소리다.
그걸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좋아, 다시 가 보자.”
한동안 멍하니 던전의 입구를 쳐다보다가 다시 결단을 내렸다. 이번에는 숨을 들이쉬지도 않았다.
나는 이미 각오를 마쳤다.
코에 물이 들어가는 것쯤이야 잠깐 견디면 될 고통에 불과하다.
사레 걸린 듯이 기침 몇 번 하고 코가 미지의 매운 느낌에 잠시 동안 고통스러울 뿐이다.
“어……?”
하지만 내 굳은 각오에도 불구하고 들어갈 수 없었다.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거나 하는 나약한 소리가 아니다.
무언가에 막힌 듯 던전에 들어설 수 없었다.
감촉이 느껴지지 않는 투명한 벽 같은 게 던전 입구를 막고 있다.
[관조 – 활성화]즉시 [관조]를 활성화한 후 던전의 입구를 살폈다.
이상 사태다. 하지만 어느 정도 예상이 가는 것도 있었다.
그 예상이 옳다면 [관조]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게 당연하다.
“……역시 안 보이네.”
예상대로. 이치를 꿰뚫어 본다는 [관조]로 저 정체불명의 막을 해석할 수 없었다.
해석하려는 낌새조차 없다.
지금까지 [관조]로 기초적인 해석조차 불가능했던 것들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그게 게임 내 시스템으로 구현된 경우다.
내가 사용하는 [마나의 지배자]나 [공간 방벽]이 그 원리를 알 수 없듯이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일일 제한인가?”
게임 대부분이 그러하듯 요일 던전에는 일일 제한이 있는 법이었다.
게임에서는 원하는 층을 1회 도전할 수 있었다.
화요일 때는 1층부터 쭉 밀고 내려갔기에 그런 제한이 없는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제한은 던전에 들어가는 것 자체에 해당됐다.
“더 병신이 됐네.”
원래 게임에서는 클리어 실패 시 기회를 빼앗지는 않았는데 야박할 따름이다. 어찌 됐든 오늘의 요일 던전은 막혔다.
초급 마법
[스태틱 볼]파직─!
시험 삼아 초급 마법을 날려 봤지만 예상대로 마법은 벽을 통과하거나 파괴하지 못했다.
[마나의 지배자 Lv. 1]일반적인 마법으로 막을 통과할 수 없다면 [마나의 지배자]를 사용한 스킬이라면 어떨까?
“으음…….”
[마나의 지배자]로 인해 뭉텅이로 빠져나가는 마나의 흐름에는 아직까지도 익숙해지지 않는다.오즈가 가진 마나의 총량은 상상 이상으로 많다. 초급 마법 정도라면 종일 난사할 수 있을 정도다.
마법의 난이도가 올라갈수록 소모되는 마나량도 많아지긴 하겠지만 이렇게 급격한 속도로 사라지지는 않을 터다.
다른 마법이 수도꼭지를 열어 물을 받는다는 느낌이라면 [마나의 지배자]는 지하수 자체를 양동이로 퍼내는 느낌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무튼, 그런 방식으로 완성된 마법은 N등급 마법사들이 사용하는…….
[디그]“빌어먹을, 제발 좀!”
이런 조잡한 상황에서까지 이러기야? 공격 마법 좀 나오라고!
그래, 이왕 완성된 마법을 낭비하기도 싫으니 다른 실험을 진행해 보기로 했다.
던전의 입구 근처를 완성된 [디그]로 파 봤다.
뭔가에 간섭당한 듯이 안 파진다.
그 후 SR등급 이상의 스킬이 나올 때까지 [마나의 지배자]를 반복했다. 하지만 위력이 높다고 해도 벽을 부술 수는 없었다.
일종의 법칙 같은 것에 보호받고 있다고밖에 생각할 수가 없다.
그리고 그 법칙에 가장 가까운 건 아마도…….
“‘바깥’인가?”
법칙으로 지켜지고 있는 던전의 입구와 깨져 나간 하늘과는 모종의 관계가 있다. 그리고 아마 내가 가진 게임스러운 능력들도.
* * *
약 일주일이 지났다.
수요일의 요일 던전에서는 뭐가 나오는지 확인하지 못했지만 아마 포션의 재료인 이 나왔을 거다.
목요일과 금요일의 요일 던전에서는 장비의 제작에 필요한 각종 목재와 금속류들이 나왔으며 월요일은 장비 강화용 재화인 이 나왔다.
지금은 얻는다고 해도 대부분 쓸 수 없는 것들이었기에 요일 던전에 들어가는 시간을 줄인 채 수업에 전념하기로 했다.
그중 제일 중요한 건 역시 중급 마법학 수업이다.
“그, 그, 그러니까…… [파이어 월]의 구성 술식은…….”
[관조 – 활성화]“여, 여기서 ‘고정화’와 ‘상승’의 술식을 엮어서…….”
아이라 교수가 주관하는 중급 마법학은 지금의 내게도 중요한 과목이기에 첫날 이후부터는 빠지지 않고 있다.
안타깝게도 초급 마법과는 달리 한두 번 본 정도로는 중급 마법을 사용할 수 없었다.
내가 아직 오즈의 지식을 녹여 내지 못하고 있는 게 문제였다. 정확하게는 술식을 그려 내지를 못했다.
“그 사이사이에 ‘발화’의 수식을 넣으면…….”
오즈에게 받은 지식이 있고 마법을 이루는 구성 술식을 알게 됐다고 해도 정작 그걸 그려 내는 건 나였기 때문이다.
마법은 상당히 복합적인 방식으로 사용된다.
게임이나 만화에서 나오는 것들은 수학적인 면모가 많았지만 의 세계에서는 미술 쪽에 가까웠다.
“이런 식의 술식이 완성되는데요…….”
마법의 구성 술식은 한 폭의 문장을 그려 내는 것과 같았다.
초급 마법이 단순한 원 안에 직선이 얽혀 그림을 이루고 있었다면 중급 마법부터는 곡선이 유려하게 섞여 들어갔다.
더군다나 고급부터는 그 영역이 3차원에 달했으며 그 이상의 마법들은 일종의 예술이라고까지 할 수 있었다.
“흐음…….”
“읏! 오, 오즈 학생? 뭐, 뭔가 잘못된 건가요?”
“아뇨, 괜찮습니다. 계속 진행하시죠. 다른 학생들이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까?”
“으으윽…….”
당연하지만 마법은 단순히 미술을 잘한다고 해서 잘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마나로 술식을 그릴 때 남들은 마나 자체를 정제하는 것부터 시작했기 때문이다.
수도꼭지에서 원하는 양의 물감만을 조절해서 받아 내는 느낌이다.
물론 나는 [관조]의 능력으로 처음부터 연필을 들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었다.
문제는 내가 그림을 엄청 못 그린다는 사실 뿐.
내 의지는 직선을 그리려고 하는데 자꾸 곡선이 그려진다.
이상하네……. 이게 왜 이럴까?
“아이라 교수님. 다시 보여 주실 수 있겠습니까?”
“오즈 학생……. 제가 뭘 틀렸다면 차라리 말을 해 주세요.”
“괜찮습니다.”
“저, 잘 할 수 있다니까요? 방금 전은 조금 컨디션이 안 좋아서 실수한 거예요. 상급 마법사 지위는 정당한 방법으로 획득했다고요! 제대로 시험도 봤어요!”
“압니다.”
아이라 교수는 게임의 인상과 달리 상당히 귀찮은 사람이었다.
게임에서는 의미심장하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지닌 미녀였는데 지금은 늘 불안에 물들어 있는 게 비 맞은 강아지 같다.
물론 내 입장이 입장인지라 저 반응은 이해가 간다.
작업 중인데 사단장이 와서 의미심장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기분일 거다.
물론 나는 사단장이 아니고 지금은 반쯤 내쳐진 상태라서 그럴 권한도 없다.
아이라 교수도 그걸 모르는 건 아닐 테지만……. 아무래도 오즈가 그녀보다도 아득한 윗사람이라는 사실 자체가 불편한가 보다.
그런데 저렇게 발작하듯 반응하면 오히려 의심스럽다는 생각은 안 하는 걸까?
아니, [관조]의 특징을 생각해 본다면 저런 반응이 당연한가?
물론 나는 [관조] 없이는 아직 마법을 제대로 사용할 수 없었기에 [관조]를 비활성화할 생각은 없다.
“다, 다음 마법은 현상 마법의 중급에 해당되는 [파르마 실드]의 구성 술식인데…….”
[파르마 실드]는 중급 마법에 해당되지만 게임에서 스킬로 존재하지 않았다.작은 원형의 방어막을 만들어 내는 스킬이라고 하는데 피격 면적이 작아서 별로 쓸모는 없을 거 같다.
그래도 일단 처음 보는 마법이 아닌가?
여기서는 필기라도 해 둬야겠다.
“지금 뭘 적은 거죠?!”
“아이라 교수님, 저는 신경 쓰지 말고 수업을 하시죠. 다른 학생들이 불안해하고 있지 않습니까.”
“저는 오즈 학생이 그런 무서운 눈으로 저를 쳐다보고 있는 게 더 불안……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저는 아무 불만도 없어요! 그, 그러니 방금 적은 건 지워 주시면…….”
“…….”
진짜 피곤한 사람이다.
결국, 중급 마법학 수업은 필기구를 치운 채 머릿속으로 암기했다.
다행히 오즈의 육신은 마법에 있어서는 암기력도 뛰어났기에 별문제는 없었다.
* * *
중급 마법학을 제외한 다른 과목 중에 지금 집중해야 할 건 한 가지밖에 없었다.
제라드가 가르치는 기초 전투술이다. 그와 엘레노아의 일을 어떻게 처리할지는 사실 최근까지도 고민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티아에게 말해 볼까도 싶었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심증 외에는 증거가 없다.
마나의 맹세를 들먹이면 신경 써 주기는 하겠지만 그것도 안 된다.
가장 중요한 건 티아가 엘레노아의 정체를 아직 모른다는 거다.
그녀는 압도적인 힘을 가진 용이었기에 학원에 다니는 인원들을 조사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마나의 맹세까지 들먹인다면 그녀가 엘레노아라는 존재에 의문을 품지 않을 리가 없다.
나와 제라드에게 어떤 경위가 있었는지를 추궁하겠지.
아직 엘레노아의 정체를 밝힐 수는 없다. 아니, 정체까지는 그렇다 쳐도 그녀가 Key Person이라는 것만큼은 반드시 숨겨야 한다.
아직도 갈피를 못 잡고 있는 하늘의 균열 현상.
그 현상에 대한 단서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으며 동시에 티아 본인과 같은 Key Person.
그 사실을 초기에 들키게 된다면 메인 스토리가 너무 꼬인다.
나는 기본적으로 메인 스토리를 곧이곧대로 따라갈 생각은 없었지만 몇몇 예외는 있다.
그건 Key Person들 사이의 관계성이다.
그들의 관계가 너무 일찍 변화한다면 메인 스토리의 난이도는 갑작스럽게 뛰어오를지도 모른다.
“흡!”
“큭!”
그렇기에 이번 일은 내가 처리해야 한다.
그걸 위해 나는 제라드와의 대련을 반복하면서 버릇을 하나 꾸며 냈다.
“……당황하면 왼팔을 뻗는 버릇이 있으시군요. 무의식중으로 상대를 저지하려고 하는 거겠지만 나중에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나중이 아니라 지금도 그렇다고 느껴지는군요…….”
나는 궁지에 몰릴 때면 항상 왼팔을 뻗어 왔다. 굳이 그 방법을 선택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기초 전투술 수업 첫날 그가 나를 마무리 지을 때 한 행동이 던지기였기 때문이다.
“검사가 상대라면 팔이 잘릴 거고 저 같은 격투가가 상대라면 관절이 박살 나거나 던져질 겁니다.”
“머리로는 알고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힘들군요.”
“이해합니다. 긴급한 상황에서 생기는 버릇이라는 건 원래 고치기 힘든 법이니까요.”
“예…….”
그는 관절기보다는 상대를 공중으로 던져 놓고 무방비한 상대를 향해 공격하는 걸 좋아한다.
그렇기에 그가 붙잡고 던지기 쉽도록 팔을 내주고 있다.
가끔 착지에 실패해서 발목이 작살날 때도 있었지만 계획은 착실하게 진행돼 가고 있다.
“제라드 교수님, 제가 일주일 내로 이 버릇을 고칠 수 있을 거 같습니까?”
“일주일 말입니까? 음……. 그러고 보니 이제 곧 1학년 실습 시기가 다가오는군요.”
“예, 될 수 있으면 그사이에 고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만…….”
제라드와 나를 쳐다보고 있는 학생들을 가리키며 내 약점이 이미 수많은 사람에게 퍼져 있다는 뜻을 피력하자 그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일주일은 힘들 거 같군요. 애초에 그런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도록 하는 게 최선일 겁니다.”
“그렇군요…….”
이걸로 첫 번째 계획은 완성됐다.
그는 적어도 내가 이 버릇을 일주일 내로 고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다면 실전에서도 마찬가지일 거다.
1학년의 첫 번째 실습은 앞으로 일주일 뒤.
엘레노아에게 분노를 표출하게 될 제라드의 빈틈을 관통할 한 자루의 비수가 완성됐다.
“다시 한번 부탁하겠습니다.”
“열정적인 학생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요.”
그리고 나는 조금 전과 같이 왼팔을 붙잡힌 채로 내던져졌다.
“풋.”
계속해서 같은 방식으로 던져지는 나를 보며 주변 사람들이 숨죽여 조소하기 시작했다.
그래, 웃어라. 나를 웃음벨로 만들어 봐라. 절대로 성공할 수 없을 거라는 편견을 심어라.
너희들의 그 조소가 내 비수를 더욱 날카롭게 만들어 줄 테니까.
17화
“보고는 이상입니다. 학원장.”
“엉, 그래. 수고했어.”
나는 조사한 요일 던전에 대한 정보를 티아에게 전했다.
물론 이나 같은 게임 속 재화의 존재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그게 모두에게 나오는 건지, 아니면 게임 캐릭터에 가까운 나에게만 나오는 건지 확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뭘.”
“실습 장소로 사용하실 생각이십니까?”
“아니.”
오늘따라 왜 이렇게 단문일까?
평소였다면 불합리할 정도로 불평을 말했을 텐데 오늘의 티아는 기분이 상당히 언짢아 보였다.
물론 분노는 아니다. 그냥 뭔가 마음에 응어리진 게 있기라도 한 듯 정신이 딴 곳에 팔려 있다.
“왜입니까? 난이도는 적당한 거 같던데.”
“네가 보기에는 이 던전이 정상 같냐?”
“정상은 아니죠. 이상한 현상이 관측되지 않습니까?”
의 던전은 보통 하나의 챕터로 이루어져 있었다.
요일 던전 같은 경우는 재화 수급을 위해 단조로운 난이도로 추가했을 뿐 나머지 던전은 하나의 지역이라고 보는 편이 옳았다.
하지만 요일 던전 1일 입장 제한이나 겉보기로만 위협적인 환경처럼 이상한 법칙에 휩싸여 있었다.
“그래, 정상이 아니야. 그런데 최근 그런 종류의 던전이 많이 늘어났다는 거 같더라.”
“그게 고민이신 겁니까?”
“그렇지……. 하늘도 그렇고 세상이 미쳐 돌아가고 있잖냐. 너 같으면 가만히 있을 수 있겠냐?”
“예, 가만히 있습니다.”
“…….”
적어도 당분간은 할 수 있는 게 없다.
바깥의 존재들에 대한 침범은 이미 진행 중이지만 여기서 어떻게 손 쓸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그러냐……. 하긴 나도 이해를 못 하고 있는데 인간인 너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문제기도 하지.”
“오늘따라 기운이 없으시군요.”
“아니, 이게 내 기본 상태거든? 네가 시도 때도 없이 지랄을 해 대니까 나도 성질이 뻗치는 거라고 이 미친 새끼야!”
“화를 참는 건 몸에 안 좋다고 합니다. 학원장.”
“……내가 안 참았으면 너는 갈기갈기 찢겨서 죽었어.”
티아가 정색한다.
그렇구나……. 저게 나름대로 절제하고 참은 거였구나…….
앞으로는 적당히 해야겠다.
뇌물의 의미로 사탕을 내민다.
최근 잘 팔리는 사탕이라고 하니 티아도 좋아할 거다.
요즘 티아가 나를 너무 혐오하는 거 같아서 뇌물을 준비해 봤다.
세계관 최강자에게 밉보여서 좋을 게 없지 않나?
“저리 안 치워?”
“음……? 단 걸 좋아하시는 거 아니었습니까?”
늘 입에 사탕을 달고 다니기에 그런 줄 알았는데? 그럼 뭐지?
혹시 금연 사탕이었나?
하긴 화룡이라서 담배를 좋아했을지도 모르겠다.
끝에서 불이 타오르고 있으니까 까마귀가 반짝이는 걸 좋아하는 거랑 비슷한 감성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젠 일단 교육자니까 금연을 위해서 끊은 건가?
“이건 그냥 내 어린 외모를 부각하기 위해서 물고 있는 거야. 이 모습으로 폴리모프하고 있으면 내가 사고 쳐도 어린아이의 철없음으로 무마시킬 수 있거든.”
“비겁하군요…….”
“인간들은 효율적인 방식을 비겁하다고 하더라?”
어른의 비겁함과 어린아이의 철없음을 겸비한 쓰레기 같은 존재가 눈앞에 있었다.
“아, 나 조만간 타지에 나가 봐야 하니까 그동안 사고 치지 마라? 이번에는 진짜로 죽인다? 목을 비틀어 뽑아 버릴 테니까 명심해라?”
“……걱정하지 마시죠. 학원장.”
정말이지 섬뜩한 말을 하는구나.
* * *
일주일이 흘러 1학년 학생들의 공동 실습이 시작됐다.
1학년의 첫 번째 실습은 두 집단으로 나뉜 채 진행된다.
마법사나 전사, 수호자, 헌터 같은 전투 계통 학생들과 성직자 같은 지원 계통으로 나뉘었다.
전투 계통 학생들의 실습은 울창한 숲속에서 학생들끼리 기습과 임기응변 등을 이용해 전투를 이끌어 나가는 모습들을 평가하기 위해서였기에 어쩔 수 없었다.
애초에 지원 계통 학생들이 1:1로 전투 계통 학생들과 같은 무대에 선다는 것 자체가 웃기는 일이다.
전투 계통 학생들 사이에는 그나마 상성이라고 할 게 있지만 지원 계통 학생들은 마주치면 끝이다.
애초에 그들을 공략하는 게 전투의 일차적인 목표로 여겨지는 수준이니 그들이 전투 계통 학생들과 같이 실습에 참여한다고 해 봤자 걸어 다니는 표적이 될 뿐이리라.
게임에서도 마찬가지.
사수들이 원거리에서 강력한 화력으로 상대를 쓰러트린다는 역할을 가지고 있었다면 수호자들은 그런 공격에서부터 파티원들을 지키는 역할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수호자들의 방어를 무너트리고 상대의 진영을 파괴하는 게 전사의 역할.
그렇게 들어온 전사를 높은 화력과 상태 이상으로 무력화시키는 게 마법사의 역할이다.
개돼지 게임이었지만 얼추 직업간 밸런스는 맞았었다. 결국 인플레가 진행되다 보니 만능캐가 등장하기 시작해서 망했지만 말이다.
물론 지원 계통 캐릭터들은 아군 진영이 박살 나는 순간 허수아비로 전락하는 거나 다름없다.
“어, 흠! 지금부터 1학년 공통 실습에 대한 개요를 다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실습은 숲속에서 이뤄질 겁니다. 각자 다른 장소에서 시작될 예정이며 다른 학생들을 발견해서 쓰러트릴 때마다 점수가 부여될 예정이죠.”
실습은 간단히 말해서 교수들의 주관하에 이뤄지는 데스 매치.
애초에 전투계통 학생들의 실습인 이상 전투를 피할 수는 없다.
싸워서 점수를 얻고 상대를 탈락시켜 최후의 1인이 남을 때까지.
그게 이번 실습의 개요다. 참으로 야만적이지 않을 수가 없다.
“지급해 드린 망토에 새겨진 방어 마법이 50% 수치까지 파괴된다면 가까운 시험관에게로 전송될 겁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하셨겠죠? 이 망토는 학생들을 보호하는 역할도 하고 있지만, 생명선 역할을 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망토의 내구력과 상대에 대한 상성이 있으니 만나면 무조건 싸움을 걸 게 아니라 지형지물을 잘 이용해서 기습하거나 망토의 방어 마법만을 노려 전투 자체를 회피하는 것도 방법이다.
“다른 건 둘째치더라도 티아마트 학원장님께서 지급한 망토만큼은 잊어선 안 됩니다?”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 사이 시험의 총감독관 역할을 맡은 고급 마법학 교수, 프루덴스 로아가 학생들에게 주의하라고 경고하고 있었다.
이것저것 의외로 바쁜 사람이다.
“어디…….”
내 몸을 감싸고 있는 붉은색 망토를 [관조]로 확인해 본다.
당연하지만 티아 학원장이 만든 마도구이니 만큼 이 망토에는 여러 가지 마법이 걸려 있다.
어지간한 일이 아니라면 상처 입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거다. 하지만 내 전용 장비보다는 뒤떨어진다.
“아, 오즈 학생. 여기 있으셨군요. 찾아다녔습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그렇게 홀로 마도구에 대한 승리감에 취해 있자 방금 전까지 시험 방식에 관해 설명하고 있던 프루덴스 로아 교수가 다가왔다.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는 노교수의 눈에는 미약한 투지의 불꽃이 감돌고 있었다.
티아 학원장이 직접 스카우트해 온 인재라고 하더니 그 성향이 벌써 보이는 것 같다.
“어, 흠! ……알고 계시겠지만 망토의 성능이 완벽하다고는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상급에 해당하는 공격 마법의 사용은 금지하게 될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나 정도 수준의 마법사가 상급 마법을 사용한다면 망토에 새겨진 방어 마법을 관통해서 상처 입힐 확률이 존재한다는 뜻일 거다.
“애초에 학생들을 상대로 상급 마법을 사용할 생각은 없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쉽게 말해서 내게 페널티를 부과하겠다는 소리다.
오히려 좋다. 결국,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변명거리를 만들어 주겠다는 소리가 아닌가?
어차피 지금의 나는 상급 마법을 쓸 수도 없으니 다행이다.
“허허허,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다른 학생들에게도 가 봐야 하니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프루덴스 로아 교수가 떠나간다.
아마 이와 같은 부탁을 할 대상은 나만이 아닐 거다.
아마 SSR에 해당되는 학생들에게는 모두 말을 걸겠지.
그 증거로 그는 이어서 1-2반 소속의 알렉시오스를 향했다.
[권왕]의 비기 역시 티아가 걸어 놓은 방어 마법을 꿰뚫을 위력이 있을 테니 당연한 일이다.“…….”
그렇게 프루덴스 로아 교수가 향하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자니 알렉시오스가 나를 향해 살기 어린 눈빛을 보내기 시작했다.
한결같은 녀석이다.
응해 줘도 상관없겠지만 나는 어린애가 아니다.
그래서 그냥 간단하게 중지를 올려 줬다.
“이 새……!”
알렉시오스가 뭔가를 소리치려고 했지만 어른인 나는 저런 어린애와 놀지 않는다.
그대로 무시한 채 엘레노아를 찾아 나서기로 했다.
주인공이라서 그런지 그녀가 관심 종자라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비교적 찾기 쉬웠다.
“노아.”
“스승? 도대체 지금까지 어디 있었던 건가요!”
엘레노아를 찾아내서 다가가자 그녀의 곁에 루시아를 제외하고도 한 명의 여학생이 더 보였다.
[관조 – 활성화]웨이브진 흰색 머리카락이 허리 높이까지 내려와 있었으며 눈은 요사스러운 보라색이다.
아리에타의 머리카락이 순수하다는 느낌이 난다면 이쪽은 차가운 설산 같은 느낌이었다.
“히끅……. 우후후후후. 처음 뵙겠습니다. 오즈 님~ 이렇게 만나 뵙게 돼서 영광이네요오오.”
“우리 같은 반인데 말이지.”
“아이 참? 사소한 일은 신경 쓰지 말아요오.”
그녀의 정체는 출신의 캐릭터이자 도깨비 왕의 부하인 중 하나.
[SR 백도깨비]백양(白蜽)
게임에서는 6장에서 다뤄지는 에서 도깨비 왕과 함께 등장했던 캐릭터 중 하나다.
안타깝게도 스토리 비중은 별로 없었다. 딱 봐도 SSR등급 캐릭터인 도깨비 왕과 함께 구색 맞추기로 나왔던 캐릭터였는데.
어쩌다가 이런 초장부터 엘레노아와 엮여 있는 건지 모르겠다.
도대체가 엘레노아의 행동 패턴을 종잡을 수가 없다.
“그나저나 얘는 왜 취해 있어?”
“도깨비는 술을 마시지 않으면 죽는다고 하던데요? 그래서 제가 몰래 가져다줬어요.”
“노아는 착한 아이라니까요오?”
“그렇지? 그렇지? 역시 백양도 그렇게 생각하지? 우리 노아가 착하고 귀엽다니까?”
머리가 이상한 엘레노아와 이상한 연극 조로 말하고 있는 루시아만으로도 벅찬데 이상한 녀석이 하나 더 늘어났다.
이 3명은 모두 머리가 새하얗다고 할 정도로 비어 있는 데 비해 속은 기분 나쁠 정도로 검다.
엘레노아는 태연하게 사람을 속인다. 그 멍청하고 순수해 보이는 표정 뒤에는 능구렁이가 있다.
루시아는 어디든 자연스럽게 섞여 들어간다. 정신 차려 보면 대화에 참여하고 있는 그녀를 볼 수 있었다.
도깨비인 백양에 이르러서는 따로 말할 것도 없다. 그녀는 종족부터가 도깨비다. 사람을 속이고 장난치는 게 일상인 존재다.
“나는 가끔 너희들과 대화하는 게 두려워질 때가 있어.”
“그런가요? 그래도 일단 만나게 돼서 다행이에요, 스승. 안 그래도 모두와 함께 작전을 구상하고 있었거든요.”
“무슨 작전을 세우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부탁이니까 선도부에게 잡혀갈 짓은 하지 마라.”
“후후후, 걱정하지 마세요. 이번 작전은 선도부의 시선조차도 완벽하게 피할 수 있을 테니까요.”
“눈앞에 있는 나는 안 보이니?”
이 쾌락 범죄자 녀석이?
너무 당당해서 한순간 내가 선도부가 아닌 줄 알았다.
그래도 이 정도면 됐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범행 계획을 세우고 있다면 그녀를 선도부로 인도해도 아무 문제가 없을 거다.
“노아, 잠깐 선도부 캠프 쪽에 가서 얘기 좀 할까?”
“……아무리 그래도 같은 방법에는 당하지 않아요. 스승.”
엘레노아가 비장한 표정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건 쫓아가면 안 된다. 그런 관심은 오히려 그녀가 원하는 거다.
그러니 여기서는 다른 방향으로 가야 한다.
반쯤 술에 취해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 백양은 무시한 채 루시아를 향해 손짓한다.
“불어, 루시아. 도대체 저 머저리가 뭘 꾸미고 있는 건데?”
“하아……. 오즈 왕자. 재미있게 놀고 있었는데 찬물을 끼얹는 행동은 지양해 주면 안 될까?”
“……네가 엘레노아랑 친하게 지내고 있어서 다행이긴 한데 지금 상황이 별로 안 좋거든?”
“제라드 교수 말인가?”
하긴 이 좁은 아카데미 내에서 제국의 첩보부인 가 저만한 정보를 모를 리가 없다.
“너희들은 어떻게 하기로 했지?”
“일단 감시를 유지한 채 내버려 두라더군. 뭐, 위험하다 싶으면 개입하기는 하겠지만.”
“그래? 그럼 필요 없으니까 얌전히 찌그러져 있으라 해.”
“직접 나설 생각인 건가?”
메인 스토리 1장에서 원망의 방향성을 착각한 제라드 교수는 엘레노아를 습격한다.
비수와 같은 말들이 엘레노아를 상처 입히게 될 거다.
물론 그 상처를 통해 나중에 정신적인 성장을 이룩할 수도 있겠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애초에 각오를 끝마치고 흉터로 남았던 상처를 굳이 끄집어내서 다시 상처를 입힐 필요는 없다.
“그래, 그러니까 전해.”
게임에서 그는 엘레노아의 눈앞에서 죽는다.
죽음의 위기에 몰린 엘레노아를 지키기 위해 보다 못한 제국이 개입해서 사살해 버린 거다.
엘레노아에게 상처가 된 건 제라드의 원한 섞인 목소리가 아니다.
또다시 크리소스의 왕국민을 지켜 내지 못했다는 자책감이다.
그녀는 그렇게 상처받으면서도 성장할 거다. 정신적으로 단단해질 거다. 하지만 굳이 그런 상처는 필요 없다고 생각된다.
“네 말대로 내가 직접 나설 테니까 휘말려서 뒤지기 싫으면 그 근처에서 어슬렁거리지 말라고.”
오만하고 이기적인 내가 그렇게 정했다.
* * *
실습의 시작과 동시에 학생들은 아이라 교수의 마법으로 인해 제각각 다른 장소로 날려 보내졌다.
나를 날려 보내면서도 필사적으로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아이라 교수 때문에 다소 불안하기는 했지만 다행히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었다.
[관조 – 활성화]실습이 시작됨과 동시에 [관조]를 최대로 활성화한다.
여기가 어딘지, 주변에 뭐가 있는지가 정보로 전해졌다.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는 존재가 [관조]에 포착됐다.
그 움직임은 불안정하게 흔들렸으나 명확하게 나를 향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하긴 이매망량이 단순히 놀려고 오지는 않았겠지.”
“히끅……. 오즈 님 안녕하세요오~”
의 일원 백양이 술에 취해 흔들리는 발걸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너랑 놀아 줄 시간은 없는데. 지금 돌아가면 봐줄 테니까 조용히 꺼지는 게 어때?”
“우후후후후. 너무 강한 말은 하지 마세요오.”
“약해 보여서?”
그 대사 하려는 거야?
나도 허세용으로 몇 번 말해 볼까 싶었지만 포기한 문장이다.
그건 좀 너무 그렇다.
“두령님이 말 했어요오. 세상은 넓으니 그 넓은 세상을 확인해 보고 오라고요오.”
“그럼 여행이나 떠날 것이지 왜 여기서 놀고 있냐?”
“우후후후후. 이 장소만큼 세상을 작게 축소한 장소가 어디 있겠어요오?”
이해는 된다.
전 세계에서 온갖 인간군상이 다 모이는 는 세상의 작은 축소판이라고 해도 좋을 거다.
“그보다 괜찮겠어요오? 저는 도깨비 숲에서도 알아주는 수호자인데 이렇게 거리를 좁히게 놔둬도.”
“별로 상관은 없겠는데.”
마법사 직업군과 수호자 직업군 간의 상성은 애매하다. 애초에 수호자는 방어가 특화된 캐릭터다.
마법사의 공격은 상태 이상이 섞여 있어서 어느 정도 발목을 묶을 수 있지만 수호자 역시 상태 이상 저항 능력이 낮은 편이 아니다.
즉 둘의 싸움은 저지와 접근의 싸움이 된다는 소리다.
“우후후후, 오즈 님은 페널티로 상급 마법의 사용을 금지 당했죠오? 그런데도 저를 상대로 여유라니 우습네요오. 역시 소문대로 오만이 지나친 게 아닌지?”
[침식도 22%]“오만?”
오즈의 [마나의 지배자]는 마법사 캐릭터의 스킬이라면 전부 사용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중에서 가장 쓸모없는 스킬이 뭐였을까?
“지금 누가 누구더러 오만하다는 거지?”
초급 마법이라도 마법 계수가 있는 한 데미지는 줄 수 있다.
하지만 한 가지, 정말이지 쓸모없는 스킬이 있었다.
“그런 긴장감 없는 태도로 감히 누구에게?”
마법사 캐릭터들의 기본 공격은 마법력 계수를 가진 [마력탄].
어지간해서는 [마력탄] 이외의 물리적인 공격을 볼 기회가 없었다.
최근 일주일 동안 나는 수업에 참여하며 중급 마법을 익혔다.
하지만 아직 미숙하다.
아무리 노력해도 구성 술식을 그리는데 아직 시간이 걸리고 만다.
그래, 선택과 집중을 할 필요가 있었다는 거다.
그렇기에 나는 계획을 위해서 두 가지 마법의 구성 술식을 그리는 걸 집중해서 연습하기로 했다.
중급 마법
[신체 능력 강화]게임에서는 물리 공격을 할 일이 없던 가장 무용지물이었던 스킬이 지금 이 순간 최선의 공격 방법으로 변했다.
“편견, 무서운 단어지. 너만 해도 나를 단순한 마법사로 보고 오만하게 굴었으니까 말이야.”
콰앙!
무방비하게 접근하는 백양에게 오히려 다가가 얼굴을 붙잡고 내려찍는다.
“커흑?!”
내가 육탄전을 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않아 대응하지 못했을 거다.
후두부부터 머리를 부딪친 백양이 토해내듯 숨을 내뱉는다.
정면으로 붙었다면 내가 졌겠지만 내 마법만을 조심한 채 너무 안일하게 다가온 대가다.
“마지막으로 기회를 줄게. 더 이상 짜증 나게 하지 말고 내 눈앞에서 조용히 꺼져.”
“네, 넵…….”
[신체 능력 강화]를 사용한 지금의 내 물리 공격력은 SR등급에 근접한 상태. 상대가 비록 수호자라고 해도 유의미한 데미지를 입힐 수 있다는 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