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ome An Academy Award-winning Villain RAW novel - Chapter (177)
아카데미 훈수빌런이 되다-177화(178/668)
〈 177화 〉 7장. 내 자신과 이 순간의 애국
* * *
도박 아닌 도박은 제법 성공적이었다.
유미르가 자리를 피해준 덕분에 나는 백설희와 함께 애국가를 1절부터 4절까지 연이어 불렀고, 백설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내 품에 안긴 채, 침대에 누워 내 어깨에 얼굴을 묻고 함께 심야영화를 관람할 뿐.
“어쩌다보니까 말을 놓게 되었는데….”
백설희는 내가 자신을 설희라고 불렀던 것부터 슬쩍 운을 띄웠다.
“앞으로도 서로 말…놓을까?”
“뭘 새삼스럽게.”
나는 백설희의 머리에 얼굴을 묻고 가볍게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이제와서 그런 말을 하면 내가 조금 섭섭할지도?”
“여태까지 계속 존대했는데 갑자기 서로 말 놓으면 그것도 어색하잖아.”
“어색하지만 지금 잘 하고 있잖아. 방금 전까지 계속 이야기 나누던 거는 나 혼자만 편했던 거야?”
“아니….”
백설희는 내 가슴에 손을 올렸다.
하얀 손가락이 내 명치를 위아래로 훑었고, 백설희는 나를 빤히 바라보며 게슴츠레 웃었다.
“나도 편했어.”
“그럼 그걸로 된 거야.”
“…….”
“일반인 도지환과 S급 히어로. 서로 입장 차이는 있겠지만, 적어도 우리가 이렇게 둘이 있을 때는 다른 거 하나도 신경쓰지 않고 편하게 지낼 수 있잖아. 안 그래?”
“그렇네.”
백설희는 좀 더 내게로 몸을 붙였다.
마치 나를 바디필로우처럼 꽉 붙잡았고, 어딘가 떠나가지 못하게 달라붙었다.
“정말, 편해서 좋아. 당신이랑 같이 있는 이 순간만큼은 정말,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아니, 아무것도 신경 쓰기 싫을 정도로 마음이 편해져.”
백설희의 피부를 통해 전해지는 심장박동은 지극히 안정적이었다.
“예전부터 알고 지내왔던 것처럼.”
“글쎄. 우리가 제일 처음 만난 게 서울 아니었어?”
“그랬지. 서울에서 그 날, 바이크 빌린다고 만났지.”
백설희의 눈동자가 반쯤 가라앉았다.
당연히 그 눈빛은 추궁의 눈빛이었고, 나는 팔베개를 하고 있던 손으로 백설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 가지고 노니까 좋아?”
“응. 좋아.”
“뭐라고?”
“정말, 내 품에 계속 넣어두고 가지고 싶을 정도야.”
나는 백설희에게로 몸을 돌린 뒤, 백설희가 나를 안는 것보다 더 진하게 끌어안았다.
“어떡하지? 설희야. 너, 앞으로 나랑 계속 있을래?”
“…….”
“다른 곳에 어디 보내지 말고, 빌런이나 악마들 나타나면 저기 다른 S급들 보고 나가라고 하고, 정 네가 나설 상황까지 상황이 악화되는 게 아니라면, 계속 너를 옆에 두고 있고 싶은데.”
“그, 그건.”
“안 될까?”
나는 백설희와 숨결이 닿을만큼 얼굴을 가까이했고, 백설희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응? 설희야.”
“…그렇게 말은 하지만, 정작 너는 네 아내가 있잖아.”
“아내랑 같이 셋이서 지내면 되지. 유미르까지 있으면 넷이 되겠지만.”
“꼭 그렇게 해야겠어?”
“응. 놓치기 싫어졌어.”
좀 더 백설희를 향해 몸을 붙인다.
백설희는 그런 내가 부담스러웠는지 다소 긴장했지만, 내게서 물러나지 않았다.
“어떻게 할래? 나랑 앞으로 이렇게 자주 밤에 영화보거나 그러면, 나 여기에서 더 진하게 나올지도 몰라.”
“더 진해진다면 어떻게 한다는 거야?”
“글쎄. 적어도 백설희라는 사람에게는 해를 끼치지 않겠지만, 백설희가 국민을 위한 영웅으로 있는 시간보다 나만을 위한 여자로 있는 시간이 더 많아지게 만들겠지.”
나는 백설희의 볼을 쓰다듬으며 더욱더 얼굴을 가까이했다.
“그런 생각 해본 적 없어? 내가 이 나라의 히어로가 아니라, 누군가와 사랑을 나누는 여자이고 싶다고.”
“…그리고 그 사랑이 아내가 있고 다른 여자랑도 놀아나는 남자와의 사랑이라고?”
“사랑에는 다양한 형태가 있지. 나는 네가 나를 사랑해준다면, 나는 그보다도 더 큰 사랑을 네게 줄 거야. 단.”
나는 백설희의 입술에 검지를 올렸다.
“독점은 안 돼.”
“…독점하고 싶다면?”
“네가 파멸할 거야.”
“내가? 후….”
백설희가 내 등 뒤로 양 손을 넘긴 뒤, 내 등을 나보다도 더 세게 끌어안았다.
“내가 당신 데리고 어디 조용한 섬으로 숨어서, 얼음의 성을 만든 다음에 당신을 평생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만들면 어쩌려고 그래? 그러면 뭐 당신 아내나 유미르가 구하러 올 거니까, 내가 그들과 싸울까봐 내가 파멸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아니.”
“그러면 뭐, 내가 너한테 푹 빠져서 히어로 스노우화이트고 뭐고 인생 다 내팽개치고 너랑 함께 살까봐. 네 말대로 다른 모두가 감당 못하는, 내가 무조건 나서야 하는 빌런이나 악당이 나타나도 당신과 사랑을 나누는데 몰두할까봐?”
“그것도 아니야.”
“그러면? 아, 뭔지 알겠다.”
백설희는 내 손을 잡아 손으로 쓸어낸 뒤, 자신의 하복부에 대며 미소지었다.
“아이가 생기면 그 아이를 위해 네 모든 걸 내던질까봐?”
“아이가 생긴다면, 나는 지금보다도 더 모든 걸 내려놓고 아이를 위해 평생 일할 수 있어.”
“…뭐?”
“아버지가 된다는 건 그런 거겠지. 가족을 위해 헌신하고, 내 아이가 올바르게 자랄 수 있게 길을 닦아두는 게 내 역할이야. 만약 그걸 위해서라면, 나는 지금 일도 그만둘 수 있어.”
“…진심이네. 정말, 진심으로 하는 소리구나.”
백설희의 얼굴에 곤혹이 스친다.
“정말 그렇다면 말해봐. 나를 상대로 정말 아이를 가지게 하고 싶어?”
“물론.”
“어째서?”
“만약 내 아내와 결혼하지 않았다면, 내가 결혼하자고 프로포즈 할 사람은 너였을 거야.”
“…그건 좀 아쉽네.”
백설희는 한탄하듯 한숨을 내쉬며 내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만약 그랬다면 내가 너랑 먼저 결혼할 수도 있었을텐데. 저기, 만일 내가 너보고 다른 여자 만나지 말라고 하면 안 만날 거야?”
“당연하지. 그런데, 너 감당할 수 있겠어?”
“…감당?”
“그래. 내가 아까 파멸이라고 한 거의 연장선이야. 무슨 말이냐 하면.”
나는 백설희의 손을 아래로 내려, 여전히 건장한 나의 건강과 활력을 증명했다.
“너, 지금의 나도 혼자서 감당하기 어렵잖아.”
“그건….”
“매일 매일 반복한다면, 너 진짜 감당할 수 있겠어?”
“…….”
“백수라면 가능하겠지.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다면 감당하겠지. 하지만 알잖아. 이능력자는 일반인보다 몇 배는 더 개인적인 욕구가 강하고, 그만큼 그 욕구를 해갈하는데 필요한 자원이 엄청 많이 필요하다는 걸.”
“…….”
백설희는 살짝 두려운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노력으로 어떻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세상에는 노력으로도 불가능한 것들이 많지. 너도 지금 여러번 해봐서 알 거 아냐. 너 혼자서는, 나를 감당할 수 없다는 걸. 지금 시간 봐봐.”
나는 TV 속 영화를 가리켰다.
“영화 시작할 때부터 달렸는데, 이제 영화가 하이라이트에 다다르고 있어. 그런데 너는 그보다도 먼저 하이라이트에 이르러서 지쳐있잖아.”
“너는?”
“나는 지금 영화 다섯 편은 넘게 봐도 거뜬하지.”
백설희의 눈동자에 점차 공포가 서리기 시작했다.
“유미르가 눈치껏 빠져줬다고 하지만, 유미르가 지금 옆에 있다고 상황이 달라졌을까? 아니야. 광고 시간 지나고 다음 영화 시작하고 10분 정도 지날 때, 이미 둘 다 지쳐서 헉헉거리고 있을 걸?”
“너, 사실은 이능력자지?”
“뭐?”
“그쪽으로만 이능력이 월등히 높은 거 아냐? 그러니까 이렇게 멀쩡한 거 아니냐구.”
“그럴 수도 있지. 재미있네. 마력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데, 애국할 때만 애국마력이 불타는 이능력자라….”
영화는 끝났다.
나는 백설희의 위로 올라섰고,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위내려다봤다.
“정말로 그런 존재라고 한다면, 너는 감당할 수 있겠어?”
“…….”
“순수하게 도지환이라는 남자를 상대로 지금 이렇게 힘겨워하는데, 내가 만약 이능력자라서 마력을 애국하는데 쓰겠다고 한다면 너는 감당할 수 있겠어?”
“애국에…마력을?”
“그래.”
유미르는 확인했다.
도깨비와 백금태양으로 먼저 했기에, 그녀는 도깨비의 위험성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전력을 다한 도깨비가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가를.
“인간의 상상력은 정말 다양하지. 그리고 상상력만 기반이 된다면, 어떠한 행위도 할 수 있어. 그게 애국이라는 전장이라도.”
“가령…이런 거?”
사아아.
백설희가 내 등 뒤에서 뻗은 손에서 차가운 기운이 흘러나와 내 등을 휘감았다.
“이건 빌런을 사로잡기 위한 그물이야. 원래는 그렇지. 하지만 네 말대로 상상력을 조금만 동원한다면, 이렇게 남자가 도망가지 못하게 만들 수도 있지.”
“…….”
“지금, 내게서 벗어날 수 없어.”
백설희의 말대로.
백설희는 마치 1인용 텐트 안에 나를 붙잡고 기어들어온 것처럼 얼음의 고치를 만들어냈고, 나는 그녀를 붙잡은 채로 꼼짝없이 붙잡히고 말았다.
안에서 밖으로 기어나가는 것도 가능하기야 하겠지만, 어딘가 크게 방지턱에 신체가 걸려서 나가는 것도 쉽지 않다.
설령 어떻게든 몸을 비집고 빠져나가려고 해도, 백설희가 숨 막힐 듯이 나를 조이며 내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만들겠지.
“도지환.”
백설희는 내 얼굴을 쓰다듬었다.
“얼굴이랑 몸만 믿고 그렇게 들이대면 다 통하는줄 알아?”
“응.”
“나 놀리고, 나 가지고 놀고, 나 기만하고 그래놓고 이렇게 나 달래고 그러면 내가 달래지는 사람이야?”
“응.”
그렇게 만들었다.
“내가 만만해?”
“그럴 리가. 처음에 너한테 접근할 때부터, 잘못되면 배에 얼음창 박히겠다는 각오로 접근했다고.”
진심이다.
“그럼.”
백설희는 내 손을 맞잡았다.
“정말로, 진심을 다해서 물어볼게. 다른 거 다 됐고, 이것만 대답해. 거짓말하거나 하면…죽여버릴 거야.”
백설희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는다.
“나.”
백설희는 떨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 임신하면, 당신이 책임질 거야?”
“당연하지. 오빠 못 믿어?”
“오빠는 무슨. 그렇게 대답하니까 더 믿지 못하겠잖아.”
“그럼 대답을 바꿀게. 애초에.”
나는 백설희를 내 품에 안으며,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책임지지 않을 거였다면, 애초에 접근하지도 않았어.”
“그럼.”
백설희는,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렸다.
“책임지기로, 약속.”
“약속.”
나는 백설희와 손가락을
“거기로 도장 찍지 말고. 여기….”
“…….”
다시.
영화가 시작되었다.
새벽 4시.
“……이 언니 진짜 독하네.”
유미르는 허공에 뚫어둔 구멍 속을 살피며, 히어로의 지독함에 혀를 내둘렀다.
“빌런 상대로 저 정도로 질기게 달라붙어야 히어로 이름값을 하는구나. 굉장해.”
거의 반나절 가까이 혼자서 도지환을 상대하고 있다.
아무리 도지환이 ‘전력’이 아닌 순수 체급만으로 상대하고 있다고 해도, 그런 체급을 의지 하나만으로 견뎌내는 걸 보면 백설희도 확실히 거저 S급으로 올라간 게 아니다.
“하긴. 사람들이 멘탈 긁는 걸로도 충분히 인내심이랑 의지가 향상되었을 테니까.”
다시 구멍을 닫았다.
아무래도 저들은 시간이 얼마나 지나가는지 모르는 듯했고, 적당히 유미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선생님은 설희 언니가 항복하면 나를 부를 생각이고, 설희 언니는 끝까지 항복 안 하려고 하네. 일단 내일 아침…도 아니지. 오늘 아침에는 쉬어야 할지도. 으으, 진짜 고생이야.”
유미르는 기지개를 켜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냥 나처럼 편하게 생각하면 될 텐데. 그건 또 안 되나? 입장이 다르니까.”
유미르는 자문자답하며 백설희와 자신의 차이를 떠올렸다.
아무래도 둘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역시 도깨비와 도지환이 같은 사람이라는 걸 언제 알아차렸느냐하는 ‘시점’.
유미르는 제법 일찍 알아차렸고, 갖은 노력 끝에 도깨비와의 관계를 정립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백설희는 다르다.
도지환과의 관계는 유미르보다 빠를지 몰라도, 도지환(도깨비)라는 부분에 있어서는 이야기가 다르다.
그녀는 이제 막 도지환이라는 남자에 대해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기 시작하는 단계.
그런 만큼, 도깨비에 대한 감정과 도지환에 대한 감정이 충돌-
해야 했지만, 그 감정의 충돌은 도지환이 직접 방망이로 백설희의 마음 구석구석 내부를 몽둥이질하여 잘 다져놓았다.
“그래. 아무리 언니라도 내가 버티지 못한 걸 가지고 계속 버틸 수 있을 리는 없지.”
내부에 스멀스멀 피어오르던 여러 가지 욕구와 욕망을 방망이로 잘 다스려놓았으니, 유미르는 백설희가 완전히 끝났다고 확신했다.
이제 다른 이들이 도지환을 의심하거나 한다?
그러면 백설희 본인부터 알아서 도지환을 실드칠 것이다.
정말로 백설희가 도지환이 도깨비라는 걸 확실하게 알아서 그런 건 아니지만, 사실상 99% 오픈한 거나 마찬가지니까.
“나도 저랬지.”
의심은 하지만 확신은 하지 못하는 상태.
상대가 ‘나 도깨비요’라고 확답하지 않으니, 뭔가 계기를 마련해서 결국 도깨비라고 정체를 강제로 드러내게 만드는 상황이 아니라면 계속 저 상태를 유지하게 되겠지.
그리고 나중에 도깨비랑 만나서 뭔가 하기라도 한다면…!
“나중에 선생님한테 도깨비 가면 하관만 없앤 다음 키스하라고 해볼까? 입술 감촉으로 ‘이건…지환 씨의 입술 느낌!’이라면서 깨닫게 될지도. 흐흥.”
유미르는 둘을 가지고 상상하며 마저 침대 시트를 꾹꾹 눌렀다.
“청소…끝!”
한쪽이 방을 어지럽히며 열렬히 애국하는 동안, 유미르는 백설희의 방을 5성급 호텔보다 더 깔끔하게 정돈했다.
“휴.”
이마에서 몽글몽글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유미르는 TV를 켰다.
아무래도 자신의 태극워치는 지금 도지환의 방에 있는 만큼, TV말고는 그녀가 시간을 보낼 요소가 없었다.
“…흐흐흐.”
유미르는 안에서 흘러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고역이었다.
“언니가 기절하면, 그다음은 나네?”
당연한 순서다.
아무리 백설희가 견디고 또 견디더라도 도지환을 이겨낼 수는 없을 테고, 그러면 당연히 도지환은 혼자 찬 바람을 쐬며 달아오른 자신의 열기를 달래며 창밖을 바라보고 있을 테지.
그때.
한창 달아올라 있을 때, 자신이 쓰면 된다.
“정액 요금제 시간이랑 같은 거라구…. 흐흐흐.”
유미르와 백설희가 동시에 한 요금제를 사용한다고 치면.
백설희가 정액 요금제 시간을 제법 많이 이용한다고 해도, 유미르는 가장 ‘엑기스’인 때에 정액 요금제를 즐길 수 있다.
“언니 여기에다가 재우고 난 뒤에 선생님이랑 드라이브나 갈까? 울릉도로 가버릴까? 으으, 어쩌지? 확 수업 째버리고 외국으로 가버릴까?”
교수인 백설희와 달리, 학생인 유미르의 시간은 지금부터 시작이니까.
그런데.
“…응?”
삐비빅.
뉴스 화면을 켜자마자, 유미르는 당혹스러운 모습을 생중계로 보게 되었다.
“저거 지금 뭐하는 거야?”
학교 운동장으로 보이는 곳.
망가진 고철 더미를 운동장에 적절히 쌓아둔 한 청년을 향해 온갖 곳에서 사람들이 카메라를 비추고 있었다.
“도깨비…나와?”
말 그대로, ‘도깨비 나와!!’라고 적혀있는 글자를 적어둔 장본인은 다름 아닌 ‘아머드 태조.’
“쟤 뭐야?”
아머드 태조는 팔짱을 낀 채, 운동장 한가운데에 서서 가만히 기다릴 뿐이었다.
“인터넷…은 확인할 수 없고. 후, 어쩌지? 분위기 중간에 깨더라도 중간에 가서 상황 알려야 하나?”
콕.
유미르는 창호지에 손가락을 뚫어 내부를 살피듯 공간을 열었다.
“…안 되겠네.”
영화는 클라이막스에 다다르고 있었다.
기승전결의 과정 중 사실상 결보다도 저 중요한 영화의 절정에 이른 순간, 괜히 영화를 꺼버린다거나 몰입을 방해하면 욕을 먹는 건 유미르다.
그러므로.
“신성한 애국의 시간을 방해하는 잼민이는 용서할 수 없지.”
유미르는 뉴스에 나오는 장소의 위치를 살핀 뒤, 백설희의 태극워치를 향해 손을 뻗어 금빛으로 만들어진 구슬 하나를 올렸다.
“…이거면 알람 울렸을 때 확인할 수 있으니까.”
삐빅.
문자가 도착했다.
[끝났어요.]백설희의 태극워치에 누가 문자를 보냈나 싶었더니, 다른 사람도 아닌 도지환이었다.
부ㅡ웅.
유미르는 공간을 가로질러 방으로 향했다.
“저한테 보내신 거, 맞죠?”
“어. 끝난 거 맞아.”
“…….”
백설희는 기절해있었다.
죽어있는 게 아닐까 순간 걱정되기도 했지만, 그저 의식을 잃었을 뿐 죽지는 않았다.
그리고 도지환 또한.
“선생님. 지금 뉴스에서 잼민이 하나가 도깨비 나오라고 어그로 끌고 있는데요.”
“……보자. 진짜네.”
“그….”
“도깨비가 무슨 잼민이 스파링 상대할 만큼 한가한 사람도 아닐 테고. 내버려 둬.”
“그, 아머드 태조가….”
[안 오면 대머리!]“…….”
“…….”
도지환은 대놓고 인상을 찌푸렸다.
“아직도 애는 애란 말이지…쯧.”
“저기, 어떻게….”
“냅둬.”
도지환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티슈를 꺼내 백설희의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어른에게는 어른의 사정이 있는 법이야.”
“…그럼.”
유미르는 스리슬쩍 앞으로 손을 뻗었다.
“제가 다녀올게요.”
“…네가?”
“네. 마침, 시험해보고 싶은 것도 있어서.”
“……이상한 거 하려는 거 아니지?”
“이상한지 아닌지는 보시면 알겠죠? 후후.”
마침 잘 됐다.
“변신.”
유미르의 몸이 무지개빛으로 반짝이기 시작했다.
* * *
그 시각, 부산 영도 버려진 폐교의 공터.
“씁. 새벽이라서 그런가. 도깨비라면 낮에 자고 밤에 활동할 줄 알았는데.”
아머드 태조는 쌀쌀한 날씨에 등골이 괜히 서늘해졌다.
딱히 이능력자가 기온의 차이에 간담이 서늘해지거나 그런 건 아니지만,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몰려온 상황에서 그냥 들어가기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나와야 하는데. 그래야 내가 새롭게 개발한 신기술, 나의 ‘태조어천가’를 보여주는데…!”
태조는 증명하고 싶었다.
강릉에서 한 번 크게 패배한 이후, 변화한 자신의 실력을 증명하고 싶었다.
유감스럽게도 두억시니 사태에서는 그걸 증명할 기회가 없었다.
그가 맡은 구역-부산 근처에는 아무래도 악마가 많이 나타나지 않았고, 그 바람에 잔챙이들만 강철의 뒤주에 가두며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했다.
스노우화이트와 도깨비가 그러했던 것처럼, S급 악마 정도는 함께 사냥하고 그래야 인지도를 쌓을 텐데.
유감스럽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니 자신의 힘을 증명할 방법은 직접 보여주는 것뿐.
그걸 위해서라면 당연히 S급 빌런이 상대가 되어야 한다.
다른 S급 히어로들에게 아머드 태조가 붙어달라고 해봐야 의미는 없고, A급에게 기술 시연을 할 테니 도와달라고 하는 건 그냥 티배깅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한층 더 강해졌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는 S급의 강자가 필요하다.
모두가 인정하는 강자가.
삐비빅.
태극워치가 울렸다.
태조는 태극워치 패널에 뜬 이름을 보자마자 태극워치를 닫으려고 했다.
-야.
-받아라.
-안 받으면 죽는다.
“…아, 뭐.”
[자다가 이게 무슨 헛짓거리야. 당장 집으로 돌아가!]“할아버지한테 연락받고 전화하는 거야?”
[당장 돌아가, 이 멍청아! 새벽 4시에 빌런한테 한 판 싸우자고 하는 S급이 어디 있어!]“새벽 3시에 햄버거 먹는 사람도 있는데, 그게 뭐 대수야?!”
[그거랑 이거랑 이야기가 다르잖아! 그리고 어느 심심한 S급이 나와서 너랑 상대를 해주겠-]파지직!
운동장에 금빛의 원이 생성되었다.
아머드 태조는 자신도 모르게 태극워치를 손으로 덮었고, 곧 안에서 걸어 나온 이를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오우야….”
저벅, 저벅.
안쪽에는 검은색 정장 같은 코트를.
위에는 하얀색 망토 같은 코트를.
그리고 머리에는 금부도사 때와 마찬가지로, 하얀 후드에 복면을 쓴 금색의 누군가가 공간을 열고 모습을 드러냈다.
“…백금태양?”
[S급. 7위. 아머드 태조.]복면 안쪽에서 말간 목소리가 흘러나오며, 백금태양이 양손을 옆으로 뻗었다.
위이잉.
백금태양의 손에서 금빛의 검이 솟아났다.
이전에 악마를 상대할 때는 전통의 멋을 살린 금부도사였다면, 지금의 모습은 마법소녀가 마법 세계 군무원이 된 것 같은 디자인이었다.
[고요한 새벽의 시간에 시끄럽게 고성방가를 지르다니. 제정신인가?]“뭐, 뭐…! 나는 도깨비를 부른 거라고!”
[도깨비는 지금 바쁘다.]“뭐? 그걸 당신이 어떻게…?”
[그리고 이런 저급한 어그로에 나올 만큼 한가한 자도 아니지.]철컥.
[내가 상대해주겠어. 무기를 들어라. 남들 다 자는 시간, 아니.]백금태양의 목소리에 서서히 분노가 깃들기 시작했다.
[애국의 시간을 방해한 죄, 용서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