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ome An Academy Award-winning Villain RAW novel - Chapter (179)
아카데미 훈수빌런이 되다-179화(180/668)
아침.
백설희는 몽롱한 정신으로 잠에서 깨어났다.
간밤에 뭔가 엄청 피곤한 상태로 잠들었던 것 같았지만, 자고 일어나니 전신이 뭔가 개운해진 것 같았다.
지금까지 쌓여있던 것들이 모두 해갈된 그런 기분.
코를 고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깊게 잠들었다가 일어나는 것 같은, 이보다도 더 행복한 감각으로 아침에 깨어나는 게 가능할까 싶은 그런 기분.
이런 기분을 언제 느꼈더라.
그래.
그날, 울릉도에서ㅡ
“!!”
“일어났어요?”
바로 옆에서 속삭이듯이 들려오는 목소리에 백설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지, 지환…씨?”
“아직 잠 덜 깬 것 같은데.”
“지환 씨가 왜…?”
“선생님, 국 다 됐어요.”
“응. 금방 갈게.”
부엌 방향에서는 다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순간 ‘어떤 년이지’라는 생각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유미르의 목소리였다.
그런데.
왜 둘은 자신의 방에 있는 걸까.
“태극워치 두고 왔어요. 유미르가 공간 열어서. 제 방에 계속 있는 건 불편하니까 저희가 넘어왔죠.”
“아, 그, 그렇죠. 저는 연락이 계속…아!”
백설희는 반사적으로 손을 침대맡 탁상 위에 뻗었다.
“연락이…!”
“없었어요. 급한 건. 있었으면 저희가 깨웠겠죠?”
“……아.”
뭔가 촌극을 벌인 것 같은 느낌에 백설희는 괜히 얼굴이 붉어졌다.
“일어나자마자 급하게 태극워치부터 확인하다니. 히어로의 일이라는 건 정말 고되네요.”
“……뭔가 이상한데.”
“뭐가요?”
“우리….”
백설희는 빤히 바라보는 도지환과 자신을 번갈아 가리켰다.
“우리, 말 놓기로 하지 않았…나요?”
“아무 표정 없이 자신을 바라보던 도지환은 백설희가 제대로 기억하고 있다는 것에 안도했다.”
“네?”
“잘 기억하고 있다고.”
도지환은 바로 표정을 풀며 백설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일어나. 밥 다 됐으니까.”
“밥은….”
“내 냉장고에서 가져온 재료로 하는 거야. 괜찮아. 냉장고 안 열어봤어.”
“!!”
백설희는 다시 한번, 정신이 번뜩 들었다.
잠깐.
내 방에 들어왔다고?
그래, 들어오기는 했지.
유미르가 먼저 이 방에서 불침번 비슷하게 있기로 했고, 그 사이에 자신은 도지환을 상대로 불굴의 의지가 꺾이지 않도록 시험에 들었다.
그러나 도지환이 이 방에 들어오는 건 상정 외였다.
도지환이 이 방에 들어왔다는 건, 자신이 도지환의 방으로 넘어가기 전에 방 정리를 하나도 하고 가지 않았던-
“…아.”
도지환이 부엌으로 가는 사이, 백설희는 급히 방 내부를 살폈다.
깔끔하게 정리 정돈이 되어있었다.
대충 바닥에 벗어두었던 외투도, 빨래 바구니 안에 대충 던져두었던 속옷도, 밤에 혼자서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마셨다가 볼링핀처럼 쌓아둔 빈 캔맥주 깡통까지 전부!!
“…….”
백설희는 도지환의 방을 떠올렸다.
결벽증까지는 아니지만, 모델하우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깔끔하게 정리된 방이었다.
물론 매일 다른 사람이 드나들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백설희 본인의 방과 비교하면 호텔에서 정리하는 수준이었다.
그렇다면.
이 방은, 설마 도지환이…?
“아….”
“언니.”
부엌에서 한창 도지환이 그릇에 음식을 담는 동안, 유미르가 다가와 목소리를 낮췄다.
“청소, 제가 다 한 거예요. 지환 쌤 몰라요.”
“아.”
“언니가 열심히 선생님이랑 하는 동안, 저는 언니 방 청소했답니다.”
“…그, 고마워…?”
“후훗. 일어나요. 아침 먹어야죠. 걱정하지 마세요. 언니가 걱정하는 거, 하나도 안 걸렸으니까.”
“……진짜야?”
“네.”
백설희는 괜히 유미르에게 고맙기도 하고, 조금 미안해졌다.
“…나중에 밥 한 번 크게 살게.”
“그런 걸 바라고 그런 건 아닌데. 그 대신. 나중에 있잖아요.”
유미르는 부엌을 한 번 눈으로 훑은 뒤, 새끼손가락을 내밀며 목소리를 낮췄다.
“저 혼자 안 되겠다 싶으면 언니한테 도와달라고 해도 되죠…?”
“…….”
백설희는 유미르의 마음씨에 괜히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자신은 어떻게든 독점하고 싶은데, 이 여자는 그마저도 이해하고 배려하려고 하는 모습을 보인다.
심지어 나이도 어린데.
“…물론이지. 다음번이 있다면, 내가 그때는 네게 도움을 요청할게.”
“네. 우리, 서로 도와요. 저 악독한 빌런을 상대로.”
“……!”
백설희는 잠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유미르는 검지를 입술에 올리며 눈을 찡긋거렸다.
“자세한 건 우리, 나중에 따로 둘이서 이야기해요.”
“…그래.”
백설희는 조금 혼란스럽기는 했지만, 그런 생각도 들었다.
방금 저 빌런, 그냥 밤에 흉악한 몽둥이를 휘두른다는 의미일까?
문자 그대로만 두고 본다면, 도지환이라는 남자는 낮져밤이의 전형이라는 의미다.
실제로 그가 가진 몽둥이는 백설희가 정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게 만들 정도로 흉악했고, 결국 백설희는 중간에 모든 의식을 잃어버렸다.
시계가 없어서 시각을 확인할 수도 없었지만, 자신이 언제부터 시작해서 언제 의식을 잃었는지도 스스로 가늠할 수 없다.
그런 의미라면 그냥 농담으로 하는 악질적인 표현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 백설희가 이해한 대로의 표현이라면?
-저는 도지환이 도깨비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안심하세요.
-일부러 모른 척하고 있는 거니까, 언니도 협조 좀 해주세요.
-왜 모른 척 가까이 다가갔는가에 대해서는 나중에 알려드릴 테니, 지금은 제게 협조해주세요.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유미르.
백금태양이 만약 도깨비가 도지환이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 이런 관계를 맺고 있는 거라면.
그녀는 왜 다른 이들에게 알리지 않고, 도깨비인 걸 숨겨주는 걸까.
어쩌면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게 아닐까.
그저 한낱 S급 히어로인 자신과 달리, 악마를 정화할 수 있는 ‘신’과도 같은 이능력을 가진 그녀라면.
“……후.”
백설희는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앉아.”
“…양식이네.”
“준비하기 편해서.”
라고 말은 하지만, 마치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만 골라서 아침으로 준비한 것 같은 도지환을 보자마자 백설희는 더 이상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왜 그래?”
“그냥, 아무것도 생각하기 귀찮아졌어.”
그래.
도지환이 도깨비면 어떠랴.
아내가 있는 남자면 어떠랴.
결국.
“도지환.”
“응?”
“…아앙.”
모든 건 자신에게 반한 이 남자의 잘못이니까.
만약.
그것이 거짓이라면.
그때는….
* * *
“불필요한 이야기를 한 것 같은데.”
“헤헹. 하지만 잘 됐잖아요. 다 계산하고 멘트 던진 거라니까요?”
백설희에게 아침을 차려주고 인사를 나눈 뒤, 유미르와 함께 내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유미르를 붙잡았다.
“어그로 끌었으니까, 이제 선생님보다는 제게 물어볼 거예요. 왜 도깨비인 걸 숨기냐. 이유가 뭐냐.”
“뭐라고 할 건데?”
“도깨비인 걸 숨기는 쪽이 더 이득이 크다?”
“이득?”
“네. 히어로답게 해결하는 거죠.”
유미르가 오히려 내 어깨를 잡고 벽으로 나를 밀었다.
“빌런이 빌런의 길을 걷는다고 해도, 그걸 옆에서 올곧은 방향으로 끌어내 히어로로 만드는 게 히어로의 사명이다.”
“…나를 설득하시겠다?”
“정의의 편에 선 도깨비. 그럴듯하죠? 그리고 실제로도 성과를 내고 있죠? 도깨비, 지금 사람 죽이는 걸 지양하고 있으니까.”
“…틀린 말은 아니군.”
“후후. 선생님 걱정하는 것만큼 심각하게 굴러가지 않을 거예요. 만약 선생님이 설희 언니한테 얼음창으로 배가 찔린다면, 그건 도깨비인 걸 숨긴 것 때문이 아니라….”
유미르의 검지가 내 입술 위를 스쳤다.
“설희 언니한테 반했다고 구라친 게 걸렸을 때의 일이죠.”
“…….”
“설희 언니, 도깨비인 거 솔직히 딱히 상관하지 않을걸요? 도깨비가 설희 언니보고 성희롱을 한 것도 아니고, 민둥산이라고 놀린 것도 아니고, 설희 언니 앞에서 빌런을 가지고 놀면서 사람 뚝배기를 깬 것도 아니고.”
“나쁜 짓은 안 했지.”
“네. 그래서 딱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예요. 도깨비인걸. 사실상 어제 다 밝혔고, 방망이로 설득 다 끝났으니까.”
“부정하지는 않겠어.”
유미르의 말대로다.
백설희는 이제 내가 도깨비인 걸 확실하게 알게 되더라도 배신감을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좋아해서 그랬다’라는 말에 대해 더 큰 배신감을 느끼겠지.
“하아.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는 건 나였나.”
괜히 머리 아프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있는 그대로 상황을 받아들이면 된다.
“선후관계를 뒤집어서 생각하면 편하겠네.”
나는 백설희를 좋아해서 그녀에게 내 정체를 노출했고, 그녀를 임신시키고 싶어 하니까.
이 섬에 있는 수많은 히로인과 여자 중, 굳이 백설희와 친하게 지낸 이유는 하나 뿐이었다.
내가.
그녀를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서.
백설희를 내 것으로 만들고, 내 아이를 가지게 하고 싶어서.
솔직히.
백설희가 싫었다면, 애초에 접근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네. 나, 백설희 좋아했던 걸지도.”
“…….”
“왜?”
“…어라? 이게 아닌데?”
유미르는 심각해진 얼굴로 눈동자를 좌우로 굴렸다.
“어, 선생님? 여자 마음 가지고 노는 나쁜 남자 아니었어요?”
“그랬지. 그런데, 네 덕분에 잠깐 생각을 해봤어. 내가 만약 백설희를 좋아하지 않았다면, 애초에 건드리지도 않았을 거야. 나는 좋아하는 사람 말고는 애국 안 해.”
“…왜 좋아하세요?”
“예쁘고 몸매 좋고 성격 좋고 애 잘 낳을 것 같아서?”
“우와….”
유미르는 입을 떡 벌리며 경악했다.
“그럼 저는요?”
“너는….”
나는 답을 하려다, 그냥 유미르의 얼굴을 손으로 밀었다.
“됐다. 그런 눈으로 바라보면 대답하고 싶어도 싫어져.”
“아이, 말해줘요. 그러지 말고.”
“듣고 싶어?”
“네!”
“그럼, 잘 들어.”
나는 유미르의 귀를 당겼다.
“애초에 너 상대로 콘돔 쓸 생각 하나도 없었어.”
“…….”
“됐지? 그럼 이제 가자. 악마 퇴치하러.”
“…앞으로는 쓰실 생각 있으신가요?”
“없어.”
그것은.
“나는 애국자라고.”
매국이니까.
* * *
쏴아아아.
부산항에 잔잔한 파도가 일어난다.
다른 배보다 훨씬 거대한 흰 여객선이 부산항에 도착했다.
수많은 이들이 항구에 모여든 가운데, 정박한 여객선을 향해 1톤 트럭들이 줄을 지어 이동하기 시작했다.
겉이 하얗게 칠해진 트럭들은 전부 특수차량이었고, 트럭의 위에는 트럭을 꽉 채우는 컨테이너 같은 게 실려있었다.
컨테이너의 겉에는 히어로 협회의 마크가 크게 찍혀있었다.
구구구.
컨테이너 안에 사람을 한 명씩 태운 트럭들이 하나둘 여객선 위에 오르는 가운데, 여객선 갑판 위에 있던 검은 정장을 입은 한 갈색 머리 여인이 태극워치를 두드려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예. 네. 승선 시작했습니다. 전부 목적지로 옮기겠습니다. 예. 모든 것은 국가와 민족의 무궁한 발전을 위해서.”
딸칵.
“‘매국종자’들이 섬에 도착하는 즉시, 실험실로 옮기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