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ome An Academy Award-winning Villain RAW novel - Chapter (262)
아카데미 훈수빌런이 되다-262화(263/668)
닉네임이라는 건 그냥 아무렇게나 지어도 된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문제라면, ‘닉네임아무거나’라는 이름을 사용해도 상관없다.
하지만 히어로 닉네임은 엄연히 다르다.
히어로에게 닉네임은 목숨과도 같은 것이며, 그 이름이 이상한 이명으로 붙는다면 그 이름을 바꾸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아무리 인자한 이능력자 여인이라도 이명이 ‘절벽라이더’라고 한다면, 그 여인은 자기 이명을 지어준 사람을 인신공격과 사실적시명예훼손으로 고소할 것이다.
이는 히어로에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빌런도 자기 이명이 이상한 방식으로 불리게 된다면, 그렇게 이름을 붙인 자를 찾아가 당장 등 뒤에 칼날을 쑤셔박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괜히 이상한 이명을 붙였다가는 소위 ‘악마’로 만들기 십상이다.
-선생님! 저 히어로 협회에서 이명 나왔습니까? 엄청 멋진 이름이겠죠?
-그, 그게.
-왜 뜸을 들이시고 그러십니까. 뭐 문제라도 생겼습니까?
-침착하고 잘 들어라. 네 히어로 이름은…’대머리 나이트’다.
-……으아아! 악마마렵다!!
괜히 이상한 이름을 지어줬다가는 멀쩡한 이능력자를 악마로 만들기 십상.
이능력자의 멘탈을 보호하기 위해, 가급적이면 이명은 최대한 그 사람의 성격이나 성향, 이능력, 기타등등 모든 것을 고려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본인의 선택을 고려하게 된다.
본인이 원하는 닉네임으로 이름을 정했다면, 그 이름을 못 쓰게 되는 상황이 아니라면 그 닉네임에 대한 애착이 생기는 게 당연한 일.
그런 의미에서.
스스로를 ‘향단’이라고 칭한 라플라스의 악마가 왜 자신을 ‘향단’이라고 이름을 붙였는지, 나는 그 이유를 본격적으로 탐구하기로 했다.
가설 하나. 혹시 이전에 향단이라는 이름을 쓴 존재가 있었나?
“주모. 조사 결과는?”
“0건이야. 아무것도 없어.”
울릉도 펜션으로 호출을 받은 주모-셀레스티아는 내가 요구한 자료를 금방 조사해 정리해왔다.
“향단이라는 이명을 쓰는 이능력자는 아무도 없었어. 한국 뿐만 아니라 한자 문화권 전부를 뒤져봤지만, 아무도 없었지.”
“한자가 달랐거나, 발음을 한국어로 바꾸니 향단이었을 경우는?”
“전혀. 일본, 중국 다 찾아봤어. 혹시나 해서 북한 출신 사람들 커뮤니티까지 다 뒤져봤어. 향단이라는 이능력자는 존재하지 않았어.”
주모의 조사 결과, 그리고 내가 따로 위키와 커뮤니티를 뒤져가며 확인한 결과.
“아예 없어. 이능력자는.”
향단이라는 이명을 가진 이능력자는 이전에 아무도 없었다.
죽은 사람도 아니었고, 한자가 다른 존재도 아니었다.
아예 없는 존재였다.
“첫 번째 가설은 틀렸군. 그럼 두 번째. 향단이라는 ‘이름’을 쓰는 사람은? 본명이거나, 가명이거나.”
“가명인 경우는 사실상 찾기 어렵겠지만, 본명이 향단인 경우은 좀 있더라. 그런데 다 일반인이었어. 이능력자도 아니고, 판데모니엄도 아니야.”
두 번째 가설. 향단이 이명이 아니라 이름 그 자체일 경우.
판데모니엄의 악마가 본명을 그대로 사용했다는 건 조금 이상할 수 있지만, 두억시니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이들에게 상식을 요구하는 건 요구하는 쪽이 잘못이다.
상식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국뽕에 절여진 외계인들의 감성에 맞게 접근해야 한다.
“진짜 아무도 없어?”
“응. 없어.”
“그렇다면 다음 가설.”
세 번째.
“…성춘향과 관련이 있는 경우.”
이제, 본격적으로 향단이라는 이름이 나온 ‘모티프’를 탐색해야 한다.
향단이라는 이름이 어디서 나왔는가?
당연히 ‘춘향전’이다.
우리 전통 판소리 중 하나로, 성춘향과 이몽룡의 로맨스 스토리 속에서 성춘향을 모시는 시녀의 이름이 향단이다.
“판소리 종사자, 춘향전 관련해서 전통을 연구하는 사람들, 춘향전의 배경이 된 전라북도 남원시. 그곳에서 향단이라는 이름을 쓸 것 같은 존재는…?”
“전무.”
통계에 따르면, 이 세계 전북 남원에 있는 인구의 수는 약 10만.
그 10만의 사람들 중에 혹시 행적이 드물거나 거동이 수상한 자를 찾는다고 하기에는 여러모로 시간이 촉박하기도 했지만, 궁기 휘하 주모들이 모두 조사를 했는데도 자료가 들어오지 않았다.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해당사항이 없기 때문에.
“그렇다면…마지막 경우를 생각하는 수밖에 없는데.”
세 가지 가설이 모두 빗겨나갔다.
“나머지 하나는….”
“춘향전 덕후들을 찾아봐도 별다른 특이점이 없더라.”
“씁.”
네 번째 가설도 무너졌다.
춘향전 자체를 사랑하는 존재가 그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이의 이름을 닉네임으로 썼다면 모를까, 그런 걸 티내는 존재도 거의 없었다.
“아무래도 향단은 두억시니랑 같은 부류는 아닌가봐. 두억시니는 뒷계정으로 막 어그로 끄는 관종이었는데.”
“차라리 그놈이랑 같은 부류였으면 잡기 편했을텐데. 쯧.”
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최후의 수단을 쓰는 것 뿐.
“이 방법까지는 쓰고 싶지 않았는데.”
망망대해 속에서 원하는 물고기를 찾는 건 어렵지만, 바다 곳곳에 떡밥을 던지고 물고기가 낚이기를 기다리는 방식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잠깐 전화 좀.”
결국, 나는 마지막 수단을 써야만 했다.
위험부담이 있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래도 저질러야만 했다.
“여보세요?”
[…어, 아, 안녕…?]개미 기어들어가는 목소리.
[어, 음, 무슨 일이야…? 혹시, 우리 애들이 뭐 잘못하거나 그, 그런 건 아니지…?]상당히 내성적이고, 나와의 전화 자체를 두려워하고, 사람과 대화하는 것 자체를 꺼려하는 음침한 목소리다.
“전혀 아닙니다. 부탁을 드리려고 전화드렸어요.”
[부, 부탁?! 과장님이…? 나한테?]“예. 이사님 아래 팀 애들, 최대한 빨리 ‘콘텐츠’를 하나 제작해주셔야 될 것 같아서.”
[어떤 콘텐츠인데…?]“라플라스의 악마, 향단을 꾀어내기 위한 떡밥용 콘텐츠요.”
[…선전물이라는 거네?]목소리가 바뀐다.
[어떤 방식으로 그 악마의 어그로를 끌 거야? 방식만 알려주면, 최대한 빨리 제작해서 보내줄게.]“급조해도 됩니다. 일단 가장 빠른 건 텍스트니까 그거부터 시작해서, 2차 창작으로 그림이든 만화든 이어나가는 걸로 하시죠.”
[도 과장님은 다 계획이 잡혀있구나? 말해봐.]업무와 관련된 이야기가 들어간 순간, 이 여자는 사람이 달라진다.
“춘향전 아십니까?”
[…조사는 좀 해볼게. 한국 전래동화지?]“예. 판소리 중 하나입니다. 라플라스의 악마가 어그로가 끌리게, 그 내용을 새로운 방식으로 각색하는 겁니다.”
향단이라는 이름이 춘향전에서 나왔다면, 그 춘향전을 가지고 현대식으로 재해석하는 작품에 대해 뭔가 반응이라도 할 터.
좋은 반응을 이끌어내든, 아니면 두억시니처럼 5700자 쓰고 난 다음 직접 제작자를 찾아오든, 향단이 뭔가 반응이 일어나기를 바랄 뿐.
만약 실패한다면, 그냥 이 세상에 새로운 콘텐츠가 하나 만들어졌을 뿐이다.
조금 위험하고도 엄한 내용이 가득한,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피를 토하고 각혈할 수 있는 내용이.
[좋아. 스토리 간단하게라도 말해봐.]“일단, 제목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혼돈 이사님.”
결사의 4대 간부 중 한 명.
결사 내부에서 총수가 직접 지정하여 ‘문화’라는 분야를 담당하고 있는 여인.
혼돈.
“제목은 ‘방자전’입니다.”
나는 그녀에게 라플라스의 악마, 향단을 끌어내기 위한 떡밥 제작을 의뢰했다.
* * *
어둠 속.
붉은 머리칼의 여인이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을 엄지로 쓱쓱 올리며 뭔가를 찾고 있었다.
“신작 재미있는 거 없나.”
여인은 입에 사탕을 물고 있었고, 하얀 나시티에 돌핀팬츠만 입은 채 침대에서 뒹굴었다.
머리는 사과처럼 만들어 땋았고, 침대 맡에는 과자봉지가 놓여있었다.
“하아암. 어디 뭐 재미있는 신작이…오.”
여인은 눈을 반짝이며 신작을 살폈다.
“세상에, 이 사람이 새 작품을…? 이건 못 참지.”
여인은 자세까지 경건한 자세를 갖추며 신작의 내용을 살폈다.
“하아, 역시. 로맨스가 최고야.”
여인은 입맛을 다시며 표지를 눌렀다.
“…쯧. 이능력으로 그린 그림인가? 그림에 혼이 없잖아, 혼이.”
표지 그림은 기술적으로는 잘 그려진 그림이었지만, 아주 미묘하게 거슬리는 불쾌한 골짜기가 있었다.
여인의 말대로 이능력을 이용해 그린 그림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여인은 영 마음에 들지 않는 표지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표지는 역시…응?”
두근.
가슴이 갑자기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방금 막 올라온 신작의 표지, 하얀 옷을 입은 청년이 옷을 좌우로 열어젖힌 채 가슴근육과 복근을 과시하고 있었다.
“어우야, 어우야. 이거 뭐야…?”
가슴에 시선이 가느라 정신이 팔렸지만, 흐트러진 정신을 차리고 시선을 아래로 돌리니, 그곳에는 휘갈겨 쓴 뜻한 타이포가 박혀있었다.
방자전 -남원불기둥 열녀폭격기-
“…뭐야, 이 거지 같은 제목은. 자, 잠깐. 이거…!”
여인은 그제야 눈치챘다.
표지의 오른쪽 위, 빨갛게 반짝이고 있는 ’19’의 표식을.
“야, 야한 소설이라고!!”
여인은 다시 경건한 자세를 갖췄다.
손에 묻어있던 과자가루를 물티슈로 닦아내고, 한 손으로 스마트폰을 움켜쥐고 다른 손은 배 위에 올리며 예우를 갖췄다.
“방자면 이몽룡의 하인인데…. 춘향전으로 뭘 쓴 거야, 이 작가는. 누군데? …밤꽃라떼?”
꾸욱.
프롤로그를 눌렀다.
“아, 미친.”
그리고 여인은 쌍욕을 내뱉었다.
“춘향이가 방자랑 첫경험을 하고, 이몽룡이랑은 손도 안 잡고, 이몽룡 한양 올라간 뒤로 온 변사또의 수청을 거부하지 않고 오히려 즐기고, NTR 당한 이몽룡을 향단이가 몸으로 유혹한다고…?”
벌떡.
“작가 새끼가 미쳤나!!”
여인, ‘향단’은 얼굴이 시뻘게졌다.
“어딜 순애물에 NTR 불륜을 끼얹고 있어!!”
창작물이라도.
소설이라도.
결코, 용납할 수 없는 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