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Childhood Friend of the Middle Boss RAW novel - Chapter (121)
중간 보스의 소꿉친구가 되었다 (121)
5년 전, 신검 도가의 평가회에서 도견우에게 패배한 이후로.
장래가 촉망된다던 도승우에 대한 평가는 크게 추락했다.
나아가 도견우가 두각을 드러내고, 번번이 그와 비교당하게 되면서.
―이번에는 제대로 보여 주겠다고 큰소리치더니, 보여 주려던 게 고작 이거였어? 실망인데…. 나는 뭐, 고유식이나 특수식처럼 내가 모르는 검술이라도 배워 온 줄 알았지.
―도견우….
―그런데 마법을 배운 거였다니…. 마법이라면 나도 배웠고, 너보다도 훨씬 잘하는데 그걸로 승부를 보면 어떡하냐. 그것도 1계위를 배웠다고 자랑한 거였다니, 원….
―비웃지 마…. 비웃지 말라고….
무엇보다 도견우와 경쟁을 벌이면 패배를 면치 못하는 것도 모자라서 꼴사나운 추태를 보이기나 하면서.
더 이상 도승우가 추켜세워지며 영예를 누리는 일은 없었다.
가문 사람들의 관심은 그에게서 완전히 떠나갔다.
한때 신검 도가의 수재라 불리던 그는 그렇게 몰락했다.
가문의 기대를 받는 사람은 이제 그가 아닌 도견우였다.
지금만 해도 그랬다.
가문에서 도견우를 밀어주려 하는 의도를 읽을 수 있었다.
‘시은 누나가 옆에 붙었다는 것은 그런 뜻이겠지.’
이면을 들여다보면 1학년 대표로서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 위한 단합회.
그 단합회에서 3학년 대표인 한편, 학생회장으로서 신임을 받고 있는 벼락꽃 도시은이 도견우를 전담하는 이유는 명확했다.
그녀는, 신검 도가는 그를 대표로 지지하려는 것이다.
“역시 사자 새… 아니, 래빗, 아니, 입학 차석이라니까!?”
“견우야! 아주 나이스다!”
“3랭크는 우리가 찾아 줄게!”
반면에 도승우를 전담하는 사람은 도시은과 비교해서 비중이 떨어지는 2학년 대표였다.
그의 역할은 도시은이 졸업하고, 도견우가 3학년 대표가 되기 이전의 공백기를 관리하는 것에 불과했다.
명가의 사람으로 태어나고 자라며 남다른 교육을 받아 왔을 학생들이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다.
실제로 그들은 권력의 냄새를 맡고 도견우의 비위를 맞춰 대기나 했다.
같은 직계인 도승우는 거의 없는 존재로 취급받고 있었다.
뒷전으로 밀려나 있는 것이다.
‘제길….’
자신의 처지를 깨닫는 실정에 절로 어금니가 악물어진다.
울분이, 증오심이, 박탈감이, 경쟁심이, 패배감이, 굴욕감이 치민다.
도승우는 도견우를 위해서 마련된 이 무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너만 아니었으면….’
그 자리에는 내가 있었을 것이다.
도견우에 대한 적개심에 사로잡힌 도승우는 이대로 그에게 굴복하고 싶지 않았다.
아직 기회라면 남아 있었다.
1학년 대표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자신이 단합회에서 도견우보다도 우수한 실력을 보일 수만 있다면, 무대의 주역을 차지할 수 있다.
대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도견우에 의해서 모든 것을 잃은 도승우에게 남아 있는 것은 이제는 열등감과 악바리 근성밖에 없었다.
그는 악에 받쳐 단합회에 임했다.
[몬스터를 조우했습니다.] [블러드 바이슨(Rank. 03) x 1]“…나왔군.”
“도승우! 뭐 하는 짓이야! 돌아와! 내가 앞서 나가지 말라고 했잖아!”
블러드 바이슨을 발견하자마자.
도승우는 즉각 지면을 박차고서 놈에게로 뛰어들었다.
조금 전에도 그에게 주의를 주었던 2학년 대표가 험한 말을 내뱉으며 별수 없이 그에게 가세해야 했다.
한편, 도승우와 파티를 짠 것은 2학년 대표뿐만이 아니었다.
“승우야! 여기는 우리한테 맡겨!”
“우리가 놈의 어그로를 끌 테니 막타는 네가 놓도록 해!”
“우리가 있으니 걱정하지 마!”
“…고맙다.”
도견우의 위상이 더 높다고 하나, 도승우 또한 신검 도가의 직계였다.
신검 도가의 위명에 빌붙으려는 사람들 중에는 혹시라도 작은 가능성에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물론, 그들 대다수가 격이 낮아서 검술명가의 서열에서 말단에 위치한 부류이기는 했다.
김일식, 김이식, 김삼식.
한날한시에 태어난 세쌍둥이 또한 그런 부류에 속했다.
“와, 승우 장난 아닌데?”
“이건 혼자 무찌른 셈 아니냐?”
“우리는 깔짝댄 것밖에 없으니까 미안하기만 하다, 야.”
도승우를 따르는 이들 중 그들은 기민하게도 눈치를 살필 줄 알며, 나름 실력도 있고, 영리했다.
그래서 그는 그들을 가까이 두고, 옛날에 우씨 세쌍둥이를 대했듯 수족처럼 부리고 있었다.
“너희가 견제해 주지 않았다면 아마 나 혼자서 상대하기 힘들었을 거야. 도와줘서 고맙다.”
“승우야….”
“너는 얼굴도 좋아, 실력도 좋아 그리고 인성까지 좋아.”
“대체 안 좋은 게 뭐냐!?”
물론, 도승우는 멍청하지 않았다.
그가 김씨 세쌍둥이가 품은 속내를 모를 리 없었다.
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도승우와 김씨 세쌍둥이는 서로가 필요한 것을 얻어 내기 위해 결탁한 관계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블러드 바이슨을 토벌한 그는 그들의 아부에 넘어가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했다.
그때, 2학년 대표가 얼굴을 구기며 다가왔다.
“도승우. 진짜 이런 식으로 나올 거냐? 내가 위험할 수 있으니까 멋대로 뛰쳐나가지 말라고 했잖아.”
도승우를 전담하는 2학년 대표.
그는 자신의 지시를 어긴 그에게 단단히 화가 난 듯싶었다.
하지만 도승우는 덤덤히 반응하며 그를 지나쳤다.
“네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닌데, 그래도 너나 다른 사람들을 생….”
“우리의 검이 위험하지 않을 때만 휘둘러 대는 얍삽한 검은 아니잖아.”
“너 지금 뭐….”
“형 말이 무슨 뜻이지는 알겠는데, 그래도 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혼자서 상대할 수 있으니 놈들에게 덤비는 거니까. 다른 사람들한테는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할게.”
“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냐?”
“…3랭크 출몰했다. 나는 갈 테니, 위험할 것 같으면 형들은 따라오지 않아도 좋아. 쌍둥이 너희는….”
“우리도 당연히 따라가야지!”
“바늘 가는 데 실이 가듯!”
“승우 가는 데 우리가 간다!”
“야! 혼자서 튀어 나가지 말라고! 진짜 말을 들어 먹지를 않네….”
도견우가 손에 넣기도 전에 먼저 게이트 키를 찾아내야 한다.
도승우는 조금 전에도 그랬듯이 파티원들을 뒤로한 채 초원을 뛰어 블러드 바이슨에게 달려들었다.
그 뒤를 김씨 세쌍둥이가 따르고, 어쩔 수 없다는 듯이 2학년 대표와 그의 계파도 편승했다.
그렇게.
‘대체 어떤 개체한테 있는 거지?’
도승우는 그들과 함께 쉴 틈 없이 블러드 바이슨을 사냥했다.
그때쯤, 그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게이트를 공략했습니다.]메시지를 확인하고.
그의 얼굴은 눈에 띄게 굳어졌다.
공략자의 정체를 확인하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1명밖에 없었다.
“도견우….”
토끼 새끼, 도견우 그놈.
결국 자신은 또 지고 만 것이다.
도승우는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도견우, 나는 네가 정말 싫다.’
* * *
“이것으로 단합회를 종료하도록 할게. 다들 오늘 시간 내주느라 고생했어. 지금쯤 현실에서는 가볍게 즐길 수 있도록 뒤풀이가 준비되고 있을 텐데, 참여할 사람들은 돌아가지 말고 밖에서 대기하고 있어 주면 좋겠어.”공략 완료 메시지가 떠오르고.
도시은은 게이트에 들어온 사람들 전원을 불러 모아 폐회를 선언했다.
나와 그녀의 뒤편에는 게이트가 형성되어 있었다.
“명가회를 주최한 우리는 사람들이 모두 나가는 걸 확인하고 난 다음에 나가도록 할 거야.”
“응, 알았어.”
게이트 키는 내게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먼저 나갔다간 게이트의 위치가 고정되고, 24시간이 지나면 사라지게 된다.
자칫해서 안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게이트를 빠져나오지 못하고 영원히 고립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도시은의 조언대로, 사람들이 모두 밖으로 나가는 것을 기다리기로 했다.
“오늘 고생 많았다, 견우야.”
“마지막 전투는 대단하더라.”
“견우 너도 시은이가 했던 것처럼 애들을 잘 이끌 수 있기를 빌게.”
“나중에 전화하는 거 알지?”
“이따 뒤풀이에서 한 잔 받아라.”
나는 게이트 앞에 서서 사람들과 덕담을 주고받았다.
몇 시간 동안 같이 싸운 덕분인지 그들은 나를 친근하게 대했다.
나 역시 처음 만났을 때와 다르게 그들을 편히 대할 수 있었다.
노효원과 진홍 노가의 사람들을 대면한 것은 그때쯤이었다.
“마지막에 놈들의 포위망을 뚫고 공세를 역전시킨 전투는 놀랍던데. 도와주러 가야 하나 고민했었는데, 설마 그런 전투를 펼칠 줄 몰랐어. 오늘 고생 많았다.”
“내가 아니라 시은이 누나의 지시가 있어서 가능했던 거지. 효원이 너도 오늘 수고했어.”
“사람들을 지휘한 것은 네 말대로 시은 언니의 힘이었을지 몰라도, 너도 선두에서 포위망을 뚫었잖아. 네 역할도 무시할 수는 없지.”
노효원이 내가 내민 손을 맞잡고 말을 건넸다.
그녀는 기분이 좋은 듯 호의적인 시선을 보내오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질문했다.
“그래서 이걸로 결심은 섰어?”
“결심?”
“도승우가 아니라 내 계파가 되어, 나를 지지할 결심 말이야.”
“아…. 알고 있었던 건가.”
“어렴풋이는.”
도승우의 성격을 생각하면, 그놈이 내가 1학년 대표로 인정받는 것을 반길 듯하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예상이 맞았는지 노효원이 멋쩍어하는 얼굴을 했다.
그녀는 단합회의 결과에 따라 나와 도승우, 둘 중 어느 쪽을 지지할지 저울질하고 있던 것이다.
‘나라도 그렇게 하기는 했겠지.’
노효원의 태도가 조금 괘씸했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대인배적으로 넘기기로 했다.
어차피 내가 대표로 인정받았으니 속이 좁게 여길 필요가 없었다.
그때,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게 정복당해 줄게. 열심히 너를 보필해 주지.”
“앞으로 잘 부탁해.”
기대했던 대답이 나왔다.
노효원을 계파로 영입하게 된 나는 흡족한 감정을 느꼈다.
그 직후, 그녀가 운을 뗐다.
“그래서 말이야.”
“왜? 뭔데?”
“언제 시간 좀 내줄 수 있겠어? 너랑 검을 통하고 싶어서 말이야.”
“나하고 대련하자는 거면 시간을 내지 못할 것도 없지. 언제 봐서….”
“대표로서는 너를 정복할 수 없을지 몰라도, 한 사람의 검사로서는 너를 정복하고 싶다.”
“….”
“그러니 다음에 시간을 내서 나와 검을 통해 줬으면 해.”
“어…. 그래, 알았어.”
“좋아, 약속한 거야. 기대할게.”
노효원이 흘러내린 붉은 머리칼을 시원스럽게 넘기며 웃는다.
그녀는 나와 몇 마디를 나누고는 게이트를 나섰다.
나는 그녀가 나간 게이트를 잠시 멍하니 쳐다보았다.
‘가끔 드는 생각인데….’
게임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전부 성격적으로 결함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래도 노효원은 게임에서처럼 나를 정복하겠다며 툭하면 대련을 신청할 듯싶었다.
그나마 그녀가 용해랑과 비교하면 신사적이라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래도 특이한 성격이기는 했다.
‘정상인이 없어, 정상인이….’
게임에서와 달리 성격을 고친 나나 도시은, 연하늘, 리사 정도만 정상에 속할 듯싶다.
앞으로도 다른 캐릭터들을 만나서 그들과 협력 관계를 맺게 될 텐데 정신이 사나울 것 같다.
나는 한숨을 쉬고, 다른 사람들을 배웅하기로 했다.
그러다 자연히 게이트를 나가려던 도승우를 마주칠 수 있었다.
“도견우….”
“도견우….”
“…?”
“날 보면 그렇게 말할 것 같았는데 정말 그렇게 말했네?”
“큭! 지금 날 놀리는 거냐?”
“어, 맞아. 얼마나 잡았냐?”
도승우의 행색은 깨끗하지 않았다.
초원을 험하게 뛰기라도 한 것인지 진흙이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었고, 몬스터의 피가 묻어 있기까지 했다.
내가 보지 못한 곳에서, 어떻게든 나를 이기기 위해서 분발했을 놈을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나는 어깨를 들썩이며 얼굴을 찡그리는 놈을 조롱했다.
아량을 보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한테 덤비겠다고 고생했을 텐데 바깥으로 나가면 푹 쉬어. 아니면 뒤풀이에서 술이나 마시든가. 나랑 같이 한잔이나 할래? 딱 한 잔만.”
“닥쳐라. 그런 식으로 깔보는 것도 언젠가 후회하게 될 줄 알아.”
“그래, 잘 가라.”
“제기랄….”
도승우가 내 손을 탁 쳤다.
그가 도시은에게 대충 인사하고는 파티원들과 함께 게이트를 통과했다.
“도견우, 봤지?”
“쟤네가 그 똘마니들이야.”
“이름도 대충 지은 세쌍둥이 놈들.”
“…너희도 이제 그만 나가라.”
초원에 남아 있는 사람도 이제는 얼마 되지 않았다.
나는 도승우의 똘마니들에 대해 욕하는 세쌍둥이에게 말했다.
그들을 옆에 데리고 있는 것도 정신이 사나웠다.
구시렁거리는 그들을 내보낸 나는 마저 사람들을 배웅했다.
어느덧 나와 도시은을 제외하고, 초원에 있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다 나간 것 같네. 누나, 우리도 이제 그만 나가기로 하자.”
“그래, 마지막까지 열심히 했어. 앞으로도 이렇게 하면 돼.”
“그런데 누나, 뒤풀이에는 무조건 참석해야겠지?”
“무조건 참석해야 하는 건 아닌데, 대표라면 자리에 참석해 사람들에게 얼굴을 비치는 게 좋기는 하지. 왜? 뒤에 일정 있어?”
“아까 하늘이한테 연락이 왔는데, 애들이랑 교류회에 오겠다고 해서. 시간 되면 걔네랑 놀 생각이었지.”
뒤풀이에 가지 않을 수는 없으니,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잠깐 시간을 내서 연하늘만 보고 자리를 떠나기로 했다.
내가 그렇게 생각한 때였다.
푸른 눈을 깜빡인 도시은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답했다.
“뒤풀이는 교류회장에서 할 거야. 그러니 사람들과 적당히 어울리면서 걔네랑 놀아도 돼.”
“아, 정말? 그래도 돼?”
“응, 괜찮아.”
잘됐다.
연하늘과 시간을 보낼 수 있겠다.
고개를 끄덕이는 도시은의 답변에, 내 입가는 올라갔다.
* * *
신검 도가의 교류회.
나름 분위기에 맞춰서 옷을 입은 연하늘, 고은비, 강한별, 박사군은 즐거이 연회장을 구경했다.
연회장에는 먹을거리는 물론이고, 놀거리와 볼거리가 많았다.
“와, 하늘아! 저기서 소믈리에가 와인도 따라 준대! 우리 와인 마시러 가자!”
“섞어 마시면 안 좋은데…. 은비야, 마실 수 있겠어?”
“괜찮아! 괜찮아! 이럴 때 아니면 와인을 언제 마셔 보겠어!? 그것도 값비싼 와인일 텐데!”
“음…. 그건 그래.”
흥겨운 노래가 연회장을 떠돌고, 맛있는 음식과 술이 입으로 들어가니 기분이 들뜰 수밖에 없다.
연회장에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웃고 떠들며, 모르는 사람들과 교류하며 인연을 만들고 있었다.
네 사람도 분위기에 호응해서는 간간이 모르는 사람들과 이야기했다.
처음 보는 사이에도 금세 친해지는 고은비의 성격이 윤활제가 된 덕분이었다.
그러다 술에 취해 기분이 고양된 그녀가 불쑥 와인을 마시러 가자고 한 것이다.
같이 있던 연하늘은 그녀에게 끌려 와인 바로 가야 했다.
“음…. 종류가 너무 많은데…. 나는 레드랑 화이트만 알고 있었는데 종류가 되게 다양하네. 하늘아, 아는 거 있어?”
“아니. 나도 오늘 처음 마시는 건데 아는 와인이 있을 리가 없… 아, 그러고 보니 요즘 보는 드라마에서 나온 와인이 있던데.”
“그게 뭔데?”
“샤토… 푸아페레라고 했나? 거기서 여주가 툭하면 병나발을 불고는 했어.”
“…병나발로 붙자는 것은 아니지? 좋아, 그럼 그걸로 달라고 그러자!”
고은비가 대표로 와인을 주문하러 소믈리에에게 걸어간다.
연하늘은 뒤에서 그녀를 뒤따르며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조금 전, 도견우에게 보낸 톡이었다.
[나]: 우리 도착했어! [나]: 언제 끝날 것 같아? [나]: 우리끼리 놀고 있을 테니까 천천히 와~메시지 옆에 있는 숫자 ‘1’은 아직까지 지워지지 않은 상태였다.
아무래도 게이트에 들어가 있어 메시지를 보지 못하는 듯했다.
‘언제 끝나는 거지….’
도견우와 교류회를 즐기고 싶건만, 조금 더 기다려야 할 듯했다.
연하늘은 아쉬움을 뒤로하고서는 소믈리에가 건네는 와인을 받았다.
고은비는 소믈리에가 알려 준 대로 멋들어지게 와인잔을 흔들어 보고는, 향기를 음미했다.
“음― 스메엘.”
“….”
창피하다.
연하늘은 말없이 고은비의 곁에서 몇 걸음을 벌렸다.
그러고는 그녀도 코를 가져다 대고 와인 향기를 맡았다.
‘과일 향이 진하기는 한데….’
소믈리에가 와인은 눈으로 즐기고, 코로 음미하며, 혀로 읽으라고 가르쳤으나.
와인을 처음 마시는 연하늘에게는 솔직히 잘 와닿지 않았다.
그녀는 잠시간 와인을 관찰하고는 맛을 보기로 했다.
“와, 맛있다. 꼭 포도밭 아래를 거닐고 있는 듯한 느낌이야.”
“아, 응…. 맛있기는 하네. 그런데 톡 쏘지는 않는데, 도수가 높지는 않은 것 같네. 나는 소주가 더 내 취향인 것 같아.”
“하늘이 술꾼 다 됐어….”
고은비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혀를 내둘렀다.
연하늘은 작게 키득거렸다.
얼마 전에 도견우도 그녀와 같은 표정을 보였던 적이 떠올랐다.
―아니… 세상에 맛있는 술이 얼마나 많은데 왜 하필 소주야?
소주를 좋아하는 연하늘과 달리, 도견우는 떨떠름해하고는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녀가 마시면 싫은 내색을 보이면서도 결국에는 술 상대가 되어 주었다.
정말이지 배려심이 많은 소꿉친구다.
그리고 그를 소주로 취하게 해서, 은근슬쩍 어깨에 기대도록 만드는 자신은 못된 소꿉친구였고.
그를 생각한 것만으로도 괜히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그러던 중이었다.
“1학년이야?”
“네? 네….”
고은비와 함께 와인잔을 손에 쥐고 주위를 돌아다니던 도중.
선배로 보이는 남자 2명이 대뜸 말을 걸어왔다.
연하늘이 고은비의 등 뒤로 숨으며 경계심을 보였지만, 그들은 태연히 두 사람에게로 접근했다.
“아, 역시 1학년이었구나. 우리는 2학년이야. 한 학년 선배인데 말 놔도 되지?”
“이미 말은 놓고 있었지만.”
“사실 아까부터 계속 너희가 눈에 들어오더라고.”
“나는 인형들이 걸어 다니는 줄 알았다니까?”
“아…. 감사합니다, 선배님들.”
“….”
남자들이 듣기 좋은 말을 건넸다.
당연히 연하늘과 고은비는 그들이 추파를 던지고 있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던 두 사람으로서는 마음은 고맙지만 난처하기만 했다.
그래서 고은비가 최대한 자연스레, 그들의 마음이 상하지 않는 쪽으로 거절하려 했건만.
그들은 알아듣지 못한 척하며 끈덕지게 능청을 떨어 댔다.
“혹시 모르는 게 있으면 우리한테 물어보도록 해. 우리가 아카데미에서 어떻게 잘 생활할 수 있는지 알려 줄 테니까.”
“우리가 신검 도가하고 친하거든. 지금 2학년 대표로 있는 애랑 거의 절친 같은 사이지.”
“보니까 술 잘 마시는 것 같던데, 우리랑 같이 마시지 않을래? 여기는 사람들이 많아서 북적거리니까 따로 밖에 나가는 건 어때?”
“근처에 아카데미 사람들 사이에서 유명한 술집이 있는데.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너희는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거야. 좀 골목으로 들어가야 하거든. 어때? 우리랑 거기서 마시는 건.”
“아, 제안은 감사한데, 저희가 지금 일행이 있어서요. 그러니까….”
“…네, 맞아요. 저희는 이제 그만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에이, 그러지 말고….”
“하늘아, 그만 가자.”
“응.”
정말이지 끈질기다.
에둘러 거절해도 이야기가 번번이 원점으로 돌아오는 것의 연속이다.
남자들은 두 사람이 동의할 때까지 계속 따라붙을 듯한 기색이었다.
이럴 때는 과감하게 끊어 내야 한다.
고은비는 대뜸 대화를 중단하고는 연하늘을 데리고 자리를 뜨려 했다.
그런데 그 행동이 그들의 심기를 자극한 모양이었다.
“야, 기다려. 우리 말하는 중인데 지금 어디로 가려는 거야? 선배한테 그래도 되겠어, 안 되겠어?”
“맞아, 예의 없게 이러면 안 되지. 우리를 무시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무리한 부탁이라도 했어? 같이 마시고 놀자고 했을 뿐인데.”
급기야 한 남자가 손을 뻗어서는 연하늘의 손목을 잡아챘다.
그녀는 남자의 손아귀 힘을 느끼고 눈살을 찌푸렸다.
“윽…. 이거 놓으세요.”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
“우리랑 같이 간다고 하면 놔줄게.”
“아니, 너희한테 돈을 내라 했어? 우리가 사 준다니까?”
신검 도가의, 도견우가 적을 둔 가문에서 주최하는 교류회였다.
괜한 소란을 일으킬 수는 없었다.
연하늘은 속으로는 언짢으면서도 최대한 차분히 그들을 떨치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손목을 붙잡은 남자는 그녀가 손을 뿌리치지 못하도록 더욱 힘을 조여 왔다.
그때, 누군가 덥석 남자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놓으라잖아요. 놓으세요.”
“넌 또 뭐야?”
“….”
두 사람의 실랑이를 목격하고서는 얼른 자리로 뛰어온 강한별이었다.
그가 연하늘을 지키듯 앞에 서며 남자들을 노려보았다.
“놓으라니까요. 계속 그렇게 붙잡고 있을 거예요?”
“넌 또 뭐냐니까?”
“얘 친구요.”
“하, 한별아….”
갑작스러운 강한별의 등장에.
남자들은 속으로 당황해하면서도 물러서려고 하지 않았다.
자존심이 허락지 않기도 한 데다, 어느새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고 있었다.
이대로 등을 돌리고 물러났다가는 창피를 당할 게 뻔했다.
“손 놔라.”
“그쪽부터 놔라.”
“지금 반말하는 거냐?”
“사부님이 존대할 가치조차 없는 사람한테는 하지 말라고 했거든.”
“뭐? 너 지금 뭐라고 했어.”
남자들은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해 강한별을 윽박질렀다.
그럼에도 그는 겁을 먹는 일 없이 그들과 눈싸움을 벌였다.
서로가 접어주려고 하지 않으니, 눈싸움은 순식간에 기 싸움으로, 곧 마나를 발현하는 일까지 일어났다.
디바이스를 꺼내기까지 했다.
‘안 되는데….’
연하늘은 당황스럽기만 했다.
강한별이 자신을 도우러 나서 줘서 고마운 마음이 들기는 했지만, 점점 소란이 커지는 실정이었다.
그녀로서는 말리고 싶었다.
무엇보다.
‘견우가 부탁했는데….’
사전에 도견우가 당부하기도 했다.
행여나 강한별이 다른 사람들하고 마찰을 빚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해 달라고.
투귀의 제자인 그가 이 교류회에서 자칫해서 검술명가와 관련된 이들과 문제를 일으켰다간, 골치 아픈 일이 벌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으으….’
그렇다고 자신을 위하는 강한별을 제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연하늘은 속으로 갈등했다.
바로 그때였다.
“손 떼라, 잘리기 싫으면.”
낮게 내리깔린 어조와 심기가 몹시 불편한 듯한 목소리.
평소에는 들은 적 없는 소리였으나, 목소리의 주인을 모를 리 없었다.
자신이 애타게 기다리던 사람이다.
연하늘은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곧장 고개를 돌렸다.
“….”
저편에서.
도견우가 당당히 사람들을 헤치고 걸어오고 있었다.
연하늘의 얼굴은 대번에 밝아졌다.
그녀가 반가워하며 그를 불렀다.
“견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