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Childhood Friend of the Middle Boss RAW novel - Chapter (164)
중간 보스의 소꿉친구가 되었다(164)
헌터의 세계에서 세외(世外)의 존재란 자리에서 물러나 더 이상 공식 행사에 참여하지 않고, 헌터로서 영리적인 목적을 추구하지 않는 위인(偉人)을 가리킨다.
이때, 물러난다는 것에 대한 해석은 속세를 완전히 벗어난 존재, 헌터를 은퇴하고 가문과 같은 다른 영역에는 여전히 관여하는 존재, 헌터의 자격은 유지하되 단지 영리적으로 활동하지 않는 존재 모두를 아우른다.
그런 점에서 신검 도가의 가주, 수왕 도예익도 엄연히 세외의 존재로 받아들여진다.
스스로 헌터로서 은퇴를 선언한 그는 가문의 관리에만 힘쓰며, 그마저도 언젠가부터 장남에게 대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장남 도우준이 가주 대리로 통하고 있다고 한들, 정식으로 차기 가주로 인정받은 것은 아니다.
다만 차기 가주 자리에 근접해 있을 뿐이다.
도예익은 여러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가장 걸맞은 자식에게 가주를 위임할 생각이었다.
즉, 다른 자식들이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판을 뒤집을 수 있다는 뜻이다.
당연히 사자의 자식으로 태어나, 무리의 우두머리가 되고자 하는 야망과 권력욕을 가지고 있던 그들이 마다할 리 없었다.
모든 검술명가의 총의를 대변하며, 명가들을 호령할 수 있는 신검 도가의 가주다.
그들은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때로는 수면 위에서, 때로는 수면 아래에서 온갖 경쟁을 벌여 왔다.
그리함으로써 현재 차기 가주는 도우준 다음으로, 도시은의 아버지인 차남 도강준, 장녀이자 셋째인 도민희, 도승우의 아버지인 삼남 도범준 순서로 유력시되는 실정이었다.
여기에 5년 전을 기점으로, 도견우의 아버지인 사남이자 막내 도상준이 끼어들며 경쟁은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특히 남매들 중 입지가 제일 약한 도범준은 도상준의 참전이 달가울 수가 없었다.
도상준에게 위협을 느꼈다.
그런 상황에서….
―뭐라고요? 그러니까 승우가… 지금 학창에 들어갔다고요?
아들 도승우의 소식은 지금까지 도범준이 공들여 쌓아 올린 탑을 무너뜨리는 꼴이었다.
신검 도가에서는 난리가 났고, 가주 도예익은 극대노했다.
―자식 놈을 어떻게 교육했으면 이 사달을 낸단 말이냐! 네놈이 그러고도 사자의 자식이야!?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가주님. 면목이 없습니다.
부정행위를 저질렀더라도 아예 걸리지 않았다면 좋았으련만.
도승우의 모략은 낱낱이 밝혀져 가문에 누를 끼치고 말았다.
도범준은 상황을 모면하지 못하고, 남매들이 보는 앞에서 가주에게 불호령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분명 경쟁을 격려하기는 했다! 그러나 이런 짓을 저질러도 된다고는 말한 적이 없다! 넌 지금 네 자식 놈과 함께 가문의 이름에 먹칠한 거야!
―죄송합니다, 가주님. 제가 앞으로 승우를 잘….
―감히 자기 혈육을 죽이려고 해!? 그놈 때문에 가문에 피바람이 불 뻔했다! 또다시 가문이 풍비박산이 날 뻔했다고!
―….
가주 도예익의 분노는 지대했다.
도범준은 그의 화를 풀기 위해 모든 자존심을 내려놓고 수그리고 또 수그렸다.
그럼에도 먼 옛날 가문에서 일어난 피의 상잔을 기억하는 그는 누그러들 줄 몰랐다.
더욱이 그를 자극하는 요인이 하나 더 있었다.
―투귀의 제자에게 졌단 말이냐? 진 것도 모자라, 가문의 보물을 빼앗겨!?
―…네. 제가 투귀의 제자에게 사정을 설명해서 되찾아….
―승우 그놈이 그런다면 모를까, 네가 되찾아오겠다니… 애들 싸움에 잘도 끼어들려 하는구나! 그 이야기가 투귀한테 들어가면 어찌 반응할 것 같으냐. 아주 나를 놀려 먹다 웃겨 죽을 거다. 아니, 그 전에 내가 죽을 거다! 내게 이 이상 모욕을 줄 생각이냐!
―아, 아닙니다.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시끄럽다!
―….
도승우가 투귀의 제자인 강한별에게 패배하고, 풍랑의 브로치를 약탈당했다.
투귀 서정진을 적수로 의식하는 도예익에게는 수치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가주로서 위엄을 유지하는 것도 잊고, 온갖 상스러운 욕을 내뱉었다.
―다 필요 없다! 부모 된 도리로서 네 자식이 싼 똥은 네가 치워라! 이 일을 해결하기 전까지 가문에 얼씬거릴 엄두도 내지 마라! 내 눈앞에서 썩 꺼져! 당장 나가!
그렇게 축객령을 받은 도범준은 가문의 해결사들과 함께 부랴부랴 학원도시에 입국해야 했다.
그들은 사태를 원만히 처리하려 온갖 애를 썼다.
하지만 이사장 소혜율과의 면담에서 난관에 봉착하고 말았다.
―신검 도가에서 이렇게 많이 기부해 주신다니, 이사장으로서 감사하네요. 다만… 기부만으로 도승우 학생의 퇴학을 막을 수는 없어요.
―네?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부족한 게 있으시다면….
―아뇨, ‘도범준 서브 로드’한테서 더 얻을 것은 없어요.
―….
―제 선에서 도승우 학생이 중간고사에서 벌인 부정행위는 경감할 수 있어요. 그런데 문제는 그것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도승우 학생이 명백한 의도를 품고 도견우 학생과 연하늘 학생을 살해하려고 한 부분도 있잖아요.
―이사장님, 명백하다뇨. 제가 알기로, 승우는 진술을 긍정하지 않은 것으로….
―진술에서는 부정했죠. 하지만 정황은 명백하지 않나요?
―….
―음모에 가담한 학생들에게서 이미 증언을 확보해 뒀어요. 도승우 학생이 불법으로 거래되는 블랙 마켓에서 암야 말벌의 독을 입수한 증거도 손에 넣었고요.
―블랙 마켓을 이용했는데 어떻게 증거를 손에 넣을 수….
―저희는 알 수 있어요. 충분히 그럴 만한 능력이 있거든요. 원하시면 자료를 보여 드릴까요?
―…구매 이력만으로 승우가 살인을 계획했다고는 입증하기 어려울 텐데요. 어디까지나 시험에서 사용할….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독도 있는데, 굳이 블랙 마켓에서 암야 말벌의 독을 구입했다고요? 좋아요, 도범준 서브 로드의 말이 맞다고 쳐요. 그런데 그 독을 연하늘 학생에게 사용한 것은 어떻게 해명하려고요?
―그건 우연에 의한….
―그 후에 도승우 학생이 다른 학생들에게 연하늘 학생의 추격을 명한 것은요?
―….
―도범준 서브 로드. 이걸 제가 좌시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나요? 학생에게 위해가 가해진 일인데도?
도범준은 기품 있게 찻잔을 내려놓는 소혜율의 정론에 반박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납작 엎드려서라도 그녀의 조언을 구해야 했다.
―그럼…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이번 일로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연하늘 학생의 사과를 받아야죠.
―…탄원서를 받으란 말씀이군요.
―네, 맞아요. 연하늘 학생이 도승우 학생을 위해 탄원서를 써 준다면, 제가 어찌어찌 여론을 되돌릴 수 있을 것 같네요.
자식의 명예는 곧 부모의 명예다.
도승우가 이대로 퇴학을 당한다면 신검 도가의 가주가 되려 하는 도범준에게 큰 타격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창피를 무릅쓰고 연하늘이 거주하는 취옥 기숙사를 찾은 것이다.
* * *
아무리 생각해도 내 소꿉친구는 너무 착한 것 같다.
독에 걸려 사경을 오간 기억이 아직도 선명할 텐데도, 덥석 그 원흉의 아버지란 작자가 요청한 면회에 응한 것을 보면 천사가 따로 없다.
나였으면 모른 척하고 말았으리라.
―그치만… 너희 가문 사람이잖아? 네 친척이고. 내가 어떻게 무시할 수 있겠어.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내 친척이라고 깍듯하게 예의를 차릴 필요 있어? 너한테는 원수잖아. 그냥 막 나가. 혹시 후원 끊길 걸 염려하는 거야? 그럴 일은 절대로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괜히 눈치 보지 마.
―으응, 아니야, 그런 거. 네가 내 뒤에 있는데 왜 걱정하겠니? 예의 차리고 싶지도 않고.
―그럼 나가는 이유가 뭔데?
―이대로 매몰차게 보냈다가는 나중에 어떤 소문이 날지 모르고, 나한테 어떻게 나올지 궁금해서.
―….
―그래서 나가 보겠다는 거야.
―…별게 다 궁금하다.
연하늘은 나름의 이유를 전했다.
나로서는 무언가 결심을 굳힌 듯한 그녀를 말릴 도리가 없었다.
그녀의 결단을 존중해야 옳았다.
하지만 셋째 큰아버지가 그녀를 어떻게 구워삶을지 알고 순순히 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좋아, 대신 나도 갈게.
―너도?
―가서 네가 꼬드김에 넘어가거나, 괜히 해코지라도 당하지 않게 옆에 있어 줄게.
―…응. 고마워, 견우야.
연하늘은 ‘싫다, 아니다’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성격이 못 된다.
마음씨가 고와서 화도 내지 못한다.
화를 내더라도 점잖게 말하리라.
그런 성격으로는 셋째 큰아버지에게 휘둘리게 될 뿐이다.
그러니 내가 곁에서 지켜 줘야 한다.
나는 아직 후유증이 가시지 않은 그녀와 동행하기로 했다.
―저기, 나 이제 괜찮은데…. 마법도 어느 정도 쓸 수 있는걸.
―넌 아직 환자야. 내 말 듣고 조심해서 걷도록 해.
―네, 네.
그렇게 취옥 기숙사 식당에서 셋째 큰아버지를 만났다.
셋째 큰아버지는 입구에서 걸어오는 나를 보고 흠칫했다.
“네가 하늘이구나? 나는 승우 아버지, 도범준이라고 한다. 과천시에 있는 레굴루스 클랜을 담당하고 있지.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되어 유감이다. 그래도 반갑구나. 몸은 이제 괜찮은 거니? 그리고… 견우도 왔구나.”
“…안녕하세요. 연하늘입니다. 몸은, 아직 좀 불편해요.”
“오랜만에 뵙네요, 셋째 큰아버지.”
나와 연하늘이 소꿉친구인 것은 가문에서 익히 알려져 있었다.
어쩌면 나를 만날지도 모른다고 짐작했을 셋째 큰아버지는 금세 표정을 바꿔 인사했다.
만약 처음 보는 사람이 보았다면 인상이 좋다고 생각했을 법한 얼굴이었다.
“서 있기도 뭐하니 앞에 앉으렴. 아무래도 뭐라도 먹으며 대화를 나누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 다과를 준비했단다. 사양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셋째 큰아버지가 맞은편 자리를 권했다.
우리는 다과에는 손을 대지 않은 채, 그가 꺼내는 말을 들었다.
처음에는 간단한 근황으로 시작된 이야기는 이내 본론으로 넘어갔다.
“다름 아니라 오늘 널 만난 이유는 승우가 저지른 짓을 부모로서 사과하기 위함이란다. 자식을 잘못 가르친 내 책임이다. 신검 도가의 사람으로서도 옳지 못했다. 진심으로 사과하마.”
“….”
“조만간에 승우가 학창에서 나오거든 정식으로 사과하러 보내겠다고 약속하마. 그러니….”
그만 승우를 용서해 줄 수 없겠니.
염치가 없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네가 승우를 위해 탄원서를 써 주었으면 싶구나.
도범준은 우리가 발언할 차례를 잠시도 주지 않겠다는 듯, 사전에 준비한 것 같은 말을 늘어놓았다.
그러고는 바닥에 놓아둔 가방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자물쇠로 잠겨 있던 가방 안에는 금화가 가득 들어 있었다.
“물론, 맨입으로는 얘기 안 하마. 네가 탄원서를 써 준다면 후회되지 않을 정도로 그에 따른 보상을 해 줄 생각이다. 이건 일부에 지나지 않아.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무엇이든 들어주마.”
“….”
“혹시 레굴루스 클랜에 입단하길 원하니? 내가 있는 과천시 지부는 높은 실적을 쌓을 수 있어, 출세의 지름길이 되는 곳이지. 상준이… 아니, 견우 아버지가 있는 송파구 지부에 비해서 월등히 좋은 입지를 갖추고 있다. 네가 원한다면… 입단 즉시 간부로 받아 줄 용의도 있다.”
부귀영화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구미가 당길 만한 제안이었다.
‘그만큼 셋째 큰아버지가 지금 궁지에 몰려 있다는 뜻이겠지.’
나는 주어진 정보를 기반으로 셋째 큰아버지의 사정을 유추했다.
한편으로는 조금 전부터 조용히 경청하고 있는 연하늘에게 힐끗 시선을 주었다.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가 이윽고 목소리를 흘렸다.
평소의 그녀라 생각할 수 없는, 거리를 두는 듯한 어조였다.
“제안은 감사하지만, 사양할게요. 그리고 사과하지 않으셔도 돼요. 저한테 사과해야 할 사람은 아저씨가 아니니까요. 그 애가 사과하는 게 아니라면 받아 줄 생각이 없어요. 받아 주더라도 용서하는 건 별개의 일이고요. 아니요, 솔직히… 그 애가 절 찾아오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다시는 보고 싶지 않거든요.”
“….”
그러니 탄원서는 써 줄 수 없다.
거절을 잘하지 못하는 연하늘답지 않게 제법 직접적인 의사 표현이었다.
셋째 큰아버지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하는 그녀의 모습은 의외란 생각이 들게 했다.
하지만 그 감상은 잠시에 지나지 않았다.
‘떨고 있어.’
테이블 아래로 시선을 내린 나는 무릎 위에 얹은 연하늘의 손이 부들거리고 있음을 엿볼 수 있었다.
겉으로는 얕보이지 않기 위해서 강인한 태도를 보이고 있으나, 사실 속으로는 두려운 것이다.
그녀의 심정을 알아차린 나는 슬그머니 손을 잡아 주었다.
“…!”
셋째 큰아버지를 상대하느라 그동안 잔뜩 긴장하고 있었을 연하늘이 순간 움찔했다.
이내 그녀는 내 손인 것을 깨닫고는 나직이 “아….” 하는 소리를 냈다.
그녀의 얼굴이 풀어진 것 같았다.
‘괜찮아, 내가 있잖아.’
과연 내 마음이 전해질지는 모르겠다.
나는 연하늘의 부담감을 덜어 주려 부드럽게 손등을 문질렀다.
그것으로도 부족하다고 느끼고는 허락을 구해 손깍지를 꼈다.
내 손짓에 따라 그녀의 손이 활짝 펴지고, 마치 처음부터 맞물려 있었다는 듯이 손가락과 손가락이 얽혔다.
그때, 셋째 큰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보상이 부족했나 보구나. 하긴, 이미 가문의 후원을 받고 있는 데다, 칠색의 마녀의 제자로서 장래가 보장된 네게는 눈에 차지 않을 만도 하지. 좋다, 보상을 추가하겠다.”
“보상이 문제가 아니라….”
“네가 탄원서를 써 주기만 한다면, 과천시 지부에서 보관하는 아티펙트들도 내주마. 아무거나 세 점까지 가져가도 좋다. 이 정도면 흥미가 생기겠지?”
“…죄송합니다.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제안에 응할 생각은 없어요.”
연하늘은 이번에도 거절했다.
그때쯤 돼서야 셋째 큰아버지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가 심기가 상한 것을 억누르듯 말에 힘을 주어 말했다.
“잘 생각해 봐라…. 분명 너한테도 나쁘지 않은 이야기일 텐데….”
“하늘이는 관심이 없다잖아요. 이제 그쯤 하시죠, 셋째 큰아버지.”
“도견우… 사촌으로서 승우가 이대로 인생을 망치기를 바라는 거냐?”
“걔 때문에 하마터면 인생을 망칠 뻔한 사람이 바로 저희인데요? 근데 저희가 걔가 어떻게 될지 알 바예요?”
“그래도 승우는 네….”
“사촌으로서 잘되기를 바라기 때문에 이러는 마음도 있는 거예요.”
“….”
“더는 할 얘기도 없는 것 같으니, 저희는 이만 일어나 볼게요. 안녕히 가세요, 셋째 큰아버지. 하늘아, 가자.”
여기에서 더 대화를 나누어 봤자 무의미할 뿐이다.
대화가 반복되려던 것을 감지한 나는 연하늘을 일으켜 세웠다.
자리에 앉은 셋째 큰아버지가 살기 어린 눈으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시선으로부터 연하늘을 숨긴 나는 조롱하듯 경고했다.
“얘가 용서해 줄 일은 없을 테니까 다음에 또 찾아오거나 하지 마세요. 아니다, 찾아오든가요. 어차피 무시하면 그만이니까. 가자, 하늘아.”
“아, 견우야…. 응.”
셋째 큰아버지가 아무 말도 없이 사납게 노려보는 가운데.
나는 연하늘의 손을 잡아끌었다.
셋째 큰아버지에게 대충 인사한 그녀는 순순히 나를 따랐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내 눈치를 살폈다.
“화났어?”
“그럼 화나지 안 나겠어? 너한테 물질로 보상하면 될 거라고 생각하잖아. 잘못했으면 사람이 죽을 뻔했는데 진짜…. 내가 셋째 큰아버지만 아니었으면 자리에서 냅다 싸대….”
“안 돼, 그런 말 하면 못써. 그래도 친척 어른이잖아.”
“너는 분하지도 않아?”
“분하냐면 분하지. 그래도 뭐….”
뒤에서 나를 졸졸 따라오던 연하늘.
그녀가 배시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네가 나 대신 화내 주니까 됐어. 그리고 여기에 신경이 쓰여서 화도 가라앉았고.”
“여기? 아….”
연하늘이 나와 깍지를 낀 손을 붕붕 흔들었다.
그녀가 웃는 얼굴을 보니 괜스레 나도 기분이 풀어졌다.
“고마워, 너 아니었으면 아까 제대로 말도 못 했을 거야.”
“그 전부터 멋지게 잘 말하던데. 대견해, 당당히 거절할 줄도 알고.”
“치이, 내가 애니?”
“애지 그럼. 나보다 한 달 늦으니까.”
“뭐어? 네, 네, 저보다 생일이 한 달 빠른 견우 아저씨.”
“…아저씨라고 하지 말라니까?”
연하늘이 어깨를 들썩인다.
깍지를 낀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웃는 모습이 꽤 인상적이다.
우리는 그대로 사람들이 지나가든 말든 복도에 서서 키득거렸다.
“이대로 방에 가기도 아쉬운데, 잠깐 산책이나 하러 갈까?”
“응, 좋아. 돌아오는 길에 편의점에서 딸기우유도 사 오자.”
“무리하지 말고 천천히 걸어.”
“나 이제 괜찮대두…. 내가 뭐 임산부라도 되니?”
“뱃속에 애가 있는데 조심해야지.”
“꺄악! 갑자기 어디를 만지는 거야!? 왜 배를 만지고 그래!?”
“애기야, 거기 잘 있니?”
“….”
“애기야? 들리니? 잘 있어?”
“에휴…. 네, 저 여기 잘 있어요, 견우 아빠.”
“응? 지금 뭐….”
“이, 이제 그만하고 얼른 가자!”
“너 지금 나한테 아빠라고 했지? 장난에 너무 심취한 거 아니야?”
“으으, 잊어! 잊어! 나 놀리지 마! 그리고 이제 배에서 손 떼! 저기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보잖아….”
“다른 사람들은 관심도 없을걸? 네가 너무 눈치를 봐서 그래. 어쨌든 가자, 가.”
그날.
우리는 헤어질 때까지 손을 놓지 않았다.
* * *
끝내 연하늘은 탄원서를 쓰지 않았다.
도범준은 무능함을 증명하는 꼴이 되어, 도예익을 찾아가 무릎을 꿇어야 했다.
그는 정에 의지해야 할 정도로 위기에 처해 있었다.
―한 번만, 제발 한 번만 봐주십시오, 아버지….
―쯧.
자칫 도승우가 퇴학이라도 당하면 가문에 불명예가 따로 없다.
모든 가문의 웃음거리가 될 터였다.
도범준이나, 도예익이나 결코 바라지 않는 상황이었다.
―실망이 아주 크구나.
―죄송합니다.
―어쩌면 범준이 너는 지금 있는 그 자리도 벅찰지 모르겠구나. 이번 일에 대한 책임을 지고, 과천시 지부장에서 물러나도록 해라.
―아, 아버지, 그건…!
―왜. 다른 것들까지 더 내놓고 싶은 거냐.
―…아닙니다. 물러…나겠습니다.
만약 도범준이 사태를 수습했다면 꾸중만 듣고 넘어갔으련만.
가주 도예익이 몸을 움직이게 되며, 그는 그 대가로 가문에서 발휘하는 영향력을 바쳐야 했다.
서브 로드의 자리는 간신히 유지하되, 과천시 지부장에서 쫓겨난 그는 향후 실적을 쌓는 것에 난항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자연히 빈자리는 도견우의 아버지, 도상준에게로 넘어갔다.
―상준이 네가 과천시를 맡거라. 송파구는 네 사람으로 앉히든, 말든 알아서 하고.
―…기대에 부응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가주님.
―그래, 정진하거라. 방심하지 말고.
이로써, 차기 가주를 노리는 경쟁 구도에 변화가 생겼다.
도범준은 사실상 경쟁에서 탈락하고 말았으며, 그의 영향력을 일부 흡수한 도상준은 장녀이자 넷째인 도민희의 입지를 위협하게 됐다.
앞으로 그는 좋든 싫든, 그녀에게 견제당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도예익과 소혜율의 협상으로, 도승우는 가까스로 퇴학을 면하고 강제 전학으로 타협했다.
―내 혈육의 정을 생각해서라도 제명은 하지 않으마. 하지만 내가 다시 인정할 때까지, 도승우 네가 가문의 이름을 입에 담는 일을 없을 거다.
도예익이 도승우에게 내린 처벌은 신검 도가의 사람으로서 가지는 지위를 박탈하겠다는 것과 다름없었다.
가볍다 하면 가볍고, 무겁다 하면 무거운 처사였다.
가주의 명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학창에서 문서로 통보를 받은 그는 비로소 자신이 몰락했음을 실감했다.
“…아무도 없군. 하기사, 그러겠지.”
어느덧 시간이 흘러.
출소한 도승우는 아무도 반기는 사람이 없는 상황에 쓴웃음을 지었다.
예견하고 있었으나, 씁쓸하다.
가족들에게도 내쳐진 그는 앞으로 살아갈 방안을 모색하며, 일단 기숙사로 향하기로 했다.
“….”
기척을 느낀 것은 바로 그때였다.
도승우는 고개를 돌렸다.
그가 코웃음을 치며 물었다.
“무슨 볼일이지? 내가 출소했다고 두부나 먹이러 온 건 아닐 테고.”
“당연히 아니지. 널 비웃으려고 보러 왔다면 모를까.”
“도견우….”
“그리고 갚아야 할 빚도 있고.”
“갚아야 할 빚이라고?”
“하늘이를 건든 대가는 치러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