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Childhood Friend of the Middle Boss RAW novel - Chapter (172)
(172)
하늘은 맑고, 햇볕은 따스하다.
바람이 불자 들판에 자란 녹음이 쏴아아 소리를 내며 흔들린다.
나무 그늘에서 눈을 뜬 우리는 속이 탁 트이는 기분을 느꼈다.
“경관이 예쁘네요. 게이트 중에는 이런 곳도 있었군요.”
“이런 세상이 게이트로 변모해서 우리 세상을 위협한다니…. 좀처럼 믿기지 않는 일이긴 해.”
경치에 감탄한 리사와 박사군이 말을 주고받았다.
그들의 감상에 동의하는 나는 조용히 화창한 세상을 둘러보았다.
지면과 하늘이 맞닿는 세상에는 슬라임들이 서식하고 있었다.
물방울처럼 반투명한 형태를 지닌 로즈 포톤 슬라임, 골든 포톤 슬라임.
서로 색이 다른 놈들의 체내에는 공통적으로 빛을 반짝이는 입자가 떠다니고 있었다.
이목구비를 알 수 없는 놈들은 꼭 일광욕을 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도 했다.
‘하늘이도 데려올 걸 그랬나….’
뒤늦게 후회가 든다.
게임에서는 별다른 감흥이 들지 않던 배경이 이렇게 아름다울 줄 몰랐다.
연하늘에게 보여 주지 못한다는 게 무척 아쉽기만 했다.
하다못해 사진이라도 찍어야겠다.
시야에 메시지가 뜬 것은 그때였다.
[공략 조건은 다음과 같습니다.] [게이트 키를 지닌 포톤 슬라임을 토벌하시오.]소혜율의 과제를 수행하다 보면 자연히 달성하게 되는 공략 조건이었다.
손으로 메시지를 치운 나는 친구들에게 말했다.
“사전에 들은 이야기로도 그렇고, 포톤 슬라임 외에 다른 몬스터는 존재하지 않는 것 같으니 각자 알아서 싸우는 거로 할까? 주위에 지형지물도 별로 없는 들판이라서 멀리 떨어지더라도 쉽게 서로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기도 하고.”
포톤 슬라임은 인간의 마나보다 대기에 녹아 있는 마나를 더 선호하는, 비교적 온순한 몬스터다.
마땅한 공격 기술이 없기도 한 놈들은 우리에게 위협이 되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개인 훈련을 대신해 놈들을 상대하자고 제의한 것이다.
친구들은 크게 반대하지 않았다.
“그러면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규칙을 정해 놓는 건 어떨까요?”
“나도 찬성이다. 엄연히 파티인데 너무 개인행동에 치중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본다.”
“나도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야. 그래서 이렇게 하는 게 어떨까 해. 서로 눈에 띄는 범위에서 활동하기로 하고, 멀리 갈 때는 근처에 있는 사람에게 말하기로 하자. 수신호로 연락은 힘드니 조명탄으로 신호를 주고받고….”
“견우야, 일정 시간마다 모여서 정보를 교환하는 것도 하자. 서로 상태도 알 수 있고 좋잖아?”
“도견우! 우리는 셋이서 하나!”
“삼두견! 케르베로스!”
“그러므로 우리는 셋이서 활동할게! 반박 시, 네 말이 맞음!”
집합지는 우리가 서 있는 나무 아래로 결정했다.
어디에서든 눈에 쉽게 들어오니 안성맞춤인 장소였다.
용해랑이 심한 길치라고 해도 설마 길을 잃지는 않을 것 같았다.
아마도….
정말 괜찮겠지?
‘일단 쟤는 내가 데리고 있을 거니 걱정은 나중에 하자.’
합의해야 할 규칙은 다 정한 것 같다.
분명 파티를 모은 것은 강한별인데, 어쩌다 보니 파티의 리더가 된 나는 손뼉을 쳤다.
“그럼 무슨 일이 생기면 언제든 조명탄을 사용하도록 해. 다치면 한계까지 참으려 하지 말고 리사한테 가서 치료받고. 리사는 이 나무 근처에서 멀리 가면 안 되는 거 알지?”
“네, 숙지하고 있어요. 다들 다치면 작은 상처라도 꺼리지 말고 저한테 오세요. 큰 상처보다는 작은 상처가 치료하기도 쉽고, 제 부담도 덜하니까요. 버프를 받으러 와도 돼요.”
“다들 들었지? 규칙 어기지 마. 자, 해산. 아, 유리는 괜히 위험한 짓 하지 말고.”
“견우견우! 날 너무 못 믿는 것 같은데 그러면 나 서운해!? 안 위험하게 잘 놀다 올게! 그럼 회의도 끝난 것 같으니 이만 가 볼게!”
남유리가 제일 먼저 자리를 떴다.
하얀 원피스 자락을 펄럭이는 그녀는 기분이 좋은지 낫을 들고 춤을 추듯 들판을 나아갔다.
공격의 범위 안에 있던 슬라임들은 산산이 흩어지거나 마석을 떨어뜨렸다.
한편, 그녀의 뒤를 이어 강한별, 박사군, 용해랑, 세쌍둥이도 각기 자리를 찾아 나서려 했다.
나는 그중 용해랑을 불렀다.
“해랑이는 잠깐 남아.”
“나한테 할 말이라도 있는 거냐?”
“내가 무술 계통은 아니지만 그래도 조언 하나 해도 될까?”
“조언?”
용해랑이 한쪽 눈썹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그러고는 어디 말해 보라는 양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머릿속으로 그의 성정을 돌이키고, 설득할 만한 방법을 궁리한 나는 입을 열었다.
“해랑이 너한테 움직임도 느리고, 공격이 위협적이지도 않은 슬라임이 과연 훈련 상대가 될까? 나는 별 도움이 안 될 거라고 생각해.”
“흠…. 나도 생각하지 않은 거 아니야. 그나마 조금 튼튼한 물풍선하고 싸우는 느낌일 테지. 혹시 뭐 좋은 방안이라도 있는 거냐?”
“있기는 해. 핸디캡을 두는 거지.”
“핸디캡?”
“어. 체내 마나는 발현하지 않고 순수하게 육체의 힘만으로 싸우는 거야.”
“….”
나는 주먹으로 발치로 다가온 로즈 포톤 슬라임을 때렸다.
주먹을 맞은 형태로 찌그러진 슬라임이 반투명한 몸을 출렁거렸다.
이내 슬라임은 언제 그랬냐는 듯 원래의 형태를 되찾았다.
타격의 피해는 찾을 수 없었다.
“지금 본 것처럼 포톤 슬라임은 충격을 흡수해 공격을 반감할 수 있어. 마나가 가미되지 않은 물리 공격은 거의 통하지 않고.”
“그런 놈들을 맨몸으로 상대하란 거냐.”
“하지만 아예 통하지 않는 건 아니잖아?”
“….”
“그 점에 착안해 훈련하다 보면 뭔가 깨닫는 게 있지 않을까? 이런 부류의 놈들을 효과적으로 상대할 수 있는 방법이나 기술, 묘리 같은 게.”
게임에 침투경(浸透勁)이란 스킬이 있다.
무술 계통 캐릭터만 배울 수 있던 스킬은 접촉 판정을 받는 공격의 크리티컬 확률을 높여 주고, 그 공격으로 데미지를 가했을 시, 확률적으로 추가 데미지를 줄 수 있어 유용했다.
나는 용해랑에게 그 스킬을 익히게 할 생각이었다.
‘이참에 배우면 얼마나 좋아.’
스킬의 습득 조건은 물리 공격에 반감을 지닌 몬스터를 무술 계통의 일반 공격으로 죽이는 것.
마침 필요한 몬스터들은 주위에 널려 있는 상황이었다.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던 나는 용해랑의 대답을 기다렸다.
이윽고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포권을 취했다.
“고맙다, 도견우! 확실히 네 말대로 좋은 훈련이 될 것 같다! 이거 갑자기 흥이 솟는걸!?”
“흥미가 생긴다니 다행이네.”
용해랑은 내 제안을 마음에 들어 했다.
그는 곧장 훈련을 하러 가겠다면서 큰소리로 웃으며 들판을 뛰어갔다.
나는 기합을 넣고 슬라임에게 주먹을 내지르는 그를 보며 안도할 수 있었다.
‘여기에서 침투경을 얻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안타깝게도 용해랑의 스킬 획득은 전적으로 그에게 달려 있었다.
나는 그가 성취를 이루기를 바라며 슬라임들을 사냥하기로 했다.
[몬스터를 조우했습니다.] [골든 포톤 슬라임(Rank. 02) x 1]포톤 슬라임의 랭크는 2~3.
방어력이 높고, 공격력이 떨어지는 놈들은 내 경험치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수풀을 뒤져 놈들을 찾아, 별다른 어려움 없이 토벌했다.
[군청검: 전류 응집>사이사이 벽뢰를 일으키고 남은 잔재를 흡수한다.
법석이 나온 것은 그러던 중이었다.
‘드디어 나왔네.’
나는 법석의 정보를 확인했다.
[골든 포톤 슬라임의 법석]◆ 소모품 분류
―법석
◆ 상세 설명
―골든 포톤 슬라임에게서 기인한 법석이다.
◆ 상세 효과
―흡수 시, 독성 분해 스킬을 2% 습득할 수 있다.
독의 지속 시간을 줄이고, 나아가 경우에 따라 해독할 수도 있는 스킬인 독성 분해.
독으로 인한 피해를 경감하는 독성 내성과 구분되는 스킬은 바로 내가 원하던 것이었다.
‘독성 내성에, 독성 분해까지 있다면 앞으로 웬만한 독에는 대응할 수 있을 거야.’
암야 말벌의 독에 당한 연하늘이 사경을 헤매던 모습을 보며 깨달은 게 있다.
독에 대한 방비는 철저해야 한다고.
게임에서보다 많은 종류의 독이, 내가 모르는 독이 존재하는 세상이다.
그런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독성 내성 스킬로는 부족했다.
하마터면 그녀를 잃을 뻔했던 나는 현재 상태에 안심할 수 없었다.
그래서 게이트에 들어온 것이다.
골든 포톤 슬라임에게서 나오는 독성 분해 스킬의 법석을 얻기 위해.
‘나랑 하늘이가 습득한 다음에는 다른 애들 몫도 모으는 거야.’
나는 법석에 마나를 불어넣어 적성을 확인했다.
딱히 사람을 가리는 스킬은 아니었던 만큼, 법석은 노란빛을 반짝였다.
아마 연하늘에게도 반응할 것이다.
한편으로는 고생길이 눈에 보였다.
‘2%라….’
스킬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법석을 50개는 모아야 한다.
다른 친구들의 몫까지 고려하면 모아야 하는 개수는 몇 배나 더 늘어나고 만다.
더욱이 법석은 몬스터를 죽이면 무조건 나오는 마석과 달리, 독립 시행에 기반한다.
그만큼 상당한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현실적으로 밤을 꼬박 새우더라도 목표치를 달성하는 것은 요원하고, 재수가 없으면 한 사람 분량도 구하지 못할 수 있다.
‘마음 같아서는 애들 전원이 독성 분해를 익혔으면 싶지만…. 너무 욕심부리지 말고 최대한 모을 수 있는 만큼만 모으자.’
내가 연하늘을 데려오지 않은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언제 끝날지 기약할 수 없고, 반복적인 사냥에 지치고, 아무 보람도 느끼지 못할 것 같아서.
괜히 그녀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처음부터 게이트에 볼일이 있던 강한별은 차치하고 다른 애들이야, 뭐….
‘미안한데 같이 고생 좀 하자.’
긍정적으로 생각했을 때, 마냥 나쁜 이야기는 아니다.
친구들은 포톤 슬라임과 싸우며 경험을 쌓고, 체력을 기르며,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내가 먹여 주고 재워 주려 텐트와 야식거리를 가져오기도 했다.
숙식이 무료로 제공되는 셈이다.
‘그러니 너희는 몸만 구르면 돼. 얼마나 편하고 좋아? 전생의 나도 내 돈 내고 살았는데….’
사실상 시간에 여유가 있었다면 훈련하기에 쾌적한 환경이 아닐까 싶다.
나는 그들이 가능한 많은 법석을 캐 오기를 바랐다.
‘이쯤이면 됐으려나.’
한편, 나 역시 이 환경을 충분히 이용할 생각이었다.
나는 벽뢰의 잔재를 흡수해 간헐적으로 스파크를 튀기는 군청검의 정보창을 띄웠다.
[군청검]◆ 장비 분류
―한손검
◆ 상세 설명
―신검 도가의 2대 가주 도민건이 애용한 검 중 하나.
―뇌각수의 뿔을 소재로, 100일 동안 담금질하여 만들어진, 세상에 단 한 자루밖에 없는 검.
―주인을 시험한다.
◆ 상세 효과
―체력 +3, 민첩 +3
―착용 시, 체내 마나를 소모하여 역날검으로 전환할 수 있다.
―착용 시, ‘수왕류’란 이름이 붙은 모든 스킬의 레벨을 1 올린다.
―스킬「전류 친화」
―스킬「전류 응집」
―스킬「전류 방출」
―스킬「전류 제어」 (New!)
―(해금 조건: 마력 60 이상)
얼마 전, 민첩이 70으로 오르면서 군청검에 내장돼 있던 스킬이 새로 해금됐다.
게임에서는 전류 응집으로 흡수한 벽뢰의 잔재를 전신에 퍼뜨림으로써 Hp와 Mp 회복 속도, 물리와 마법 공격력, 물리와 마법 방어력, 공격 속도, 이동 속도, 회피율 등의 상승에 관여하던 전류 제어.
‘게임 속 도견우의 전용 버프기였지. 발동하고 벽뢰를 몸에 두르는 이펙트가 참 멋있었는데….’
군청검의 다섯 번째 스킬도 그렇고, 전류 제어는 지금보다 나를 더 강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문제는 스킬을 다루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점.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아서 번번이 위험에 처했을 정도다.
현재 수준으로는 도저히 실전에 적용할 게 못 됐다.
그렇기에 이참에 스킬을 연습해 어떻게든 감을 터득하기로 했다.
‘스킬을 연습할 환경으로는 딱이야. 주위가 탁 트여 있기도 하고, 위험한 몬스터도 없으니까.’
숨을 가다듬은 나는 군청검으로 의식을 집중했다.
응집된 벽뢰를 풀어헤친다.
[군청검: 전류 제어>푸른 전류가 사납게 솟구쳐서는 내 몸을 휘감는다.
벽뢰가 전신을 훑는 감각에 절로 온몸에 난 털이 삐죽 솟는다.
이내 체내로 흘러든 벽뢰가 심장과 혈관, 마나 회로를 자극한다.
전기가 통하는 찌릿한 감각에 눈이 번쩍 뜨인다.
파직!
그대로 곧장 발을 내디딘다.
시야가 부지불식간에 뒤로 밀려난다.
사고는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뇌에서 내리는 명령 신호와 몸이 불협화음을 일으킨다.
몸이 고꾸라지려는 나는 어떻게든 이를 악물며 균형을 잡으려 했다.
‘내가 오늘 꼭 제어하고 만다.’
그렇게 나는 들판에서 몸부림쳤다.
* * *
‘얘는 언제 오는 거지….’
도견우가 먼저 자라고 말했지만, 편히 잘 수 있을 리 없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불안하고, 곁에 있어야 마음이 놓이는 사람이 바로 자신의 소꿉친구다.
‘견우 보고 싶다….’
도견우가 없으면 세상이 멈춘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히는 연하늘은 한없이 우울하기만 했다.
좀처럼 의욕이 솟지 않는 그녀는 멍하니 그의 사진이나 보며 침대에 누워 있었다.
초인종이 울린 것은 그때였다.
“응?”
소리를 포착한 토끼 귀가 쫑긋했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연하늘은 현관으로 시선을 보냈다.
“누구지….”
아무래도 누군가 찾아온 모양이다.
밤늦은 시간의 방문이라니, 부쩍 경계심이 들 수밖에 없다.
침대 밖으로 다리를 내민 연하늘은 가볍게 걸칠 옷을 입고, 책상 위에 둔 디바이스를 챙겼다.
여차하면 쇠망치를 내려칠 생각으로 문을 열었다.
“안녕, 하늘아! 깜짝 놀랐지? 아직 안 자고 있을 것 같아서 놀러 왔어. 뭐 하고 있었어?”
“…은비? 은솔이랑 아린이도….”
“얌. 좋은 밤이야. 먹을 거 사 왔어.”
“안녕, 내가 놀러 와 준 거니까 고맙게 여기도록 해.”
문밖에는 제각기 검은 봉지를 든 고은비, 차은솔, 민아린이 서 있었다.
연하늘은 그들의 예고 없는 방문에 눈을 깜빡였다.
그러자 고은비가 봉지를 들어 눈앞에서 흔들었다.
“견우랑 애들이 돌아올 때까지 술이나 마시며 기다리는 게 어떨까 해서. 우리만 편하게 있으면 미안하잖아. 하늘아, 마실 거지?”
“응?”
“좋아, 마신다고 했어! 사실 거부권은 없었지만. 그럼 하늘이 방에서 술판이나 벌여 볼까!?”
“뭐? 내 방에서? 갑자기?”
“이러고 있을 시간 없어. 얘들아, 사감님한테 들키지 않게 얼른 들어가자!”
연하늘이 당황하든, 말든.
고은비가 아랑곳 않고 현관으로 발을 들여, 신발을 벗고 방 안으로 들어간다.
차은솔, 민아린도 차례로 그녀의 뒤를 따랐다.
“이게 무슨 일이지….”
문을 닫은 연하늘은 멀뚱히 서서 자신의 방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에만 해도 넓게 느껴지던 방 안이 어느새 북적거리고 있었다.
익숙하게 부엌으로 향해서는 각종 그릇과 술잔을 가져오는 고은비.
입에 닭꼬치를 물고 우물거리며 술과 안주를 세팅하는 차은솔.
염탐하듯 가늘게 눈을 좁혀서는 방 안을 둘러보는 민아린.
“….”
방에 사람의 온기가 감돌기 시작한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연하늘은 친구들의 배려에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주머니에서 디바이스를 쥔 손을 뗀 그녀는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내 방에서 마시는 거니까, 입장주 있는 거 알지? 나 빼고 다 한 잔씩 마시도록 해.”
“와아… 하늘이 사악한 것 봐. 이럴 때는 견우랑 똑같아, 아주…. 그리고 동기 사랑 몰라!? 동! 기! 사! 랑! 나! 라! 사! 랑!”
“그럼 아린이가 은비 몫만큼 대신 마시도록 해. 흑기사 하면 되겠네.”
“응? 야, 연하늘! 너 왜 갑자기 가만히 있는 날 걸고넘어지는 건데? 입장주도 어이가 없는데, 뭐? 나보고 흑기사를 하….”
“얌얌. 나도 흑기사 해 줘. 고마워.”
“아니, 내 말 좀 들으라고요…. 내가 왜 대신 마셔야 하는데!?”
“흑…. 아린아, 정말 알고 싶니? 그 진실을 감당할 수 있겠어? 왜냐하면 네가… 아니야, 나는 못 말하겠어.”
“얌…. 최약체니까?”
“앗! 은솔이가 말해 버렸네…. 이건 내 잘못 아니야.”
“내가… 최약체라고? 내가? 내가아아? 나 민아린이이이이!?”
“아린아, 목소리 좀 낮춰 줄래? 사감님한테 들키면 어쩌려고 그러니?”
“이건 못 참아. 모욕으로 받아들이기 전에 얼른 정정해. 정정하지 않으면….”
“나 지금 주머니에 쇠망치 있는데.”
“…조용히 하면 되잖아, 조용히 하면. 애가 무식하게 진짜….”
“응, 내가 아카데미 수석이야. 너는 성적이 어떻게 되니?”
“식빠앙….”
“식빵? 얌…. 맛있겠다.”
“그래서 우리, 하늘이 컴퓨터에는 뭐가 있는지 궁금하지 않니? 하늘아! 비번 알려 줘!”
“은비야, 내 컴퓨터 만지지 말고 여기 와서 술이나 마시자.”
“비밀번호가… 어? 됐네?”
“어?”
“견우 생일이 비밀번호였구나. 그럼 이제 뭐가 들어 있는지 검색이나 해 볼까? 일단 avi부터….”
“안 돼, 하지 마. 은비야, 하지 마. 착하지? 이리 와.”
“흥, 꼴을 보니까 남한테 부끄러운 영상이라도 숨겨 놨나 보지?”
“얌…. avi가 영상이야? 처음 알았네. 너는 알고 있었구나.”
“아… 혀, 현대인이라면 당연히 알고 있어야지! 기본 상식인데! 숨김 파일도 그렇고!”
“반응이 좀 수상한데? 나중에 아린이 컴퓨터도 뒤져 봐야겠네. 그나저나 하늘이 컴퓨터에는… 견우 영상이 대부분이구나…. 진짜 찐이네.”
“으으…. 이제 그만 봐….”
“크흠! 야, 저 영상 나한테도….”
“아린아, 뭐라고? 술이 들어갔다고 머리가 어떻게 된 건 아니지?”
“….”
“머리 이상하면 나한테 말해 줘. 내가 고쳐 줄게. 언제든지.”
“…내 머리 멀쩡하니까 디바이스에서 손 좀 빼지?”
“자! 얘들아, 우리 짠!”
“짠. 얌얌…. 안주가 부족한데 더 사 올까?”
그렇게.
우울한 감정을 떨친 연하늘은 세 사람과 술판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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