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Childhood Friend of the Middle Boss RAW novel - Chapter (259)
(259)
그레이스 제국
리사가 우리의 의견을 취합해 여행 일정을 공유했다.
열여덟 살이 돼서 처음으로 떠나는, 친구들이 함께하는 여행이었다.
우리 모두는 설레는 마음으로 어서 그때가 오기를 바랐다.
‘가서 에피소드를 공략하느라 고생도 겪겠지만, 그래도 어디야.’
그리하여 이날 아침.
여행을 떠나는 기대에 부푼 나와 연하늘, 세쌍둥이는 그레이스 제국으로 향했다.
워프 게이트를 이용했던 만큼, 이동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다만 출입국 심사를 거치느라 적잖은 시간을 소모해야 했다.
특히 입국 심사에서.
‘출국 심사야 간단했지만, 입국 심사는 정말….’
그레이스 제국의 폐쇄성을 반영하듯, 입국 심사를 맡은 제국의 직원은 우리의 신상과 입국 목적을 철저히 조사하려고 들었다.
심지어 우리를 보증할 수 있는 제국민의 정보를 요청하기도 했다.
―제국민의 초대를 받지 않으면 제국에 입국할 수 없습니다. 초대장을 제출해 주십시오.
―네…. 여기요.
―잠시 진위 여부를 확인하겠습니다. 신원 보증인은… 리사… 그레이스?
―네, 맞아요.
―…제23황녀님의 지인이셨군요. 실례가 많았습니다.
우리가 리사의 초대로 입국하려던 사실이 밝혀지자, 그나마 심사가 간소해졌다.
그럼에도 우리는 입국 허가를 받을 때까지 진을 빼야 했다.
사정은 입국 심사장에서 만난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설마 리사 친구라고 해도 입국 절차가 까다로울 줄은…. 듣던 대로 까다롭구나.”
“나는 졸려 죽겠어….”
“아니, 마도 민가의 사람을 어떻게 이렇게 대할 수 있어? 한국이었으면 상상도 못 했을 거야. 내가 열불이 나서 참….”
“나도 성질 죽이느라 힘들었잖아. 아, 스트레스 쌓여! 은비까비! 뭐 재밌는 거 없어?”
“흠… 나는 가주님의 성함을 한자로 써 보란 질문을 받고 참 당황스럽더군.”
안경알을 닦는 박사군.
연하늘의 어깨에 기대고 앉아 잠을 청하려 드는 차은솔.
붉은 머리칼을 홱 젖히며 화를 삭이는 민아린.
부루퉁한 얼굴을 하는 남유리.
팔짱을 끼고 동조하는 용해랑.
그 밖에 다른 친구들도 저마다 불만을 표했다.
우리는 그렇게 잡담을 떨며 리사의 마중을 기다렸다.
이윽고.
히이잉!
말 울음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발굽을 밟는 소리가 가까워졌다.
게이트 터미널 앞에 앉아 있던 우리는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내가 잘못 보고 있는 건가?”
“….”
웬 마차가 포장도로를 따라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강한별이 눈을 의심했지만, 분명 마차가 맞았다.
과학과 마법으로 문명이 발전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어안이 벙벙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니….
‘뭐야, 마도구였던 건가.’
마차는 마나를 동력원으로 삼고 있는 듯했다.
세상에 녹아든 마나를 의식하자, 마차 주위로 피어오르는 마나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제야 나는 마차를 끄는 말들이 겉으로만 그럴싸하게 보이는 기계였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몇몇 친구들도 깨달은 것 같았다.
그때.
히이잉!
“….”
마차가 우리 앞에 멈춰 섰다.
말들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앞발을 들어 올렸다 내렸다.
이내 마부석에서 내린 사람이 마차 문을 열어 주었다.
“제국에 온 것을 환영해요. 다들 오랜만이에요. 잘 지냈나요?”
“심사는 무사히 통과한 모양이군. 뒤에 짐을 싣는 칸이 있다. 짐을 싣는 대로 올라타라.”
마차에 타고 있던 리사와 미하일.
두 사람이 우리를 반겼다.
* * *
마차는 그레이스 제국에서 유명한 관광용 교통수단이라고 한다.
역참이 설치된 범위 내에서는 어디든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는 모양이다.
‘자동차보다는 조금 느리지만, 나름 운치가 있기는 하네.’
마차가 제도(帝都)를 달리고 있다.
나는 리사의 설명을 흘려들으며 창밖에 펼쳐진 풍경을 감상했다.
여러 문화 양식이 공존하는 성곽도시가 지나간다.
한국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풍경은 무척이나 색달랐다.
“제국의 역사가 오래된 만큼, 제도는 다양한 시대로 어우러졌어요. 이세계에서 넘어온 후에는 이 세계의 양식이 유입되기도 했고요.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굉장히 가치 있는 곳이에요.”
“….”
보는 눈이 즐거웠다.
친구들도 나와 비슷한 심정인지 창밖을 감상하기에 바빴다.
잠시 후, 마차가 정차했다.
“여기는 비비안 거리라고 해요. 제도에서 손꼽히는 번화가죠. 저희는 이곳 거리를 구경하면서 저기에 있는 세계수를 보러 갈 거예요.”
미하일이 내민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리는 리사.
뒤이어 마차에서 내린 우리는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사람들로 붐비는 거리 너머에는 구름에 가려질 정도로 거대한 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그레이스 제국의 세계수였다.
“여러분, 여기에서 사진 찍어요. 여기가 비비안 거리와 함께 세계수가 잘 나오는 위치거든요.”
거리의 이름이 적혀 있는 듯한 입구 간판 아래에서 리사가 제안했다.
그러자 사진 찍기를 좋아하던 여자애들이 신이 나서는 그녀의 주위로 모여들었다.
나랑 강한별, 용해랑, 박사군, 세쌍둥이, 미하일도 그들 사이에 섞여 자리를 잡았다.
사진은 고은비에게 스마트폰을 받은 마부가 찍어 주었다.
그 후, 우리는 리사를 따라서 비비안 거리를 구경했다.
‘그레이스 제국에는 인간 외에도 다양한 종족이 산다더니, 신기하네.’
이국적인 풍경이 가득한 거리.
우리는 그곳에서 엘프나 드워프, 아인은 물론이고, 수인(獸人)들을 찾아 볼 수 있었다.
‘와, 저기 토끼 수인도 있네. 모녀 관계인 건가?’
대격변 시기, 그레이스 제국과 함께 이세계에서 넘어온 수인.
그들은 아인과 별개로 구분됐다.
아인이 인간의 유전자가 변질돼, 동물의 특징을 지닌 존재라면.
수인은 동물의 유전자를 토대로 인간과 유사하게 진화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아인에 비해 동물의 특징이 더 짙게 묻어났다.
눈동자 색이 다양하기도 했다.
‘마음 같아서는 토끼 모녀한테 당근이라도 사 주고 싶은데…. 경계하겠지? 아쉽네.’
평소 동물을 좋아하던 나로서는 자연히 수인들에게 시선이 갔다.
특히 토끼 수인에게.
나는 정답게 장을 보고 있는 분홍색 토끼 모녀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참고로 그레이스 제국에서는 그들을 묘인족(卯人族)이라 부른다고 한다.
‘털이 북슬북슬해 보이는데 만지고 싶다…. 하늘이랑 다를까? 역시 다르겠지?’
정말이지….
자꾸 볼수록 뒤를 쫓아가서 등에 건전지를 달고 싶어지는 토끼 모녀다.
나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시선을 느낀 것은 그때였다.
“…하늘아?”
“혹시 저 수인들한테 실례되는 생각을 하고 있던 건 아니지? 아까부터 계속 쳐다보길래.”
“….”
연하늘이 생긋 웃고 있었다.
무섭다.
이내 그녀가 미소를 거뒀다.
“토끼라면 다 좋은 거니? 그래서 나랑 만나는 거야?”
“하늘아, 진정하고… 아무래도 오해하는 것 같은데….”
“왜? 토끼가 그렇게 좋으면 차라리 토끼나 왕창 키우면서 살다 죽지 그래? 아니면 여기에서 묘인족하고 사귀든가. 나보다 더 토끼 같을 테니까 좋겠네.”
“야, 너랑 토끼랑 다르지…. 하늘아, 내 말 좀 들어 봐.”
“흥, 됐네요. 은비야, 은솔아, 우리 저기 보러 가자!”
연하늘이 단단히 삐졌다.
그녀가 나를 홱 지나친다.
나는 여자애들과 손을 잡고 저 멀리 사라지는 그녀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하늘이 달래느라 고생하겠네. 근데 그냥 쳐다보는 것도 안 되나….’
이미 벌어진 일은 별수 없다.
나는 연하늘의 기분을 풀 기회나 엿보기로 했다.
그때, 미하일이 혀를 차고는 내게 핀잔을 주었다.
“제국이 다른 나라에 폐쇄적인 이유는 이것 때문이기도 하다. 한 번도 이종족을 접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들을 진귀한 동물이라도 보듯 여기니까.”
“….”
“수인이 신기한 기분은 알겠지만, 너무 쳐다보지는 말도록 해. 그들에게는 결례다.”
“…내 생각이 짧았어. 주의할게.”
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형도 올 줄 몰랐어. 웬일이야?”
“리사 혼자 너희를 챙기느라 고생할 게 눈에 선했으니까. 그래서 내가 돕기로 한 거다. 모쪼록 말썽 피우지 말고, 편하게 여행을 즐기다 돌아가길 바라마.”
“어… 음… 그건… 힘들지도?”
“…국외 추방을 당하고 싶지 않으면 제발 얌전히 있어라.”
* * *
학원도시의 세계수와 달리, 그레이스 제국의 세계수에서는 사전에 신청한 견학자들에 한해 매달 신당을 공개하고는 했다.
나아가 신당에서 보관 중인, 세계수의 열두 신기에 속하는 신장(神杖)을 관람할 수 있었다.
“예약이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신당에는 입장하지 못했을 거예요. 예약이 금방 마감됐거든요.”
그래서 리사가 이 시기에 맞춰 여행을 계획한 것이다.
우리는 그녀의 티켓팅 노력 덕에 세계수의 신당에 들어설 수 있었다.
그때, 붉은 머리칼이 인상적인 엘프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저는 이곳 세계수의 수호자 예시카라고 합니다. 제5황자 전하와 제23황녀 전하, 일행분들의 방문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세계수의 수호자, 예시카.
그녀와 간단히 통성명을 교환한 우리는 신당에서 내다보이는 경관을 둘러보았다.
저 멀리서부터 제도를 감싸는 3개의 성곽이 보였다.
“경치 좋네.”
“그러게.”
살며시 내 팔을 끌어안는 연하늘.
어찌어찌 화해하는 데 성공한 우리는 경치를 감상하는 한편, 친구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그러던 중, 예시카가 주목을 모았다.
“신장을 관람하고 싶은 사람은 저한테로 와 주세요.”
세계수의 신기를 관람하는 시간이 됐다.
우리는 얼른 예시카에게로 향했다.
잠시 후, 그녀는 우리를 비롯한 견학자들을 데리고 신당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게임에서나 보던 신기였는데…. 실제로 보면 어떨지 기대되네.’
신장 – 엔들리스 플래티나(Endless Platina).
게임에서는 두 번이나 등장한 세계수의 신기였다.
한 번은 지금 이렇게 직접 신당 내부를 보러 가면서.
다른 한 번은….
‘스토리 최종 에피소드에서.’
게임의 전개에 따르면.
강한별이 졸업을 앞둔 시기에 헌터와 빌런들의 전면전이 벌어진다.
이때, 강한별 일행은 분투 끝에 타천을 쓰러뜨린다.
하지만 그의 야망은 막지 못해, 끝내 세상의 멸망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균열을 야기하고 만다.
그런 상황에서….
‘리사 앞으로 백금빛이 떨어지고, 그 속에서 신장이 나타나는 거지.’
게임에서 인상 깊었던 장면이다.
나는 이 세상에 환생한 지금도 신장의 주인으로 인정을 받은 리사가 거대한 균열을 봉합하던 장면을 선명히 떠올릴 수 있었다.
그 신장을 관람할 수 있다니, 가슴이 두근거리기만 했다.
이윽고.
“신당에는 각종 보안 마법이 걸려 있는 만큼, 안에 있는 물건에 섣불리 손을 대는 일이 없길 바랍니다. 또한 금줄 안으로는 절대 들어가지 마십시오. 만약 들어가 불상사가 생긴다면 본인 책임이 될 겁니다.”
“….”
우리는 신당에 발을 들였다.
세계수의 기둥을 파서 만든 공간에는 의식에 사용될 법한 도구들이 전시돼 있었다.
도구들 주위로는 접근을 차단하는 금줄이 쳐져 있었다.
“신장은 이쪽입니다.”
우리는 예시카의 안내를 따라 가장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신장 – 엔들리스 플래티나’는 그곳에 보관되어 있었다.
‘…평범하지 않다는 건 알겠어.’
형형색색의 보석으로 장식된, 황금으로 이루어진 석장.
신장 – 엔들리스 플래티나는 척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거룩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그 기운에 홀린 우리는 거의 넋을 놓고 신장을 바라보았다.
“훔치고 싶다….”
“….”
…한별아, 그러면 안 돼.
그가 침을 삼키는 소리에 정신을 차린 나는 생각을 환기하기로 했다.
‘게임에서는 이벤트성으로 나와서 정보를 알아볼 수 없었는데, 이참에 살펴볼까?’
눈에 힘을 준다.
나는 신장의 정보를 띄웠다.
하지만 아쉽게도.
[대상의 격이 아득히 높습니다.] [정보를 열람할 수 없습니다.]쳇.
원하는 메시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사실, 크게 기대하지도 않았던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이변이 일어난 것은 그때였다.
일순 신장이 번쩍이는가 싶더니….
‘어라?’
세상이 개변했다.
어느새 나는 폐허 속에 서 있었다.
그런데 낯이 익은 것 같았다.
‘여기는….’
별빛도 보이지 않는 밤하늘 아래.
붕괴한 도시를 둘러본 나는 불쑥 떠오르는 이름을 꺼냈다.
“하트랜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