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Dark Knight in the Game RAW novel - Chapter (214)
결전
* * *
데일이 황혼의 생기와 잔혼을 흡수하려 했다.
황혼은 이 가소로운 시도에 코웃음을 쳤다.
“어딜!”
황혼은 데일의 시도를 가볍게 물리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둘 간의 힘 차이는 압도적이었으니.
하지만 데일이 생각보다 쉽게 나가떨어지지 않았다.
이건 정신과 영혼의 싸움이다.
그리고 데일은 이런 싸움에 익숙했다.
그 옛날, 선배 흑기사 케인이 가르쳐주었듯.
황혼의 혼을 빨아들이기 위해 모든 힘을 쏟았다.
서로 간에 혼과 생기가 얽힌다.
황혼의 기억이 섞여 들어온다.
이제 데일은 황혼을 이해한다.
그가 왜 이런 짓을 벌이는지.
자신에 대해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
황혼 역시 이에 질세라 데일의 힘을 빨아들였다.
황혼 역시 기억을 흡수한다.
이 순간.
둘은 하나로 연결되었다.
이 세상에서 서로가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하는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둘은 타협할 수 없다.
서로 간에 줄다리기가 계속된다.
팽팽하던 승부는 점점 황혼 쪽으로 기울어간다.
애초에 승부가 불가능한 싸움이다.
황혼은 수많은 사람들을 흡수했고, 두 여신마저 먹어 치웠다.
그 영혼의 힘은 감히 데일에 비할 바가 아니다.
하지만 데일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는 게걸스럽게 황혼의 잔혼을 빨아들였다.
조금이라도 상대에게 더 큰 타격을 주려는 듯이.
영혼의 고통에 황혼이 고함쳤다.
“그만! 이미 내가 이겼어! 이런 행위에는 아무 의미가 없다고.”
“정말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나?”
“뭐?”
데일은 섬뜩할 정도로 무감정한 눈으로 황혼을 쳐다보았다.
“너와 나는 본질적으로 같아. 타인의 힘을 먹어 치워 자신의 힘으로 삼지. 하지만 그 힘에는 분명, 부작용이 있지.”
그 부작용을 마주한 건 바로 조금 전이다.
데일의 꿈속에서 그를 짓뭉개던 악마들. 마음속에 남아 있는, 지금껏 죽이고 흡수해온 자들의 찌꺼기.
“난 거기서 해답을 찾았어. 아이러니하게도, 네 덕분에 말이지.”
“뭐?”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무어라 말하려던 황혼의 입에서 돌연, 핏물이 흘러나왔다.
핏물은 빛이 되어 사방에 흩어졌지만 도무지 멎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무슨……?”
황혼은 머리를 울리는 끔찍한 고통에 몸부림쳤다.
데일은 상대의 마음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생생히 볼 수 있었다.
그건, 반란이었다.
“지금이다! 지금 우리의 힘으로 이 마녀를 쓰러트릴 수 있어!”
“배신자 년!”
“신들을 위해! 제국을 위해!”
황혼이 그간 먹어 치워 온 수많은 사람이 데일이 만들어준 기회를 틈타 마구 날뛰었다.
누군가는 신앙을 위해.
누군가는 다른 사람들을 지키려고.
누군가는 황혼에 대한 복수심으로.
이유는 달랐지만 저들이 바라는 건 하나였다.
황혼의 몰락.
낯익은 이들이 보인다.
용병와, 성녀, 그리고 기사단장.
기분 탓일까?
기사단장과 눈이 마주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기사단장은 웃고 있었다.
감사를 표하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으으!”
황혼은 필사적이다. 정신을 가라앉히기 위해 다급히 집중력을 유지하려 했다.
가만 두고 볼 데일이 아니다.
데일은 집요하게 황혼의 영혼을 물어뜯었다.
절대 상대가 마음을 가다듬을 시간을 주어서는 안 된다.
“너어어어!!!”
황혼이 데일에게 분노를 외친 순간.
화아아!!
황혼의 몸에서 수많은 영혼이 뿜어져 나왔다.
드디어 황혼이 제어권을 잃은 것이다.
“아, 안 돼!”
황혼은 다급히 영혼들을 다시 붙잡으려 했다.
그게 힘의 원천이었으므로.
그중에서 유독 찬란한 존재감을 뽐내는 영혼이 둘 있었다.
하나는 밝은 빛무리를 발산하며, 다른 하나는 깊은 어둠을 흩뿌린다.
여신들.
데일은 그 둘에 손을 뻗었다.
황혼이 자신의 몸속에 여신의 힘을 받았다면, 자신도 가능하겠지.
빛과 어둠을 한 몸에 받아들인다면 어떻게 될지는 뻔하다.
하지만 몸이 전부 타버려도 좋다.
죽음 역시 기꺼이 감수할 것이다.
데일이 지키려던 모든 것들을 지킬 수만 있다면.
데일의 몸속으로 두 여신이 들어온다.
데일은 몸 안에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힘을 느꼈다.
머릿속에는 익숙한 목소리가 울렸다.
[데일. 사랑하는 내 아들아. 네가 정말 자랑스럽구나.]“마지막으로 힘을 내려주시겠습니까?”
[얼마든지.]눈치를 살피던 빛의 여신이 말했다.
[죽으면 나한테 오거라. 내 옆자리를 비워둘 테니.]그러고는 데일에게 힘을 내려주었다.
빛과 어둠의 힘.
수십 년 전 협약을 맺었던 두 여신이 지금, 비로소 하나가 되었다.
데일의 온몸을 휘몰아치는 힘에 전능감을 느꼈다.
지금. 데일은 아득히 높은 경지에 다다라 있었다.
이 상태를 오래 유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이제 끝을 봐야 한다.
데일은 망연자실하게 앉아 있는 황혼에게 다가갔다.
데일이 말했다.
“이 세계 사람들은, 자신을 소개할 때 자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말하더군. 누구의 아들. 누구의 제자. 어디 소속의 누구.”
“네가. 감히!”
황혼은 대답 대신 힘을 끌어올렸다.
데일을 죽이기 위해 필사적으로 그러모은 마지막 힘이다.
끔찍한 기세가 발산된다.
하지만 데일은 차분하다.
“나는 존경하는 할아버지의 손자. 누군가의 동료. 그리고 인간인…… 데일이다.”
“죽어!!”
황혼이 마지막 힘을 그러모아 광선을 날렸다.
모든 걸 삼켜버릴 정도로 강력한 일격을 향해, 데일은 느릿하게 손을 뻗었다.
데일의 안광이 한차례 일렁였다.
후욱.
침묵이 온 공간을 지배했다.
세상이 빛에 둘러싸였다가, 어둠에 가라앉았다가, 다시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
*
*
화려한 폭발도 없다.
귀를 찢는 굉음도.
온 대지를 뒤흔드는 진동도 없다.
세상은 이전과 조금도 달라진 게 없다.
다만 하나. 황혼이 있던 자리가 텅 비어 있을 뿐이다.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는 듯이.
사람들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온 하늘을 뒤덮었던 주황빛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태양이 돌아왔다.
그것이 의미하는 건 하나였다.
승리.
“이, 이겼다?”
“우리. 살아남은 거야?”
“와아아아!!!”
“데일! 데일! 데일!”
“대륙의 구원자!”
우레와 같은 환호성과 함께, 데일의 이름을 연호했다.
동료들도 살아남았다는 기쁨에 서로 얼싸안았다.
하지만 그러기도 잠시.
“자, 잠깐. 데일 경은?”
“어?”
동료들이 다급히 데일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데일이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모든 걸 불태운 자 특유의 후련한 분위기가 데일에게 맴돌았다.
동료들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데일에게 다가갔지만, 이내 표정을 굳혔다.
“데일 경?”
얼굴이 사색이 된 에스델이 급하게 달려가 데일의 손을 붙잡았다.
데일의 몸에서 점점 기력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큰 힘에는 대가가 따른다.
빛과 밤의 여신을 동시에 받아들였으니, 육체가 붕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데일의 심장에서 밤의 신성이 서서히 빠져나갔다.
심장은 여전히 뛰지 않았다.
에스델이 양손으로 입을 막았다.
엘레나도, 하켄도, 프라우도. 그 누구도 말을 잇지 못했다.
누군가는 방법을 찾기 위해 고개를 두리번거렸고 또 누군가는 데일의 몸을 절박하게 흔들었다.
하지만 데일의 시간을 멈출 수는 없었다.
“아아!”
데일은 동료들을 올려다보며 미소를 짓고는 스르르 눈을 감았다.
얼마 만에 지어보는 순수한 미소일까.
차가운 피가 흐르지만, 누구보다 마음이 따뜻했던 흑기사는 그렇게 눈을 감았다.
* * *
“휘! 휘! 그렇게 대륙을 지켜낸 위대한 흑기사는 동료들의 곁에서 눈을 감은 것입니다! 아아! 온 대륙을 지켜낸 영웅이여! 그 최후까지 명예로웠던 기사여! 우리는 그대를 잊지 않으리! 그대의 이름은 영원히 기억될지어다! 휘! 휘! 그리하여 위대한 흑기사의 이야기는 이렇게 막을 내리었다!”
음유시인 소마는 눈가를 훔치는 시늉을 하며 슬쩍 관객들의 반응을 살폈다.
그는 이번 공연에 자신이 있었다.
그도 그럴 게, 대륙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이야기가 아닌가.
데일과 짧게나마 함께했던 자신이 직접 부르는 노래이니, 분명 관객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으리라.
자신만만하게 생각한 소마는 멋들어진 자세로 꾸벅 고개를 숙였다.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를 기대하며.
하지만…….
딱!
어디선가 돌이 날아와 소마의 머리를 강타했다.
분노한 소마가 화를 내려 했다.
“어, 어떤 새끼가!”
이윽고 소마가 마주한 건, 분노에 사로잡힌 관객들.
그들의 손에는 돌, 포크, 접시, 심지어 단검까지 들려 있었다.
곧바로 집어던질 기세였다.
‘이, 이대로는 죽는다.’
죽음의 위기를 느낀 소마가 외쳤다.
“잠까아아안! 아직 뒷이야기가 남아 있습니다!”
“뭐?”
“아. 역시.”
“휴우. 오늘, 손에 피를 묻힐 뻔했네요.”
그제야 관객들도 안심하고 자리에서 앉았다.
소마는 그 살벌한 광경에 이마를 닦으며 입을 열었다.
“자. 그럼 이야기를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황혼이 쓰러진 이후의 이야기를. 휘! 휘!”
소마의 휘파람과 함께 공연이 재개되었다.
* * *
이레네.
한때 제국의 심장이었던 곳에 사람들이 분주히 지나다녔다.
황혼의 야욕이 꺾인 지도 4년이 지났다.
대륙은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지만, 사람들은 살아남았다.
싸움을 마친 사람들은 각자 흩어졌다.
이제 제국은 없었다.
제국이 되돌아오길 원하는 사람도 없었다.
사람들은 각자의 길을 걸어나갔다.
엘드리엄 성주는 북부의 세력을 그러모아 엘드리엄 왕조의 시작을 선포했다.
사제장 에리얼과 대주교 에스델이 그 왕권을 공식적으로 인정해주었다.
4군단과 3군단은 해산했다.
베른바르트는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이끌고, 악마가 점거했었던 동쪽 땅을 개척하기 위해 떠났다.
위대한 노장은 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까지 도전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데일을 따르던 리치 무르하탈과 언데드 야가브는 함께 힘을 합쳤다.
둘은 자신들의 전공에 대한 보답을 요구했고, 사람들은 남쪽의 늪 근처 땅을 내주었다.
이제 남쪽에는 대륙 역사상 최초의 언데드 도시가 있다.
무르하탈은 그 도시의 이름을 ‘시체 도시’라 지었다가, 야가브에게 핀잔을 들었다.
늪에 사는 하이엘프가 시끄러운 이웃의 등장에 펄펄 뛰었다는 건 또 다른 얘기.
카엘름과 서부 도시 몇 개는 독립을 선언했다.
각 지방의 영주들도 이때다 싶어 자신의 세력을 키우기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대륙에 힘의 공백이 생긴 탓에 내전의 우려가 커졌다.
그걸 방지하려면 누군가는 제국이 맡던 역할을 해주어야 한다.
비슷한 뜻을 품은 사람들이 모여 국가를 건설했다.
국가의 이름은 바이만 왕국이다.
그 왕좌에 앉은 건 옛 바이만 왕가의 마지막 핏줄을 가진 소녀였다.
하지만 왕은 어디까지나 왕국의 얼굴을 담당할 뿐이다.
국가의 통치는 각계의 인사 수백 명이 모여 의사를 결정하는 기구인 ‘의회’를 통해 이루어진다.
처음에는 여러모로 삐걱거리던 체계는 머지않아 나름대로 잘 굴러가기 시작했다.
가끔 의회에서 난투극이 벌어져 대규모 유혈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지만, 그 정도는 사소한 사건이리라.
옛 마법 왕국을 계승한 새로운 왕국의 수도는 이레네가 있던 자리에 지어졌다.
도시의 이름은 이레네 그대로였다.
대륙의 장인들이 모여들어 이레네를 건설했다.
마법사와 학자들은 관료 제도를 고심했다.
장인들은 천 년 동안 무너지지 않을 건물을 짓고자 했고, 학자들은 천 년 동안 무너지지 않을 국가의 기틀을 잡고자 했다.
성대한 축제와 함께 새로운 왕국은 그렇게 출발을 알렸다.
모든 게 순조로워 보였다.
왕좌에 앉은 소녀가 너무 자주 왕궁에서 도망쳐나가 신하들이 골치 아파한 걸 빼면, 그 어떤 근심도 없었다.
이레네로 들어오는 입구에는 크고 웅장한 신전이 세워졌다.
놀랍게도, 빛의 여신과 밤의 여신을 모두 섬기는 신전이었다.
두 여신이 한 집을 쓰는 데에 동의했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아무튼 대주교 에스델과 사제장 에리얼은 이 파격적인 혁신을 밀어붙였다.
이것으로 두 신도 사이의 갈등과 밤의 교도들에 대한 차별의 시선이 차차 사라질 것이다.
카일라는 다시 여관을 차렸다.
이전보다 훨씬 좋은 자리에, 훨씬 괜찮은 건물에서 영엽을 이어 나갔다.
그녀의 음식 솜씨가 워낙 좋았기에 늘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가끔 술에 취한 취객이 난동을 부리기도 했지만, 그때는 거대한 늑대가 다가와 쫓아내 버렸다.
한쪽 다리를 다쳤지만 하티에게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켄은 주민들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한 여인에게 청혼했다.
상대는 그의 소꿉친구이자, 죽은 친우 퀼의 아내였다.
그녀는 청혼을 받아들였다.
하켄은 용병을 그만두고, 농사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벌써 애가 둘이나 생겼기에, 애보랴 농사 배우랴 꽤나 고생이었지만, 하켄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떠나가는 법이 없었다.
프라우는 바이만 왕국의 기사단장이 되었다.
본디 기사단장은 아일라가 맡을 예정이었지만, 그녀는 부상의 후유증 탓에 정중히 자리를 거절했다.
프라우는 자기가 대륙에서 두 번째로 뛰어난 기사라고 공공연히 떠벌리고 다녔다.
첫 번째가 누구인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모두가 알았다.
에른스트는 바이만 왕국의 외교관으로서 각지를 돌아다녔다.
아직 새 질서가 들어서는 과도기다.
언제든 지금의 균형이 깨져 혼란이 찾아올 수 있다.
또다시 피가 흐르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에른스트는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동료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가끔, 한자리에 모이는 날도 있었다.
* * *
새로 지어진 이레네. 이전에 외곽구역이 있던 자리에 회색 건물이 하나 있다.
창문이 여러 개 뚫려 있는 건물에서는 아이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레온 학교’라는 이름을 한 학교다.
아이들에게 간단한 글쓰기나 산수, 신학, 검술을 비롯해 마법까지 가르치는 곳인데, 인기가 아주아주 많았다.
기본적으로 학비가 무료인데다, 점심 식사까지 제공하니 가난한 가정의 아이들이 많이 찾아왔다.
하지만 가난한 아이들만 있는 건 아니었다.
귀족. 부자. 심지어 왕족까지.
신분과 재산을 가리지 않고 여러 학생이 문을 두드렸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 레온 학교의 교사진이 너무나 화려했다.
귀족들조차 자기 자식을 입학시키고 싶을 정도로…….
에스델은 그런 레온 학교의 정문에 서서 건물을 둘러보았다.
‘전보다 커진 것 같은데. 증축한 건가?’
이 레온 학교는 각지에서 엄청난 기부금을 받는다.
교단에서도 매달 기부금을 내었으니, 적어도 자금이 부족할 일은 없을 것이다.
에스델은 건물로 들어서기 전, 괜히 흠흠! 헛기침한 뒤 손거울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머리를 신경 써서 빗어넘기고, 혹여나 이상한 데가 없는지 거울을 몇 번이고 확인했다.
그녀와 함께 일하는 사람이 봤다면 경악했을 일이다.
늘 서류에 파묻혀 사는 에스델은 자기 외모를 꾸미는 일이 없었다.
워낙 본판이 화사한지라 굳이 손을 안 대도 아름답다는 게 놀라운 일이지만…….
그녀는 기본적으로 자기 외모가 남에게 어떻게 비치는 지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 타입이었다.
외모보다는 내면이 중요한 게 아닌가 하는, 다소 이상주의적인 사람이었으니.
그렇기에 일국의 왕을 만나든, 어딘가의 귀족을 만나든. 한결같았던 그녀다.
그런 에스델이 수줍게 머리를 가다듬고 있으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어. 사제 양반 아니야?”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 에스델이 화들짝 놀랐다.
하켄이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뭐예요. 하켄이네요.”
“이야. 사제 양반은 1년 만에 보는데 어째 변한 게 없어.”
“그러는 하켄은 더 아저씨스러워졌네요.”
“윽. 내가 벌써 애만 둘이야. 친구 아들까지 생각하면 자식만 4명이라고.”
“부인이나 자식들 건강에는 별문제는 없죠?”
“없어없어. 그쪽에서 보내준 사제님이 워낙 실력이 출중하셔서, 조금만 아파도 금방금방 고쳐주시더라고.”
다행이라는 듯. 에스델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켄이 환히 웃으며 말했다.
“자. 그럼 들어가자고.”
“예.”
하켄은 씩씩하게 학교로 걸어 들어갔다.
건물은 긴 일자형 복도가 나 있었는데, 양옆으로 교실이 있어 아이들이 공부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꽤나 신기한 광경이었다.
이렇게 많은 아이들이 좁은 교실에 모여 책을 읽고 있다니.
더 신기한 건, 그런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들이다.
마탑의 마스터.
교단의 고위 사제.
왕국에서 이름 높은 기사.
현자라 불릴 정도의 학자.
하나하나가 각계의 명사라 부를 수 있는 이들이 아이들을 열심히 교육하고 있었다.
하켄이 알기로, 이 학교의 봉급은 그리 높지 않았다.
적어도 저런 거물들을 초청하기에는 부족했다.
하지만 저들은 기꺼이 이 자리를 맡았다.
“워어. 역시 신기하다니까? 저런 사람들이 여기 있고.”
“의회에 들어가기 위해 거쳐야 하는 필수 코스 느낌이니까요. 레온 학교에서 교사를 안 해본 사람은,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느낌? 그래서 경쟁률이 엄청나게 높아요. 저 자리를 두고 각종 청탁이 들어올 정도라니까요?”
“허허. 거, 참. 세상일이란 게 참 신기해.”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하켄은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마침내 원하던 이를 찾아냈다.
길게 길러 한데로 묶은 검은 머리.
조금 창백하지만 혈색이 도는 피부.
어디서나 눈에 띌법한 미남자.
데일이 교과서를 붙잡고 수업하고 있었다.
“자. 그럼 이 문제를 풀어볼 사람?”
“저요저요!”
“저요! 선생님, 제가 말할게요!”
앞다투어 손을 들던 아이들은 뒤에서 느껴지는 흉흉한 기세에 하나둘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그리고 올라가는 손 하나.
데일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래. 엘레나. 말해보렴.”
“정답은 32입니다.”
“……정답이다. 잘했다.”
“헤헤.”
칭찬을 받은 엘레나는 만족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하켄이 어이없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공주님, 아니. 왜 폐하가 저기에?”
에스델이 이마에 손을 짚었다.
“……안 그래도 폐하께서 자꾸 왕궁에서 도망쳐, 이곳에 놀러 온다고 다들 하소연이에요.”
“말려야 하는 거 아닌가?”
“누가 말릴 건데요. 하켄이 말해볼래요?”
“아.”
엘레나가 이곳에 찾아오는 걸 막았다가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는 사람들은, 감히 그녀를 말릴 수 없었다.
그렇게 수업을 구경하길 잠시.
마침내 수업이 끝났다.
“자. 수업 끝. 조심히 들어가라.”
“감사합니다 선생님!”
아이들이 우르르 교실을 나섰다.
뒤늦게 엘레나와 함께 나온 데일은 하켄과 에스델을 보고 미소 지었다.
“왔어? 오랜만이네.”
“이야. 데일 경. 혈색이 더 좋아졌는데요?”
“이제 딱히 경은 안 붙여도 되지만 말이야.”
데일은 기쁜 듯이 심장에 손을 가져다 댔다.
쿵쿵. 심장이 힘차게 맥동했다.
다시는 되찾지 못할 거라 생각했기에, 데일에게는 더욱 각별하게 느껴졌다.
‘그때는 죽는 줄 알았지.’
밤의 신성이 빠져나가면서 그는 다시 인간이 되었다.
본래라면 거기서 데일은 죽었어야 한다.
하지만, 빛의 여신이 천상으로 돌아가기 전에 자비를 베풀어주었다.
자기 힘을 써, 데일의 육신을 되살린 것이다.
이전. 드워프 왕국을 멸망시킨 이후, 처음으로 지상에 개입한 셈이었다.
[너의 헌신을 생각하면, 이 정도 보답은 당연한 것이겠지.]그리하여 데일은 다시 인간의 육신을 얻었다.
심장이 뛰고, 더운 피가 흐르고, 통증을 느끼며, 음식의 맛도 구별할 수 있다.
그렇다고 평범한 몸이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이전 흑기사로서의 잔재 탓에 데일의 힘은 여전히 인간이라 믿기 힘들 정도로 강했다.
요즘도 왕왕 포크나 펜을 부러트려먹으니, 불편하다면 불편한 일이다.
“자. 가자. 카일라가 미리 음식을 준비하고 있을 거야.”
“예.”
“빨리 가자고! 배고파 죽겠어!”
“하켄은 달라진 게 없네요.”
“하하. 폐하도 그대론 거 같아서 보기 좋습니다.”
“……키 조금 컸거든요?”
넷은 함께 걸어, 카일라의 여관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 이미 다른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프라우. 카일라. 하티.
한구석에는 에리얼과 에른스트도 있었고, 아일라도 보였다.
다른 한구석에는 한스와 안드레이가 마법에 대한 토론을 나누고 있었다.
“어서오세요! 데일!”
사람들이 데일을 맞아주었다.
데일은 웃으며 자리에 앉았고, 이내 음식을 먹으며 식사가 시작되었다.
술이 돌았다.
사람들은 그간 전하지 못한 소식들을 나누었고, 때로는 이전에 함께했던 모험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어렵고 힘든 시간도 지나고 보면 모두 추억이 되어 있었다.
가끔 하티가 과장되게 다리를 절며 데일을 놀렸다.
그러면 데일은 하티의 갈기를 마구 쓰다듬어 주었다.
술에 취한 하켄이 테이블에 올라 고래고래 노래를 불렀다가, 카일라에게 등짝을 얻어맞기도 했다.
즐겁고 흥겨운 시간이 밤새도록 이어졌다.
한참을 웃고, 떠들고, 마시던 데일은 문득. 맥주잔 속으로 시선을 주었다.
구릿빛 맥주 위에 자신의 모습이 비쳐 보였다.
잔 속의 데일은 웃고 있었다.
“…….”
맥주에 비친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데일은 이내 잔을 들어 맥주를 모조리 비워버렸다.
시원한 맥주가 목을 타고 흘렀다.
솔직히 말해 맛은 영 아니었지만, 그건 그것 나름대로 즐거웠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즐거울 수 있을까?
모를 일이다.
또 어떤 일들이 저 미래에 기다리고 있을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하지만 데일은 걱정하지 않았다.
여기 있는 동료들과 함께라면 어떤 일이 일어나든, 잘 헤쳐나갈 수 있으리라 믿었으니까.
휘! 휘!
그렇게 데일의 이야기는 계속되리라.
《게임 속 흑기사가 되었다》 완결
감사합니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