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King of Crusaders RAW novel - Chapter (104)
십자군의 왕이 되었다-104화(104/215)
핏빛 독수리 (4)
* * *
“저게 도대체 무슨 진형인가?!”
“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폐하. 측면까지 저렇게 창을 내밀고 있다니….”
프리드리히 황제와 제후들 모두 전장을 바라봤다.
방금까진 모든 게 예상대로였다.
‘하마한 기사들이 장애물을 치우고 숫자로 밀어붙인다!’
한 번만 돌격이 성공하면 적 진형은 무너질 터였다.
놈들이 불타는 기름을 쓰긴 했지만 효과가 크진 않았다.
독일 기사들 2진과 3진은 성난 황소처럼 적을 향해 달려들었다.
문제가 생긴 건 바로 그때였다.
가만히 버티고 있을 줄 알았던 적 창병들이 천천히 전진하며 우익의 1진을 덮친 것이다.
2진과 3진도 우왕좌왕하며 끌려 들어가고 있었다.
“지난번 전투에서 일부러 가만히 있었던 거로군. 우릴 속이려고 같잖은 술수를 부린 게야.”
프리드리히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사각형 형태에 사방으로 튀어나온 창.
성난 고슴도치가 가시를 세운 모습 같았다.
진형 외곽에선 궁수와 쇠뇌병들이 기사들을 향해 화살을 쏘아댔다.
접근하던 말들이 창에 가로막히고 화살에 맞아 쓰러졌다.
“지금 당장 행동에 나서야 하네.”
프리드리히 황제가 말했다.
다른 제후들 모두 침묵을 지켰다.
“다들 저쪽을 보게.”
그가 손가락으로 전장을 가리켰다.
“놈들이 움직이면서 진형에 빈틈이 생겼지. 뒤에 있던 부대가 자리를 채우려면 시간이 걸릴 터. 우린 저곳을 친다.”
“하지만 그러면 전방의 기사들을 구하지 못할 겁니다. 차라리 포위된 쪽으로 원군을 보내는 게….”
“놈들의 후방을 쳐야 아군을 구할 수 있네. 어차피 숲엔 아무도 없어.”
황제가 말했다.
“보두앵은 이미 전력을 투입했어. 우리도 맞서 싸우는 수밖에 없다.”
그가 고삐를 당기자 말이 앞으로 나갔다.
제후와 기사들이 그 뒤를 따랐다.
“내가 돌격을 지휘한다!”
“황제 폐하께서 앞장서신다! 신성로마제국 만세!”
“황제 폐하를 위해!”
수천의 기사들이 일제히 앞으로 돌진했다.
신성로마제국의 깃발이 바람에 펄럭거렸다.
* * *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대단하군요.”
에이그가 전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공자님께선 이 계획이 성공하리란 걸 아신 겁니까?”
“어느 정도는.”
내가 말했다.
미래의 역사를 알고 있으니 틀린 말은 아니지.
16, 17세기.
스페인군은 프랑스의 중기병과 맞서 싸우기 위해 한 가지 방법을 떠올린다.
창병과 총병이 섞인 거대한 방진.
이 기동 요새 같은 사각형 방진은 기병을 상대하기 최적이었다.
스페인 방진.
또는 이 방진을 쓴 테르시오라는 명칭으로 알려졌지.
이 방진에서 창병은 단순히 창을 땅에 박고 버티는 게 아니었다.
방진을 유지한 채로 이동하는 것이 핵심.
비록 속도는 느리지만, 지금처럼 좁은 전장에선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아마 평원이었다면 우리 부대를 무시하고 우회할 수 있었을 거야.”
하지만 독일 기사들은 이미 1진, 2진과 3진이 뒤섞이며 난장판이 된 상태였다.
여기에 밀라노 연대의 압박까지.
혼란에 안 빠지는 게 더 이상하겠지.
“앞으론 다들 이런 방식으로 싸우겠군요. 기사가 설 자리도 없을 겁니다.”
“아니, 말에 갑옷을 씌우면 충분히 돌파할 수 있어.”
이런 파이크 방진에서 공격을 맡는 건 궁수와 쇠뇌병들.
파이크 창병들은 그들을 지키는 성벽에 가까웠다.
말에 갑옷을 씌우면 활이나 쇠뇌로는 죽이기 힘들지.
머스킷 총이 나오면 모를까.
그때 위그가 달려왔다.
그가 손을 흔들며 외쳤다.
“황제의 깃발입니다! 놈들이 돌진해오고 있습니다!”
난 곧장 망원경을 들었다.
저 멀리서 수천의 기병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특유의 말 체취가 코를 찔렀다.
제국군에 남아있던 전력.
사실상 모든 예비대가 돌진해오고 있었다.
선두에 펄럭이는 노란색 바탕에 검은 독수리 깃발.
신성로마 황제의 상징이었다.
난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예상보다 반응이 너무 빨라.”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다는 걸 깨달은 건가.
밀라노 연대가 압박을 계속하면 돌격 중이던 독일 기사들은 전멸할 수밖에 없을 터.
하지만 황제는 밀라노 연대가 아닌 그 옆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놈들의 목표는 분명했다.
밀라노 연대가 전진하며 생긴 빈틈.
“지금 당장 크레미나 연대에 가서 행군 속도를 높이라고 해!”
난 에이그에게 소리쳤다.
“아, 알겠습니다!”
난 숨을 몰아쉬며 다시 망원경을 들었다.
내 계획의 유일한 취약점.
그건 바로 파이크 연대의 느린 이동 속도였다.
밀라노 연대가 전진하며 생긴 빈자리는 뒤의 크레미나 연대가 채워야 했다.
하지만 프리드리히 대응이 예상보다 너무 빨랐다.
이대로라면 틈새가 닫히기 전에 밀고 들어올 터.
“한 번이라도 돌파를 허용했다간 중간에 있던 궁수와 쇠뇌병들이 전멸할 겁니다, 공자님.”
“저도 알고 있습니다.”
난 위그를 바라봤다.
지금 예루살렘 기사들은 말에서 내려 싸우는 중이었지.
“기사단원과 성묘단원들을 다시 불러들여야겠습니다. 지금 돌격을 막을 수 있는 건 그들뿐입니다.”
“제가 이미 깃발로 명령을 내려놨습니다. 곧 있으면 모일 겁니다.”
위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판단이 빠르군.
집결 명령을 알리는 깃발들이 펄럭거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모이는 건 소수의 기사단원뿐이었다.
고작해야 백오십 정도.
달려온 그들은 숨을 헐떡이며 땀과 피를 닦았다.
종자들이 후방에서 대기 중이던 군마를 끌고 나왔다.
“성묘단원과 이탈리아 기사들은 반응이 없습니다. 전령을 보내긴 했습니다만….”
위그가 말했다.
“이제 시간이 없습니다.”
“그렇게 훈련했는데도….”
난 입술을 깨물었다.
격렬해진 전투 때문에 신호를 확인 못 하는 게 분명했다.
루아크라면 통제할 줄 알았는데.
난 고개를 돌려 전방을 바라봤다.
프리드리히 황제가 이끄는 기병들이 빠른 속도로 접근해왔다.
남은 시간은 이제 고작해야 몇 분 정도.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난 숨을 몰아쉬며 생각했다.
지금 내게 남은 카드는….
지금 내게 남은 카드는….
위그가 말했다.
“제가 기사들을 이끌고 놈들을 요격하겠습니다. 그게 유일한 방법입니다.”
“이 정도 숫자로는 어림도 없을 겁니다.”
난 모인 기사들을 바라봤다.
수 차이가 너무 심했다.
최소한 1:10이 넘는 병력 차이.
“아무리 작은 참새라도 전력을 다하면 매를 막을 수 있습니다.”
위그가 껄껄 웃었다.
“그리고 저희 기사들은 참새가 아니죠. 한 번. 놈들을 한 번 정도는 막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럼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내가 말에 올라타려는 걸 그가 막았다.
“지휘관이 전장에 나서는 건 승리가 확실해졌을 때뿐입니다. 아니면 그만큼 절박하거나요.”
위그가 진지해진 어조로 말했다.
“공자님께선 이곳에 남아 지휘를 계속하셔야 합니다.”
“….”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저도 무리할 생각은 없으니까요. 돌아와서 루아크 녀석 엉덩이를 걷어차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가 기사들을 향해 검을 휘두르며 외쳤다.
“자, 가자! 이 느려터진 굼벵이 녀석들아!”
* * *
“독일놈들을 막아라!”
“성도 예루살렘을 위해! 국왕 폐하와 왕국을 위해!”
말들이 앞으로 치고 나갔다.
위그는 은가면을 벗어던지고 투구를 썼다.
그들은 전진 중인 크레미나 병사들을 지나쳤다.
병사들이 창을 흔들며 환호성을 보냈다.
하지만 멈춰설 여유는 없었다.
“계속 달려라! 최대한 넓게 퍼져서 놈들을 막는다!”
그가 신호를 보내자 기사단원들이 양옆으로 퍼지며 날개 형상을 만들었다.
들리는 건 말발굽 소리뿐.
앞에선 검은색 파도가 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기사와 기사.
말과 말.
그들은 서로를 향해 돌진했다.
위그는 창을 쥔 손에 힘을 줬다.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성도 예루살렘을…!”
파도에 부딪히는 순간,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그의 창에 맞은 독일 기사가 땅으로 쓰러졌다.
위그는 부러진 창을 내던지고 검을 빼 들었다.
피가 사방으로 튀며 그의 갑옷을 적셨다.
위그는 검을 휘둘렀다.
두 명.
세 명.
네 명.
그는 말의 허벅지를 찌르고 쓰러진 적의 갑옷 틈새를 단검으로 쑤셨다.
검은 파도는 끝없이 밀려들었다.
뭔가 그의 몸을 치며 쓰러트렸다.
정신을 차린 위그는 몸에 창이 박혔다는 걸 깨달았다.
사슬갑옷에는 큼지막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는 창을 움켜잡은 뒤 적 기사를 말 아래로 끌어 내렸다.
사슬을 걷어내고 단검을 찔러넣자 꾸르륵 소리를 내며 죽었다.
위그는 선 채로 잠시 비틀거리다 죽은 적 위에 쓰러졌다.
그는 고개를 돌려 반대편을 바라봤다.
크레미나 연대가 전방으로 전진하며 공백을 메꿨다.
그 모습을 본 그는 발작하듯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 좀 쉬어도 되겠군.”
위그는 핏물에 누운 채 숨을 몰아쉬었다.
주변의 모든 게 느릿느릿하게 움직였다.
먹구름이 낀 하늘.
전사들의 고함과 비명이 귀를 울렸다.
죽기 좋은 날이야.
그렇게 생각하며 위그는 눈을 감았다.
과거의 기억들이 소용돌이치듯 그를 휘감았다.
* * *
“넌 언젠가 우리 가문을 이끌어 갈 운명이다, 위그. 그걸 항상 명심하거라.”
아버지는 항상 이렇게 말하곤 했다.
장남.
첫째 아들로 태어난 순간 위그의 운명은 결정되어 있었다.
그는 언젠가 가문을 이어받을 후계자였다.
온 가문의 재산과 관심이 그에게 쏠렸다.
그리고 위그에게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나이가 찬 그는 가족들과 헤어져 기사들에게 훈련을 받았다.
오직 사내들로만 이루어진 전사 가족.
그곳에서 위그는 기사가 됐고 서임을 받았다.
그 이후 수많은 전장에서 싸우며 그는 가문의 명예를 드높였다.
다른 방랑 기사들과 달리 그는 위험한 일을 맡을 필요가 없었다.
넉넉한 돈과 종자들.
싸움은 그저 이름을 알리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곧 있으면 그는 가문을 물려받을 터였다.
영광스러운 이벨린 가문을.
하지만 그 모든 게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 어서 빨리 말해보게. 내가 도대체 무슨 병에 걸린 건가?
― 아, 아무래도 나병에 걸리신 것 같습니다. 좀 더 증상을 지켜보긴 해야겠지만….
나병.
이 세상에 나병 환자가 설 자리는 없었다.
그건 귀족이라 해도 마찬가지.
위그는 오래 전 약속됐던 혼인은 물론 후계자 자리도 포기해야 했다.
그는 동생인 발리앙에게 후계자 자리를 넘겼다.
― 가문은 너에게 맡기마, 발리앙
― 하지만 형님 굳이 이렇게까지….
위그는 성 나사로, 라자루스 기사단에 입단했다.
나병에 걸린 귀족과 기사들의 최후의 대피처.
이곳에서 싸우고 기도하다 죽는 게 그들의 운명이었다.
위그는 그 운명을 거부했다.
그는 히스파니아와 이탈리아의 성지로 순례를 떠났다.
매일 밤 그는 절박한 마음에 검을 붙잡고 기도했다.
― 제 병만 치료해주신다면 남은 평생을 예루살렘의 수호를 위해 바치겠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아무 응답도 없었다.
그 이후 위그는 술독에 빠져 살았다.
그는 홀로 생각했다.
신께선 왜 이런 가혹한 시련을 내리신 걸까?
왜 다른 누구도 아닌 하필 내게?
그제야 그는 깨달았다.
세상은 그보다 불운한 이들로 가득 차 있었다.
전쟁에 부모를 잃고 구호소에 맡겨진 아이들.
평생 모아온 재산과 가족을 눈뜨고 빼앗긴 농민들까지.
그 어디에도 그리스도의 사랑은 보이지 않았다.
그걸 깨달은 순간 위그는 기도를 멈췄다.
어차피 이 세상은 불합리했다.
그는 다시 성도로 돌아와 사라센들과 싸웠다.
별다른 목적은 없었다.
그저 죽기 위한 싸움.
그는 동료없이 홀로 싸웠다.
이교도와 싸우다 죽는 게 그의 이름과 가문을 드높일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는 항상 최선두에서 싸우고 가장 늦게 후퇴했다.
국왕인 보두앵의 명령에 따라 에일라트에 간 것도 싸우기 위해서였다.
버릇없는 망나니로 유명했던 어린 보두앵.
하지만 직접 만난 그는 소문과 달랐다.
― 놀라신 표정이군요. 제가 너무 가까이에서 말씀드렸습니까?
― 그럴 리가요. 이렇게 훌륭하신 분들이 절 호위하신다니 큰 영광입니다, 이벨린의 위그 경. 발리앙 경.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위그는 어린 보두앵에게 왠지 모를 기대를 느꼈다.
언제나 확신에 찬 눈빛.
시민들을 구하기 위해 싸움에 나서는 용기까지.
보두앵에겐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매력이 있었다.
위그는 소년을 믿어보기로 했다.
에일라트에서 콘스탄티노플.
키프로스와 이곳 이탈리아에 이르기까지.
그는 항상 기대를 뛰어넘었다.
양초는 횃불이 됐고, 횃불은 또다시 태양으로 변했다.
공자는 환한 빛이었다.
― 왜 콘스탄티노플을 지켜야 한다고 하시는 겁니까?
― 저희가 나서지 않으면 많은 사람이 죽을 겁니다. 그리스인이 라틴인을 죽이고, 라틴인이 그리스인을 죽이겠죠. 전 그걸 막고 싶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의 황궁에서도.
― 위그 경께서도 함께 식사하실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요.
― 괜찮습니다. 어차피 그리스 음식은 제게 잘 안 맞더군요.
키프로스와 이탈리아에서도.
― 위그 경만큼 선두에서 용맹히 싸운 사람은 없었을 겁니다.
성 소피아 대성당의 모습이 떠올랐다.
바실리우스에게 작위와 호칭을 받을 때도 보두앵 공자는 그의 곁에 있었다.
가니에르와 에이그, 루아크까지.
위그는 그들과 함께 웃고 떠들며 싸웠다.
나병에 걸린 이후 처음으로,
위그는 깨달았다.
그가 보두앵 공자를 만난 이유를.
나병에 걸려야 했던 이유를.
그는 더 이상 죽고 싶지 않았다.
‘살고 싶어.’
보두앵 공자가 앞으로 할 일들을 옆에서 보고, 함께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예루살렘을 지키고 싶었다.
“위그 경!”
익숙한 목소리.
그를 부르는 소리에 위그는 눈을 떴다.
새하얀 빛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화끈거리는 빛이 그의 팔을 움켜잡았다.
“위그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