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King of Crusaders RAW novel - Chapter (105)
십자군의 왕이 되었다-105화(105/215)
핏빛 독수리 (5)
* * *
“위그 경!”
숨이 벅찼다.
가슴 속 폐가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위그를 느낀 건 전장 한복판이었다.
그는 다른 기사단원들 옆에 쓰러져 있었다.
부러진 팔.
갑옷 밖으로 튀어나온 내장.
한눈에 봐도 심각한 부상이었다.
젠장. 젠장.
“군의관!”
난 뒤를 돌아봤다.
급하게 뛰어오느라 동행조차 없었다.
주변에선 동맹군 병사들이 생존자를 확인 중이었다.
난 그들에게 소리쳤다.
“가서 군의관을 불러와! 다른 기사들도 부축해서 데려가고!”
내 명령을 들은 병사들이 서둘러 움직였다.
“공자, 공자님이십니까?”
위그가 중얼거렸다.
난 그의 팔을 붙잡았다.
“힘을 아끼세요. 곧 있으면 의사가 올 겁니다.”
난 망토를 벗어 내장을 덮었다.
손끝에서 미끌거리는 게 느껴졌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지?
내장이 터져 나왔을 때는….
위그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투구를 벗겨 주십쇼. 이 철 덩어리를 쓰고 죽고 싶진 않습니다.”
난 그의 투구를 벗겼다.
위그의 얼굴 곳곳은 검게 썩어 있었다.
전에는 괜찮아 보이던 한쪽 눈도 이제 보니 흰색으로 변해 있었다.
뭐가 보이긴 한 건가?
“공자님께서 오신 걸 보니 저희가 이겼나 보군요. 아니면 공자님께서도 하늘로 오신 겁니까?”
“전 아직 살아있습니다. 위그 경도 아직 살아있고요.”
“전투는 어떻게 됐습니까? 황제는….”
그가 기침을 내뱉었다.
붉은 핏덩이가 망토에 떨어졌다.
“황제는 포위됐습니다. 밀라노 부대가 강 쪽으로 밀어붙였죠. 이젠 도망칠 곳이 없습니다.”
“그렇군요.”
“곧 있으면 군의관이 올 겁니다. 그때까지 어떻게든….”
“이런 부상을 살릴 수 있는 의사는 없습니다. 지금 어떻게 산다 해도 어차피 곧 나병으로 죽겠죠.”
위그가 콜록거리며 답했다.
그가 입꼬리를 올리며 씩 웃었다.
“사람은 죽어야 할 때 죽는 게 아니라 죽을 수 있을 때 죽는 겁니다.”
그가 웃으며 기침을 토해냈다.
“그래도 이렇게 죽을 수 있다니 다행이군요. 신성로마 기사들과 정면으로 맞서 싸웠으니 말입니다.”
“경 덕분에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난 그의 팔을 붙잡았다.
위그에게선 흔들리지 않는 차분함만 느껴졌다.
“공자님께선 예루살렘을 지키셔야 합니다. 왕이 되시는 걸 못 보는 건 아쉽지만….”
그가 다시 기침을 내뱉으며 내 팔을 붙잡았다.
“성도의 운명은 공자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전 그동안….”
난 말을 얼버무렸다.
내가 왜 예루살렘을 위해 싸운 걸까?
그 이유는 간단했다.
내가 원래 살던 21세기로 돌아가기 위해서.
그리고 지금.
위그가 죽는 것도 성도 수호가 아닌 내 욕망 때문이었다.
“그냥 저 자신을 위해 싸워온 겁니다. 예루살렘 성도를 위해서가 아니라요.”
내가 말했다.
“제가 아니었어도….”
“주님께서는 모든 운명에 계획이 있으십니다. 공자님이 선택받으신 것도 이유가 있을 겁니다.”
그가 미소 지었다.
“제가 에일라트에서 공자님을 처음 만난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게 무슨 소용입니까?”
내가 물었다.
시야가 점차 흐릿해졌다.
“어차피 모든 운명이 정해져 있다면 이렇게 싸우는 게 무슨 소용이 있단 겁니까?”
“모든 운명은 정해져 있지만,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그게 제가 살면서 깨달은 유일한 진리입니다.”
위그가 껄껄 웃었다.
그의 웃음이 기침으로 변했다.
“공자님께 마지막으로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그가 손에 힘을 줬다.
“에이그 그 녀석이 남작가 여식이랑 사랑에 빠졌습니다. 공자님께서 왕이 되신다면 녀석에게 작위 정도는 내려주실 수 있겠죠.”
그가 기침을 내뱉었다.
“공자님 주변 사람들을 잘 챙겨 주셔야 합니다. 결국 믿을 수 있는 건 그들밖에 없습니다.”
“….”
“제 시체는 기사단 망토와 함께 예루살렘에 묻어 주십쇼. 발리앙도 별말 안 할 겁니다.”
“알겠습니다.”
“그거면 됐습니다. 어렸을 때 꿈은 영원히 사는 거였지만….”
그가 말했다.
“지금은 그걸로 됐습니다.”
“위그 경?”
난 그를 바라봤다.
더 이상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차가움.
낯선 차가움만이 느껴졌다.
난 망토로 그의 몸을 가렸다.
에이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자님?! 공자님! 그렇게 혼자 달려나가시면 어떻게 합니까? 제가 한참을 돌아다녔는데….”
에이그가 내 곁에 멈춰섰다.
녀석의 시선이 망토를 향했다.
설명은 필요 없었다.
에이그는 위그 앞에 무릎 꿇었다.
하늘에서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졌다.
곧이어 소나기가 내리며 얼굴을 적셨다.
내겐 다행인 일이었다.
* * *
“보두앵 공자 만세!”
“예루살렘 만세! 롬바르디아 동맹 만세!”
“성십자가에 축복과 영광을!”
내가 가는 곳마다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전장을 돌아다니던 병사들도 내게 고개 숙이거나 무릎 꿇었다.
전장 곳곳에 꽂힌 파이크 창은 마치 나무들 같았다.
전투의 열기는 비와 함께 식었다.
“승전을 축하드립니다!”
귀족과 기사들이 다가올 때마다 난 적당히 손을 흔들었다.
가식적인 미소조차 짓기 힘들었다.
난 그들의 축하를 받으며 전장을 걸어 다녔다.
몇십 분이 지났을까.
빗방울이 점차 줄어들었다.
위그의 말대로 로마의 비는 짧고 굵게 끝났다.
난 축축해진 땅을 걸어 지휘 천막으로 돌아갔다.
루아크와 귀도가 날 반겼다.
루아크가 말했다.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공자님. 저희 성묘단원들이 제때 나서기만 했어도 이렇게….”
“그 얘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죠.”
난 루아크를 바라봤다.
그도 잔뜩 지친 표정이었다.
죄책감과 슬픔이 느껴졌다.
그래, 루아크도 위그랑 친한 사이였지.
매일 투덕거리며 싸우긴 했지만 그건 전사로서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 질책하는 건 좋은 모습이 아니겠지.
그건 나중에 따로 해도 충분했다.
“우선 위그 경 수습부터 부탁드리겠습니다. 다른 쓰러진 기사단원들도 예루살렘으로 보내야겠죠.”
“라자루스 기사단 중 생존자는 없습니다. 사십 명 모두….”
“그렇군요.”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신성로마제국 기사들을 정면으로 막아냈다.
자신들이 죽는다는 걸 알고 있었겠지.
그런데도 그들은 명령에 응했다.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귀도가 입을 열었다.
“이번 전투에서 그들만큼 용감하게 싸운 기사들은 없었을 겁니다. 그리고 위그 경은….”
그가 말을 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분이셨죠.”
“….”
난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침묵이 흘렀다.
귀도가 헛기침했다.
“황제가 전령을 보내 협상 의사를 전했습니다. 명예로운 평화를 원한다더군요.”
“명예로운 평화라고요?”
나도 모르게 코웃음이 나왔다.
난 귀도를 바라봤다.
“싸우기 전까진 아무 말도 없다가 이제 와서 대화를 나누자고 하는 겁니까?”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난 검을 잡고 싶은 충동을 애써 억눌렀다.
아무거나 베고 싶었다.
프리드리히이든 하르트만이든 신성로마든 뭐든.
이 의미도 명분도 없는 전쟁을 일으킨 놈들 모두를.
“꺼지라고 하시죠. 아니, 전령의 목부터 베는 게 좋겠습니다. 황제가 뭐라 답할지 벌써 궁금해지는군요.”
그때 다른 기사들이 다가왔다.
기사단원과 성묘단원의 고위기사들.
그들 역시 나처럼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공자께서 명령만 내려주신다면 당장 저놈들을 강에 처박아 버리겠습니다.”
“제가 직접 황제를 잡아 오겠습니다!”
“공자님. 위그 경은 한때 제 스승이기도 하셨습니다. 그분의 죽음은 제게도 크나큰 비극이지요.”
귀도가 내 앞으로 다가오며 속삭였다.
살짝 떨리는 목소리.
“하지만 이번 전투에 목숨을 바친 건 위그 경뿐만이 아닙니다. 수많은 이탈리아 병사와 기사들이 죽었습니다.”
그가 말했다.
“만약 황제가 죽기라도 한다면 모든 승리가 물거품이 될 겁니다. 독일에선 프리드리히의 아들을 왕으로 뽑아 또다시 이탈리아 원정을 준비하겠지요.”
그가 말을 이었다.
“그러면 독일 왕은 더 큰 군대를 모아 알프스산맥을 넘어올 겁니다. 공자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
난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귀도의 말은 옳았다.
하지만 그 말이 옳다 해서 분노가 사라지는 건 아니지.
난 건너편을 바라봤다.
프리드리히의 군대는 강을 뒤로 한 채 포위되어 있었다.
그들은 포위된 후에도 몇 번 돌파를 시도했다.
하지만 말과 병사들 모두 지친 상태.
롬바르디아 동맹의 파이크 창병들은 그들을 완전히 포위했다.
현재 전투는 소강상태.
그들을 도우러 올 원군은 없었다.
로마 도시한테도 버림받았으니.
당장 먹을 식량도 없겠지.
기쁨과 환희에 가득 찬 동맹군과 반대로 절망만이 느껴졌다.
“황제 쪽에서 먼저 허리를 굽혔으니 저희도 받아드릴 때입니다.”
“좀만 더 생각을 해보죠. 어차피 저들에게 도망칠 곳이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내가 말했다.
당장 답을 주지 않으면 녀석들도 다급해지겠지.
“알겠습니다. 그럼 저와 루아크는 가서 포위망을 점검하겠습니다.”
귀도가 고개를 끄덕이며 나갔다.
루아크도 마찬가지.
나머지 기사들도 우르르 나갔다.
천막에는 나와 에이그 둘만 남았다.
난 천막 한쪽에 놓인 물그릇에 손과 얼굴을 닦았다.
투명하던 물이 붉게 물들었다.
내 피는 하나도 없었다.
“공자님.”
에이그가 침묵을 깨고 물었다.
“혹시 위그 경께서 남기신 말씀이 있으십니까?”
“널 잘 돌봐주라고 하시던데. 남작가 딸이랑 만난다면서? 그것도 몰래?”
“그건….”
에이그가 손을 흔들었다.
“그리 진지한 건 아닙니다. 그냥 교회에서 몇 번 대화를 나눈 게 전부고요. 따로 만나려 한 적도 있었지만….”
에이그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우린 서로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애초에 전 아무도 아니지 않습니까. 신성한 핏줄도 아니고요.”
“그 정돈 내가 얼마든지 만들어줄 수 있어. 나중에 좀 더 자세히 말해보자고.”
내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 위그도 내가 개판 치는 걸 원하진 않았겠지.
내가 생각할 건 하나뿐이었다.
예루살렘을 구하자.
“황제와 대화를 나누긴 해야겠어.”
“다행이군요. 전 공자님께서 돌격 명령이라도 내리실 줄 알았습니다.”
에이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만 같아선 그러고 싶지만 그래 봤자 기분이 풀리진 않겠지.”
내가 말했다.
지금 프리드리히를 죽여봤자 그를 독일의 영웅으로 만들어 줄 뿐이었다.
그보다 더 굴욕적인 게 필요했다.
“황제가 직접 무릎을 기게 만들어야겠어.”
“무릎을 긴다니 그게 무슨….”
“곧 있으면 알 수 있을 거야. 가서 피에르 사제 좀 불러줘.”
내가 미소 지으며 답했다.
* * *
“계속 이렇게 있을 순 없소! 적들도 우리만큼 지쳤으니 포위를 돌파할 때요!”
분노에 찬 함성이 오고 갔다.
병사들이 그 주위를 오고 가며 부상자들을 실었다.
기력이 다한 기사와 병사들이 곳곳에서 픽픽 쓰러졌다.
종자들이 이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강물을 날랐다.
임시로 구성된 신성로마 진영.
아니, 그저 한곳에 모여 있을 뿐 진영이라 하기도 힘들었다.
그들 앞에선 동맹군 병사들이 긴 창을 겨누며 서 있었다.
“백작의 말씀이 옳습니다. 다시 한번 전열을 가다듬어 돌격해야 합니다.”
“이미 말들은 모두 지쳐 쓰러졌소! 당장 먹을 식량도 없는 판국에 어떻게 기력을 회복하자는 거요?!”
“그럼 어떻게 하자는 거요? 그냥 나가서 항복이라도 해야겠소?!”
“황제 폐하께서 동맹에 항복하시는 건 좋지 않은 선례를 남길 겁니다.”
제후들의 말이 오고 갔다.
프리드리히 황제는 앉은 채 침묵을 지켰다.
“그러면 차라리 강을 건너는 건 어떻겠습니까? 놈들도 강 너머까지 쫓아오진 못할 겁니다.”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요? 그러면 적들이 쏘는 화살을 그대로 다 맞을 수밖에 없소.”
“….”
침묵이 흘렀다.
그들 모두 황제를 바라봤다.
이번 원정을 계획한 사나이.
그는 여전히 입을 다문 채 앉아 있었다.
그때 한 병사가 숨을 헐떡이며 달려왔다.
“사절단. 사절단이 도착했습니다!”
병사가 소리쳤다.
“피에르라는 이름의 사제가 직접 사절단을 이끌고 왔습니다. 그것도 성십자가를 들고….”
“성십자가를 들고 왔다고?”
제후들이 웅성거렸다.
그들 모두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사제를 안쪽으로 모셔라.”
황제가 일어서며 말했다.
“내가 직접 대화를 나눠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