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King of Crusaders RAW novel - Chapter (106)
십자군의 왕이 되었다-106화(106/215)
인터미션 (1)
* * *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롬바르디아 동맹 병사들은 파이크 창을 들고 양옆으로 도열했다.
행렬의 끝에는 성십자가와 나, 교황이 서 있었다.
난 십자가 앞에 서서 황제를 바라봤다.
그는 이전에 봤을 때보다 더 지친 표정이었다.
하얀 옷을 입은 여인이 그의 옆에 서 있었다.
베아트리스 황후인가.
거대한 사자 곁에 선 사슴 같았다.
두 사람은 동맹군 병사들로 이루어진 통로를 뚜벅뚜벅 걸어왔다.
이탈리아 병사들의 시선이 그들을 따라 움직였다.
성십자가 앞에 도착한 두 사람은 교황 앞에 무릎을 꿇었다.
“교황 성하.”
“교회의 아들딸들이여. 그대들을 환영합니다.”
루치오 교황이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는 양손으로 황제의 머리를 안아 올리고 입을 맞췄다.
그다음엔 황후의 차례였다.
교황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두 분께서 오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쪽의 보두앵 공자는 아시리라 믿습니다.”
“물론이지요.”
나와 프리드리히는 서로를 바라봤다.
붉은색 수염이란 뜻의 ‘바르바로사’로 알려진 사내.
그는 사슬 갑옷이 아닌 평범한 정복 차림이었다.
군데군데 황금 장신구들이 보였다.
난 무의식적으로 이마가 찌푸려지는 걸 애써 참았다.
그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자네가 피에르 사제를 보낸 거로군. 그렇지 않나?”
“이번 전투가 벌어지기 전날. 그리스도께서 제 꿈에 나타나셨습니다.”
내가 말했다.
“그리고 제게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프리드리히 황제가 잘못된 길을 선택했으나, 아직 바로잡을 수 있다고 말입니다.”
난 그를 향해 미소지어 보였다.
“피에르 사제는 제 말을 그대로 전했을 뿐입니다. 폐하께서도 제 말을 믿고 여기까지 오신 것 아닙니까?”
물론 프리드리히는 내 말을 믿지 않았다.
나도 그가 믿지 않는다는 걸 알고.
하지만 누가 뭘 믿느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적당히 항복할 기회를 주는 게 중요하지.’
귀도의 말이 옳았다.
황제가 이곳에서 죽으면 독일의 영웅이 된다.
그렇게 할 순 없지.
황제는 살아남아야 했다.
독일 황제가 얼마나 비겁하고 겁쟁이인지 유럽인 모두가 알 수 있도록.
“이 정도 포위는 언제든지 뚫으실 수 있었을 테니 말입니다.”
난 코웃음 쳤다.
제국군은 붕괴 직전이었다.
한 번의 공격.
단 한 번이면 독일인들을 모조리 죽일 수 있었다.
“만약 주님의 뜻이 그러하다면…. 싸움을 멈추는 게 현명한 선택일 수 있겠지.”
프리드리히의 입술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의 얼굴이 붉게 물들며 수염과 색이 비슷해졌다.
난 그가 굴욕을 느낄 수 있게 병사들을 배치했다.
양옆으로 도열한 건 기사도 아닌 평범한 병사들.
황제가 항복하기 위해 농민들 사이를 걸어오는 건 전례 없는 일이었다.
“제 생각도 폐하와 같습니다.”
난 빙긋 미소지었다.
전투에서 이긴 건 우리라고.
아무리 자존심을 지켜준다 해도 승자와 패자가 누군지는 확실히 해야지.
난 계시를 이용해 최소한의 체면만 살려줬다.
‘내가 거짓말을 하면, 황제는 그걸 믿는 척을 하고.’
황제는 전투에 져서 항복하는 게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주님의 뜻에 따라 항복하는 것뿐.
말장난이지만 황제에게 이것 말고 다른 탈출구는 없었다.
황제가 입술을 깨물며 중얼거렸다.
교황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
“보두앵 공자. 만약 자네가 내 손을 잡았다면 난 몇 년 후 예루살렘을 위해 십자군 원정을 떠났을 걸세.”
그가 말을 이었다.
“사라센들을 물리치고 저 동방 너머로 내쫓았겠지. 이번 일로 그럴 가능성은 없어졌네. 자넨 성도 예루살렘을 위험에 빠트린 거나 마찬가지야.”
“글쎄요. 그런 충고를 하기 전에 제국부터 챙기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난 그의 눈동자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네가 가만히 있었으면 이런 난장판도 안 벌어졌겠지.
“이번 일은 외교적인 방법으로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하르트만 백작이 패배했을 때도 협상의 여지는 남아 있었죠.”
신성로마제국의 영향력을 넓히는 건 돈을 뿌리기만 해도 쉽게 할 수 있었다.
어떤 동맹이든 눈앞에 확실한 적이 없으면 무너진다.
특히 이탈리아 도시들은 결속력이 더 약했지.
적당히 돈을 뿌려 아군과 첩자를 늘리면 롬바르디아 동맹은 알아서 붕괴했을 터.
동맹이 붕괴하면 베로나의 교황도 수세에 몰렸겠지.
그러면 신성로마제국은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정반대 길을 택한 건 너잖아.’
프리드리히 황제는 그 어느 때보다 큰 대군을 이끌고 알프스산맥을 넘었다.
강력한 적 앞에 이탈리아 도시들은 하나로 연합했고 난 그들을 이끌었다.
결국 황제는 자기가 내디딘 발에 걸려 넘어진 셈.
“설령 이번 원정이 성공했다 해도 이탈리아 도시들은 다시 반란을 일으켰을 겁니다. 그러면 또다시 원정을 와야 했겠지요.”
“….”
황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감정이 상했다는 건 굳이 육감을 쓰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황제 폐하께서 십자군 원정에 오지 않으셔도 상관없습니다.”
난 다시 미소 지었다.
처음엔 프리드리히 황제를 최대한 십자군 원정에 끌어들일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이상, 프리드리히는 내게 적대할 게 분명했다.
“그리스도께서 제게 계시하길 다른 독일의 영웅이 십자군 원정을 온다 하시더군요. 그자가 지금 런던에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만.”
프리드리히 황제에겐 지렛대가 하나 있었다.
그와 피가 이어진 사자공 하인리히.
하인리히 공작은 황제와 대립하다 작위와 영지를 전부 뺏기고 처가인 잉글랜드로 도망친 상태.
그는 나중에도 여러 번 프리드리히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다.
‘프리드리히 황제에겐 입천장에 박힌 가시 같은 존재지.’
신성로마의 권위가 땅바닥에 처박힌 지금이야말로 그가 나서기 최적의 순간이었다.
그에게 만약 적절한 자금이 지원된다면 어떨까?
“이 건방진 자식이! 감히 날 협박하는 거라면….”
“전 앞으로 벌어질 수 있는 일을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프리드리히가 성큼성큼 내 앞으로 걸어왔다.
이글이글 불타는 두 눈이 날 내려다봤다.
난 기사들에게 다가오지 말라는 손짓을 보냈다.
이렇게 나와준다면 나야 좋지.
“어디 치고 싶으시면 얼마든지 쳐 보시죠. 교황 성하와 성십자가 앞에서 말입니다.”
깡이 있으면 어디 한번 해보라고.
침묵이 이어졌다.
“….”
침묵을 깬 건 교황이었다.
그가 특유의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 황제와 황후 두 분 다 어서 성십자가 앞에 기도하시지요. 대화를 나눌 시간은 앞으로도 많을 겁니다.”
프리드리히 황제가 성십자가 앞에 섰다.
난 자연스럽게 성십자가 바로 옆에 섰다.
그렇게 쉽게는 안 되지.
이제 황제는 내게 무릎을 꿇는 모양새가 됐다.
그가 인상을 찌푸리며 날 바라봤다.
얼굴이 다시 붉게 물들었다.
“…이건 예정에 없었던 것 같네만. 난 자네가 아니라 그리스도 앞에만 무릎 꿇을 걸세. 저리 비키게.”
“그리고 전 그리스도의 뜻을 대리하는 자이지요. 안 그렇습니까? 예루살렘에서 이 성십자가를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계시까지 받았으니 말입니다.”
내가 말했다.
“폐하께선 제게 무릎 꿇으시는 게 아니라 성십자가와 그리스도 앞에 무릎 꿇으시는 겁니다.”
이렇게 말하니 옛날에 봤던 드라마가 떠오르네.
‘사람이 아니라 계급에 경례하는 걸세.’
황제는 중재를 요청하듯 교황을 바라봤다.
하지만 교황은 미소만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시 침묵이 흘렀다.
분노와 당혹감이 그의 몸을 타고 흐르는 게 느껴졌다.
황제는 잠시 머뭇거리다 이내 무릎을 꿇었다.
“와아아!”
병사들의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베아트리스 황후가 기도할 차례가 되자 난 성십자가 옆에서 물러났다.
이런 모욕은 황제 혼자 받는 걸로 족하겠지.
교황이 신호를 보내자 한 병사가 송아지를 끌고 나왔다.
교황은 직접 송아지를 끌고 황제 부부에게 다가갔다.
“이 송아지는 죽은 줄 알았지만 다시 살아온, 잃은 줄 알았지만 다시 찾은 아들을 위한 선물입니다. 황제께선 부디 받아주시지요.”
“물론입니다, 성하.”
황제는 송아지를 받아든 뒤 교황과 평화의 입맞춤을 했다.
병사들의 환호성이 한층 더 크게 울려 퍼졌다.
***
그다음 날.
황제와 교황, 나 우리 셋은 로마에 함께 입성했다.
로마 원로원은 누구보다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그들은 교황이 온다는 소식에 곧장 성문을 열었다.
거기에 화려한 환영식까지.
불과 며칠 전엔 신성로마 황제를 반기고, 그 황제에 대항했다가 다시 황제를 반긴다니.
‘박쥐도 이런 박쥐가 따로 없겠군.’
교황은 로마 도시를 용서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롬바르디아 동맹군과 예루살렘 기사단, 신성로마제국 기사들도 함께 로마 안으로 들어왔다.
사방에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주님을 축복하라! 교황 성하께서 세계의 심장인 로마 도시로 돌아오셨으니!”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꽃잎이 허공에 흩날렸다.
하긴 로마인들 입장에서도 나쁜 결과는 아니겠지.
프리드리히 황제는 얼마 전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에 보상금을 지급하기로 약속했다.
아직도 그가 죽인 시체들이 강 곳곳에 떠 있었다.
“황제다! 황제가 교황 성하와 함께 걷고 있어!”
“야만인 학살자! 독일로 돌아가!”
그들은 황제를 향해 과일을 던지며 야유를 보냈다.
몇몇 독일 기사들이 나섰지만 이미 황제가 사과와 포도를 얻어맞은 뒤였다.
난 그 모습을 보며 대놓고 비웃었다.
고작 이 정도로 불쾌하면 안 되지.
독일로 돌아갈 때까지 패배자 취급을 받을 텐데.
그나저나 여기가 로마로군.
난 주변을 둘러봤다.
한때 세계의 심장이었던 곳.
검투사 경기가 열리던 콜로세움과 정치인들이 토론하던 포룸들까지.
지금은 쓰이는 건물보다 폐허가 더 많은 것 같았다.
이곳을 직접 걸으니 기분이 묘하네.
루치오 교황이 내게 다가왔다.
“이탈리아에서 정말 큰일을 해내셨습니다, 보두앵 공자. 다른 그 어떤 그리스도인도 이런 업적을 세우진 못했을 겁니다.”
“전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교황 성하. 어느 신자라도 같은 일을 했겠지요.”
난 고개를 숙였다.
황제를 물리치면서 교황의 힘은 그 어느 때보다 확고해졌다.
그럼 이제 그 대가를 내놓으셔야지.
동방 교회와의 화해.
그리고 3차 십자군.
교황도 내 눈빛을 읽은 것 같았다.
“이미 콘스탄티노플과 유럽에 성직자들을 보내놨습니다. 곧 있으면 새로운 공회의를 열 수 있겠지요.”
그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이젠 헤어졌던 두 형제가 다시 만날 때가 됐습니다. 지금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겠지요.”
“저도 전력을 다해 성하를 돕겠습니다.”
“3차 십자군과 관련된 이야기는 나중에 자세히 나누도록 하지요. 공자를 위해 생각해둔 여러 가지 것들이 있습니다.”
그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지금 공자께선 황제 곁에 설 자격이 있으십니다. 자, 함께 가시지요.”
성 베드로 대성당은 구릉 아래에 있었다.
성당 안에 들어서자 종이 울리며 주님을 찬미하는 ‘사은찬미가’가 울려 퍼졌다.
교황이 앞장섰고 나와 황제는 함께 그 뒤를 따랐다.
교황 옆 의자에 앉자 예배가 시작됐다.
노래와 기도문이 이어지고 나도 모르게 조금씩 눈이 감겼다.
지난 몇 주간 얼마나 정신없이 돌아다닌 걸까.
수많은 전투와 싸움.
그리고 목숨을 잃은 사람들.
이 정도면 충분했을까?
문득 위그가 떠올랐다.
지금쯤 지중해를 건너고 있겠지.
난 배에 실린 관을 떠올리며 잠에 빠졌다.
차가운 바닷물이 얼굴을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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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우스 슈노르 폰 카롤스펠트 – 프리드리히 황제 (퍼블릭 도메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