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King of Crusaders RAW novel - Chapter (116)
십자군의 왕이 되었다-116화(116/215)
깨어진 서약의 독수리 (1)
* * *
“나인 척하는 건 어땠어?”
“이렇게만 말해두죠. 숨 막혀 죽는 줄 알았습니다.”
에이그가 투구를 벗으며 말했다.
난 녀석이 건넨 투구를 받았다.
“하루 종일 공자님인 척하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일 줄 몰랐습니다.”
에이그가 말했다.
“전에는 하루만이라도 왕족으로 살아보고 싶었는데 말입니다.”
“별로 유쾌한 경험은 아니지.”
내가 웃으며 답했다.
나도 처음 이 세계에 떨어졌을 때 적응 못 했지.
온갖 전통과 규율이 있었으니.
잠시라도 가만히 있으면 잡아먹히는 정글 같았다.
뭐 이젠 익숙해졌지만.
“용병들 막는 건 어떻게 되셨습니까?”
“놈들이 마을을 습격하는 걸 현장에서 잡아냈어. 사실 그것보다 좀 긴 이야기이지만.”
내가 천막을 나서며 말했다.
마셜과 리처드가 용병들을 끌고 오는 중이었다.
이것도 정말 이상한 상황이군.
젊은 헨리 영지를 습격한 제프리의 용병대.
그리고 그걸 진압한 마셜과 리처드.
제프리와 베르트랑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마셜을 쫓아냈다고 생각했겠지.
이제 그 기대를 박살 낼 차례였다.
우선 그러기 위해선 베르트랑.
그 녀석부터 공략해야겠군.
“젊은 헨리 왕이 공자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베르트랑도 불렀다더군요.”
에이그가 내 곁에 붙으며 말했다.
우린 함께 천막을 지나치며 진영 중앙으로 향했다.
해가 천천히 지고 있었다.
몇몇 병사들이 돌아다니며 횃불에 불을 붙였다.
“베르트랑이 정확히 어떤 자인데 그러시는 겁니까? 그냥 평범한 시인이나 귀족처럼 보이던데요.”
“평범한 음유시인은 아니지. 사실상 이번 전쟁을 부추긴 장본인이거든.”
내가 말했다.
이 시대의 귀족들은 자기 이익을 위해 전쟁을 이용했다.
베르트랑은 좀 선을 넘긴 했지.
윌리엄 마셜이 왕비와 간통을 저질렀다고 소문을 퍼뜨린 것도 그 녀석.
휘하의 음유시인들을 이용한 게 분명했다.
‘트루바두르(음유시인)’
그들은 궁정의 여론을 움직였다.
동시에 스파이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고.
“그럼 그자를 죽이시려는 겁니까?”
“지금 당장 죽일 필요는 없겠지. 아직은 쓸 구석이 있거든.”
진영 중앙의 천막에 다가가자 경비병들이 고개를 숙이며 비켜섰다.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공자님.”
안으로 들어가자 거대한 테이블들이 보였다.
하지만 안에 있는 건 두 사람뿐.
젊은 헨리와 베르트랑이었다.
두 사람이 동시에 날 바라봤다.
헨리가 미소를 지으며 일어섰다.
“고, 공자! 어서 이쪽으로 오시지요. 아직 베르트랑을 소개 모, 못 드린 것 같습니다만.”
“소개는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난 베르트랑을 바라봤다.
그에게서 옅은 긴장감이 느껴졌다.
내가 갑자기 왜 왔는지 궁금하겠지.
“이미 잘 알고 있으니까요.”
* * *
“폐하의 말씀대로 공자님과 대화를 나누는 건 처음인 것 같군요. 예루살렘의 존귀하신 분을 만날 수 있어 크나큰 영광입니다.”
베르트랑이 말했다.
비단옷 사이로 근육질의 몸이 보였다.
음유시인이라기보다 전사에 가까운 체형.
“저도 경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렇게 말한 난 젊은 헨리를 바라봤다.
“마셜 경과 리처드 공은 아마 내일쯤 이곳에 도착할 겁니다. 폐하께 미리 인사를 전해달라더군요.”
“그, 그렇군요.”
“마셜이 리처드 공작과 함께 온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폐하?”
베르트랑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와 헨리를 번갈아 바라봤다.
“마, 말 그대로일세. 두 사람이 이, 이곳에 날 만나러 온다는 거지.”
헨리가 음유시인을 바라봤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내, 내가 정녕 그대의 말을 믿었다고 생각하나? 마셜이 내 아, 아내와 간통을 저질렀다고?”
“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저 궁정에 떠도는 소문을 폐하께….”
“애초에 자네가 퍼뜨린 소문이지!”
헨리가 소리쳤다.
차분한 분노가 느껴졌다.
화가 나면 말을 안 더듬는 건가.
난 중앙에 서서 두 사람을 바라봤다.
방금까지 부드럽던 분위기가 한순간에 팽팽해졌다.
“그, 그대가 제프리와 손잡고 용병대를 보낸 걸 내 모를 줄 알았나?”
“혹시 마셜에게 그런 말을 들으신 겁니까? 그자가 폐하의 환심을 되찾기 위해 이젠 없는 거짓말도 지어내는군요.”
베르트랑이 짐짓 태연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까지 숨기지는 못했다.
“폐하께서 무슨 이야기를 들으신 건진 모르겠지만, 마셜이 리처드 공작의 사주를 받은 것이 분명합니다.”
“계속 거짓말을 하시는군요.”
내가 끼어들었다.
베르트랑이 날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외람되오나, 공자께선 이곳 유럽 땅에 오신지 몇 주도 채 안 되십니다. 그런데 어찌 제가 진실을 말하는지 거짓을 말하는지 아신다는 겁니까?”
“전 많은 걸 압니다, 보른의 베르트랑이여. 저에 대한 이야기는 들으셨을 텐데요.”
난 씨익 미소 지었다.
널 모르다니.
잉글랜드 진영으로 시작하면 넌 척결 대상 1순위거든.
그만큼 네놈에 대한 정보도 많이 알고 있지.
이 녀석이 저지른 범죄와 배신, 악행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뭐부터 시작해야 할까.
워낙 많아서 하나 콕 짚는 게 더 어렵군.
“우선 제프리 공작과 필리프 왕에게 받은 자금부터 설명해주시죠. 젊은 헨리 폐하의 금고에서 빼낸 돈도 있겠군요.”
사실 이 시대에 부패는 잘못이 아니었다.
오히려 돈을 안 빼돌리는 게 이상할 터.
‘하지만 왕의 돈을 빼돌린 건 이야기가 다르지.’
그렇게 빼돌린 돈을 어느 교회에 숨겼는지.
이를 도와준 귀족과 영주는 누구인지.
난 줄줄이 목록을 읽어나갔다.
내 말이 이어질수록 베르트랑의 표정이 점점 딱딱히 굳었다.
당혹감이 점차 공포로 바뀌었다.
난 그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이 상황 자체가 이해 안 가려나.’
갑자기 나타난 예루살렘 왕족이 자기의 가장 은밀한 비밀들을 술술 말하고 있으니.
자기 비밀을 모두 아는 낯선 자.
이보다 무서운 상대는 없었다.
베르트랑이 얼굴을 붉히며 외쳤다.
“이건 터무니없는 날조들입니다! 폐하. 전 제 평생을 폐하와 잉글랜드 왕실을 위해 봉사해왔습니다.”
“나, 난 그동안 그대의 말을 믿어왔지, 베르트랑. 이번 저, 전쟁을 결심한 것도 그대와 그대의 트루바두르(음유시인)들 때문이었고.”
젊은 헨리가 말했다.
여전히 차분한 분노가 느껴졌다.
“하지만 고, 공자의 말을 들으니 이해가 가더군. 왜 그대가 이, 이번 전쟁을 원했는지 말이야.”
그가 덧붙였다.
“내, 내 직접 조사해보니 공자가 한 말이 전부 사실이더군. 이것까지 부, 부인할 건가?”
베르트랑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고, 공자님. 제가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내를 설득해 십자군 원정에 합류시켰는지 모르실 겁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인 제게 어찌 이런 거짓 누명을 씌우실 수 있으십니까?”
그가 말했다.
“공자님의 이런 폭압적인 행동을 유럽의 신자들이 용납하지 않을 겁니다.”
“정말 재밌는 주장이군. 아직 분위기 파악을 못 한 것 같네만….”
난 보란 듯 코웃음 쳤다.
이젠 이런 같잖은 협박까지 하는군.
“내가 로마로 서신 한 통만 보내면 자넨 곧바로 파문당할 걸세. 헨리 폐하께서도 자넬 도와주진 않으시겠지.”
난 젊은 헨리를 바라봤다.
그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파문당한 사람의 말을 누가 믿겠나? 자네가 왕실 금고의 돈을 빼돌렸다는 게 알려지면 편을 들어줄 사람도 없겠지.”
“하, 하지만 그건….”
베르트랑이 일어서며 말을 더듬거렸다.
그의 얼굴은 이제 하얗게 질렸다.
공포.
공포가 온몸을 타고 흐르는 게 느껴졌다.
그가 헨리의 옷소매를 붙잡았다.
“폐하, 제가 한 모든 일은 어디까지나 폐하를 위해 한 것입니다. 다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가 말했다.
“폐하께선 아버지의 허수아비가 아닌 진정한 잉글랜드 왕이 되고 싶어 하지 않으셨습니까?”
“….”
“이번 전쟁에서 폐하가 승리하신다면 아무도 폐하의 권력과 힘을 의심하지 못할 겁니다! 모두가 폐하의 이름을 찬양하고 칭송하겠지요!”
“그래서 내가 저, 전쟁을 일으키도록 꼬드기고 마셜을 내쫓았다는 건가? 그게 다 날 위해 한 거라고?”
“예, 그렇습니다!”
베르트랑이 무릎을 꿇으며 외쳤다.
그는 용서를 구하듯 헨리의 발등에 연신 입을 맞췄다.
“난 이미 잉글랜드의 왕일세.”
젊은 헨리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가 경멸스럽단 어조로 말했다.
“자네나 다른 이들이 인정하든 말든, 난 이미 잉글랜드의 왕이란 말일세.”
“무, 물론입니다. 폐하!”
“당장이라도 자네 목을 치고 싶지만….”
헨리가 말했다.
“자네에게 목숨을 구할 기회를 주지. 경비병! 가서 제프리와 영주들을 소집하게.”
그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공자. 그대에게 큰 비, 빚을 졌습니다.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군요.”
“아직 제게 감사하기엔 좀 이른 것 같습니다.”
내가 미소 지으며 답했다.
곧 있으면 제프리와 다른 영주들이 오겠군.
“오늘 밤은 이제 시작이니까요.”
***
귀족과 영주들이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갑작스러운 소집에 하나같이 불만에 찬 표정이었다.
제일 마지막에 들어온 건 제프리였다.
그는 프랑스인들을 이끌고 안으로 들어왔다.
난 그들을 한 명 한 명 바라봤다.
‘필리프 2세의 사절단.’
필리프 왕도 이 전쟁을 지원했을 터.
프랑스 왕은 공식적으론 잉글랜드 왕보다 상위 군주였다.
하지만 실제로 다스리는 영토는 아키텐이나 브르타뉴랑 비슷했지.
프랑스 입장에선 헨리 2세의 아들들끼리 서로 싸울수록 이익이었다.
형제끼리 치고받고 싸우는 사이에 프랑스 영토를 넓힐 수 있으니.
“오, 오늘 밤 여러분을 부른 이유는 간단하오. 바로 어제 마, 마셜 경이 이끄는 부대가….”
젊은 헨리가 설명을 이어나갔다.
마셜과 리처드, 내가 이끄는 부대가 제프리의 용병대를 붙잡았다는 것.
헨리의 말이 끝나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영주들 모두 서로의 눈치만 살필 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먼저 입을 연 건 제프리였다.
그가 날 바라봤다.
“보두앵 공자는 지난 며칠 동안 폐하와 함께 사냥을 나가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어찌 마셜 경과 남쪽으로 내려갔다 하시는 겁니까?”
“전 많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미소 지으며 답했다.
에이그가 나 대신 있었다고 말할 순 없지.
기만행위로 몰아갈 수 있으니.
논점을 흐리려는 주장이었다.
“너, 너는 역겨운 짓을 저질렀다, 제프리! 네 용병대들을 리, 리처드가 보낸 것처럼 꾸미다니….”
“형님, 이젠 절 의심하시는 겁니까? 전 전쟁이 벌어지자마자 형님을 위해 곧바로 이곳에 달려왔습니다.”
제프리가 어깨를 으쓱이며 물었다.
그의 시선이 다시 날 향했다.
“‘누가’ 꾸민 짓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형님께선 음모에 빠지신 겁니다.”
그가 말했다.
“전 형님의 마을을 습격하라고 용병대를 보낸 적이 없습니다.”
“마을을 습격한 건 네가 해, 해산시켰던 용병들이었다, 제프리.”
“누군가 제가 해산한 용병들을 다시 모집했을 수도 있지요. 제 이름을 내걸고 말입니다.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입니다.”
“….”
“이거 정말 실망이군요.”
제프리가 웃음을 터뜨렸다.
“고작 그런 빈약한 증거들을 가지고 절 의심하신 겁니까? 형님께선 그보다 더 나으실 줄 알았습니다만.”
안도감이 느껴졌다.
자기 계획이 들통나도 저렇게 차분할 수가 있군.
아무리 증거를 들이대봤자 부인하면 그만이란 건가.
하지만 이것까지 부인할 순 없겠지.
“제프리 공의 말씀은 옳습니다. 누군가 이런 음모를 꾸몄을 수도 있겠지요. 제프리 공께 누명을 씌우려고 말입니다.”
내가 일어서며 말했다.
천막 안 모두의 시선이 날 향했다.
내가 항복했다고 생각한 듯 제프리가 미소 지었다.
그가 말했다.
“하지만 누구나 실수하는 법은 있지요. 저 역시 형님의….”
“하지만 누군가 나서서 증언한다면 어떨까요?”
“증언이라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제프리가 인상을 찌푸렸다.
난 그를 바라보며 미소 지어 보였다.
고개를 천천히 돌린 난 베르트랑을 바라봤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부들부들 떨고 있는 죄인.
“보른의 베르트랑. 뭔가 하실 말씀이 없으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