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King of Crusaders RAW novel - Chapter (119)
십자군의 왕이 되었다-119화(119/215)
깨어진 서약의 독수리 (4)
* * *
“전 일이 이렇게 커질 줄 몰랐습니다, 공자님.”
에이그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녀석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공자님께 바로 보고드리려 했는데 이런저런 일이 터지면서 용병들을 막으러 가셨고….”
“걱정 마, 에이그. 널 혼내려던 건 아니야.”
내가 웃으며 말했다.
내 앞엔 에이그와 피에르, 마르코 세 사람이 서 있었다.
“단지 좀 놀랐을 뿐이지.”
“전 주민들께 진실을 알렸을 뿐입니다, 공자님.”
피에르가 내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공자님께서 직접 말씀하시지 않은 진실들을 말입니다.”
“그, 그렇군요.”
난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이 사람은 너무 광신도 같다니까.
“다 저희 베네치아 쪽 실수로 벌어진 일입니다. 배가 제때 오지 못한 것부터 사과드려야겠죠.”
마르코가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감정.
“계약 기간을 준수하지 못한 건 꼭 보상하겠습니다. 이런 불편을 끼쳐드려 어떻게 해야 할지….”
“사과하실 필요 없습니다.”
파도 때문에 출항을 못 했다고 했지.
그것까지 뭐라 할 순 없었다.
“오히려 그 덕에 상황이 재밌게 된 것 같으니까요.”
내 말을 들은 마르코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때 에이그가 말했다.
“요즘엔 군표가 책정된 금액보다 훨씬 높은 값에 팔리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든 군표를 얻으려고 마을끼리 싸움도 벌인다더군요.”
“면죄부가 생겼으니 무리도 아니지.”
내가 말했다.
상황은 사실 꽤 간단했다.
‘군표’는 연옥에서의 시간을 줄이고 천국으로 갈 수 있는 증표다!
피에르가 이렇게 연설하면서 주변 마을들이 앞다퉈 군표를 얻으려 달려든 것이다.
‘이 시대의 신앙심을 너무 얕봤어.’
어음 증서를 종교적으로 바꿀지는 상상도 못 했군.
“면죄부라니요?”
“면벌부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하려나. 연옥에서 받는 벌을 줄여주는 거니까.”
연옥은 천국과 지옥의 중간 개념이었다.
대죄를 저지르지는 않았지만, 천국에 곧장 가기엔 부족한 자들이 머무르는 곳.
그곳에서 잠벌을 받고 기도하면 천국으로 갈 수 있었다.
‘성서 그 어디에도 교황에게 이런 권한을 부여하는 말씀은 없소!’
독일의 마르틴 루터가 로마와 대립해 개신교를 만든 계기가 되기도 했지.
거기에 인쇄술까지.
독일어로 된 성경이 퍼지면서 독일인들은 직접 성경을 읽고 판단을 내렸다.
‘교황에겐 면죄부를 팔 권한이 없다!’
그걸 몇 세기나 앞서서 시작해버렸군.
난 턱을 만지작거렸다.
엄밀히 말하면 면죄부는 아닌가?
나중에 그 금액만큼 바꿔주는 거니 채권이나 돈에 가까운데.
임시로 돈을 마련하기 위한 미봉책.
하지만 그렇다고 한번 쓰고 버릴 필요는 없겠지.
잘만하면 꾸준히 자금을 모을 도구가 될 터.
어쩌면 그 이상이 될지도 몰랐다.
“이자는 주지 않는다면… 사실상 돈이 되겠군.”
내가 웃으며 말했다.
이 종이를 가지고 오면 진짜 동전으로 바꿔준다!
그건 지폐지.
맨 처음 종이돈을 쓴 곳이 북송이니 대충 비슷한 시기군.
멍하니 서 있던 마르코가 손뼉을 쳤다.
그가 잔뜩 흥분한 얼굴로 팔을 흔들었다.
“그, 그거 정말 엄청나군요! 예루살렘에서 발행하면 전 유럽의 신도들이 쓰려고 할 겁니다. 쓰면 쓸수록 벌을 줄일 수 있는 돈이라니….”
“어차피 종이를 써도 결국 동전으로 바꿔줘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럼 별 이득이 없을 것 같은데요.”
에이그가 물었다.
“자네는 상인이 아니라 잘 모르겠군. 이건 엄청난 일일세. 동시에 아주 간단하기도 하지.”
마르코가 손을 흔들었다.
“내 쉽게 설명해 줄 테니 잘 듣게. 독일인 대장장이가 예루살렘 기사에게 갑옷을 팔고 이 ‘종이돈’을 받았다 해보자고. 일 디나르가 적힌 종이돈을 말일세.”
“계속 말씀하시죠.”
“그럼 예루살렘 기사는 갑옷을 잉크가 묻은 종이 하나랑 교환한 거나 마찬가지일세. 이보다 더 수지 좋은 장사가 어디 있겠나?”
“하지만 그 돈을 진짜 동전이랑 바꾸면 소용없지 않습니까.”
“물론 그렇겠지. 하지만 바꾸지 않고 계속 다른 물건을 사는 데 쓴다면?”
마르코가 물었다.
“진짜 동전으로 바꿔주기 전까지, 예루살렘은 공짜 이익을 얻는 셈이지. 사람들이 이 종이를 믿는 한 예루살렘은 절대 손해 볼 일이 없네!”
“마르코 씨의 말이 맞습니다.”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21세기 기축통화국은 미국.
미국 입장에서 달러 패권을 유지하는 건 무엇보다 중요했다.
나도 자세한 건 경제학도가 아니니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중요한 건 하나였다.
신뢰를 유지하는 것.
그건 지폐를 무리하게 발행하지 않으면 됐다.
금이랑 연결된 금본위제를 유지하고 금융 업무를 처리할 지점들도 필요한데.
이건 걱정 안 해도 되겠군.
“기사단 지부는 유럽 곳곳에 있죠. 거기서 이 ‘성도권’을 동전으로 바꿔주는 겁니다. 아예 발행도 기사단에 맡겨야겠군요.”
종이돈을 쓰면 예루살렘을 지원하는 것과 같다!
그럼 연옥에서 받는 벌도 줄어든다!
이런 결론이 되는 건가.
12세기 최대의 사기꾼이라도 된 느낌이군.
“저희 베네치아에서도 공자님과 예루살렘을 지원하겠습니다!”
마르코가 침 튀기며 말했다.
잔뜩 흥분한 게 느껴졌다.
보물상자를 눈앞에 둔 해적 같은 반응.
“필요한 게 있다면 얼마든지 말씀하시지요.”
“종이돈을 일일이 손으로 다 쓸 순 없겠죠.”
내가 말했다.
여기선 마르틴 루터가 쓴 방법을 써야겠군.
마침 적절한 도구도 있었다.
캉의 집에서 봤던 정교한 나무 조각들.
“캉을 불러줘. 아무래도 나무 조각이 몇 개 필요하겠어.”
“나무 조각 말입니까?”
에이그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도장이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하려나.”
내가 웃으며 답했다.
면죄부를 찍어내는 데 목판 인쇄만큼 좋은 게 어디 있을까.
에이그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또 일이 잔뜩 늘어나겠군요.”
“아, 공자님!”
마르코가 뭔가 떠올랐다는 듯 손을 들었다.
“그러고 보니 여쭙고 싶은 게 하나 있습니다. 공자님께서 전에 말씀하신 대로 나무를 종류별로 모았습니다만.”
그가 계속해서 말했다.
“나무통들을 정확히 어디에 쓰려고 하시는 겁니까? 앨릭서와 무슨 관계가….”
“앨릭서를 저장해둘 통이라고 해두죠.”
아, 그거도 있었지.
나무를 구하기 힘든 레반트와 달리 이곳 유럽엔 나무가 풍부했다.
물론 나무들을 모으는데 돈이 좀 들었지만.
그것도 금방 회수가 가능하겠지.
“지금부터 간단히 설명해드리죠. 제가 아는 것들도 정확하진 않으니 시행착오가 좀 있을 겁니다.”
내가 말했다.
원 역사에서 처음 위스키를 만든 것도 실수였던 것 같은데.
“우선 나무통들에 와인을 넣어둔 다음, 스며들 때까지 기다리고. 앨릭서를 넣어서….”
* * *
다음 날.
난 쇠뇌를 한 손에 쥐고 숨을 죽였다.
앞쪽에서 심장 뛰는 소리가 들렸다.
북을 마구 두드리는 듯한 리듬.
미친 듯이 요동치는군.
난 다리를 흔들어 불트에게 신호를 보냈다.
불트가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편자가 진흙을 밝으며 질척거리는 소리를 냈다.
수풀 너머로 녀석이 보였다.
‘큰 놈이군.’
거의 경차만 한 크기의 멧돼지.
녀석의 몸 곳곳엔 화살과 볼트가 박혀 있었다.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녀석은 숨을 씨익씨익거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난 조심스레 쇠뇌를 들었다.
한 방이면 놈을 잡을 수 있었다.
목.
일직선으로 노출된 목에 한 방만 쏘면….
난 쇠뇌를 쏘는 대신 불트에게 돌진 신호를 보냈다.
불트가 달려들자 멧돼지가 화들짝 놀라며 반대편으로 도망쳤다.
“리처드 공! 그쪽으로 갔습니다!”
“알겠소!”
리처드가 쇠뇌를 들고 달려왔다.
사냥꾼 몇 명이 창을 들고 그를 따라왔다.
멧돼지는 그들을 스치며 잽싸게 방향을 바꿨다.
리처드가 다시 뒤로 외쳤다.
“형님! 그쪽입니다!”
잠시 후 꽤액하는 돼지 비명이 울려 퍼졌다.
난 리처드와 함께 소리가 들린 쪽으로 갔다.
멧돼지는 목에 창이 꽂힌 채 쓰러져 있었다.
마지막 일격을 꽂아 넣은 건 젊은 헨리.
그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사냥감 옆에 서 있었다.
“후, 훌륭한 사냥이었습니다, 공자. 리처드 너도 수, 수고했다.”
“형님께선 마상시합만 잘 하시는 줄 알았습니다만 사냥도 꽤 하시는군요.”
리처드가 웃으며 말했다.
그가 말에서 내려 내게 다가왔다.
형형색색 비단옷이 바람에 흩날렸다.
황금 박차에 장밋빛 튜닉.
새하얀 망토까지.
공작이라기보다 왕처럼 보이는 복장이군.
그가 내 곁으로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공자 그대가 잡을 수 있었는데 일부러 이쪽으로 몬 거군. 안 그렇소?”
“글쎄요. 제가 굳이 눈앞의 사냥감을 안 잡을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내가 웃으며 답했다.
의외로 이런 곳에서 눈치가 빠르군.
내가 멧돼지나 잡자고 여기 나온 건 아니지.
이건 젊은 헨리와 리처드를 화해시켜 주기 위한 이벤트였다.
“리처드 공께서도 놈을 잡을 기회가 있지 않으셨습니까? 마지막 순간에 쇠뇌를 내리신 것 같던데요.”
“….”
리처드가 아무 말 없이 날 빤히 바라봤다.
이내 그가 빵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내 예감이 맞았군. 공자랑 나는 통하는 구석이 있는 것 같소. 영웅은 영웅을 알아본다고 해야 할까.”
난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그나저나 정말 멋진 말이군. 몇 년 동안 훈련한 거요?”
“애초에 훈련이 필요 없었습니다. 처음 본 날부터 제 말을 잘 따랐죠.”
난 옆에 선 불트의 갈기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녀석이 기분 좋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털의 뽀송뽀송한 촉감이 손가락 끝으로 느껴졌다.
처음 만난 날부터 잘 달려줬으니.
체력도 쌩쌩해 다른 말로 갈아탈 필요도 없고.
“그리고 공짜로 얻기도 했죠.”
“이런 명마를 공짜로 얻었다니. 그건 좀 부럽구려.”
리처드가 말했다.
그가 자신의 형을 바라보며 외쳤다.
“그나저나 공자와 다니니 몰이꾼들이 필요가 없군요. 짐승들이 있는 곳을 바로바로 찾아내니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형님?”
“저, 정말 놀랍긴 하구나. 도대체 어, 어떻게 하시는 겁니까, 공자?”
젊은 헨리가 날 바라보며 물었다.
아직 말 더듬는 게 완전히 낫진 않았다.
그래도 전보단 훨씬 더 줄어들었네.
“저만의 감각이 있다고 해두죠.”
“빗속에서 도망치는 적들을 찾아낸 것도 그대의 ‘감각’을 이용한 거요?”
리처드가 웃으며 물었다.
“공자 그대는 참 신비한 사람인 것 같소. 교황을 구하겠다며 붉은 수염(바르바로사) 황제와 싸우더니 이젠 우리 형제까지 화해시켰지.”
“모든 건 다 주님의 뜻입니다.”
“하, 주님의 뜻만큼 웃긴 말도 없을 거요. 로마에서 고귀한 척 떠드는 성직자 나부랭이들이나 하는 말이지.”
리처드가 조소를 흘리며 말했다.
“기사단은 오만하며, 수도사들은 탐욕스럽고, 수녀들을 욕정에 넘치는 창녀들이오.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지.”
“그 말은 동의하기 힘들 것 같군요. 물론 부패한 자들도 있지만….”
난 그의 시선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기사단원 모두가 오만하다면 전 재산을 기부한 뒤 죽을 때까지 사라센과 싸우지 않겠죠.”
위그의 마지막이 떠올랐다.
내장이 튀어나온 채 빗물 속에 누워있던 모습.
하지만 그는 그 순간에도 내게 미소 지었다.
“….”
침묵하던 리처드가 고개를 숙였다.
“이거 내가 말실수를 한 것 같군. 부디 내 무례를 용서해주시오. 사실 나도 그리 평판이 좋은 사람은 아니지. 내 어찌 남에게 뭐라 할 수 있겠소?”
그가 미소 지으며 큰 소리로 물었다.
“아, 그래. 오늘 밤에는 함께 자지 않겠소? 공자와 나, 형님 이렇게 셋이 말이오.”
뭐라고?
나도 모르게 고개가 갸우뚱해졌다.
같이 자자고?
“조, 좋은 제안이구나. 공자께선 이제 저희와 피를 나눈 형제나 마찬가지입니다.”
젊은 헨리가 말했다.
그가 내게 다가와 어깨동무를 했다.
“잠자리를 하, 함께하는 것만큼 확실한 게 어디 있겠습니까?”
난 두 사람을 바라보다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잠만 같이 자자는 거였나.
하긴 이 시대엔 군주가 친한 사람들이랑 같이 자는 게 보통이었지.
신하들이랑 같이 자는 건 신뢰를 보여주는 거였고.
내가 기억으론 리처드랑 젊은 헨리에게 동성애 특성은 없었다.
그래도 남정네 둘이랑 같은 침대에서 자는 건 싫은데.
예루살렘을 구하려고 이런 일까지 해야 한다니.
내 신세도 정말 처량하군.
그때 리처드가 말했다.
“그나저나 아버지께서 우리가 잉글랜드로 가는 걸 허락하실지 모르겠구려. 아마 공자 그대가 오는 걸 경계하고 계실 거요.”
“그 부분은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내가 웃으며 답했다.
헨리 2세는 우리가 오는 걸 반기지 않겠지.
하지만 내게도 나름의 방법이 있었다.
헨리 2세가 우릴 받아들이도록 강제하는 것.
그 정도는 피에르로 충분하지.
사제까지 막을 순 없을 터.
“제가 살짝 손을 써뒀으니까요.”
* * *
Q : 정말 저 당시 군주와 귀족들은 함께 잤나요?(성적 의미X)
A : 중세 유럽에선 영주가 신뢰하는 부하들과 같은 공간에서 잠을 자는 경우가 흔했습니다. 함께 잠을 잔다는 건 곧 신하들을 향한 영주의 신뢰를 보여줬지요.
또한 리처드 1세의 경우 필리프 프랑스 왕과 같은 방에서 잤다는 기록이 많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근대와 현대 학자들은 두 사람이 동성애 연인관계라고 주장했으나, 이는 신뢰성이 낮다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함께 잤다는 기록은 중세에 쓰여졌으나, 정작 당시엔 이를 문제 삼은 중세인들은 아무도 없었죠.
젊은 헨리의 경우에도 아버지인 헨리 2세와 화해한 후 같은 침대에서 잤다는 기록이 많습니다.
하지만 역사 기록이라는 특성 상 동성애자이거나 양성애자였을 가능성을 배제하긴 힘들겠죠.
‘리처드가 남자와 동침했다면 그것이 계속 비밀로 유지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어쨌거나 왕들은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노출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성애가 용서받지 못할 죄일 뿐 아니라 범죄로까지 간주되던 시대에 왕이 그런 추문에 휩싸였다면 연대기 작가들이 어떤 식으로든 충분히 언급했을 것이다. 윌리엄 롱챔프가 소년들을 좋아한다는 의혹이 있다는 것까지 이들은 기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리처드 왕의 적수들도 틀림없이 이 추문을 물고 늘어지면서 정치적 이득을 취하려 들었을 것이다.’
출처 자료 – 낯선 중세(유희수),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앨리슨 위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