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King of Crusaders RAW novel - Chapter (12)
십자군의 왕이 되었다-12화(12/215)
풀을 뜯는 사자와 황소 (2)
* * *
“에일라트에 상선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고?”
“예, 이미 항구가 가득 찼다고 합니다. 어떻게 한 건진 모르겠지만 현지에서 조립한 배도 세 척에….”
“베네치아 놈들이 한 거겠지. 돈이라면 사자라도 산채로 씹어먹을 놈들이니.”
르노가 메고 있던 검집을 풀었다.
덜커덩하며 떨어지는 검집을 시종들이 허겁지겁 주웠다.
“오늘 잡았다던 죄인은 어디에 있나?”
“바로 옆 방에 있습니다.”
흑인 집사장이 손짓하자 병사들이 한 사내를 질질 끌고 왔다.
사내의 몸은 상처와 흉터, 고문 흔적들로 빽빽했다.
“그래, 네놈이 여태까지 사라센 놈들을 위해 첩자질을 했다는 거냐?”
르노가 으르렁거렸다.
“성채 안에 살던 대장장이라고?”
“으, 음해입니다, 영주님! 저는 지난 몇 년 동안이나 영주님과 주님을 위해서….”
“아직 정신을 덜 차렸군.”
르노가 손짓했다.
“상처에 꿀을 발라서 성벽 위에 올려놔라. 하룻밤 정도 파리들이랑 놀다 보면 알아서 죄를 실토하겠지.”
“영주님! 제발……!”
사내가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소리쳤다.
“저에겐 아내와 어린 딸들이 있습니다! 부디 자비를….”
“그래? 첩자의 가족들이 어떤 벌을 받는지는 너도 잘 알 텐데? 자백하면 팔다리 한두 개로 끝내주도록 하마.”
“아아아!”
발악하던 사내가 검집을 얻어맞고 축 늘어졌다.
그가 끌려나가자 침묵이 방을 덮었다.
“그나저나 그 꼬맹이 보두앵에게 에일라트 재건을 맡겼다라….”
르노의 콧수염이 씰룩거렸다.
“마지막으로 왕궁에서 봤을 때만 해도 빌빌대던 약골이었는데 그사이 많이 변했나 보군. 폐하께서 이런 큰일도 맡기시고 말이야.”
그가 코웃음을 쳤다.
“아니면 나병 때문에 이젠 정신까지 오락가락하시는 건가?”
노골적으로 왕을 모독하는 발언.
하지만 꼬투리 잡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폐하께서 아카바가 아니라 굳이 에일라트를 재건하신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습니까?”
집사장이 헛기침하며 물었다.
“차라리 영주님께 도움을 요청했다면 아카바를 훨씬 더 빨리….”
“자네도 참 눈치가 없군. 꼬맹이 공자를 키워주려고 일부러 그런 거야.”
“예?”
“에일라트가 재건되고 돈이 흘러들어오면 그만큼 궁전에서 그 꼬맹이의 위상도 높아지겠지.”
르노가 다시 코웃음 쳤다.
그의 시선이 창문 밖을 향했다.
“이래서 기 녀석이 난리를 친 거군.”
사자상이 새겨진 성탑들.
깊숙한 해자와 가파른 절벽까지.
예루살렘 왕국 동부의 요충지.
케락.
이곳이 그가 맡은 영지였다.
그 누구보다 먼저 이슬람의 공격을 받아내는 최전방.
“저번에 에일라트로 가던 중에 바다위 놈들과 부딪혔다고 하지 않았나?”
“예, 맞습니다. 그때 현장에 있던 베네치아 상인들의 말에 따르면….”
집사장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놈들을 전리품으로 유인한 뒤 기습했다고 하더군요.”
“바다위 놈들을 전리품으로 유인했다라. 기사 중에 나름 머리가 돌아가는 녀석이 있었나 본데.”
르노가 중얼거렸다.
침묵하던 그가 벌떡 일어섰다.
“바다위 부족들한테 전해라. 올해 연공은 작년의 두 배로 받겠다고 말이야.”
“하지만 그랬다간 반발이….”
“놈들이 반발할수록 나야 좋지. 싸울 명분을 주면 거절할 이유가 뭐겠나?”
그가 씨익 미소 지었다.
“이제 슬슬 내가 나설 때가 됐어.”
“그 말씀은….”
“살라딘이 카이로에 처박혀 있는 지금이야말로 사라센 놈들의 겨드랑이를 찌를 때다.”
르노가 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그가 보란 듯 엄지와 검지를 비볐다.
“오랜만에 놈들 지갑에서 돈 좀 꺼내보자고.”
“하지만 국왕 폐하께서 살라딘과 맺은 조약에 따르면 내년까지는 그 어떤 적대행위도….”
“멍청한 놈 같으니라고.”
르노가 으르렁거렸다.
“한낱 이교도랑 맺은 조약을 왜 내가 신경 써야 한다는 거냐? 어?!”
“오,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집사장이 허겁지겁 고개를 조아렸다.
“영주님이 아니면 누가 이곳을 지키겠습니까?”
“그래, 나밖에 없겠지. 레몽 그 녀석은 겁먹은 개처럼 꼬리나 말고 있으니.”
껄껄 웃던 그가 생각에 빠진 표정을 지었다.
“녀석과 난 함께 사라센 놈들에게 붙잡혔었지. 15년.”
그가 중얼거렸다.
“난 그 망할 15년을 사라센 놈들 감옥에서 버텼어. 말라비틀어진 빵과 조롱을 받으면서 말이야.”
“…….”
“가서 기사단을 소집해라. 내일부터 다마스쿠스에서 메카로 가는 대상隊商들을 친다.”
“하지만….”
“이번엔 또 뭐냐?”
“만약 에일라트에 계신 보두앵 공자께서 이 일을 문제 삼으시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혹여 항구 재건에 차질이라도 생긴다면 그 책임이….”
“어디 그 꼬맹이 공자가 어떻게 나오는지 한번 보자고. 레몽 같은 겁쟁이인지, 아니면 이 르노처럼 싸울 준비가 된 사내대장부인지 말이야.”
그가 망토를 두르며 소리쳤다.
“기사들을 소집해라!”
* * *
에일라트
“전진!”
장정들이 명령에 맞춰 창을 앞으로 휘둘렀다.
수십 개의 장대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허공을 갈랐다.
“일보 후퇴! 정지! 정지!”
가니에르가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가 병영에 쩌렁쩌렁 울렸다.
“모두 멈춰!”
머뭇거리던 사내들이 멈춰섰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 한 명이 흐트러지면 모두 죽는다! 이미 몇 번 말했던 것 같은데?!”
가니에르가 고개를 흔들며 외쳤다.
“그래도 처음보다는 많이 나아졌군. 오늘은 여기서 훈련을 마치겠다, 해산!”
사내들이 우르르 흩어졌다.
그들 모두 훈련이 끝나서 다행이라는 듯 왁자지껄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 한 소년이 가니에르의 곁으로 다가왔다.
에이그였다.
“그래도 처음에 비하면 많이 나아졌네요. 그때는 창도 제대로 못 잡았으니까요.”
“아직 많이 부족하긴 하지만….”
가니에르가 웃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 정도면 얼추 맞서 싸우는 건 될지도 모르겠구나. 전투가 시작하자마자 도망 안 갈 때 얘기지만.”
가니에르가 주머니에서 사과를 꺼내 던졌다.
“그래서 궁수들 쪽은 어때?”
“일단 쇠뇌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활보다는 훨씬 배우기 쉬우니까요.”
에이그가 점프해 사과를 받았다.
소년의 허리에 달린 쇠뇌와 볼트 주머니가 흔들렸다.
“시간은 가는데 할 일은 계속 쌓이기만 하니. 성벽 보수도 아직 안 끝났고.”
“그래도 봉화가 있으니 다른 성채들에 도움을 청할 수 있겠죠.”
에이그가 말했다.
“공격받는다 해도 지원군이 올 때까지만 버티면 되고요.”
“지금 당장이야 그렇게 할 수 있겠지. 하지만 나중에는 그런 임시방편도 안 통할 거다.”
가니에르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의 시선이 텅 빈 막사를 향했다.
“싸울 장정의 수가 너무 부족해. 그게 여기 에일라트만의 문제는 아니지. 왕국 전체에 기사와 병사가 부족하니 말이야.”
“그래서 이렇게 많은 성채를 지은 게 아닌가요? 아무리 대군을 몰고 온다 한들 성벽은 쉽게 뚫지 못하니까요.”
“성채는 성채일 뿐. 그 자체로 적들을 물리칠 순 없어.”
가니에르가 말했다.
“만약 적들이 성채를 무시하면? 눈앞에서 농작물을 불태우고 가축들을 훔쳐가면 그땐 어떻게 할 거냐?”
“그때는 성 밖으로 나와 놈들과 맞서 싸우면 되지 않을까요?”
“그럼 성이 무방비해지겠지. 숨어있던 적들이 그때를 노려 성을 포위하면?”
“그때는….”
에이그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저도 모르겠네요. 이기게 해달라고 주님께 비는 수밖에요.”
“그래, 그럴 수밖에 없겠지. 천상의 군대가 온다면 확실히 도움이 될 거다.”
가니에르가 미소 지었다.
그가 손을 뻗어 에이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무슬림들은 예루살렘을 잃은 게 자신들의 신이 내린 고난이자 시험이라고 생각한다지. 어쩌면 이젠 우리가 그런 시험과 고난을 겪을 차례일지도 모르겠구나.”
심연과 어둠.
지금 예루살렘 왕국은 그 둘 사이에 끼어 있었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전쟁이 벌어질까.
성지, 성도.
세상의 중심.
이곳 예루살렘은 영광의 땅이자 무수히 많은 자의 피로 물든 전장이었다.
신과 악마.
참된 신앙자와 거짓된 이교도.
삶과 죽음.
기사단에 입단하기 전만 해도 모든 건 명확했다.
하지만 레반트의 모래폭풍은 모든 걸 흩트려놨다.
“이거 쓸데없는 말을 너무 많이 늘어놨구나. 그래, 공자님을 수행하는 건 어떤 것 같더냐?”
“뭐라 말하긴 어렵지만, 처음 생각했던 거랑은 다르다고 해두죠. 공자님께서 이상한 행동이나 말씀을 하실 때도 많긴 하지만….”
소년이 계속해서 말했다.
“대부분 좋은 결과로 끝났으니까요. 저한테도 늘 이것저것 챙겨주셨고요.”
“대부분 좋은 결과로 끝났다라. 그래, 네 말이 맞는 것 같구나.”
가니에르가 중얼거렸다.
지난 몇 주 동안 그는 보두앵과 함께 지내왔다.
구호소의 수많은 병자를 구한 소금설탕물.
바다위 부족들의 습격 때 보여준 용기와 대처력.
그의 지휘 아래 순조롭게 진행 중인 에일라트 재건까지.
보두앵 공자는 소문과는 정반대 인물이었다.
“그나저나 며칠 동안 공자님을 못 뵌 것 같은데….”
그때 수도복을 입은 기사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가니에르 형제여. 보두앵 공자께서 기사들을 모두 호출하셨네.”
“공자님께서 호출하셨다고?”
“긴급한 안건이라고 하시더군. 어서 빨리 회의실로 가보게.”
“알겠네, 지금 바로 가도록 하지.”
가니에르가 에이그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너도 따라와야 할 것 같구나, 에이그.”
* * *
“르노가 곧 사라센 상단들을 습격할 거라니. 그걸 어떻게 아신 겁니까, 공자님?”
가니에르가 물었다.
에일라트 중앙건물에 마련된 참모 회의실.
수많은 기사와 관료들이 테이블을 중심으로 앉아 있었다.
난 가니에르를 바라봤다.
“그쪽에 제 ‘지인’이 있다고 해두죠. 내부자에게서 확보한 정보입니다.”
사실 정보원 같은 건 없긴 한데.
이 정도는 눈 감고도 알 수 있지.
게임하면서 그 녀석 때문에 빡친 적이 한두 번 아니거든.
르노.
십자군 진영의 초강경파.
젊은 시절 동로마령 키프로스를 약탈하던 그는 지금 케락의 영주였다.
게임에서도 녀석은 수시로 협정을 어기고 무슬림 상단이나 순례자들을 공격했다.
그때마다 지역 안정도가 팍팍 깎이는 건 덤.
가끔은 참다못한 살라딘이나 이슬람 세력이 전쟁을 선포하기도 했다.
‘지금 전쟁을 벌이면 승산이 너무 낮아.’
그런 사태는 어떻게든 막아야 했다.
애초에 에일라트에 온 이유 중에 하나도 녀석을 막기 위해서고.
“아무리 르노 영주라 해도 공자님께서 에일라트에 계시는 동안은 조용히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만.”
가니에르가 한숨을 내쉬었다.
“사냥개가 제 버릇을 못 버린 모양이군요.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평화 협정 자체가 흔들릴 겁니다. 살라딘도 가만히 있지 않겠죠.”
“르노 영주가 원하는 것도 바로 그런 상황입니다.”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르노가 원하는 건 지금 당장 이슬람 세력과 전면전을 벌이는 것.
“일이 심각해지기 전에 어떻게든 막아야 합니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공자님. 르노 영주의 행동은 명백한 협정 위반이겠지만….”
가니에르가 말했다.
“르노는 이교도들과의 협정 자체가 무효라고 주장할 겁니다. 실제로 로마에서 그런 판단을 내린 적도 많고요. 공자님께서 직접 군대를 끌고 가셔서 상단들을 호위하는 게 유일한 방법이겠습니다만….”
“그랬다가는 오히려 다른 이들의 오해를 사겠죠.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건지 이해했습니다.”
내가 말했다.
예루살렘 왕족이 무슬림 상인들을 십자군으로부터 호위한다?
이유가 뭐든 간에 강경파에서 물고 넘어질 게 분명했다.
안 봐도 뻔하지.
‘더러운 이교도들의 돈을 받고 사라센 놈들을 지켜준다!’
‘그리스도를 배신했다! 십자군의 수치!’
흠, 생각보다 상황이 복잡하네.
르노를 내버려 두면 어떻게든 난장판을 벌일 게 분명한데.
그렇다고 개입하자니 명분이 부족.
배신자, 이교도라는 프레임이 한 번 박히면 여론전에서도 밀릴 테고.
“…….”
“…….”
회의장에 있는 누구도 선뜻 입을 열지 않았다.
머리를 굴리던 그때, 뭔가 떠올랐다.
‘꼭 게임에서 쓰던 방법들만 이용하란 법은 없잖아.’
어이없을 정도로 간단한 답.
왜 여태 이 생각을 못 했던 거지?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떨까요?”
내가 웃으며 물었다.
“르노가 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사라센 상단과 순례자들을 습격하는 겁니다.”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