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King of Crusaders RAW novel - Chapter (128)
십자군의 왕이 되었다-128화(128/215)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3)
* * *
“이렇게 공자를 만날 수 있어 기쁩니다.”
“저 역시 왕비님께서 풀려나신 모습을 보니 기쁘군요.”
난 고개를 숙였다.
엘레오노르 왕비.
그녀는 백마 위에 홀로 올라타 있었다.
그녀가 안장에서 천천히 내렸다.
“공자께선 내 아들들의 싸움을 멈춰줬어요. 그리고 아서왕의 무덤을 찾아 잉글랜드 왕실을 구했죠.”
“왕비님도 절 도우셨고요.”
내가 웃으며 답했다.
난 그녀가 내민 손등에 입을 가볍게 맞췄다.
지금 예순이 넘은 나이였지.
언뜻 봐선 사십 대처럼 보이는 동안이었다.
잔주름이 있긴 하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외모.
‘동화에 나오는 왕비를 보는 것 같네.’
고풍스러운 아우라가 뿜어져 나왔다.
괜히 유명한 인물이 아니었군.
“공자를 보니 내가 루이와 십자군 원정을 떠났을 때가 기억나는군요. 그곳에 계신 분들은 특유의 분위기가 있죠. 고귀하다고 해야 할까요.”
그녀가 싱긋 미소 지었다.
“애초에 공자께선 하늘의 계시를 받으신 분이니 당연한 이야기일지 모르겠군요.”
“아서왕께서 선택하신 분은 젊은 헨리 폐하와 리처드 공이십니다. 전 그분의 말씀을 전했을 뿐이죠.”
“그리고 베켓도요. 이보다 더 적절한 때는 없었을 겁니다.”
그녀가 말했다.
“예루살렘은 요즘 어떤가요?”
“아직은 평화로운 분위기입니다만….”
내가 말했다.
여기서 과장할 필요는 없겠지.
“곧 큰 전쟁이 벌어질 겁니다. 그 전쟁에 성도의 운명이 걸려있죠.”
“그래서 공자께선 제 아들들을 예루살렘에 데려가려 하시는 거고요.”
엘레오노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시녀나 시종의 도움 없이 우아한 동작으로 말에 올라탔다.
“공자는 아서왕의 무덤을 찾고 혜성과 지진을 예언했죠. 어쩌면 성도로 가는 게 내 아이들의 운명일지도 모르겠군요.”
그녀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나누도록 하죠. 공자에게 받은 은혜를 어떻게 갚을지도요.”
“지금 당장은 더 급한 일이 있죠.”
난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많은 사람이 몰려왔다.
거리가 발 디딜 곳 하나 없이 꽉 찰 정도.
곧 있으면 사람들 머리 위를 밟고 지나가야겠군.
난 엘레오노르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오늘 쇼의 주인공은 그녀였다.
남편에 의해 부당하게 감금된 왕비이자,
멀린이 예언한 깨어진 서약의 독수리.
런던의 시민들은 그녀를 원했다.
독수리가 날개를 펼칠 때.
“왕비님께서 앞장서시죠.”
* * *
도시는 환호성으로 가득했다.
성채와 거리를 지키던 기사와 병사들도 몰려드는 인파에 당황하며 물러섰다.
누가보면 축제로 착각할 분위기였다.
엘레오노르 여왕은 선두에 선 채 시민들의 환영을 받았다.
“데우스 불트! 데우스 불트!”
“신의 뜻이다!”
십자군 원정이라도 떠나는 것 같네.
신의 뜻!
엘레오노르 왕비가 런던으로 돌아온 건 어디까지나 신의 뜻이었다.
그리고 부덕한 왕에게 내려진 혜성과 지진.
이보다 더 명확한 증거가 뭐가 있을까?
‘묘한 기분이 드네.’
난 잉글랜드 전체를 속여 넘겼다.
내가 어떤 말을 하든 혜성과 지진은 벌어졌겠지.
난 그저 앞뒤에 예언과 협박을 곁들였을 뿐이다.
뭐, 그게 예언자들이 하는 일이긴 하지만.
‘모세가 이집트에서 한 것도 비슷했고.’
물론 열 가지 재앙에 비하면 임팩트가 좀 떨어지긴 했다.
그건 따라 하기 힘들겠지.
강을 피로 만들고, 개구리 비를 내리고, 우박을 떨어뜨리고, 메뚜기 떼까지 소환해냈으니.
하지만 잉글랜드인들은 날 자신들의 모세로 여겼다.
에이그가 곁으로 다가왔다.
“잉글랜드인들 사이에서 여왕의 인기가 이렇게 높을 줄 몰랐습니다. 아키텐(남프랑스) 출신이라….”
“인기가 없을 줄 알았다고?”
내가 웃으며 되물었다.
사실 이런 사태를 만든 건 헨리 2세 본인이지.
“헨리 2세는 처음부터 큰 실수를 저질렀어. 왕비를 죄수처럼 가둬놓은 것 자체가 문제였지.”
내가 말했다.
“자기는 예비 며느리나 다른 여자들하고 대놓고 동침하면서 말이야.”
사실 헨리 2세가 왕비를 가둔 이유는 이해할 수 있었다.
아들들이 반란을 일으키도록 지지한 게 엘레오노르였으니.
그녀는 아들들이 정당한 권력을 얻고, 자신도 그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헨리 2세는 그녀를 감금함으로써 또다시 반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막았다.
‘하지만 민중들이 보는 모습은 다르단 말이지.’
왕비를 감금하고 예비 며느리와 간통을 저지른다!
이걸 곱게 받아들일 그리스도 신자는 없었다.
‘그러니 엘레오노르를 독수리로 비유한 멀린의 예언이 떠돈 거겠지.’
거기에 아키텐과 잉글랜드의 음유시인들은 대부분 왕비를 지지했고.
그녀를 감금함으로써 지지자들이 규합할 명분을 준 셈이다.
“차라리 이혼했으면 나았을 거야. 하지만 그럼 아키텐 땅을 포기해야 했을 테니 싫었겠지.”
“그 실수가 이 상황까지 이어진 거군요. 그럼 만약에….”
에이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헨리 2세가 자기 죄를 인정하고 뉘우쳤으면 혜성과 지진은 일어나지 않는 거였나요?”
“글쎄. 그것도 주님의 뜻에 달려있었겠지.”
내가 웃으며 답했다.
이럴 땐 신의 뜻을 들먹이는 것도 생각보다 편하군.
어떤 일이 벌어지든 주님의 뜻이라고 말하면 그만이니.
“이제 젊은 헨리와 엘레오노르 왕비가 왕국을 지휘할 거야. 헨리 2세는 뒷방으로 물러나고.”
사실상 이빨 빠진 상왕上王 같은 신세.
헨리 2세가 이번에 입은 정치적 타격은 회복 불가능했다.
‘지지하던 영주들도 돌아설 테니.’
이 시대의 군주는 영주들의 지지 없이 권력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잉글랜드인들이 지진을 본 순간 게임은 끝난 거나 마찬가지였다.
‘신께서 왕을 버리셨다!’
그보다 더 큰 타격은 없겠지.
“내 군대를 습격했으니 그 정도 대가는 치르게 해두자고.”
선두에 있던 루아크가 다가왔다.
그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곧 있으면 궁에 도착합니다, 공자님.”
* * *
궁은 텅 비어있었다.
하녀와 시녀, 시종들까지.
한눈에 봐도 수가 적어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경비를 서는 기사와 병사들도 마찬가지.
다들 불안한 눈빛으로 우릴 바라봤다.
막아서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난 리처드, 엘레오노르와 함께 통로를 가로질렀다.
‘분위기 하나는 잘 파악하는군.’
헨리 2세가 망했다는 걸 깨달은 이들이 빠져나간 건가.
왕이 죽으면 신하들이 보물이나 돈을 챙겨 도망치는 일은 흔했지.
그래도 몇몇 이들은 아직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제 와서 라인을 갈아타기엔 너무 늦은 자들.
이들의 운명은 헨리 2세에게 달려 있었다.
난 엘레오노르, 리처드와 함께 알현실 안으로 들어갔다.
안엔 고작해야 열 명 정도.
포고관은 없었다.
중앙엔 헨리 2세가 앉아 있었다.
햇빛에 비친 그의 얼굴은 전보다 초췌했다.
나이를 십 년 넘게 먹은 듯한 표정.
눈 아래의 다크서클도 짙었다.
그가 우릴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적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허탈함과 두려움.
죄책감까지.
완전히 진이 빠진 반응이군.
이렇게까지 무너져내릴 줄은 몰랐는데.
그가 엘레오노르를 바라보며 힘빠진 웃음을 터뜨렸다.
“엘레오노르. 그대를 막을 수 있는 자는 정녕 아무도 없나 보구려.”
“언젠가는 벌어질 일이었어요, 헨리.”
엘레오노르가 말했다.
기쁘다기보다 착잡함이 섞인 목소리.
그녀가 왕좌를 향해 다가갔다.
“당신은 우리 아들들을 꼭두각시 인형 취급했어요. 당신이 줄을 달고 움직이면 아무 불평 없이 따라 움직일 거라고 생각했죠.”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는데.”
“난 아이들에게 기회를 주려고 했을 뿐이에요. 자신들의 정당한 기회를.”
엘레오노르가 말했다.
“하늘을 본 새끼 독수리들이 날지 못하게 막는 건 잔인한 짓이에요. 애초에 가능하지도 않고요.”
“난 아이들이 더 준비될 때를 기다렸을 뿐이오. 헨리, 리처드, 제프리, 존. 그 아이들을 위해 내 직접 둥지를 다듬고 쓰레기들을 치웠건만….”
“둥지를 다듬으면서 아델과 뒹구신 겁니까?”
리처드가 웃으며 물었다.
헨리 2세는 인상을 찌푸리며 아들을 노려봤다.
그의 시선이 날 향했다.
“고귀하신 성도 예루살렘의 보두앵 공자. 자네는 내가 수십 년간 가꾸어온 왕국을 몇 주 만에 뒤집어 놨네. 무슨 일이 있어도 자네가 해협을 건너오지 못하게 막았어야 했거늘.”
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자넬 막지 않은 게 내 가장 큰 실수였지.”
“누구나 후회하는 일은 있는 법이지요.”
난 어깨를 으쓱였다.
날 글래스턴베리로 보낸 것도 후회하고 있겠지.
내가 아서왕의 무덤이라는 초대형 폭탄을 터뜨릴 줄은 상상도 못 했을 테니.
“하지만 폐하께서 후회하실 건 그게 전부가 아닙니다.”
“아직도 할 예언이 남았다는 건가? 이 궁을 통째로 무너뜨리거나….”
그가 왕좌에서 일어섰다.
“아니면 런던을 통째로 바다에 처박기라도 할 건가?”
“전 폐하와 싸우기 위해 이곳 잉글랜드에 온 게 아닙니다. 오히려 구원의 기회를 드리기 위해 왔죠.”
내가 말했다.
이젠 그가 물러설 차례였다.
만약 헨리 2세가 끝까지 권력을 놓지 않고 발악하면 문제가 복잡해졌다.
아들이 아비를 죽일 순 없는 셈.
그렇게 되면 왕국이 박살 난다는 건 본인도 잘 알겠지.
“….”
헨리 2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네가 지진을 예언한 날부터 베켓이 내 꿈에 나타나더군.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공포와 죄책감이 휘몰아쳤다.
“구름 위에 앉아 아무 말 없이 날 바라보더군. 내가 아무리 소리 질러도 꿈쩍도 안 하고 말이야.”
“내가 말했었죠. 베켓을 대주교에 임명해선 안 된다고요. 그자는 당신 대신 신을 선택했을 뿐이에요.”
엘레오노르가 말했다.
“하지만 우리에겐 아직 실수를 바로잡을 기회가 있어요. 보두앵 공자가 이곳 잉글랜드에 온 게 곧 주님의 뜻이죠.”
“….”
정적이 내려앉았다.
모두의 시선이 날 향했다.
아, 그렇군.
그리스도와 교황의 대리자로서 헨리 2세를 심판하러 온 건 나였다.
그렇다면 그를 용서할 사람도 오직 나뿐.
난 왕좌로 나아갔다.
망토가 창문 밖 바람에 흔들렸다.
“폐하께선 그동안 범해온 죄들을 인정하십니까?”
내가 물었다.
“프랑스의 아델과 간통을 저지르고, 아서왕의 십자가를 없애기 위해 용병대를 고용했으며, 엘레오노르 왕비를 감금한 것. 이 죄들을 인정하십니까?”
“내가 용병대를 고용한 건…!”
헨리 2세가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선택지는 둘뿐이었다.
무조건 항복이냐.
아니면 최후까지 발악이냐.
모두가 왕을 바라봤다.
침묵이 흐르고….
“내 죄를 인정하네.”
헨리 2세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도 폐하를 용서하실 겁니다. 잉글랜드는 젊은 헨리 폐하께 맡긴 뒤 왕비님과 캔터베리로 가시지요.”
“캔터베리로 말인가?”
“예, 성 베켓께서 폐하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곳에서 죄를 고백하신다면 성인께서도 더 이상 폐하의 꿈에 나타나지 않으실 겁니다.”
“…알겠네.”
헨리 2세가 비틀거리며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가 내 팔을 덥석 붙잡았다.
잔뜩 준 힘.
안도감과 편안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공자 자네의 말대로 하겠네. 그리고 리처드와 아델의 결혼식을 당장 올리고….”
“저는 아버지께서 씹다 뱉은 사과를 먹을 생각 없습니다. 그 사과가 썩었을 때는 더더욱 그렇죠.”
리처드가 인상을 찌푸렸다.
“필리프 왕은 너와 아델이 결혼하길 요구했다. 그건 바꿀 수 없는 계약이었어.”
“당신이 아델을 품에 안기 전까진 그랬지요.”
엘레오노르가 말했다.
“난 리처드를 유럽의 조롱거리로 만들 생각 없어요, 헨리.”
“필리프가 가만히 있진 않겠군.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 어쩔 수 없겠지.”
헨리 2세가 중얼거리며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곳 잉글랜드의 통치권은 내 아들인 헨리에게 넘기도록 하지. 캔터베리에서 고해성사를 받은 이후엔….”
그가 말했다.
“모든 걸 내려놓고 십자군 원정을 준비하겠네. 자네와 함께 떠나도록 하지.”
“예?”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십자군 뭐라고?
“뭐라고요, 헨리?”
엘레오노르와 리처드도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늙은 왕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공자 자네가 원한 게 이거 아니었나?”
그와 난 당황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이건 좀 의외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