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King of Crusaders RAW novel - Chapter (138)
십자군의 왕이 되었다-138화(138/215)
방패와 창 (3)
* * *
“왜 내게 미리 말해주지 않은 거요?”
리처드가 날 노려봤다.
씨익씨익거리는 숨소리.
“내가 물었을 때 귀띔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않았소?”
“제가 공작을 속이려 그런 건 아닙니다.”
내가 웃으며 말했다.
리처드도 깜짝 놀랐겠지.
갑자기 내가 그런 폭탄 발언을 했으니.
‘필리프가 십자군 원정을 떠나지 않으면 리처드도 떠나지 않는다!’
리처드가 그 자리에서 화를 안 터뜨린 게 다행이었다.
“제가 미리 알려드렸다면 공작께선 놀라지 않으셨을 겁니다. 필리프도 분명 의심했겠죠.”
적을 속이려면 아군부터 속여야 하는 법.
리처드가 십자군 원정을 떠난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었다.
그것 자체가 필리프가 원하는 상황이고.
가만히 두면 프랑스만 이익을 얻는 셈이었다.
‘난 그걸 카드로 바꾼 것뿐이고.’
어제 내 발언으로 판은 뒤집혔다.
이제 리처드를 떠나게 하려면 필리프 본인도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
리처드 턱을 만지작거렸다.
생각에 잠긴 표정.
“공자 그대 말이 틀리진 않았겠지. 필리프도 분명 내가 아키텐에 남는 걸 바라진 않을 테니.”
그가 날 바라봤다.
“하지만 필리프가 원정을 포기하면 그땐 어떻게 할 거요? 그렇게 되면 공자와 예루살렘에도 큰 손해일 텐데?”
“필리프는 분명 공작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 겁니다.”
“그것도 예언이오?”
“그렇다고 해두죠.”
내가 웃으며 답했다.
적어도 원래 역사에선 그랬거든.
원 역사에서 리처드와 필리프는 함께 3차 십자군 원정을 떠났다.
필리프는 싸우는 시늉만 하다 다시 프랑스로 돌아오긴 했지만.
‘자기가 리처드와 1대1로 싸우긴 힘들다는 걸 알겠지.’
리처드는 이미 수십 년간 아키텐을 통치하며 자신의 실력을 증명했다.
내전을 진압하며 쌓은 어마어마한 내공까지.
“어제 천막에서 나온 말들은 지금쯤 부대 전체에 퍼졌을 겁니다.”
내가 말했다.
“그리고 마상시합이 끝나면 유럽 전체에 퍼지겠죠. 아무리 필리프라고 해도 무시할 수 없을 겁니다.”
심지어 십자군 원정에 떠나겠다고 스스로 맹세까지 했으니.
귀족과 백성들의 압박도 무시할 수 없었다.
원 역사처럼 리처드와 함께 간 이후에, 병이나 다른 핑계를 대서 도망치려 하겠지.
‘물론 내가 그렇게 둘 생각은 없지만.’
미리 막을 방법을 세워두면 그만이었다.
미래를 알고 있으니 여러모로 편하긴 하군.
“일단 공자 그대의 말을 믿는 수밖에. 이제 와서 뭐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리처드가 한숨을 내쉬었다.
“일이 어떻게 되든 난 예루살렘으로 갈 거요. 필리프가 망설이면 멱살이라도 끌고 가야겠지.”
난 그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리처드에 헨리 2세, 필리프.
거기에 이탈리아에서 모인 자원병과 기사들까지.
이 정도면 내 유럽 원정은 대성공에 가까웠다.
‘원 역사의 3차 십자군을 몇 년이나 앞당긴 건가.’
하지만 떠나기 전에 정리해야 할 게 하나 남아 있었다.
브르타뉴의 제프리.
“‘잡초’ 처리는 어떻게 됐습니까?”
“그 부분은 형님께서 도맡아서 처리하실 거요.”
리처드가 어깨를 으쓱였다.
“형님도 이제 왕이시니 알아서 하시겠지.”
“….”
난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제프리를 처벌하는 건 젊은 헨리나 리처드가 맡아야 했다.
난 어디까지나 외부인.
카인과 아벨의 일에 끼어들 순 없었다.
헨리 2세랑 엘레오노르도 이런 상황을 예상했을까?
생각에 빠진 그때 리처드가 말했다.
“공자의 말은 어디까지가 계시이고 거짓인지 모르겠구려.”
그가 계속해서 말했다.
“그대는 기적을 이용해 이익을 얻었소. 유럽에 새로운 십자군 열기를 일으켰지.”
그가 덧붙였다.
“하지만 그 어떤 사기꾼도 혜성과 지진을 예언할 순 없는 법. 군대를 자기 수족처럼 움직이는 것도 마찬가지요.”
“….”
“난 어제 공자가 부대를 지휘하는 모습을 봤소. 적 진형이 흔들리기 직전에 정확히 찔러 공격하더군. 마치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말이오.”
“하지만 공작님과 비교하면 아직 부족합니다.”
내가 웃으며 답했다.
육감.
이제 전장을 파악하는 건 익숙했다.
병사들의 감정과 사기.
정신을 집중하면 전선의 어디가 취약하고 단단한지 알 수 있었다.
붕괴할 듯 말듯 흔들리는 곳에 병력을 집중시키기.
그게 내가 가장 애용하는 전술이었다.
‘다른 자들처럼 시야나 전령에 의지해 전장을 파악해야 했다면….’
아마 지금보다 몇 배는 더 힘들었겠지.
“솔직히 말하면 그대가 진짜 성인인지 아닌지는 상관없소. 공자 그대는 변화를 일으키는 사람이지. 그것보다 더 재밌는 게 뭐가 있겠소?”
“전 뭔가를 성취하려는 사람에 불과합니다.”
내가 말했다.
난 성경이나 전설에 나오는 성자, 성인이 아니었다.
내겐 식욕과 성욕, 그리고 살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애초에 기독교나 다른 걸 믿는 것도 아니고.’
예루살렘을 지킨다.
위그가 목숨까지 바치며 지키려 했던 곳.
에이그, 가니에르, 테오도라와 수만 명의 사람이 사는 곳.
난 그곳을 지키고 싶었다.
기독교와 이슬람의 싸움 따윈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다.
“장애물이 앞을 막으면 치워버리고요.”
“역시 그대는 다른 성직자들보다 솔직하군. 내가 자주 하는 말이지만….”
놀란 표정을 지은 리처드가 웃음을 터뜨렸다.
“난 사제와 수도사들을 믿지 않소. 그들은 항상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게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기보다 어렵다 하지.”
그가 계속해서 말했다.
“하지만 정작 본인들은 그 누구보다 탐욕스럽게 돈을 끌어모으지 않소? 교회를 위해서다, 신도를 위해서다 말이야 잘 하지만….”
그가 덧붙였다.
“결국엔 남들보다 더 큰 교회를 지으려고 안달이지. 그대는 자기가 성자가 아니라 하면서 실제론 성자처럼 행동하지. 보통 성직자들은 그 반대인데 말이오.”
“….”
난 머리를 긁적였다.
극도로 위선적이면 그게 선이 될 수도 있는 건가?
“난 자기 욕망에 솔직한 사람이 좋소.”
“그럼 지금부터라도 반대로 행동해야겠군요.”
“그러기엔 이미 늦었소. 사람들은 누군가가 악마나 천사라고 생각하면 그자가 뭘 하던 자기 생각대로 해석하지.”
리처드가 껄껄 웃었다.
“공자 그대는 자기 함정에 스스로 빠진 거요. 자, 자잘한 얘기는 그만하고 같이 아버지나 보러 갑시다. 원정과 관련해 논의할 것들이 있소.”
난 그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 * *
“폐하, 절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그, 그래. 자네와 이렇게 마, 만나는 건 처음인 것 같군.”
젊은 헨리가 말했다.
천막 안에는 그와 로브를 쓴 사내 둘뿐이었다.
호위 기사와 경비병들도 보이지 않았다.
천막 밖에서 기사와 종자들이 토너먼트를 준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젊은 헨리는 의자에 기댄 채 맞은편 사내를 바라봤다.
검은 로브에 흉터 자국이 가득한 얼굴.
‘국왕의 사냥개’.
왕궁에서 사내를 모르는 자는 없었다.
하지만 그의 진짜 이름을 아는 자 역시 아무도 없었다.
“자, 자네는 오랜 기간 내 아버지를 모셔왔지. 거의 이십 년이라 하던데, 맞나?”
“예, 그렇습니다. 제 인생의 대부분을 잉글랜드 왕실을 위해 바쳤지요.”
“내가 아, 아서왕의 십자가를 가지고 올 때 습격한 것도 자네 부하들 아니었나?”
“….”
“다시 한번 묻지. 날 습격한 건 자네 부하들 아니었나?”
“전 헨리 2세 폐하의 명을 수행했을 뿐입니다. 또한 폐하께서 다치시는 일이 없도록 만전을 기해….”
“왜 자꾸 말을 비, 빙빙 돌리나? 그냥 맞다 하면 되는 것을.”
젊은 헨리가 말했다.
“자, 자네에게 책임을 물을 생각은 없네. 화살이 사슴을 죽였다 해서 화살을 탓할 순 없는 법.”
“….”
사내가 고개를 푹 숙였다.
“자넨 아직 내 아버지를 섬기나? 아니면 날 서, 섬기나?”
“전 잉글랜드 왕실을 섬깁니다, 폐하. 어떤 분께서 왕좌에 오르신들 제 충성은 바뀌지 않습니다.”
“그리고 지금 왕좌에는 내, 내가 앉아 있지. 만약 리처드나 제프리가 아, 앉았어도 마찬가지라는 건가?”
“….”
젊은 헨리가 피식 웃었다.
“대, 대답할 필요 없네. 이미 답은 아, 알고 있으니.”
그가 물었다.
“내가 왜 오늘 자, 자네를 이렇게 불렀다고 생각하나?”
“독사를 잡으려 부르신 것 아니십니까?”
“도, 독사라. 자네 말도 트, 틀리진 않지.”
젊은 헨리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제, 제프리는 토너먼트가 끝나기도 전에 항구로 떠났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다, 당한 수모를 참지 못했지.”
“그리고 지금 라이 항구에 있지요. 이 시기엔 파도가 심해 아직 해협을 건너지 못했을 겁니다.”
로브를 쓴 사내가 말했다.
“미리 제 부하들을 항구에 보내놨습니다.”
“그, 그럼 자네도 예상했다는 거군?”
“전 오랜 세월 동안 헨리 2세 폐하를 모셔왔습니다. 그분의 주위엔 항상 적들이 많았지요.”
“그리고 이젠 내 적들이지.”
젊은 헨리가 말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결정을 내리는 건 어디까지나 폐하이십니다. 폐하께서 말씀하셨듯이 전 그저 화살에 불과합니다.”
“그 어떤 잡음도 나오지 않게 처리하게.”
젊은 헨리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내가 잉글랜드의 왕으로서 그대에게 내리는 첫 명령일세.”
“폐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제프리 공작님은 해협에서 자취를 감추실 겁니다.”
사내가 고개를 숙였다.
“바다에서 벌어진 일은 바다에 남는 법이지요.”
* * *
삼 일 뒤
잉글랜드 남부
라이 항구
“그래서 아직도 배를 구하지 못했다는 건가? 벌써 일주일째야! 일주일!”
제프리가 소리쳤다.
그가 자신의 귀족과 기사들을 향해 팔을 흔들었다.
그들 모두 제프리의 시선을 피했다.
“어디 입이 있으면 말을 해보게! 말을!”
“선장들 모두 파도가 높다며 출항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중년의 영주가 말했다.
“웃돈을 준다 약속해도 나서는 이가 없더군요. 아무래도 좀 더 기다리는 편이….”
“그럼 나보고 여기서 손가락이나 쪽쪽 빨고 있으라는 건가?!”
제프리가 인상을 찌푸렸다.
“곧 있으면 리처드랑 필리프가 내려올 걸세. 그리고 날 대놓고 비웃겠지.”
그가 외쳤다.
“자네들은 내가 그런 수모를 겪길 바라나?”
“무, 물론 아닙니다, 공작님. 시간을 좀만 더 주신다면 선박을 꼭 구하겠습니다.”
“나서는 자가 없으면 징발이라도 하게.”
“하지만 그랬다간 헨리 폐하께서 결코 용서하시지….”
“어떤 방법을 쓰던 배를 구하는 게 좋을 거야. 자네들을 위해서라도.”
제프리가 손을 흔들자 모두 천막 밖으로 나갔다.
홀로 남은 제프리는 의자에 털썩 앉았다.
탁자 위에 놓인 앨릭서는 거의 비어있었다.
‘필리프 그 녀석도 마지막에 날 배신했지.’
그가 술잔을 채우며 중얼거렸다.
토너먼트 때의 기억이 그의 머릿속에 슬글슬금 떠올랐다.
말을 타고 모든 걸 쳐부수며 돌진해오던 보두앵 공자의 모습.
그런 활약을 펼친 건 윌리엄 마셜 이후 보두앵이 처음이었다.
거기에 포로로 잡혀 질질 끌려갔던 수모까지.
제프리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지금 아키텐, 노르망디는 텅텅 비어있지.’
리처드랑 필리프가 돌아가려면 몇 주는 걸릴 터였다.
둘이 없는 지금이야말로 절호의 기회였다.
영지를 늘리고 주변 영주들을 회유할 기회.
그러기 위해선 지금 당장 해협을 건너야 했다.
‘배를 징발하는 게 유일한 선택지인가.’
하지만 그랬다간 젊은 헨리가 그의 꿍꿍이를 알아챌 터였다.
지금은 어떻게든 의도를 숨겨야 했다.
제프리가 술잔을 기울이던 그때 기사대장이 천막을 열고 들어왔다.
그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공작님! 배를 띄우겠다는 선장이 한 명 나타났습니다!”
“주님께서도 날 완전히 버리시진 않으셨군.”
제프리가 씨익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럼 당장 출항 준비를 하라고 전해라. 준비가 끝나는 대로 해협을 건넌다.”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공작님.”
기사대장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배가 한 척뿐인지라 기사들이 다 탈 수가 없습니다. 거기에 배를 호위할 선단도….”
“군대는 천천히 넘어와도 상관없다.”
제프리가 손을 흔들었다.
“중요한 건 내가 해협을 건너는 거야. 거기에 이곳에서 해적질을 벌일 간 큰 놈들은 없지.”
그가 말했다.
“그럼 우선 나와 영주들 먼저 해협을 건너겠다. 가서 명령을 전해라.”
“알겠습니다, 공작님.”
기사대장이 경례한 후 다시 천막 밖으로 나갔다.
천막 밖 바다를 바라보며 제프리는 입맛을 다셨다.
‘아직 다 끝난 건 아니야, 보두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