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King of Crusaders RAW novel - Chapter (152)
십자군의 왕이 되었다-152화(152/215)
< 152화 – 예루살렘의 왕 (2) >
“발리앙 경. 설마 진심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거요?”
살라딘이 말했다. 그는 맞은편에 선 사내를 관찰하듯 응시했다.
프랑크 기사들 특유의 네모난 투구에 사슬갑옷 차림.
발리앙은 적진 한가운데서도 태연한 표정이었다.
“포로들이 탈출하기 전까지 다미에타에 가지 말아 달라니.”
살라딘이 코웃음 쳤다.
“아무리 그리스도인들이 술을 자유로이 마신다지만 이건 좀 심한 것 같구려.”
“제가 만약 술에 취했다면 술탄께 이런 부탁을 드리고 있지도 않았을 겁니다.”
“하긴 그대가 진정 취했다면 검부터 빼고 달려들었겠지, 안 그렇소?”
살라딘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발리앙은 여전히 무덤덤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럼 어디 한 번 이유나 들어봅시다. 왜 내가 프랑크인 포로들이 도망치게 내버려 둬야 한단 거요?”
살라딘이 뒤에 서 있는 조카, 타키 앗딘과 시선을 교환했다.
“그건 당신들에게만 좋은 일 같소만? 차라리 정식으로 포로 교환 협상을 하는 건 어떻겠소?”
살라딘이 물었다.
“지금 당장 다미에타에서 함대를 물리고 포로들에게 저항을 멈추라고 한다면 나도 응할 생각이 있소.”
“그건 불가능합니다. 술탄께서도 그 정도는 아시겠지요.”
“그렇다면 내가 다미에타로 가서 직접 그대들 함대를 몰아내고 포로들의 목을 베는 수밖에. 경께서도 그 정도는 아시겠지.”
살라딘이 어깨를 으쓱였다.
“우리 이슬람은 그대들처럼 몸값을 못 내는 포로들을 무참히 학살하진 않소. 하지만 반란에 동참한 거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
발리앙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씀드리죠. 제 제안을 받아들이신다면 술탄께서도 이익을 얻으실 겁니다.”
“정확히 어떤 이익을 말하는 거요?”
“카이로에서 적지 않은 금은보화들이 유출됐다는 소식은 들으셨을 겁니다.”
“···.”
살라딘이 입을 다문 채 발리앙을 노려봤다. 짧은 침묵이 천막에 흘렀다.
“난 아무 확인도 해주지 않겠소. 하지만 그게 사실이라고 해봅시다.”
“숙부님!”
“네가 나설 일이 아니다.”
살라딘이 손을 뻗어 보였다.
“그게 지금 포로들을 풀어달라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요?”
“아사신들은 재물들을 나눈 뒤 캐러밴들을 통해 레반트 남부를 지나고 있습니다. 아마 자신들의 본거지인 마시아프로 가져가려는 속셈이겠지요.”
“재밌는 사실이로군. 그리고 내게 그걸 알려주는 이유는···.”
“보물을 실은 캐러밴들의 위치를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럼 술탄을 따르는 바다위 부족들을 통해 회수하실 수 있겠죠.”
“···.”
“포로들의 몸값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처음엔 기병들을 끌고 와서 날 막으려 하더니 이젠 가만히 있는 대가로 카이로에서 훔쳐간 보물들을 돌려주겠다라. 재밌는 제안이시구려. 그 점은 내 인정해주겠소.”
살라딘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가 탁자 위의 잔을 집어 들었다.
“하지만 그건 도둑이 자기가 훔쳐간 돈으로 보상해주겠다는 거나 마찬가지 아니오?”
“그걸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발리앙이 말했다.
“하지만 전 이곳에 옳고 그름을 따지기 위해 온 것이 아닙니다. 이미 그 돈은 아사신들 수중에 있습니다.”
“하긴 우리가 옳고 그름만을 따졌다면 애초에 정치란 존재하지 않았을 터.”
살라딘이 턱의 수염을 만지작거렸다. 그는 다른 손으로 잔을 톡톡 두드렸다.
“보두앵의 허락 없이 그대가 그런 제안을 하진 않겠지. 좋소, 내가 그대의 제안을 받아들인다고 해봅시다.”
살라딘이 말했다. 그는 얼굴을 잔뜩 찌푸린 조카를 바라보며 빙긋 미소 지었다.
“내가 바다위 부족들에게 서신을 보내려면 최소 며칠은 걸릴 거요. 그대들이 위치를 알려준다 해도 그들을 붙잡을 거란 보장은 없지. 애초에 그대가 날 속이려는 속셈일 수도 있고.”
살라딘이 말했다.
“그 사이 포로들이 다미에타에서 탈출한다면 나만 눈먼 당나귀 신세가 되는 것 아니겠소?”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건지 저도 이해합니다.”
발리앙이 말했다.
“만약 술탄께서 제안을 승낙하신다면 저와 제 기사들이 볼모로 이곳에 남을 겁니다.”
“포로들을 대신해 볼모가 되겠다라. 그만큼 보두앵을 믿는다는 거요?”
살라딘이 물었다.
“아마 어린 보두앵이 세운 계획이겠지. 병든 예루살렘 왕이라면 이런 위험을 감수하지 않을 테니.”
“왕은 행동으로 모든 걸 말하는 법입니다.”
“···.”
살라딘이 잔을 들어 들이켰다.
그가 말했다.
“알았소, 곧 답을 줄 테니 잠시 편하게 기다리시오. 부하들에게 귀빈으로 모시라 말해놨소.”
발리앙이 천막을 나가자 타키 앗딘이 곧장 입을 열었다.
“이건 프랑크놈들의 술수가 분명합니다, 숙부님. 지금 당장 다미에타로 진격해야 하시지요.”
“그럼 도망친 포로들은 붙잡을 수 있겠지. 하지만 카이로의 금화는 잃게 될 거다. 발리앙이 한 말은 진심이었어.”
살라딘이 말했다.
“그자는 스스로 볼모를 자청했다.”
“하지만 포로들이 이대로 도망친다면 이집트의 민심이 들고 일어설 겁니다.”
“과연 그럴까?”
“예?”
“이집트는 지난 몇 년간 프랑크인들의 침공으로부터 자유로웠다. 상인들은 베네치아의 금화를 받고 시민들도 지하드는 레반트의 일이라 생각하고 있지.”
살라딘이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라. 다미에타 부두까지 프랑크 함대가 들이닥친 지금, 놈들이 친구라고 주장할 자는 없을 거다.”
“포로들이 도망치도록 냅두는 게 더 이익이라 하시는 겁니까?”
“놈들이 다미에타를 점령하려 했다면 이미 전투가 시작됐을 거다.”
살라딘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놈들은 부두만 겨우 점령했어. 그렇다는 건 포로들을 구출하려 급조한 함대라는 거다.”
그가 덧붙였다.
“놈들이 포로들을 싣고 떠날 때쯤 우리가 다미에타에 입성하면 어떻게 되겠느냐?”
“그러면 다미에타 시민들 모두 숙부께서 함대를 몰아내셨다 생각하겠군요.”
“바로 그거야. 알 아딜에게는 안 된 이야기지만 모든 비난은 그 녀석에게 향할 거다.”
살라딘이 조카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무래도 이집트는 당분간 네가 다시 맡아줘야겠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이집트를 지켜내겠습니다.”
“목숨까지 바칠 필요는 없다. 상황이 안 좋으면 얼마든지 도망쳐도 좋아. 나도 그런 적이 많으니.”
살라딘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표정이 다시 굳었다.
“보두앵. 그놈은 역시 쉽지 않은 상대야.”
“하지만 놈도 숙부님을 속이진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아사신들의 돈까지 뜯어가며 자신의 실수를 만회하려는 것 아니겠습니까?”
“모든 국가와 종교는 이야기 위에 만들어지는 법이다. 유대교, 기독교뿐만 아니라 이슬람까지 마찬가지지.”
살라딘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포로들을 구하기 위해 이 정도까지 대가를 치르려는 왕족은 흔치 않아. 보통은 그 반대 아니더냐? 자신의 몸값을 내기 위해 세금을 쥐어짜는 이들이 대부분이니.”
그가 계속해서 말했다.
“예루살렘이 포로들을 구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는 게 알려지면 더 많은 프랑크 전사들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울 거다.”
“어쩌면 놈이 노린 것도···.”
“그런 점일 수 있겠지. 기나 르노 같은 자들은 예측하기 쉽다. 놈들은 자신의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돼지나 마찬가지야. 하지만 자기보다 더 큰 무언가···.”
그가 중얼거렸다.
“대의를 위해 싸우는 자들은 결코 쉬운 상대가 아니다. 우리 무슬림이 그동안 프랑크인들에게 진 것도 바로 그 때문이야.”
“···.”
“기와 보두앵의 내전에 개입하지 못한 시점에서 이미 우린 함정에 빠진 거나 마찬가지다.”
살라딘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라도 만회를 해야겠지.”
* * *
“역시 살라딘은 쉬운 상대가 아니군요.”
난 눈을 비볐다. 며칠 동안 잠을 제대로 못 자서 그런지 눈꺼풀이 자꾸 감겼다.
결국 살라딘은 행군을 멈췄다.
지금쯤이면 구출된 포로들도 다미에타 항을 떠났겠지.
돌고 돌아서 문제를 해결하긴 했군. 싸움이 아닌 협상으로.
살라딘은 카이로에서 빠져나갔던 금화들을 되찾고, 난 포로들을 돌려받는다.
살라딘의 돈으로 포로 몸값을 낸 셈이었다.
‘여기까지만 보면 손해는 없는 것 같지만···.’
포로들을 성채에서 구하기 위해 이집트에 있던 첩자들을 총동원해야 했다.
스파이들은 드러나지 않을 때가 가장 강한 법.
이제 살라딘은 우리 첩보망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눈치챘을 터였다.
거기에 콘스탄티노플의 명을 따르는 동로마 첩자들까지.
‘그래도 포로들 몸값이라 생각하면 충분히 싸.’
생각에 빠져있던 그때 테오도라가 말했다.
“아마 살라딘도 당신이랑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거예요. 결국엔 포로들을 구해냈잖아요.”
“살라딘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협상이었죠.”
내가 웃으며 말했다. 만약 다른 이슬람 지도자였다면 내 제안을 무시했을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살라딘은 자신이 얻을 이익을 알아차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발리앙은 혈혈단신으로 살라딘을 진영을 찾아가 담판을 벌였다.
“협상을 성사시킨 것도 발리앙 경이었고요.”
“만약 당신이 나서지 않았다면 그 포로들은 모두 처형당했을 거예요. 누비아 흑인들과 함께 나란히 무릎 꿇고 죽었겠죠.”
테오도라가 내 팔을 붙잡았다.
“당신은 기뻐할 자격이 있어요.”
“가니에르가 내게 이렇게 말하더군요.”
난 가니에르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왜 진작 포로들을 구하지 않았느냐는 내 물음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기사단원들에게 있어 사라센에게 포로로 붙잡히는 건 불명예스러운 일입니다. 돌아온 후에도 겁쟁이라 낙인 찍히는 일이 많고요. 그건 병사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니에르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이미 귀족들 사이에선 불평이 나오고 있습니다. 사라센에게 항복한 겁쟁이들을 구하는데 너무 큰 대가를 치른다고 말입니다.’
내 얘기를 전해들은 테오도라가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 겁쟁이에 왕이나 영주는 포함되지 않는다는 건가요?”
“왕이나 영주라면···.”
“지금까지 사라센에게 붙잡혔다가 몸값을 내고 풀려난 영주와 왕이 얼마나 많았나요? 그리고 고위 기사단원들은요?”
“그것도 그렇군요. 고귀한 핏줄에는 다른 규칙이 적용되죠.”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십자군 역사에서 영주와 왕이 포로가 되는 일은 흔했다.
당장 레몽 백작과 르노. 이전의 다른 예루살렘 왕들도 마찬가지.
적지 않은 이들이 몸값을 내고 풀려났다.
그중 몇몇은 사라센과 앞으로 싸우지 않겠단 맹세까지 했지.
‘물론 사라센과 한 맹세는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나중에 말을 바꿨지만.’
높은 사람들은 포로가 되어도 아무 문제 없는데 정작 전장에서 싸우는 기사와 병사들에겐 불명예스러운 일이라니.
“용감히 싸웠다면 포로가 되는 걸 부끄러워할 이유는 없겠죠. 누군가에게 잘못이 있다면 그건 전략을 잘못 세운 지휘관이고요.”
난 자리에 앉아 생각에 빠졌다.
예루살렘 왕국은 징병 가능한 인구수가 그리 많지 않았다.
로마 가톨릭뿐만 아니라 정교회 신자들까지 포함한다 해도 이슬람 세력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편.
그렇다면 있는 사람들이라도 잘 대우해줘야 했다.
‘모두를 위한 하나, 하나를 위한 모두.’
이걸 100% 완벽히 실천하는 건 불가능하겠지. 하지만 적어도 그런 인식을 심어줄 필요는 있었다.
이번 사건은 그런 인식을 만들 기회가 될 수 있겠지.
“그럼 이렇게 된 거 한번 돈 쓸 계획을 세워보죠.”
“갑자기 돈 쓸 계획이라니요?”
“큰 대가를 치르고 포로들을 구해냈으니, 뽑아낼 수 있는 건 뽑아내야죠.”
내가 웃으며 말했다.
다행히 벤치마킹할 곳들은 차고 넘쳤다.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등등.
보훈처를 비롯해 군인들에게 원호를 제공하는 나라는 많지.
난 의자에서 일어서며 머리를 흔들었다.
‘아무래도 한국 보훈처는 빼는 게 낫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