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King of Crusaders RAW novel - Chapter (155)
십자군의 왕이 되었다-155화(155/215)
< 155화 – 예루살렘의 왕 (5) >
성묘교회
숨 막힐 듯한 분위기 속에서 난 발걸음을 옮겼다. 사방에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늘 사이로 먹구름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여기 이렇게 오는 건 결혼식 이후로 두 번째인가.’
그때와는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양옆으로 도열한 기사와 병사들을 지나며 난 교회 안쪽으로 들어갔다.
중앙회랑은 사람들로 빽빽했다.
힐끗 뒤를 돌아보자 테오도라가 보였다.
그녀는 평소와 달리 순백의 달마티카 차림이었다. 소매가 길고 폭이 넓은 전례 의상.
내 옷은 그녀와 비슷했지만 위에 금색 장식이 촘촘히 박혀 있었다. 통로를 지나자 성가가 울려 퍼졌다.
중앙에 선 헤라클리우스 총대주교와 그 옆의 보두앵 4세. 그는 서지도 못한 채 반쯤 누워있었다.
나는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대관식 자체는 그리 복잡하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건 총대주교에게 받는 도유 의식.
신성한 기름부음을 받는 순간 난 왕이 된다.
제단에 놓인 두 왕관.
나와 테오도라는 총대주교 앞에 멈춰 섰다.
“우리를 여러분과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세게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어 주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선 우리에게 인장을 찍으시고 우리 마음 안에 성령을 보증으로 주셨습니다.”
총대주교가 말했다. 그는 손가락에 기름을 찍은 뒤 내 팔목과 이마에 십자가 모양으로 발랐다.
“그대는 예루살렘의 국왕으로서 백성들을 지키고, 왕국의 헌장과 법, 기독교 교회를 지키기 위해 싸울 것을 맹세하는가?”
“맹세합니다.”
발리앙에게 금반지와 보주, 홀을 건네받은 난 무릎을 꿇었다.
헤라클리우스 총대주교가 왕관을 들었다. 차가운 감촉이 머리 위에 느껴졌다.
“그렇다면 일어나시지요, 국왕 폐하.”
나와 테오도라는 함께 일어서서 통로의 인파를 바라봤다.
“국왕이여 영원하소서!”
“국왕이여 영원하소서!”
함성이 울려 퍼졌다. 기쁨, 두려움, 경외감, 공포, 희망, 절망. 온갖 감정들이 물밀듯 밀려들었다.
난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앞을 바라봤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 순간 모든 게 멈췄다. 귀를 뒤흔들던 소음도, 몸을 뒤흔들던 감정들도 사라졌다.
“···뭐야?”
난 주변을 둘러봤다. 모든 게 멈춰 있었다.
시간이 멈춘 건가?
아니면 드디어 내가 정신이 나갔나 보군.
“안타깝지만 그건 아니야.”
난 소리가 들리는 곳을 바라봤다. 까마귀.
검은 깃털의 까마귀 한 마리가 중앙회랑의 창문에 앉아 있었다.
처음 느끼는 감각.
인간, 동물이 아닌 뭔가 기묘한 감각이 느껴졌다. 그건 까마귀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까마귀가 아니었다.
“넌 뭐지?”
“내가 누구냐고?”
까마귀가 까악까악 소리를 내며 창문에서 내려왔다. 울음소리는 마치 날 비웃는 것처럼 들렸다.
“굳이 말하자면 널 이곳에 부른 사람이라고 해두자고. 뭐 사람은 아니지만.”
“···.”
기묘한 감각만이 느껴졌다. 갑자기 멈춰선 세계와 말하는 까마귀까지.
이 모든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 모가지를 잡아 비틀기 전에 제대로 대답하는 게 좋을 거야.”
난 녀석을 노려봤다.
“넌 도대체 뭐야?”
“글쎄.”
까마귀가 내 앞에 서며 다시 웃는 소리를 냈다.
“일단 신이라고 해둘까?”
* * *
“물론 너희들이 말하는 신하고는 좀 다르겠지만.”
“···.”
“지금까지 네가 게임 세계에 우연히 떨어졌다고 생각했어? 아니면 이 모든 게 그냥 한여름 밤의 꿈이라든가?”
까마귀가 말했다.
“아쉽게도 그건 아니거든. 이 시간대에 적합한 사람은 너밖에 없었어. 그래서 우린 널 고른 거고.”
“날 골랐다니?”
“정해진 운명을 바꾸는 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
녀석이 당연하다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난 그동안 널 아주 가까운 곳에서 바라봤어. 이 세계에 떨어진 후에도 한시도 빠짐없이 쭈욱 관찰했지.”
“그럼 왜 이제야 나타난 거지?”
난 까마귀를 노려봤다. 정말 이딴 놈이 신이라고?
날 이 세계에 집어 던진 놈이?
“왜 지금 모습을 드러낸 거야?”
“난 너에게 제안을 하러 왔어. 아주 간단한 제안이지.”
녀석이 말했다.
“너도 눈치챘겠지만 네가 지금 가진 육체는 그리 오래 버틸 수 없어. 허약한 것도 문제지만 육감도 있지.”
까마귀가 휘파람 소리를 냈다.
“그게 얼마나 대단한 능력인지는 아는 거야? 인류 역사에서 그걸 가진 사람은··· 너 말고 없었을 걸?”
“그것 참 영광이군.”
“하지만 육감은 그만큼 강한 능력이야. 쓰면 쓸수록 몸을 갉아 먹지. 고통도 그만큼 더 커지고.”
“···.”
“수명도 더 짧아질 수밖에 없어.”
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녀석의 말이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육감을 쓰면 쓸수록 몸은 더 힘들어졌다. 하지만 수명이 깎인다는 건···.
“예루살렘이 어떻게 되든 넌 고통 속에서 죽게 될 거야.”
“그래서? 네 제안은 뭐지?”
“네가 원래 살던 세계로 돌아가게 해줄게. 21세기 대한민국으로.”
까마귀가 말했다.
까악― 소리가 고요한 중앙회랑에 울려 퍼졌다.
“덤으로 사관학교에서 쫓겨난 것도 없었던 일로 해줄 수 있어. 그럼 넌 원래 인생으로 돌아가겠지. 보두앵이 아니라 네 인생으로.”
“그 대가는 뭐지?”
“대가는···.”
짧은 침묵이 흘렀다.
“대가는 없어. 넌 그냥 그걸 원하기만 하면 돼. ”
“아무 대가 없이 날 원래 세계로 보내주겠다고?”
“그래, 그리고 넌 여기서 고통스러운 삶을 살지 않아도 되겠지. 십자군과 이슬람의 싸움도, 허약해지는 몸도. 전부 다 한 여름밤 꿈이 되는 거야.”
“그럼 여기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거지?”
내가 물었다.
“내가 떠나면 이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거야?”
“그게 무슨 상관이 있겠어? 어차피 수백 년 전에 다 끝난 일이 될 텐데.”
까마귀가 고개를 뒤로 젖히고 까악― 웃었다.
“애초에 넌 기독교 신자도 아니잖아. 유럽인이나 중동인도 아니지. 이 사람들은 처음부터 너랑 아무 상관 없었다고.”
“···.”
난 주변을 둘러봤다. 이유는 콕 짚어 말할 수 없었지만, 까마귀의 말은 진심처럼 들렸다.
한마디.
제안을 승낙하겠다는 말 한마디면 21세기로 돌아갈 수 있었다.
‘사관학교로 돌아가서 다시 내 인생을 살 수 있어.’
내가 원하는 건···.
내가 원하는 건 뭘까?
내가 정말로 원하는 건···.
“나쁘지 않은 제안이지만 이제 와서 그러기엔 너무 늦었어.”
난 까마귀를 바라보며 웃었다.
“난 끝을 볼 거야. 그게 어떤 결말이든 간에.”
“뭐라고?”
까마귀가 웃음을 멈췄다. 녀석이 정색하듯 꼬리를 흔들었다.
“넌 네가 원해서 이곳에 온 게 아니야! 난 너에게 원래 세계로 돌아갈 기회를 준 거라고!”
까악 소리가 이어졌다.
“미리 말하지만 이 기회는 오직 한 번, 지금밖에 없어. 앞으로 영영 없을 거라고. 설령 예루살렘을 지킨다 한들 돌아가지 못하면···.”
“상관없어.”
난 녀석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 시대에 떨어지고 처음으로 속 시원한 기분이 들었다.
“네가 뭐라고 하든 난 이제 예루살렘의 왕이야. 왕이 왕국을 버리고 도망칠 순 없지.”
내가 웃으며 덧붙였다.
“그리고 난 지금 결혼한 몸이거든.”
“그만큼 권력이 좋다는 건가? 어?! 권력욕만 많은 멍청한 원숭이 놈들 같으니라고.”
까마귀가 몸을 흔들자 사방으로 검은 깃털이 흩날렸다.
“그럼 이건 어때? 네가 원래 세계로 돌아가도 권력을 누릴 수 있게 해주지. 높디높은 권세에 예쁜 암컷들도 얻을 수 있을 거야.”
녀석이 테오도라 앞에 서며 말했다.
“만약 이 암컷이 마음에 든 거라면 그대로 줄게. 그것도 네가 원하는 성격으로.”
“뭔가 착각한 것 같은데···. 여왕한테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되지.”
고개를 돌리자 수많은 이들이 보였다.
테오도라와 보두앵 4세, 시빌라, 레몽, 발리앙과 수많은 귀족, 영주, 기사와 병사들.
이들이 다가 아니었다.
날 위해 싸우고 죽었던 이들도 있었지.
[예루살렘 왕국을 지킨다]이건 내가 스스로 내린 선택이었다.
“난 이들의 왕이야. 이 이상 뭘 원할 수 있겠어?”
“더 안락한 삶은? 편안한 죽음은? 제트기를 타고 누릴 수 있는 재벌의 삶은? 이것들은 어때?”
“난 이미 네 제안을 거부했어, 까마귀.”
내가 말했다. 난 녀석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만약 네가 나한테 강제할 수 있었다면 이렇게 나랑 말싸움하고 있지도 않았겠지. 그러니 신이든 뭐든 간에 이만 꺼져.”
“···.”
까마귀가 입을 다문 채 총총 발걸음을 옮겼다.
“이건 좀 의외인데. 이건 좀 의외야. 너 같은 선택을 한 놈은 처음이거든.”
침묵이 흐르고 까마귀가 다시 입을 벌렸다.
“아무래도 넌 좀 더 살아있을 필요가 있겠어. 그래, 너무 일찍 죽어버리면 싱겁겠지. 예루살렘의 운명이 정해지고 네가 비참해질 때까지···.”
녀석이 말했다.
“네가 허약함으로 죽을 일은 없을 거야. 육감을 쓸 때 몸에 부담이 가지도 않을 거야. 이러면 허무하게 죽진 않겠지.”
“선물이 크군.”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기왕 그러는 거 수명도 늘려주지, 그래?”
“난 널 도와주려는 게 아니야.”
까마귀가 앞에 서더니 날 올려다봤다.
“그저 네가 어떻게 끝날지 궁금한 것뿐이지. 절망에 차서 울먹이는 모습을 보고 싶어.”
난 손을 뻗어 녀석을 붙잡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내 손아귀에서 빠져나간 녀석이 까악까악 소리 질렀다.
“난 네게 선택지를 줬어. 그리고 넌 그걸 거절했고. 네가 다시 날 볼 일은 없을 거야.”
“그것참 다행이군.”
우리 둘은 서로를 노려봤다. 이내 녀석이 다시 말했다.
“기왕 온 김에 목숨이나 하나 미리 거둬가야겠네. 그럼 안녕, 예루살렘의 왕.”
난 놈이 날개를 퍼덕거리며 날아가는 모습을 바라봤다. 다시 감정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세계가 다시 움직였다.
* * *
“보두앵? 보두앵?”
테오도라가 내 몸을 흔들며 물었다. 걱정과 공포, 두려움.
그녀가 내 손을 붙잡았다.
“괜찮아요, 보두앵?”
“난 괜찮아요, 그냥 현기증이 좀···.”
내 주변엔 걱정스러운 표정을 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정신을 차린 난 주변을 둘러봤다.
내게 말 걸던 까마귀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정말 있었던 일인가?’
내가 본 건 어쩌면 환각일지도 몰랐다. 대관식이라는 압박감에 생긴 환상.
“보두앵 5세 국왕 폐하 만세!”
“국왕이여 영원하소서!”
함성이 계속 울려 퍼졌다. 난 테오도라와 시선을 나눴다. 그녀가 안심했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이 갑자기 쓰러지는 줄 알았어요.”
“대관식 날에 그럴 순 없죠.”
내가 웃으며 말했다. 어쨌든 난 지금 이곳에 있었다. 예루살렘의 왕으로서.
그것만이 중요했다.
“국왕이여 영원하소서!”
이제 성묘교회 밖으로 나가 말을 타고 성전 산으로 갈 차례였다.
난 모두의 환호를 받으며 통로를 지나쳤다.
뒤에선 발리앙이 보두앵 4세를 부축하고 있었다. 난 뭔가 이상하단 걸 눈치챘다.
불규칙한 심장박동. 희미한 호흡.
‘기왕 온 김에 목숨이나 미리 거둬가야겠네.’
까마귀는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목숨. 누구의 목숨을 거둬간다는 걸까?
“폐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사람들의 시선이 내 뒤로 향했다.
난 고개를 돌렸다.
보두앵 4세가 땅에 널브러진 채 쓰러져 있었다. 발리앙이 팔을 흔들며 소리쳤다.
“폐하께서 쓰러지셨다!”
“어서 의사를 불러와라!”
“······난 괜찮다. 보두앵. 보두앵은 어디 있느냐?”
보두앵 4세가 희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호흡은 흔들거리는 촛불처럼 금방이라도 꺼질 것만 같았다.
난 그에게 달려갔다.
“여기 있습니다, 폐하.”
“넌 테오도라와 함께 성전 산으로 가야 한다. 가서 남은 대관식을 끝마치거라.”
“하지만···.”
“이건 내가 왕으로서 네게 내리는 마지막 명령이야. 내 말대로 하거라.”
그가 숨을 몰아쉬었다.
“고맙다, 보두앵. 네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안심하고 죽지 못했을 거다.”
“···.”
“자, 이제 어서 가거라.”
시빌라가 그에게 다가와 무릎 꿇었다. 몸을 일으킨 나는 고개를 돌려 성묘교회 밖으로 걸어나갔다.
가랑비가 내리며 예루살렘을 적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