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King of Crusaders RAW novel - Chapter (157)
십자군의 왕이 되었다-157화(157/215)
< 157화 – 성부와 성자와 성령 (2) >
예루살렘 정궁
“이쪽에 서명하시면 됩니다, 폐하. 그리고 이쪽에도···.”
난 눈앞의 서류들을 노려봤다. 몇 시간째 종이만 바라보니 눈이 사막에 온 것처럼 건조했다.
보두앵 4세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며 난 곧장 국정 업무에 내몰렸다.
“서류 작업은 끝이 없군요.”
“그리고 폐하께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발리앙이 헛기침하며 말했다.
“왕은 자신의 왕국에서 그 누구보다 고귀하고 존귀한 자입니다. 말투와 행동에서도 그것이 느껴져야 하는 법이지요.”
“그 말은···.”
왕 신분에 걸맞게 말하라는 거군.
하긴 지금까지도 내 말투를 듣고 놀란 사람이 많긴 했지.
난 목을 가다듬은 뒤 답했다.
“알겠네, 발리앙 경.”
“폐하뿐만 아니라 왕국의 위신이 달린 일입니다.”
발리앙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왕이 된다는 게 쉽진 않군.”
각종 세입, 귀족들의 알력 다툼, 군대, 외교, 교회에 이르기까지. 검토해야 할 것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보두앵 4세는 병든 몸으로 이런 업무들을 처리했다는 건가.
난 뻐근해진 팔을 바라봤다. 육감을 써도 이전만큼 힘이 들진 않았다.
대관식 날 까마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네가 당장 허약함으로 죽을 일은 없을 거야.’
정말 그 건방진 까마귀가 신이었을까? 신이라기보단 사악한 정령 같은 느낌이었는데.
‘만약 내가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보두앵 4세도 아직 살아있었을까?’
어차피 고민해도 답은 알 수 없었다. 난 펜을 내려놓고 발리앙을 바라봤다.
“장례식 준비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나?”
“이미 기본적인 준비는 다 끝났습니다. 아, 그리고 말씀드릴 게 하나 있습니다만···.”
그가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 건넸다. 인쇄기로 찍어낸 듯한 그림.
중앙에는 말을 탄 사내가 보였다.
“구호기사단에서 자체적으로 찍었다더군요. 보두앵 4세 선왕 폐하의 그림입니다.”
발리앙이 말했다.
“이미 교회와 길거리 곳곳에 퍼졌습니다.”
“내가 승인한 거네. 그사이 많이 퍼졌나 보군.”
내가 종이를 받아들며 말했다. 구호기사단에서 보두앵 4세를 추모하는 그림을 인쇄하고 싶다고 요청한 건 불과 며칠 전 일.
이렇게 빨리 인기를 얻을 줄은 몰랐는데.
“역시 폐하께서 주도하신 거였군요. 처음 인쇄기에 대해 들었을 때만 해도 재밌는 장난감 같았습니다만···.”
발리앙이 머리를 긁적였다.
“백성들의 민심까지 움직일 정도라니. 왜 폐하께서 기사단에만 사용을 허락하셨는지 알겠습니다.”
“그만큼 강력한 물건이지.”
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시대에 티비나 라디오 같은 미디어 매체는 당연히 없었다.
그림은 글을 모르는 이들도 이해할 수 있는 간단하면서도 강력한 프로파간다 수단이었다.
하지만 보두앵 4세의 죽음까지 이렇게 이용하는 게 옳은 일일까?
‘아마 국익을 위해서라면 신경 쓰지 않았겠지만···.’
난 탁자를 두드렸다. 왕의 죽음을 추모하는 그림이 잘못된 건 아니겠지.
왕국의 단합에도 도움이 되는 일이니.
“아예 유럽 쪽에 그림들을 보내도 되겠군.”
“유럽에 그림을 보낸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 그림들 말일세. 거기에 음유시인들의 이야기까지 합치면···.”
내가 중얼거렸다. 지금 유럽은 십자군 열풍이 한창이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가 만들어낸 유행.
내가 다시 예루살렘으로 왔으니 분위기도 어느 정도 가라앉았겠지. 적절한 이야기만 있으면 그 불씨를 되살릴 수 있었다.
죽는 순간까지 왕국을 지키기 위해 싸운 나병왕. 이것보다 더 가슴 뜨겁게 하는 이야기가 어디 있을까?
“유럽 기사 중에 롤랑의 노래를 모르는 자는 없지 않나.”
카롤루스 대제를 따르던 기사, 롤랑이 이슬람 대군에 맞서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다는 무훈시.
물론 실제 역사와는 차이가 있었지만, 유럽인들은 이 이야기를 진실로 받아들였다.
아서왕 전설도 마찬가지.
‘보두앵 4세도 충분히 그렇게 될 수 있겠지.’
롤랑의 노래처럼 거짓을 지어낼 필요도 없었다. 실제 있었던 일만으로도 감동을 자아내기엔 충분했다.
내 말을 들은 발리앙이 고개를 끄덕였다.
“보두앵 4세 폐하보다 더 큰 희생을 하신 분은 없으실 겁니다.”
“···.”
“겸사겸사 공의회도 진행하면 되겠군. 공의회 준비도 경에게 맡기겠네.”
“공의회라면···지금이 가장 적절한 시기이긴 하겠군요. 3차 십자군 시작 전에 해결해야 하니 말입니다.”
“이탈리아 도시들, 잉글랜드, 프랑스, 동방 로마, 거기에 아비시니아(에티오피아) 왕국들까지 있지. 공의회가 없이는 협력도 안 될 걸세.”
내가 웃으며 말했다. 로마 가톨릭, 동방 정교회에 에티오피아와 이집트의 콥트 정교회까지.
진정한 기독교 드림팀인가.
공의회는 기독교 사제와 신학자들이 모여 교리와 규범에 대해 논의하는 이벤트였다.
1차 십자군이 결성된 것도 1095년의 클레르몽 공의회.
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로마 가톨릭뿐만이 아닌 모든 기독교 종파들이 모이는 대大 공의회였다.
“하지만 사공이 많을수록 항로를 정하기 어려운 법이죠. 만약 타협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발리앙이 말했다.
“오히려 상황이 더 안 좋아질 수 있습니다. 콘스탄티노플, 로마, 아비시니아 모두 폐하께서 자기들 편을 들어줄 거라 생각할 겁니다.”
“그럼 그렇게 생각하게 놔두게.”
난 길게 기지개를 켰다. 내 도움을 기대한다는 건 반대로 내게 의지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공의회에 다들 오긴 하겠군.
지금까지 유럽과 동로마에 뿌려둔 씨앗을 거둘 때였다.
“예루살렘에 오면 좋든 싫든 결정을 내려야 할 테니.”
대통합이냐, 아니면 대분열이냐.
세계의 바퀴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 * *
동방 로마
콘스탄티노플
“이미 예루살렘에 축하사절단을 보내지 않으셨나요? 근데 이번에 또 사절들을 보내신다고요?”
아녜스 황후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그녀는 자신의 남편, 알렉시오스 2세를 바라봤다.
“보두앵 공자. 아니, 보두앵 왕은 보편 공의회를 요청했어.”
알렉시오스 2세가 말했다. 그는 시종들의 도움을 받아 제의를 걸쳤다.
“거의 삼백 년 만에 열리는 보편 공의회지. 우리가 어떻게 해서든 주도권을 잡아야 해.”
“그래서 3차 십자군에 합류하겠다고 발표하신 건가요?”
아녜스가 몸을 가리며 일어섰다. 그녀가 알렉시오스의 팔을 붙잡으며 물었다.
“저번 원정이 끝난 지도 얼마 되지 않았잖아요. 너무 노골적으로 예루살렘의 편을 들면···.”
그녀가 말했다.
“시민들의 반발을 살 수도 있어요.”
“난 단순히 보두앵을 도와주려는 게 아니야. 예루살렘은 제국을 사라센으로부터 막아주는 방패 같은 존재지.”
알렉시오스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가 미소 지으며 아내를 바라봤다.
“정확히 말하자면 십자군에 ‘합류’하려는 게 아니라 십자군을 이끌기 위해 가는 거야. 예루살렘이 살아남아야 제국도 안전해질 수 있어. 그리고 서방 교회와 동방 교회가 다시 합쳐진다면···.”
그가 중얼거렸다.
“어쩌면 다시 서방으로 힘을 뻗어 나갈 계기가 될지도 모르겠지. 프랑스의 당신 가족들이 반기지는 않겠지만.”
“난 이미 로마 제국의 황후예요, 알렉시오스.”
그렇게 말한 아녜스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아직 한창 성장 중인 작은 손.
“그리고 황후는 황후의 의무를 다해야죠.”
“지금 당장 떠나지는 않을 거야, 아녜스. 내가 공의회에 직접 참가할 필요는 없으니.”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우선 공의회가 잘 마무리되길 바라자고.”
“보두앵은 폐하의 편을 들어줄 거예요.”
아녜스가 웃으며 말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폐하께서 예루살렘을 수호할 테니까요.”
* * *
아키텐 남부
“그, 그대는 예루살렘의 수호를 위해 싸울 것을 주님의 앞에서 맹세하는가?”
“맹세합니다.”
리처드가 무릎을 꿇으며 답했다.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기사와 병사들이 검과 창을 들었다.
“그, 그렇다면 그대에게 이 서, 성검을 맡기겠다. 잉글랜드 왕실의 명예와 영광은 이, 이제 그대에게 달렸다. 아키텐 공작, 리처드여.”
“제 영광이 곧 폐하와 잉글랜드 왕실의 영광이 될 것입니다.”
리처드가 검을 받으며 일어섰다.
젊은 헨리와 그가 포옹을 나누자 사람들의 환호성이 쏟아졌다.
리처드의 뒤에서 한 기사가 일어섰다. 젊은 헨리가 그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윌리엄 마셜 경. 경은 날 대신해 십자가의 맹세를 수행할 의무를 졌네. 부디 나와 왕국을 자랑스럽게 해주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폐하.”
“잉글랜드 만세! 헨리 국왕 폐하 만세!”
환호가 이어졌다. 젊은 헨리는 리처드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주, 준비는 잘 되어가고 있는지 궁금하구나.”
“우선은 아버지께서 먼저 떠나실 겁니다. 지금 당장 다 떠나기엔 배가 부족하다더군요.”
리처드가 심드렁한 어조로 말했다.
“그다음엔 프랑스 서쪽을 빙 돌아서 키프로스까지 갈 겁니다. 주님께서 원하신다면 무사히 도착할 수 있겠죠.”
“네, 네가 없는 동안 아키텐은 걱정할 필요 없다. 나와 로, 로마 교회가 직접 지켜줄 테니.”
“하지만 필리프가 프랑스를 떠나지 않는다면 소용없을 겁니다.”
리처드가 답했다.
“지금도 가지 않으려고 온갖 핑계를 지어내고 있지 않습니까?”
“피, 필리프도 결국엔 떠날 수밖에 없을 거다. 하지만 분위기가 바뀐다면···.”
“이미 보두앵에게 편지를 보내놓긴 했습니다. 그자라면 뭔가 방법을 생각해낼지도 모르겠죠.”
리처드가 어깨를 으쓱였다.
“이번에 예루살렘의 왕좌에 올랐다더군요.”
“나도 드, 들었다.”
젊은 헨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잔뜩 흥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예루살렘의 왕이라니. 그보다 더 신성하고 고귀한 의무는 없겠지.”
“제가 형님이었다면 잉글랜드로 만족했을 겁니다.”
리처드가 웃으며 말했다.
“예루살렘의 왕. 장담컨대 그 자리는 지옥의 돼지우리를 관리하는 것보다 힘들 겁니다.”
* * *
‘보두앵 5세가 공의회를 요청했다!’
예루살렘 왕국이 공의회를 요청했다는 이야기는 순식간에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프랑스, 잉글랜드, 이탈리아와 히스파니아(스페인)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기독교인이 공의회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중엔 독일인들도 포함됐다.
“내겐 일언반구도 없이 그리스(동로마) 황제와 공의회를 열겠다니! 로마 교회가 드디어 정신이 나갔군!”
프리드리히 황제가 숨을 씨익씨익 내뱉으며 소리쳤다.
“이건 우리 제국을 노골적으로 무시한 것 아니더냐!”
“이번 공의회는 사실상 보두앵 왕이 주도하고 있습니다. 황제 폐하께서 먼저 그자에게 서신을···.”
“그놈에게 먼저 허리를 굽히란 얘기냐?! 날 유럽인들이 보는 앞에서 모욕하고 굴욕을 줬던···.”
“양보. 폐하께선 유럽의 평화를 위해 양보하신 거죠.”
베아트리스 황후가 말했다.
“지금은 예루살렘과 싸울 때가 아니에요. 하인리히 공작이 북부에서 점점 더 큰 힘을 얻고 있으니···.”
“그 가증스러운 놈을 지원한 게 바로 보두앵이오! 그 멍청한 성도권인지 뭔지 하는 종이쪼가리로 제국 신민들을 현혹하고 있으니.”
“폐, 폐하. 마침 성도권과 관련해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재정관리관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날이 갈수록 성도권을 쓰는 마을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만약 이대로 간다면···.”
“이대로 간다면 뭐?”
“만약 기사단들이 성도권을 현금으로 바꿔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재정관리관이 계속해서 말했다.
“얼마 전 예루살렘 왕실은 기사단들을 전부 왕실 직속으로 통합했습니다. 만약 보두앵 왕이 독일 지부 기사단들에게 명령만 내린다면···.”
“성도권은 아무 가치가 없는 쓰레기가 되겠군.”
“그, 그렇습니다.”
“감히 내 제국에 이런 독을 풀어놓다니.”
프리드리히 황제가 수염을 잡아 뜯으며 중얼거렸다.
“보두앵 그놈은 이걸 노리고 하인리히를 도운 거야. 성도권을 만든 것도 성도 수호가 아니라 나와 제국을 공격하기 위해···.”
그의 이마에 주름이 깊게 패였다.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이후로 그의 주름은 나날이 더 늘어나기만 했다.
“그날 이후로 제대로 잠을 잘 수가 없소. 그 저주받을 날 이후로.”
베아트리스 황후가 손을 뻗어 그를 쓰다듬었다.
“우선 교황 사절단에 맞춰 공의회에 제국 대표를 파견하시죠, 폐하.”
“그래, 우선 그렇게 해야겠지.”
붉은 수염 황제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예루살렘에 뭔가를 주긴 해야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