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King of Crusaders RAW novel - Chapter (164)
십자군의 왕이 되었다-164화(164/215)
< 164화 – 신성한 도시 (4) >
“이렇게 우리가 얼굴을 맞대는 건 처음인 것 같소만, 르노 영주.”
살라딘이 맞은편에 무릎 꿇은 사내를 바라보며 물었다. 사내가 일어서려 하자 쿠르드 병사들이 그의 다리를 창으로 내리쳤다.
“부하들까지 전장에 버리고 혼자 도망치려 하다니. 부끄럽지도 않소?”
“그러는 너도 몽기사르 전투 때 혼자 살려고 허겁지겁 도망치지 않았나?”
르노가 땅에 침을 뱉으며 답했다.
“내 듣기론 경주용 낙타까지 뺏어 타서 도망쳤다던데. 그건 벌써 까먹었나 보지?”
“이 자식이 어디 감히 술탄의 앞에서···.”
“됐다.”
살라딘이 손을 뻗어 흥분한 부하들을 말렸다. 그가 르노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목이 말라 보이는구려. 뭣들 하느냐. 영주께 물을 좀 가져다주거라.”
“하지만···.”
“물을 가져다주라 했다.”
잔을 건네받은 르노가 코웃음 쳤다.
“사라센들이 이렇게 예의범절이 있을 줄은 몰랐군. 아니면 뭔가 수작이라도 부리려는 건가?”
“걱정하지 말고 마시시오. 독을 타지는 않았으니.”
“독이 든 걸 걱정한 게 아니야. 더러운 사라센 손이 닿은 걸 마시기 싫은 것뿐이지.”
“술탄이시여! 지금 당장 이놈의 목을 베시지요!”
“이 건방진 녀석이 어디 감히···!”
흥분한 장교들이 삿대질하며 소리쳤다. 르노는 그들을 바라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대만큼 무슬림들의 화를 돋우는 사람은 없을 거요, 르노 영주.”
살라딘이 다시 손을 들며 말했다. 천막에는 정적만이 흘렀다.
“그대는 지금까지 수십 번이 넘게 평화협정을 어겼소. 수백 수천이 넘는 무고한 무슬림 백성들의 피를 그 더러운 손에 묻혔지.”
살라딘이 말했다.
“그런 그대가 그 물이 더럽다고 할 자격이 있다 생각하시오?”
“너희들의 그 잘난 무함마드인지 뭔지 하는 작자도 메카를 오가는 상단들을 습격하지 않았나?”
르노가 잔을 들이켜며 말했다.
“그놈도 무고한 상인들을 습격해서 물건을 빼앗고 몸값을 받아냈지. 난 그거랑 똑같은 일을 했을 뿐이야.”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근데 왜 나만 나쁜 놈이 된다는 건가?”
“우리의 예언자께서 가주(약탈 전쟁)를 벌이신 건 어디까지나 메카의 우상숭배를 뿌리 뽑기 위해서였소. 그대처럼 사리사욕을 챙기기 위한 게 아니었지.”
살라딘이 말했다.
“예언자께선 가주를 통해 얻은 전리품을 움마(공동체) 유지에 쓰셨소. 마지막 순간엔 그 누구보다 빈곤하게 떠나셨지.”
“그래서 아내들에게 그렇게 많은 유산을 남기고 간 건가?”
르노가 껄껄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그의 말이 이어질수록 천막 안 장교들의 표정이 붉게 변했다.
“포장이야 누구나 그럴듯하게 할 수 있지. 하지만 개똥을 비단으로 감싼다고 똥 냄새가 없어지는 건 아니거든.”
그가 말했다.
“난 너희들의 감옥에서 15년을 보냈지. 네놈들의 더럽고 구역질 나는 거짓말을 15년 동안 들었다고.”
“예언자이신 무함마드께서는···.”
살라딘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대가 그렇게 함부로 말할 분이 아니오. 그리고 그분께선 그대처럼 몸값을 내지 못한 자들을 무참히 학살하진 않으셨소. 케락의 영주, 르노여.”
“너도 우리 왕이랑 똑같군. 그럴듯한 말만 잔뜩 늘어놓고 말이야.”
르노가 말했다.
“정작 자기는 나서는 법이 없지.”
“난 내가 주님의 계시를 받았다는 거짓말을 하진 않았소.”
살라딘이 웃으며 답했다. 그가 고개를 돌려 천막 밖으로 나갔다.
“이곳에서 푹 쉬고 계시오, 르노 영주. 곧 머지않아 떠날 때가 올 테니.”
“내가 너희들을 무서워할 줄 알아?! 어디 한번 해보라고! 애미들이랑 오입질이나 할 줄 아는 이 사라센 놈들이 어디 감히···!”
르노의 함성이 천막 안에서 울려 퍼졌다. 몇몇 장교들이 인상을 찌푸렸지만, 살라딘은 차분한 표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르노의 목소리가 희미해졌다.
“비역질하고 이단 짓을 벌이는 돼지 같은 협잡꾼 새끼들아···!”
살라딘의 동생, 알 아딜이 걱정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 저놈을 당장 죽이지 않으실 겁니까, 형님?”
그가 물었다.
“형님께선 저자를 직접 처형할 거라 공개적으로 약속하셨습니다. 만약 처형이 미뤄진다면 다들 불만을 품을 겁니다. 저 돼지 놈의 손에 가족을 잃은 병사와 장수들이 적지 않습니다.”
“걱정할 필요 없다. 난 내가 한 맹세를 지킬 테니.”
살라딘이 말했다.
“놈은 신성한 메카를 더럽혔어. 지금까지 시아파 놈들이 메카를 공격한 적은 많았지만, 십자가 우상 숭배자들이 쳐들어온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가 덧붙였다.
“그만큼 확실한 본보기로 삼아야겠지. 마니 계곡에서 목을 칠 테니 준비해놓도록 해라.”
그가 알 아딜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 우선 옷을 벗긴 뒤에 당나귀 뒤에 태워라. 그렇게 메카를 한 바퀴 돌게 하면···.”
“메카 시민들도 만족하겠군요.”
“그리고 알 쿠드스(예루살렘)까지 그 이야기가 퍼져나가겠지. 지금 당장 돼지 목을 딸 필요는 없다. 어차피 르노는 우리 손안에 있어.”
살라딘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래바람이 그의 몸을 스치며 지나갔다.
“보두앵이 어떻게 나올지 한번 지켜보자고. 르노를 구하려 하지 않는다면 왕국의 영웅을 버린 게 될 테고···.”
살라딘이 덧붙였다.
“르노를 구하려 나선다면 자기가 무능하다는 것만 보여줄 테니.”
* * *
메카를 침공한 르노가 잡혔다는 소식은 얼마 지나지 않아 레반트 전체를 뒤흔들었다.
이슬람이 다스리는 도시에선 기쁨에 찬 환호성과 함성이 오고 갔다.
“무슬림과 신앙의 수호자인 살라딘 만세!”
“다미에타와 메카의 수호자여! 당신보다 더 큰 업적을 이룬 영웅은 이제껏 없었습니다!”
살라딘을 찬양하는 시가 곳곳에서 낭송됐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는 채 며칠이 지나지 않아 깨졌다.
다마스쿠스를 비롯한 대도시 곳곳에 이런 내용의 종이가 퍼진 것이다.
‘술탄 살라딘은 몸값을 받고 르노를 풀어주기로 프랑크인들과 협상 중이다!’
수십 수백 장이 넘는 종이들이 거리와 골목 곳곳을 가득 채웠다. 사람들은 벽에 붙은 종이를 바라보며 수군거렸다.
시간이 흐르면서 소문은 어느새 진실처럼 받아들여졌다.
“정말 술탄께서 르노를 풀어주시려 한다는 건가?”
“아니,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케락의 미친개를 풀어준다니!”
르노에게 습격을 당했던 상단들은 노골적으로 불만을 제기했다. 이들은 에미르(제후)를 찾아가 진실 여부를 따졌다.
심지어 몇몇은 자신들이 대신 몸값을 낼 테니 르노를 죽여달라는 청까지 올릴 정도였다.
“도대체 누가 이런 소문을 퍼뜨린 것이냐!”
“당장 그 종이들을 모두 불태우고 유포한 자들을 붙잡아라!”
각 도시의 에미르들이 대응에 나섰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돈을 받고 거리에 종이를 뿌린 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들이었다.
몇몇 도시에선 아이들에게 태형을 집행하려다 이에 반발하는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이 모든 게 고작 2주도 안 되는 사이에 벌어졌다.
“아직 확인된 정보가 없으니 기다리도록 하시오! 르노에 대한 처형은 곧 집행될 거요!”
“확인된 정보가 없다니! 그렇다는 건 소문이 사실이라는 거 아닌가!”
이와 정반대로 예루살렘에서는 르노를 찬양하는 음유시와 그림들이 이어졌다.
그는 어느새 왕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영웅이 되어있었다.
매일 밤 르노 영주를 위해 기도를 올리는 신도들도 적지 않았다. 그런 정반대의 분위기 속에서, 레반트의 시간은 조금씩 흘러갔다.
* * *
예루살렘
“현재까지 파악한 사라센의 신호탑들은 이 정도입니다.”
발리앙이 서류 더미를 탁자 위에 올려놨다. 보는 것만으로 위압감이 느껴지는 양.
“정찰병과 첩보를 기준으로 만든 자료라 아직 부족한 부분들이 많습니다.”
“생각보다 많긴 하군. 간격도 촘촘하고.”
난 서류들을 한장 한장 넘기며 살폈다. 살라딘은 지난 몇 년간 날 따라서 신호탑 체계를 구축해놨다.
‘하지만 망원경이 없으니 신호탑 사이의 거리가 좁을 수밖에 없지.’
비효율적인 건 기본에 운용하는데 돈도 많이 들어가겠군.
“경은 이 신호탑들을 이용하자는 건가?”
“예, 제가 파악한 바에 따르면 사라센 상인들도 이 신호탑을 자주 쓰고 있습니다.”
“상인들이 신호탑을 쓴다니?”
“캐러밴(대상단)이 출발하기 전에 다른 시장의 시세나 상황을 미리 살핀다고 하더군요.”
발리앙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칙적으론 그런 사적인 사용이 금지되어 있지만, 뒷돈만 건네면 어떤 서신이든 보낼 수 있죠.”
“그렇다면 다른 정보들도 오고 가겠군.”
난 탁자를 두드렸다. 예루살렘 왕국의 신호탑들은 성묘수호단과 기사단의 엄격한 관리를 받았다.
애초에 신호탑을 운용하는 자들도 모두 단원들. 허가받지 않은 사적인 이용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하지만 살라딘 쪽은 다르지.’
우리가 파악한 정보에 따르면 살라딘은 신호탑들을 다 사비로 지은 게 아니라 일부를 각 도시의 태수들에게 맡겼다.
그만큼 통신 관리도 주먹구구식으로 될 수밖에 없었다.
“역시 아랍인답다고 해야 할까···.”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아랍 상인들이 이런 신호탑을 안 쓸 리가 없지.
상인들에게 정보는 곧 돈이나 마찬가지. 애초에 이슬람의 예언자인 무함마드도 원래는 사업하던 양반이었으니.
“자네가 하려는 말이 뭔지는 나도 잘 알겠네.”
난 발리앙을 바라봤다. 정보가 줄줄 새는 통신 체계.
이걸 이용해서 여론을 흔드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다.
“신호탑을 이용해 거짓 정보들을 보내면 도시들 모두 혼란에 빠지겠지.”
“그리고 살라딘도 르노의 처형을 서두를 수밖에 없을 겁니다. 이미 신호탑에 심어둔 첩자들이 몇 명 있으니 충분히 가능합니다.”
“···.”
발리앙의 말이 옳았다. 어찌 보면 돈도 안 드는 가장 쉬운 방법이고.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이 카드를 지금 쓰면 나중에는 쓸 수 없게 되네. 굳이 지금 손패를 보일 필요는 없겠지.”
내가 말했다.
“살라딘이 신호탑에 문제가 있다는 걸 깨닫고 개선한다면, 그 후에는 우리가 손대기 힘들어질 걸세.”
이런 중요한 카드는 적절한 순간에만 사용해야 했다.
‘대영제국의 처칠도 그랬지.’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군은 독일의 암호 체계를 뚫는 데 성공한다.
그들은 독일 공군이 코번트리 도시를 공습할 거라는 정보를 파악했지만, 암호 해독 사실을 숨기기 위해 대피령을 늦췄다.
정보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 도시 하나를 희생한 것이다.
“그렇다면 폐하의 뜻대로 하시지요.”
발리앙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소문은 퍼질 대로 퍼졌으니 굳이 더 손을 쓰지 않아도 될 겁니다.”
“살라딘은 결국 르노를 처형할 수밖에 없을 걸세. 이미 분위기는 기울었어.”
내가 웃으며 말했다. 아무리 살라딘이라 해도 21세기에서 온 미디어 전쟁은 상상 못 했겠지.
프로파간다와 인쇄기의 결합은 확실히 강력했다.
“아예 기사단 내부에 따로 조직을 만들어도 되겠군.”
“조직이라면···.”
“인쇄기와 여론전만 담당하는 특수 조직 말일세.”
난 창문 밖 도시를 바라봤다. 시민과 상인, 사제와 기사들로 가득 찬 거리가 보였다.
“기사단은 이곳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에 퍼져 있지. 이들보다 여론을 움직이는데 적합한 자들이 어디 있겠나?”
이미 레반트의 사람들은 르노의 ‘과장된’ 원정 이야기를 듣고 감동에 빠졌다. 거기에 내가 퍼뜨린 보두앵 4세의 일대기까지.
유럽 전역에 이런 분위기를 퍼뜨리면 더 많은 지원이 이곳 예루살렘으로 오겠지.
성도 예루살렘의 상황을 전하는 정기 간행물은 어떨까?
난 고개를 돌려 발리앙을 응시했다.
“그리고 놈들 신호탑에 더 많은 첩자를 침투시키게.”
내가 말했다. 적의 통신을 손에 쥐고 있으면 언제든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곧 그들을 써야 할 때가 올 걸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