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King of Crusaders RAW novel - Chapter (170)
십자군의 왕이 되었다-170화(170/215)
< 170화 – 막간극 (5) >
키프로스
“이 망할 놈의 뱃멀미는 도저히 익숙해지질 않는군.”
헨리 2세가 비틀거리며 나무판자를 타고 내려왔다. 시종과 기사들이 그의 주변에 달라붙었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내가 배에서 내리다 떨어져 죽을 정도로 늙진 않았네.”
헨리 2세가 시종들의 손을 내치며 답했다. 병사들도 그 뒤를 이어 우르르 부두에 내렸다.
땅을 밟자마자 멀미로 비틀거리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이보게, 마셜. 자네는 멀미도 안 하는 것 같군.”
“하루 종일 말 위에서 살다 보면 멀미에도 금방 익숙해지는 법이지요.”
윌리엄 마셜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는 여느 때와 같이 사슬 갑옷을 걸치고 있었다.
그가 헨리 2세의 곁으로 다가가 부축했다.
“구원 한 번 받자고 이런 여정이라니. 정말 내가 예루살렘에 가면 구원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폐하께서 진정 구원을 바라시고, 예루살렘을 위해 싸우신다면 그리될 것입니다.”
“성서에선 주님께서 전지전능하시며 인간 역사의 모든 일을 그분께서 정하신다고 하지.”
헨리 2세가 코웃음 쳤다.
“그리고선 우리 인간에게 선행을 행할 자유가 있으며, 또 그렇게 해야 한다고 하지 않나? 난 구원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건가, 아니면 이미 지옥행이 정해져 있는 건가?”
“자유의지에 관한 토론은 사제들과 나누시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마셜이 웃으며 말했다.
“전 그저 주님의 뜻을 따를 뿐입니다. 적이 앞에 있으면 고민할 건 별로 없죠.”
“그래, 자네 말도 맞겠군.”
그때 말에 탄 기사들이 그들의 앞으로 다가왔다. 장창에 달린 깃발들이 허공에서 흔들렸다.
선두의 사내가 말에서 내려 헨리 2세에게 고개를 숙였다.
“잉글랜드 왕국의 헨리 2세 폐하를 뵙습니다. 전 로마 황실을 대신해 이곳 키프로스를 통치 중인 아르리다이오스라고 합니다.”
“키프로스는 예루살렘 왕국의 보두앵 왕이 다스린다고 알고 있소만.”
헨리 2세가 물었다.
“로마인들이 다시 통치하고 있는 거요?”
“예루살렘의 보두앵 국왕께선 로마 황실의 작위를 받으셨습니다. 또한 그분께선 테오도라 황녀님과 혼인하시어···.”
“보두앵 국왕이 로마 바실리우스(황제) 폐하의 아래라고 강조하는 것 같소만.”
마셜이 팔짱을 끼며 물었다.
그러자 아르리다이오스가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었습니다. 전 그저 로마와 예루살렘이 피를 나눈 혈맹이라는 것을 말씀드리려 했을 뿐입니다.”
“뭐, 그 부분을 놓고 우리가 말다툼할 이유는 없겠지.”
헨리 2세가 하품을 내쉬며 기지개를 쭉 켰다.
“보두앵 왕이 우리를 위해 미리 보급품을 준비해놨다고 들었소만. 우리도 노고를 풀어야 하니 좀 넉넉하게···.”
“소식을 아직 못 들으셨군요. 지금 예루살렘 왕국에선 한창 전투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아르리다이오스가 말했다. 그가 고개를 돌려 섬의 동쪽을 응시했다.
“술탄 살라딘이 이끄는 대부대가 아스칼론과 케락을 포위했습니다.”
“키프로스에 오자마자 참 즐거운 소식이군.”
헨리 2세가 인상을 찌푸렸다. 마셜 역시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당장 레반트로 가야겠군요. 최대한 빨리 보급을 마쳐야겠습니다.”
“보두앵 국왕께서도 미리 저희에게 준비를 맡기셨습니다.”
아르리다이오스가 말했다. 그가 손짓하자 인부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허락만 해주신다면 지금 바로 선적 작업을 시작하겠습니다.”
“아스칼론과 케락이라.”
헨리 2세가 중얼거렸다.
“우선 상황부터 제대로 파악해야겠군.”
* * *
예루살렘 동부
“일단 식량은 넉넉한 편이로군.”
“폐하께서 명하신 이후로 한 치의 차질도 없이 준비해왔습니다.”
“그래, 수고했네.”
난 고개를 끄덕이며 장부들을 한장 한장 넘겼다. 르노 대신 케락의 통치를 맡은 왕실 대리인은 중년의 사내였다.
몰락한 귀족 가문 출신의 행정관.
부정부패를 저지를 만한 인물은 아니었지만, 딱히 능력이 출중하다는 느낌도 안 들었다.
‘거기에 성내 분위기도 그리 좋지 않군. 직접 케락에 오지 않았으면 위험했겠어.’
공성전에서는 병사와 백성들의 사기가 거의 모든 걸 결정했다.
새로 온 지휘관이 믿음직스럽지 못하다면 사기도 한순간에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케락을 다스리던 르노는 메카 근처에서 처형당했으니.
‘우리 쪽 병력은 5천에 적 병력은 대략 4만.’
야전에서는 절대 맞붙지 않을 병력 차이. 공성전이라는 걸 감안해도 아슬아슬했다.
그나마 물자는 넉넉했다.
식량과 무기, 보급품은 10개월 이상 버틸 수 있는 양이었다.
‘살라딘도 일 년 내내 여기만 포위할 순 없겠지.’
대군은 행군하는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식량과 물자를 소모했다. 손자가 괜히 공성전을 하책이라고 한 게 아니었다.
에미르(제후)들이 무한정 돈이 들어가는 원정을 과연 용납할까?
“잠깐 나가보자고.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겠네.”
방 밖으로 나와 망루로 향했다. 기사단원과 병사들이 성벽 곳곳을 다니며 한창 전투를 준비했다.
가니에르 역시 한쪽에서 인부들을 지휘 중이었다. 날 발견한 그가 다가왔다.
“역시 케락은 천혜의 요새가 맞습니다, 폐하.”
그가 땀을 닦으며 말했다.
“삼면이 깊은 협곡으로 둘러싸인 데다 성벽에 다가오려면 우선 언덕을 올라야 하죠. 성벽에 닿기 전에 반은 나가떨어질 겁니다. 거기에 투석기도 이미 세 대가 설치됐습니다.”
“그리스의 불도 충분히 있지. 하지만 아직 방심할 순 없네.”
케락의 성벽은 견고했지만, 그렇다고 무적은 아니었다.
“동쪽은 비교적 접근하기가 쉽지. 그리고 땅굴을 파온다면 대응하기가 쉽지 않을 걸세.”
십자군과 백 년 가까이 싸우면서 이슬람 군대도 나름의 공성전 전략을 개발했다.
땅굴 파기도 그중 하나.
우선 성벽 아래까지 땅굴을 판 뒤, 땅굴을 지지하는 나무기둥에 불을 붙인다.
그러면 땅이 내려앉으며 성벽을 간단히 무너뜨릴 수 있었다.
‘거기에 망고넬 같은 투석기들도 있고.’
방심했다간 한순간에 성벽이 무너질 수 있었다.
“발리앙 경께서 최대한 빨리 아스칼론을 구원하고 돌아오시면 좋겠습니다만···.”
가니에르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도 쉽지 않겠죠.”
“내가 살라딘이었다면 타키 앗딘에게 최대한 시간을 끌라고 했을 걸세.”
난 고개를 끄덕였다.
레몽과 발리앙이 빨리 오는 것만 바라고 있을 순 없지.
“주변 주민들 대피는 어떻게 됐나?”
“지금 병사들을 풀어 주민들과 식량, 물자를 성안으로 이동시키고 있습니다.”
가니에르가 답했다.
“아마 오늘내일 중으로는 끝날 겁니다.”
“성안으로 가져올 수 없는 건 모두 불태우라 전하게. 살라딘에게 넘겨주느니 없애는 게 낫겠지.”
청야전술은 공성전의 기본.
“재산을 잃은 백성들에게는 따로 보상금을 주면 되겠지.”
“그걸 다 보상하려면 돈이 많이 들긴 할 겁니다만···.”
가니에르가 미소 지었다.
“시민들의 불만을 잠재울 수는 있겠군요.”
우리 둘은 함께 성벽에 서서 바깥을 바라봤다.
성벽 아래는 식량과 물을 나르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말과 낙타들이 요란한 울음소리를 내며 짐을 실어날랐다.
“폐하께선 살라딘이 얼마나 오랫동안 케락을 포위할 거로 생각하십니까?”
“글쎄.”
난 손에 들린 투구를 만지작거렸다. 이미 살라딘의 군대는 계속되는 습격으로 지쳐 있었다.
거기에 포위를 계속할수록 금전적인 손해도 커지겠지.
케락의 수비가 뚫리느냐,
아니면 살라딘이 먼저 지쳐 떨어지느냐.
“아무리 길어도 2, 3개월을 버티진 못할 걸세. 아스칼론도 그 전에 정리가 되겠지.”
보급 문제가 심해진다면 살라딘도 버티진 못할 터.
난 가니에르를 바라봤다.
“가니에르 자넨 토마스, 구호 기사단원들을 이끌고 아만으로 가게.”
“살라딘이 코앞에 있는데 아만으로 가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가니에르가 인상을 찌푸렸다.
“공성전에는 한 명이라도 더 많은 병사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전 겁쟁이처럼 도망칠···.”
“도망치라는 얘기가 아닐세. 그 정반대지.”
내가 웃으며 답했다.
“기병들을 이끌고 살라딘의 후방 보급망을 교란하게. 하지만 무리해서 칠 필요는 없어. 소 엉덩이에 붙은 모기처럼 신경 쓰이게 계속 공격하면 되네.”
“그럼 살라딘이 보급대에 더 많은 호위를 붙일 겁니다.”
“그만큼 포위전에 쓸 병력은 줄어들겠지.”
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한 번 케락을 떠나면 다시 돌아올 수 없습니다. 만약 무슨 일이 생긴다면···.”
“걱정할 필요 없네.”
난 망루 한쪽에 세워진 성십자가를 바라봤다.
내가 친정에 나선 이후 성십자가는 항상 날 따라다녔다.
“케락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지킬 테니.”
* * *
“어서 빨리 물을 실어라!”
낙타와 말들이 부들부들 다리를 떨며 움직였다. 병사들이 그사이를 뛰어다니며 물 자루들을 날랐다.
“케락 안에는 우물이 없다는 걸 명심해라! 물을 조금이라도 더 날라야 한다!”
캐러밴을 끌고 온 상인들은 보급관들에게 비싼 값에 식량과 물자를 팔았다.
몇몇 병사들은 그리스의 불이 담긴 도자기들을 조심스레 날랐다.
“거기 조심해! 죽고 싶은 거냐?!”
“살라딘에게 붙잡히기 싫으면 빨리빨리 움직여라!”
그때 한 병사가 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외쳤다.
“저기 좀 봐! 폐하께서···.”
고개를 든 병사들 모두 순간 몸을 멈칫했다.
예루살렘의 국왕, 보두앵이 투구를 벗으며 그들 사이로 달려왔다.
“폐하! 국왕 폐하이시다!”
그는 무릎을 꿇으려는 병사들을 향해 괜찮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다들 멈추지 말고 계속 작업하게! 날라야 할 물은 얼마나 남았나?”
그는 병사들 사이로 들어가 직접 물 자루를 날랐다. 호위 기사와 기사단원들 역시 검집을 풀은 뒤 물을 날랐다.
“폐하, 물은 저희가 나르겠습니다. 그러니 안으로 드시지요.”
“괜찮네, 카이사르도 한 걸 내가 못 하라는 법은 없지.”
멍하니 서 있던 병사들이 이내 하나둘 다시 물을 날랐다. 성안으로 대피했던 여인과 아이들도 작업에 동참했다.
“뭣들 하느냐! 폐하께서 직접 물을 나르신다!”
몇몇 병사들은 궁수들을 위해 성벽 앞 일정 거리마다 말뚝을 심었고, 투석기에 쓸 돌들을 날랐다.
대공사를 보는 듯한 광경이었다.
해가 진 후에도 수많은 이들이 횃불에 의지해 작업을 계속했다.
그렇게 이틀이 지난 후, 검은 물결이 케락을 뒤덮었다.
“사라센이다! 사라센들이 왔다!”
“모두 전투태세를 갖춰라! 종을 울려라!”
이슬람 대군이 사해와 요르단 계곡 쪽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살라딘을 나타내는 황색 깃발이 선두에서 흩날렸다.
말에 탄 정찰병들이 케락에 다가오며 소리쳤다.
“알라 후 아크바르!(알라께선 위대하시다)”
“하느님 외에 신은 없으며, 무함마드는 하느님의 사자이다!”
그들의 외침이 케락의 성벽을 따라 울려 퍼졌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쿵―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허공을 가른 돌덩이가 정찰병들의 앞에 떨어지며 굉음을 냈다.
놀란 정찰병들이 황급히 기수를 돌려 본대 쪽으로 도망쳤다.
이번엔 성벽에서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데우스 불트! 신께서 원하신다!”
케락 공성전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