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King of Crusaders RAW novel - Chapter (172)
십자군의 왕이 되었다-172화(172/215)
< 172화 – 케락 공성전 (2) >
“폐하! 폐하! 얼른 일어나셔야 합니다!”
“···무슨 일인데 그래?”
눈꺼풀이 접착제를 붙여놓은 것처럼 움직이질 않았다. 겨우 몸을 일으키자 흥분한 에이그의 얼굴이 보였다.
“놈들이 다시 공격해 온 거야?”
잠기운이 사라지면서 주변의 감정과 감각들이 몰려들었다. 긴장과 당혹감.
“그건 아닙니다만···.”
에이그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놈들이 사절단을 보내왔습니다.”
“사절단?”
난 에이그와 다른 시종들의 도움을 받아 갑옷을 걸쳤다.
“살라딘이 벌써 사절단을 보내올 줄은 몰랐는데.”
문밖으로 나오자 병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날 반겼다. 귀청이 떨어지겠군.
난 적당히 손을 흔들며 성벽 위로 올라갔다.
이미 병사들은 아래쪽 성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에이그가 손짓했다.
“저쪽입니다.”
성문 앞에는 짐을 실은 낙타 몇 마리가 서 있었다. 선두에는 말을 탄 사내.
익숙한 얼굴이었다.
“알 아딜이군.”
살라딘의 동생이자 에일라트에서 내게 붙잡혔던 인물. 그가 고개를 들더니 내 쪽을 바라봤다.
“폐하,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성문을 열어줘. 알 아딜 혼자 우리랑 싸우려고 온 건 아니겠지.”
그때 루아크가 다가왔다. 그도 방금 막 잠에서 깼는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가 도끼를 흔들며 말했다.
“혹시 모릅니다. 만약 사라센 놈들이 암살자를 보낸 거라면···.”
“알 아딜은 술탄의 동생일세. 아무리 술탄이라 해도 형제를 자살 임무에 보내진 않겠지.”
내가 웃으며 말했다. 그것도 나름대로 재미있을 것 같긴 한데.
난 에이그에게 망토를 가져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귀빈으로 대우하게. 함부로 검을 꺼내거나 무례를 범하는 자들은 용서하지 않겠네, 알겠나?”
“알겠습니다, 폐하.”
병사들이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곧이어 성문이 열리자 낙타들이 슬렁슬렁 안으로 들어왔다.
난 알 아딜을 빤히 바라봤다.
‘무슨 속셈으로 온 건지는 뻔하지.’
하지만 잠깐 놀이에 어울려줘도 나쁠 건 없었다.
* * *
“예루살렘의 보두앵 국왕을 뵙습니다.”
“케락에 온 걸 환영하오, 알 아딜 장군. 에일라트 이후에 두 번째로 만나는 것 같소만.”
“그렇습니다. 그땐 폐하께서 아직 왕이 아니셨지요.”
알 아딜이 태연한 어조로 답했다. 의외로 별로 화난 반응은 아니군.
그가 내게 감옥에서 했던 말이 아직도 선명했다.
‘그대들의 타락한 종교는 붕괴할 거요. 그때가 되면 우리 이슬람만이 참된 종교로서 남게 되겠지. 우리의 신앙이 모든 면에서 그대들의 것보다 우월하오.’
그때와는 분위기가 미묘하게 달랐다. 알 아딜도 시간이 지나면서 좀 더 성숙해진 건가?
“술탄께서 폐하를 위한 선물을 보내셨습니다. 성에 과일이 없을 거라고 걱정하시더군요.”
그가 창문 밖 낙타 떼를 가리켰다. 낙타들은 등에 가죽 주머니를 잔뜩 짊어지고 있었다.
저게 다 과일이라는 거군.
단순한 선물인가?
아니, 그보다는 과시용에 가깝겠지.
우리한테는 신선한 과일들이 이렇게 차고 넘칠 정도로 많으니 슬슬 항복해라 이런 건가.
하지만 고작 이 정도 수작에 넘어갈 정도로 케락의 보급 상황이 나쁘진 않았다.
오히려 넉넉하고도 남지.
알 아딜도 성안 상황을 염탐하러 왔을 터.
어디 마음껏 확인해보라고.
“술탄께선 배려심이 넘치시는구려. 부디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해주시오.”
내가 웃으며 말했다.
“케락을 둘러싼 군대를 물려준다면 더 감사할 거요.”
“술탄께선 더 이상 그리스도인과 무슬림의 피를 흘리기 원치 않으십니다.”
알 아딜이 말했다.
“술탄께서 제안하시는 건 간단합니다. 만약 지금 케락을 포기하고 떠나신다면 안전한 퇴각을 보장하겠습니다.”
그가 진지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백성과 기사, 병사들뿐만 아니라 폐하 역시 예루살렘으로 무사히 돌아가실 수 있을 겁니다.”
“···.”
난 대답 대신 턱을 만지작거렸다. 성만 포기하고 나가라는 건가.
살라딘이 거짓말을 할 인물은 아니었다.
아마 진심으로 하는 제안이겠지.
내가 물었다.
“술탄께선 날 잡으러 오신 줄 알았소만. 그냥 놓아주시겠다는 거요?”
“술탄께선 전쟁이 아닌 평화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지금 그 대가는 케락뿐입니다.”
알 아딜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공성전이 계속된다면 술탄께서도 병사들을 통제하실 수 없을 겁니다. 성이 함락되면 케락의 병사와 백성들 모두 죽임을 당하겠지요.”
“제안이 아니라 협박처럼 들리는 것 같소만.”
내가 웃으며 답했다. 살라딘의 제안은 이성적이었다.
만약 내가 불리한 상황이었다면 망설임 없이 받아들였겠지.
“나도 술탄께 같은 제안을 드리겠소. 지금 포위를 풀고 퇴각한다면···.”
내가 말했다.
“우린 그 어떤 추격도 하지 않으리다. 예루살렘 왕국과 내 명예를 걸고 약속하겠소. 그러니 이만 다마스쿠스로 돌아가시오.”
“살라흐 앗딘 술탄께선 어떤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케락을 차지하실 겁니다.”
“그리고 난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케락을 지켜낼 거요.”
침묵이 흘렀다. 알 아딜도 성안으로 들어오면서 병사들의 사기와 무장을 확인했겠지.
우리가 단단히 준비해놨다는 걸 눈치챘을 터.
그때 재밌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술탄께서 이렇게 선물을 보내셨으니 나도 작은 선물을 하나 드리리다.”
난 옅은 미소를 지었다.
“곧 있으면 잉글랜드의 왕, 헨리 2세께서 이끄시는 십자군 선봉대가 레반트에 도착할 거요. 이제 몇 주도 채 안 남았지.”
“···.”
알 아딜이 눈썹을 찌푸렸다. 내 말이 블러핑이라고 생각하는 듯한 반응.
“그들이 오기 전에 케락에서 떠나는 게 좋을 거요. 부디 술탄께도 그리 전해주시오.”
“···알겠습니다.”
그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난 자리에서 일어선 그와 악수를 나눴다.
“아, 술탄께선 여인과 아이들이 대피해 있는 곳을 알고 싶어 하십니다.”
그가 까먹고 있었다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여인과 아이들이라. 그건 왜 궁금해하시는 거요?”
“그쪽으로 돌을 던지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곧 투석기가 완성될 테니 미리 알아두는 게 낫겠지요.”
“술탄께선 정말 기사도가 넘치시는구려.”
내가 웃으며 답했다.
은근슬쩍 투석기 설치가 끝나간다고 압박하는 건가.
그거랑 별개로 민간인 공격은 피하겠다니. 살라딘도 여러모로 재밌는 인물이라니까.
짧은 대화를 나눈 뒤 알 아딜은 다시 성문 밖으로 나갔다.
짐을 내려놓은 낙타들이 한결 가벼운 걸음으로 성문을 나섰다.
에이그가 다가왔다.
“알 아딜이 가져온 과일이랑 고기는 어떻게 할까요?”
“병사와 백성들에게 공평하게 나눠서 줘. 살라딘이 독을 타진 않았을 거야.”
내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일전에 에일라트에서도 이렇게 선물을 받았었지.
“그나저나 알 아딜에게 왜 헨리 2세와 잉글랜드군에 대해 알려주신 겁니까?”
에이그가 물었다.
“놈들이 모를 때 딱 공격했다면···.”
“지금 살라딘에겐 시간이 별로 없어.”
내가 말했다. 늘어나는 전비戰費와 사상자.
거기에 3차 십자군이 온다는 압박감이 더해진다면 어떨까?
“잉글랜드군까지 도착하면 결국 군대를 돌릴 수밖에 없겠지. 내 말을 들었으니 살라딘도 직접 첩자를 풀어서 확인할 거야.”
“그러면 폐하의 말씀이 사실이라는 걸 알겠군요. 최대한 버티기만 하면···.”
“우리의 승리지. 그러니 최선을 다해보자고.”
난 성벽 밖을 응시했다.
무슬림 공병들이 한창 작업 중인 거대한 망고넬 투석기들이 보였다.
* * *
망고넬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건 이틀 후였다.
“돌이 날아온다!”
살라딘의 군대는 우리 투석기들이 반격하지 못하도록 더 큰 덩치의 망고넬들을 세웠다.
에이그가 머리를 숙이며 외쳤다.
“살라딘이 약속했던 대로 민간인 구역엔 안 쏘는 것 같습니다!”
“성벽을 집중타격해서 무너뜨리겠다는 거야.”
내가 투구를 쓰며 말했다.
돌이 성벽에 부딪힐 때마다 진동이 몸을 뒤흔들었다.
다행히 아직 무너져내린 구역은 없었다. 케락의 성벽은 견고했다.
“이 정도면 버틸 만한 것 같습니다!”
“문제는 투석기가 아니야.”
난 망원경을 들고 맞은편을 바라봤다. 흙먼지 사이로 높은 탑들이 보였다.
공성탑.
세 개 이상의 공성탑들이 한창 지어지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오기 전에는 투석기로 공격하기도 어렵겠군.”
공성탑이 성벽에 달라붙기라도 하면 문제가 곤란해졌다. 아무리 수비가 유리하다고 해도 적 병력이 쏟아져 나오면 성벽을 뺏기는 건 한순간.
그건 어떻게든 막아야 했다.
“고작 저런 나무탑들을 신경 쓸 필요 있겠습니까? 그리스의 불을 붙이면 순식간에 불탈 겁니다.”
“살라딘이 아무 대비도 안 할 만큼 멍청하진 않아. 이 냄새가 안 느껴져?”
내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코를 찌르는 희미하면서도 역한 지린내.
“그리스의 불을 막으려고 삭힌 오줌을 적신 거야. 아마 가죽을 푹 적신 다음 공성탑을 둘렀겠지.”
식초, 모래, 삭힌 오줌.
이것들을 섞으면 그리스의 불을 끌 수 있었다.
“그럼 삭힌 오줌을 뒤집어쓰고 온다는 겁니까?”
에이그가 역겹다는 표정을 지었다.
“별로 상상하고 싶은 광경은 아니군요.”
“우리도 미리 준비해놨잖아. 필요할 때는 그거라도 뒤집어써야지.”
내가 웃으며 말했다. 역시 현실은 영화와 달랐다.
오줌을 적신 가죽을 입고 싸울 줄 누가 알았을까?
“그리스의 불도 안 통하면 방법이···.”
“우리도 성벽을 더 높게 쌓으면 돼.”
내가 말했다. 고구려에서도 사용했던 방식이지.
공성탑으로 공격해 온다면, 놈들이 내리지 못하게 성벽을 높이면 됐다.
공성전이라면 동아시아도 나름 할 만큼 했다고. 내 설명을 들은 에이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지금 새 성벽을 쌓을 여유는 없지 않습니까?”
“돌로 된 성벽을 쌓을 필요는 없어. 그냥 나무랑 진흙만으로도 충분해.”
난 케락 안쪽 시내를 바라봤다. 대부분 벽돌로 된 건물들이었지만, 중간중간 목재도 많았다.
이것들을 부수면 임시 성벽을 쌓을 수 있었다.
“시내에 있는 목조 저택들을 다 헐어야겠어. 가서 병사랑 기사들을 소집해.”
시민들은 대부분 지하 시설로 대피했으니 문제없겠지.
“나중에 집주인들이 보면 깜짝 놀라겠군요. 투석기에 맞아서 부서졌다고 해야겠습니다.”
“전부 다 왕실에서 보상해 줄 거라고 전해. 케락이 사라센 손에 점령되는 것보다는 나을 거야.”
내가 웃으며 답했다.
어차피 집은 나중에 얼마든지 지을 수 있었다.
지금은 공격을 막아내는 게 급선무였다.
‘놈들이 공성탑과 투석기만 준비할 리 없어.’
아마 다음 공격은···.
땅 아래에서 온다.
“항아리나 맥주통. 항아리나 맥주통을 성벽 근처 곳곳에 반쯤 묻은 다음, 위를 얇은 가죽으로 덮어놔.”
내가 말했다.
“귀가 밝은 사람들을 근처에 배치하고. 동서남북 모든 방향에 묻어놔야 해.”
“갑자기 항아리를 땅에 묻으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난 대답 대신 미소를 지었다.
사관학교에서 지겹게 읽었던 병법서들도 여기선 도움이 되는군.
“곧 있으면 알 수 있을 거야.”
* * *
“뭣들 하느냐! 어서 빨리 도끼를 휘둘러라!”
루아크가 소리쳤다.
그는 거리를 뛰어다니며 단원들의 작업을 감독했다.
성묘단원들은 열심히 도끼를 휘두르며 나무를 쪼갰다. 그 옆에선 튜튼 기사단원들이 작업을 거들었다.
“우린 사라센들과 싸우러 온 거지 이렇게 나무나 패러 온 게 아니오!”
“어이, 막스! 입 다물고 어서 도끼나 휘둘러!”
“자기들이 뭐라도 되는 양 날개를 달고 다니니.”
“너 이 자식들 지금 뭐라고 했어?! 내가 독일어를 못 할 줄 알아?!”
작업 도중 몇몇 단원들 사이에 시비가 붙었다.
분위기가 험악해지던 그때, 루아크가 도끼를 휘두르며 끼어들었다.
“싸울 시간 있으면 빨리 나무나 쪼개라, 이 굼벵이 새끼들아!”
그가 튜튼 기사단원들을 향해 소리쳤다.
“내 독일 기사들은 용맹하고 힘이 넘친다고 들었건만 나무 쪼개는 솜씨는 영 별로군.”
루아크가 씨익 미소 지었다.
“아니면 고작 이 정도로 힘이 딸리는 건가?”
“다음 말을 조심히 하는 게 좋을 거요, 루아크 단장.”
튜튼 기사단장, 알브레히트가 나서며 말했다.
“우리 독일인들은 모욕을 그냥 넘어가지 않으니 말이오.”
“그건 북구인들도 마찬가지요.”
루아크가 웃으며 답했다.
“그럼 내기라도 하는 건 어떻겠소? 두 기사단 중에 누가 더 많은 집을 해체하는지 세보는 거요.”
그때 돌덩어리 몇 개가 성벽을 지나 시내 근처에 떨어졌다.
몇몇 단원들이 움찔했지만, 알브레히트와 루아크 단장은 미동 없이 서로를 노려봤다.
“그런 내기야 언제든지 환영이지. 그럼 뭘 걸지 정해야겠군.”
“그대 독일인들은 맥주와 와인을 물처럼 마신다 들었소. 지는 쪽은 일주일 동안 물만 마시도록 합시다.”
“그거 좋겠군.”
알브레히트가 웃으며 말했다.
“나중에 말 바꾸면서 질질 짜지나 마시오.”
“그쪽이야말로 미리 물을 준비해두는 게 좋을 거요.”
루아크도 미소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가 손짓하기 무섭게 성묘단원들이 도끼를 힘차게 휘둘렀다.
튜튼 기사단원들도 서둘러 다음 집으로 향했다. 루아크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거 옛날 생각이 드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