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King of Crusaders RAW novel - Chapter (175)
십자군의 왕이 되었다-175화(175/215)
< 175화 – 케락 공성전 (5) >
에일라트
“아스칼론에선 지금도 전투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만에 하나 이집트 군대가 이기기라도 한다면···.”
“놈들은 곧장 이곳 에일라트로 들이닥칠 겁니다! 이럴 시간에 빨리 대피해야 합니다!”
좁은 방안에서 사내들의 함성이 오고 갔다. 유대인 부족의 족장, 에마누엘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침묵을 지켰다.
“족장님, 결단을 내려주시지요.”
“예, 저희 모두 족장님의 판단을 따르겠습니다.”
“수십 년 전 살라딘이 에일라트를 불태웠을 때 우린 무작정 사막으로 도망쳤네.”
에마누엘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내들 모두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보두앵 폐하께서 이곳 에일라트를 재건해주시며 하신 말씀을 잊은 겐가? 지금 고향을 버리고 도망친다면 다음 기회는 없을 걸세.”
“하지만 수만이 넘는 적들을 저희가 어찌 상대할 수 있겠습니까?”
한 사내의 말에 다른 이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가족들이 모두 개죽음을 당하느니 차라리 도망자로 사는 게 낫습니다.”
“보두앵 폐하께서도 저희를 버리진 않으실 겁니다. 로마인들처럼 따로 개척촌이라도 마련해주시지 않겠습니까?”
“자넨 폐하께서 아무 대가 없이 그런 개척촌을 지어주셨다 생각하나?”
에마누엘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테오도라 왕비님께선 콘스탄티노플 출신이시지. 거기에 로마인들도 대부분 병역을 지고 있네. 우리랑 그들은 달라.”
레반트에는 수많은 유대인 부족이 살았다. 그중에는 기독교나 이슬람으로 개종한 이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유대인은 어딜 가나 의심의 눈초리를 받았다.
“우린 이곳에 남아 고향을 지켜야 하네. 설령 이집트의 대군이 몰려온다 해도 버텨야 해.”
그가 말했다.
“그걸 위해 지금까지 물자를 비축하고 훈련을 해온 것 아닌가?”
“···.”
침묵이 이어지던 그때, 한 청년이 일어서며 외쳤다.
“사라센 놈들이 올 테면 얼마든 오라고 하죠! 에일라트에는 이제 베네치아인들도 있지 않습니까? 분명 보두앵 폐하께서 저희를 구원하러 오실 겁니다!”
“옳소! 무기를 들고 싸웁시다!”
사내들의 함성이 이어졌다.
그때, 누군가 방안으로 뛰어들어왔다.
“조, 족장님! 부두에 배들이 잔뜩 들어왔습니다! 무기를 든 병사들이 배에서···.”
“부두에 병사들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에마누엘이 일어서며 외쳤다.
그는 부족 사내들의 부축을 받으며 부두로 달려갔다.
수십 척이 넘는 갤리선들이 부두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아니, 저것들 다 베네치아 상선들 아닌가?”
“베네치아 배들이라니. 최근에 아비시니아로 떠난 배들이 있었나?”
“전령 몇 명이 배를 타고 갔다는 얘기는 들었네만···.”
창과 검을 든 흑인 병사들이 우르르 부두에 내렸다. 말들도 조심스레 나무판자를 밟으며 내려왔다.
배에서 내리는 건 대부분 흑인이었다.
그들 중 보석을 머리에 찬 사내가 에마누엘 일행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통역처럼 보이는 베네치아인이 헥헥거리며 그 뒤를 따랐다.
“이보게, 노인장.”
사내가 에마누엘 앞에 서며 물었다. 통역이 허겁지겁 달려오며 말을 전했다.
“예루살렘은 어느 방향인가?”
* * *
“조금만 더 고개를 숙일 수 있으시겠습니까? 아주 살짝만 더··· 딱 좋습니다!”
캉이 숯덩이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난 성벽에 기댄 채로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참았다.
밖에선 적 대군이 포위하고 있는데 한가롭게 초상화 모델이라니.
“이번엔 아주 완벽한 그림이 나올 것 같습니다. 나중에 목판에 그대로 옮겨야겠군요.”
캉이 종이 위로 숯을 움직이며 말했다.
“예루살렘의 시민들도 분명 좋아할 겁니다.”
“백성들에게 내 그림을 강매하고 싶은 생각은 없네.”
내가 웃으며 답했다.
백성들이 내 그림을 집에 걸어놓는다고 생각하니 왠지 모르게 거부감이 느껴졌다.
‘무슨 김일성, 김정일 부자도 아니고.’
그런 건 선왕, 보두앵 4세나 다른 이들을 기리는 걸로 충분하지.
“하지만 예루살렘 사람들은 폐하를 그 누구보다 좋아합니다. 자신이 직접 나서서 모범을 보이는 왕이 그리 많진 않지요.”
캉이 어깨를 으쓱였다.
“유럽이나 이곳 레반트 둘 다 말입니다.”
“내가 무슨 모범을 보였다는 건가?”
“콘스탄티노플에선 어린 황제의 목숨을 구하시고, 유럽에선 진정한 ‘주님의 평화’를 이룩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캉이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이곳에선 병사들과 함께 싸우고 돌을 나르셨죠. 제가 볼 땐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하십니다.”
“내가 볼 때 대단한 건 자네일세. 저 멀리 프랑스에서 잉글랜드, 그리고 이곳까지 날 따라오지 않았나?”
거기에 캉은 잉글랜드에선 아서왕의 (모조) 십자가가 뺏길 뻔한 걸 막아줬지.
“저 같은 한량이야 발 가는 곳으로 사는 게 인생이죠.”
우리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사실 예루살렘 사람들만 폐하를 우러러보는 건 아닙니다. 유럽과 콘스탄티노플에서 온 사람들도 다 그렇더군요.”
캉이 어깨를 으쓱였다.
“특히 피에르 사제님께서 책을 펴내신 후로 더 그런 분위기고요. 폐하께서 어떤 말을 하시든 일주일 안이면 모든 기독교인이 알게 될 겁니다.”
“내 영향력이 크다는 건 알았지만···.”
그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그렇게 모범적인 인물이란 생각은 안 들었다.
이 세계에 떨어졌을 때만 하더라도 난 내 목숨을 구하기 위해 싸웠지. 근데 이젠 예루살렘 왕이라.
정작 믿는 종교가 없는 내가 전 세계 기독교를 대표한다니.
“생각할수록 아이러니한 상황이군.”
“예?”
“아무것도 아닐세. 그냥 혼잣말이었어.”
앞으로 태어날 아이와 예루살렘 왕국을 생각해서라도 이 전쟁은 내 선에서 끝내야 해.
백 년 가까이 이어진 이 지긋지긋한 종교 전쟁. 이걸 끝내고 평화를 구축할 방법은 뭘까?
예루살렘, 중동의 화약고.
생각에 빠져 있던 그때,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젠 익숙할 대로 익숙해진 소리.
병사들이 각자 위치로 뛰어갔다.
“사라센 놈들이 온다!”
* * *
“모두 자기 자리를 지켜라!”
병사들이 멍한 표정으로 성벽 너머를 바라봤다. 이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규모.
사실상 적 군대 전체가 성으로 달려들고 있었다.
“저게 도대체···.”
“놈들이 승부를 내려는 거야.”
내가 에이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답했다. 육감으로도 수만에 달하는 적들이 느껴졌다.
그 모습을 본 병사들의 공포가 성벽 전체로 퍼져 나갔다.
‘이번 공격만 막으면 돼.’
이렇게 무식한 공세는 살라딘에게도 남은 수가 없다는 뜻이었다. 오늘만 버티면 승리할 수 있었다.
헨리 2세와 에티오피아의 랄리벨라 왕도 슬슬 도착하겠지. 살라딘도 그 소식을 들으면 군대를 물릴 게 분명했다.
투구를 에이그에게 맡기고 성벽을 성큼성큼 걸었다.
‘난 연설에 소질이 없는데.’
하지만 왕에겐 왕이 해야 할 의무들이 있는 법.
“예루살렘의 병사들이여!”
숨을 깊게 들이마시자 뜨거운 공기가 폐를 가득 채웠다.
“두려워하지 말라! 선왕이신 보두앵 4세께선 몽기사르에서 사백의 기병으로 수만이 넘는 살라딘의 군대를 물리치셨다!”
성벽 위 병사들의 시선이 날 향했다.
용기와 승리를 향한 확신.
이 두 개를 어떻게든 채워줘야 했다.
“나도 보두앵 4세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그대들 옆에서 함께 싸우겠다! 예루살렘을 위해 싸우자!”
“주님을 위해 싸우자!!”
성벽 곳곳에서 함성이 울려 퍼졌다.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나가던 공포와 두려움도 사그라졌다.
여인과 아이들이 그릇을 들고 돌아다니며 병사들에게 빵과 죽을 먹였다.
대충 배를 채운 뒤 쇠뇌를 들 때쯤 화살과 돌덩어리가 날아왔다.
“부상자들을 아래로 옮겨! 어서 빨리 지하로 옮겨라!”
성벽을 향해 달려오던 무슬림 병사들이 화살을 맞고 픽픽 쓰러졌다.
그 빈자리를 뒤에서 달려오던 적들이 곧장 다시 채웠다.
“أحضر كبش الضرب(공성추를 가져와라!)”
공성추 여러 개가 성문 쪽으로 다가왔다. 난 투석기들에 명령을 내리며 탄착점을 조정했다.
“쉬지 말고 계속 쏴라!”
항아리가 땅에 부딪히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공성추를 들고 달려오던 적 병사들이 화염에 휩싸이며 나가떨어졌다.
“폐하! 그리스의 불이 전부 떨어졌습니다!”
“그럼 아무 돌이나 넣고 쏴! 멈추지 말고 계속 쏘란 말이다!”
난 에이그와 함께 성벽을 뛰어다니며 예비대를 투입하고 전투를 지휘했다.
사다리를 넘어온 적 병사들과도 직접 싸워야 했다.
“예비대를 모두 투입해!”
“하지만 그랬다간 다음 공격이···.”
“다음 공격은 없어! 이번이 마지막이야.”
내가 숨을 몰아쉬며 소리쳤다.
사다리를 통째로 밀어버리는 루아크의 모습이 보였다.
“뭣들 하느냐! 어서 빨리 가서! 폐하를 지켜라! 모두 멈추지 말고 싸워라!”
예비대로 남아 있던 성묘수호단과 튜튼 기사단원들이 소리치며 검을 휘둘렀다.
에이그가 소리쳤다.
“적 공성추가 동문 바로 앞까지 왔습니다!”
“그 위에다 남은 기름을 모조리 부어! 그리고 성문 뒤쪽을 토사土沙로 막고!”
동문 쪽으로 달려가며 외쳤다.
이미 제르날과 다른 대장장이, 직공들이 모여 성문 뒤에 흙과 돌을 쌓고 있었다.
여인과 노인, 아이들도 자갈과 물을 나르며 도왔다. 난 그들과 함께 수레를 나르고 흙을 쌓아 올렸다.
‘이 정도면 성문이 돌파당해도 상관없겠지.’
열심히 성문을 깨부숴봤자 앞이 토사로 가득 차 있으면 적 병사들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적을 앞에 두고 열심히 흙을 파헤친다면 모를까.
작업이 끝난 걸 확인한 나는 다시 성벽 위로 올라가 지휘를 계속했다. 손과 눈꺼풀이 부르르 떨리고 입술은 바싹 말랐다.
“폐하, 조금이라도 쉬시지요. 이러다 쓰러지시겠습니다.”
“쉬는 건 전투가 끝난 후에 얼마든지 할 수 있어.”
난 에이그와 함께 성벽 곳곳을 누볐다.
“놈들이 지치기 시작한다! 계속 싸워라!”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은 병사가 부상당해 지하로 실려 갔다. 적들 역시 마찬가지.
성벽 앞에 시체들이 계속 쌓이며 작은 언덕을 이룰 정도였다.
성벽을 가로지르던 중 내 쪽으로 날아오는 물체가 느껴졌다. 난 몸을 비틀었지만 한 박자 늦었다.
투구가 망치로 맞은 것처럼 흔들렸다.
젠장, 정신이 둔해지니 몸도 둔해졌군.
“폐하!”
“난 괜찮아!”
욱신거리는 걸 무시하고 일어서자 에이그의 손이 보였다. 핏물이 손가락을 타고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내 시선을 눈치챈 에이그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아까 화살 하나가 팔을 스쳤습니다. 하필이면 갑옷 사이를 뚫고 지나갔더군요.”
“어서 빨리 가서 치료부터 받아.”
“그냥 스친 상처입니다.”
“이건 명령이야. 가서 치료부터 받아. 내 호위는 루아크 경한테 맡기면 돼.”
“···알겠습니다.”
치료받으러 간 에이그는 몇 분 만에 다시 성벽 위로 올라왔다. 해가 천천히 지평선으로 떨어질 때쯤, 전투는 끝났다.
우리의 승리.
의심의 여지가 없는 승리였다.
“사라센 놈들이 도망친다!”
“와아아! 우리가 이겼다!”
“꺼져 이 더러운 새끼들아!”
“방심하지 말고 무기를 계속 들어라! 혹시라도 놈들이 다시 공격해올지 모른다!”
난 성벽에 몸을 기대고 숨을 몰아쉬었다.
에이그가 건넨 물을 들이마시자 나도 모르게 신음 비슷한 소리가 나왔다.
“폐하, 정말 이번이 마지막이라면···.”
“그래, 이제 끝난 거나 마찬가지야.”
내가 말했다. 육감으로 느껴지는 적 병사들의 사기는 분명했다.
공포와 두려움.
사상자도 최소 수천은 넘게 나왔겠지. 살라딘에겐 이번 공세가 최후의 시도였다.
더 이상 병력을 투입해봤자 무의미한 도살일뿐.
“에이그.”
“예, 폐하?”
“가서 사라센 글을 쓸 줄 아는 사람을 불러줘. 서신으로 쓸 종이랑 펜도. 살라딘에게 서신을 보내야겠어.”
“서신이라니. 무슨 말을 보내실 겁니까?”
“글쎄, 칭찬이라고 하면 어떨까?”
내가 웃으며 답했다.
지금 나와 살라딘의 상황에 가장 잘 어울리는 서신이 하나 있지.
고구려 을지문덕 장군이 우중문에게 보냈던 시. 난 서기를 옆에 앉힌 채로 말을 읊어갔다.
“자, 이제 받아적게. 술탄, 살라딘이여. 그대의 전략은 하늘의 이치를 깨달았고···.”
해가 모습을 감추며 서늘한 공기가 성벽을 휘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