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King of Crusaders RAW novel - Chapter (177)
십자군의 왕이 되었다-177화(177/215)
< 177화 – 광명으로 인도하소서 (2) >
“···.”
“···.”
침묵이 흘렀다.
난 맞은편에 선 흑인 사내를 바라봤다.
이십 대 후반처럼 보이는 외모에 황금빛 비단, 사슬 갑옷 차림.
뒤의 호위 기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 모두 황금도시, 엘도라도에서 온 것처럼 황금빛으로 반짝거렸다.
“폐하, 무슨 말씀이라도 하시지요. 누가 보면 싸우는 줄 알겠습니다.”
에이그가 곁에서 속삭였다.
다리를 흔들자 불트가 앞으로 천천히 나아갔다.
나와 랄리벨라 국왕은 서로를 응시했다. 먼저 입을 연 건 랄리벨라였다.
그가 더듬거리며 어색한 억양으로 말했다.
“뭔가 특별한 건 느껴지지 않는구려.”
“···.”
“우리 사절단은 그대가 주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말했소. 우리 왕국에 대해서도 속속들이 알고 있다던데. 정말 하늘의 계시를 받은 거요?”
“그렇다 할 수 있겠죠.”
내가 웃으며 답했다. 솔직히 에티오피아 쪽은 플레이해본 적이 많이 없지.
애초에 십자군 전쟁 중에 메이저 진영도 아니었고.
‘하지만 랄리벨라 국왕은 달라.’
성도가 사라센에게 정복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에티오피아에 새 예루살렘을 짓겠다고 선포한다.
아프리카의 몇 안 되는 기독교 진영으로 나름 팬층도 있었고.
“우선 감사부터 드려야 할 것 같군요. 아비시니아의 군대가 오지 않았다면 살라딘도 도망치지 않았을 겁니다.”
“감사를 표해야 하는 건 오히려 내 쪽이요. 가니에르 경이 이끄는 기사단원들은 우리 왕국을 사라센 침략자들로부터 지켜줬소. 거기에 우리 사제들이 말하길···.”
그가 말했다.
“이번 공의회에서 예루살렘이 우리 왕국의 편의를 봐줬다고 하더군.”
공의회 때 편의를 봐줬다고?
그냥 대화에 끼어들 수 있게 몇 번 도와준 게 다였는데.
‘애초에 제대로 된 결정도 안 낸 공의회였고.’
21세기 UN의 기후변화 협약이나 마찬가지였다. 제대로 결정하는 게 없고, 그렇기 때문에 모두가 동의한다.
심지어 북한도 찬성할 정도니.
‘어쨌든 고맙게 생각해준다면 그걸로 된 거지.’
굳이 감사를 마다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내가 군대를 끌고 이곳까지 단순히 감사를 표하러 온 게 아니오.”
랄리벨라 왕이 말했다. 난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독교 왕국인 만큼 왕에게 종교적 정통성이 필요할 터. 성전만큼 더 좋은 방법이 있을까?
랄리벨라는 성전에 참가해 정통성을 얻고, 난 더 많은 병력을 얻는다.
서로 윈윈인 상황이···.
“난 예루살렘을 우리 왕국으로 옮기고 싶소.”
“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무슨 에티오피아식 농담인가?
하지만 랄리벨라 왕의 표정은 한없이 진지했다.
“내가 말한 건 예루살렘을 자그위 왕국으로 옮기고 싶다는 거요.”
“···.”
예루살렘을 옮기고 싶다고?
“일단 함께 예루살렘으로 가시지요. 그곳에서 차근차근 대화를 나누는 게 어떠시겠습니까?”
* * *
지나는 마을마다 사람들이 몰려나와 우릴 반겼다.
꿀과 고기 외에도 수많은 음식.
우린 게걸스럽게 배를 채우며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케락을 떠나고 이틀이 되던 날, 우린 마침내 성도에 도착했다.
“케락에서의 승리는 주님께서 우리 왕국과 신도들을 보살피고 계신다는 증거이자···.”
가장 먼저 우릴 반긴 건 피에르와 헤라클리우스 총대주교였다. 두 사람의 설교는 언제나 그렇듯 수십 분 넘게 이어졌다.
하지만 내가 찾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테오도라.
그녀가 말에 탄 채로 내 곁에 다가왔다.
“테오도라.”
“보두앵, 이번에도 무사히 돌아왔군요.”
그녀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순수한 기쁨과 환희.
그리고 뭔가 더 느껴졌다.
테오도라의 배에 다른 생명이 있었다.
내 아기. 아직 배는 그리 튀어나오지 않았는데. 내 육감으로 느껴질 정도로 성장한 건가?
“임신한 게 맞았군요.”
“예?”
테오도라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내 미소 지었다.
“당신이 나보다 아기를 먼저 반길지는 몰랐네요.”
“그런 뜻은 아니었어요. 그냥 느껴진 게···.”
“농담이에요, 보두앵.”
테오도라가 웃으며 말했다.
“헨리 2세가 왕궁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요.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아서···.”
“상태가 좋지 않으시다고요?”
헨리 2세가?
지중해를 넘어오면서 무리라도 한 건가. 쉰 살을 넘어가면 중세 기준으로 노인이기는 한데.
“의사들은 열병이라더군요. 그래도 지금은 많이 나아지셨어요.”
“그럼 다행이네요.”
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유럽 원정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한동안 고생했었지.
“발리앙 백작과 레몽 백작도 기다리고 있고요.”
“만날 사람들이 많네요.”
“일이 끝나면 침실로 오는 것만 잊지 말아요, 보두앵. 당신과 나눌 말이 많아요.”
테오도라가 웃으며 말했다.
난 그녀와 함께 대화를 나눈 뒤, 곧장 왕궁으로 향했다.
헨리 2세는 궁 깊숙한 침실에 누워 있었다.
“몸이 안 좋으시다 들었습니다.”
“며칠째 죽을 노릇이네. 이 망할 레반트는 무슨 숨도 쉬기도 어렵군.”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눈이 퀭했다. 바다를 건너오면서 단단히 고생했나 보군.
“우선 감사부터 드려야겠군요. 잉글랜드군이 아스칼론을 구원했다 들었습니다.”
“별것도 아니었네. 그 이집트 놈들은 우리를 보자마자 도망치더군.”
헨리 2세가 말했다. 하녀들이 그의 곁에서 야자나무 잎을 흔들었다.
“자네에게 말해줄 게 있네. 필리프는 아직도 십자군 원정을 머뭇거리고 있어. 리처드가 먼저 떠나길 기다리는 것 같더군.”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나 보군요.”
저번에 기사단 지부들을 이용해 압박한 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수작을 부리는 모양이군.
“필리프가 이곳으로 오도록 계속 압박하는 편이 좋을 걸세. 다시 한번 프랑스에 있는 기사단 지부들에게 명령을 내려서 여론을···.”
“글쎄요, 아무리 예리한 검이라고 해도 자주 쓰면 날이 무뎌지는 법입니다.”
물론 헨리 2세의 말은 옳았다. 예루살렘의 권위를 앞세워 압박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하지만 그건 너무 노골적이고 강압적이었다.
“붉은 수염(바르바로사) 황제가 왜 제게 튜튼 기사단을 내어줬다고 생각하십니까? 저와 제국은 이탈리아에서 맞붙은 적이 있는데 말입니다.”
“자네가 하인리히 공작을 지원해서 그런 거 아닌가? 내 사위 말일세.”
“바로 그겁니다.”
하인리히 사자공.
난 그를 지원함으로써 신성로마제국을 우회적으로 압박하는 데 성공했다.
황제는 내게 튜튼 기사단을 줬을 뿐만 아니라, 공의회 때도 훼방을 놓지 못했다.
오히려 내 앞에서 빌빌 기었지.
“프랑스에도 같은 수를 쓸 수 있겠죠. 하지만 이번엔 돈을 쓸 필요도 없을 겁니다.”
내가 지닌 힘은 돈뿐만이 아니었다. ‘예루살렘의 왕’이자 ‘신앙의 수호자’로서 상징.
그건 황제에 버금가는 힘이었다.
몇몇 사람들은 내 말이 곧 신의 뜻이라고 여길 정도이니.
“프랑스 영주 중 십자군에 우호적인 이들에게 정식 감사증을 보낼 겁니다. ‘성도 수호에 힘써줘서 고맙다’ 이 정도 내용이면 충분하겠죠.”
“성도 예루살렘의 감사증이라. 받는 것만으로도 정치적인 힘이 될 수 있겠군.”
헨리 2세가 중얼거렸다.
“성도 예루살렘이 아니라 자네가 써준다는 게 더 중요하겠지만 말이야.”
“그리고 전 이미 두 독수리가 예루살렘에 올 것이라는 계시를 공표했습니다. 그중 한 마리는 리처드 공작이죠. 만약 필리프 왕이 나머지 독수리가 아니라면···.”
“프랑스 영주 중 한 명이 독수리가 될 수 있겠군.”
“바로 그겁니다. 분위기가 그렇게 흘러가면 필리프도 더 버티진 못하겠죠.”
지금 시대의 프랑스 왕권은 그리 강하지 않았다. 허구한 날 잉글랜드나 다른 영주들과 투덕거리며 싸우는 이유도 그래서고.
그런 상황에서 필리프가 영주들의 힘이 커지는 걸 보고만 있을까?
‘결국엔 올 수밖에 없겠지.’
다른 영주가 십자군 원정 떠난다는 걸 막을 수도 없을 터.
“그거 정말 재미있는 생각이군. 내가 젊었을 적 했을 법한 생각이야.”
헨리 2세가 껄껄 웃었다.
“잉글랜드에서 자네가 이런 식으로 날 괴롭혔던 거군. 막상 옆에서 보니 재미있어.”
“나의 불행은 비극이고, 남의 불행은 희극인 법이죠. 하지만 제가 언제 폐하를 괴롭힌 적 있습니까?”
내가 웃으며 물었다.
“전 폐하의 아드님들께 기회를 드리고, 왕비님을 풀어드렸을 뿐입니다.”
“그래, 그래. 내가 죄인이었지. 하지만 잉글랜드로 돌아가 엘레오노르랑 다시 부부 생활을 하느니···.”
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차라리 이곳 레반트에 뼈를 묻는 게 나을 걸세.”
“주님께서 폐하를 지켜 다시 잉글랜드까지 인도하실 겁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도 참 잔인하신 분이로군.”
우리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럼 푹 쉬시지요, 폐하. 앞으로의 일은 천천히 상의해도 될 겁니다.”
“알겠네. 어차피 이 늙은이 여기 누워서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나?”
난 몸을 일으켜 문 쪽으로 향했다. 에이그가 곁으로 다가왔다.
“감사증으로 필리프를 압박하기 충분할지 모르겠군요.”
“그걸로도 충분할 거야. 하지만 카드를 한 장 더 꺼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헨리 2세에겐 말하지 않은 트럼프 카드.
“교황 성하와 기사단 지부들에 서신을 보내야겠어.”
“그 말씀은···.”
“성무금지령이라고 들어본 적 있어?”
“성무금지령이라면 모든 종류의 성무聖務를 금지하는 것 아닙니까? 유아세례부터 시작해서 고해성사, 결혼식, 장례식, 미사까지 전부 금지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 교황 성하께서 지니신 가장 강력한 무기지.”
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시대에 성무聖務가 지니는 중요성은 21세기와 차원이 달랐다.
고해성사를 하지 못하면 죄를 용서받지 못해 천국으로 갈 수 없다. 결혼식을 하지 못하면 혼인 관계를 인정받지 못하고, 자녀들은 사생아가 된다.
장례식, 즉 종부성사를 받지 못하면 죽음을 인정받지 못해 세금을 계속 내야 한다.
사실상 국가의 모든 행정이 성무聖務에 연결된 셈.
“그럼 폐하께선 프랑스에 성무금지령을 내리시려는 거군요.”
“아니, 지금 그랬다간 역풍을 맞을 거야.”
물론 교황은 내 부탁을 들어줄 가능성이 컸다. 십자군 원정은 교황의 권위도 걸린 문제이니.
하지만 성무금지령은 그 파괴력만큼이나 역풍도 거셌다.
프랑스에 동정 여론이 생기거나 프랑스인들이 반발할 가능성도 크고.
사람은 얻어맞으면 화를 내는 법이다.
하지만 눈앞에 커다란 주먹이 왔다 갔다 하면 어떨까?
정상인이라면 누구나 피하려 하겠지.
“기사단 지부들을 이용해 소문을 퍼뜨리는 게 나아. 십자군 원정을 미룰수록 성무금지령이 내려질 가능성이 크다고.”
그 상황에서 필리프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이번 케락 전투와 관련된 소식을 인쇄기로 찍어내고, 추가로 성무금지령에 대한 암시도 넣어서 배포하라고 전해.”
난 걸음을 옮겼다.
이것 말고도 처리해야 할 일들은 많았다.
* * *
발리앙과 레몽은 회의실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폐하. 정말 죄송합니다.”
발리앙이 고개를 푹 숙였다.
레몽 역시 마찬가지. 그가 헛기침하며 말했다.
“타키 앗딘은 잉글랜드 군대를 보자마자 곧장 배로 도망쳤습니다. 베네치아 배가 도착하긴 했지만···.”
“시간이 안 맞았나 보군.”
가니에르에게 전해 들은 그대로군. 타키 앗딘은 역시 아스칼론을 점령할 생각이 처음부터 없었다.
“자네 둘 다 사과할 필요 없네. 아스칼론과 케락 둘 다 구했으니 그걸로도 충분하지 않겠나?”
“하지만 저흰 제때 폐하를 구원하러 가지 못했습니다. 만약 케락이 무너지기라도 했다면···.”
발리앙이 중얼거렸다.
난 그의 팔을 부드럽게 두드렸다.
“하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지. 타키 앗딘의 군대는 장창과 참호를 준비했다고 들었네. 그게 사실이라면 자네들이 교전을 피한 건 현명한 선택이었어.”
난 탁자 중앙에 놓인 지도를 바라봤다. 살라딘의 맹공에도 예루살렘 왕국의 영토는 변함없이 그대로였다.
“어쩌면 살라딘도 이제 예루살렘 정복을 포기할지 모릅니다.”
레몽 백작이 말했다.
“폐하와 저희 영주들의 의지가 견고하다는 걸 확인했으니 말입니다.”
“아니, 살라딘이라면 그렇게 쉽게 포기하지 않을 걸세.”
난 고개를 가로저었다.
예루살렘 탈환은 살라딘 왕국의 기반이자 전부였다.
죽지 않는 이상 그가 예루살렘을 포기할 리 없었다.
‘당분간 내부를 안정시키고 힘을 기르는 거라면 몰라도.’
나도 나머지 3차 십자군이 오는 걸 준비하고, 잉글랜드와 에티오피아 군대를 위한 주둔지도 필요했다.
수많은 이들의 피를 흘려 얻어낸 귀한 시간이었다.
이걸 낭비할 순 없지.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많군.
“적이 먼저 포기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순 없네.”
그렇게 말한 난 발리앙과 레몽을 바라봤다. 두 사람 다 대충 예상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우선은 이번 전쟁을 평가하는 것부터 시작하도록 하지. 각 기사단에 알려서 필요한 자료를···.”
테오도라에게 늦지 않게 가려면 하나라도 더 빨리 끝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