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King of Crusaders RAW novel - Chapter (212)
십자군의 왕이 되었다-212화(212/215)
신의 뜻 (2)
악연도 길어지면 정이 든다고 하던가. 알 아딜의 얼굴이 이렇게 익숙해질지는 몰랐는데.
“이쪽으로 오시죠. 술탄께서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오랜만에 다시 보는 것 같구려, 알 아딜 장군. 팔을 다치신 것 같소만.”
그는 입술을 살짝 깨물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다마스쿠스 외곽의 작은 마을.
무슬림 병사와 기사단원들의 기 싸움으로 분위기는 팽팽했다.
난 무슬림 병사들을 힐끗 바라봤다. 쿠르드족 출신 병사들.
살라딘이 속한 아이유브 가문도 쿠르드 출신였지.
자신들의 술탄이 패배했다 해도 그들은 끝까지 충성을 지킬 터였다.
난 에이그에게 손짓을 보냈다.
“너무 자극하지 마. 저들도 선을 넘진 않을 거야.”
“폐하께서 위험에 처하신다면 저희도 가만히 있진 않을 겁니다.”
에이그가 여전히 검집에 손을 갖다 댄 채 말했다.
“뭔가 심상찮은 게 느껴지면 바로 소리 지를게. 그전엔 최대한 가만히 있어줘.”
그렇게 말한 난 건물로 향했다.
안에는 침대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 위에 누워있는 건 익숙한 얼굴, 살라딘이었다.
창백한 얼굴에 온몸에서 흘러내리는 땀까지.
시종들이 끊임없이 새 수건을 그의 몸에 올렷다.
‘병에 걸렸다는 말이 거짓은 아니었군.’
침대 옆 의자에 앉자 그가 천천히 눈을 떴다. 우린 잠시 말없이 서로를 바라봤다.
“축하드리오, 보두앵.”
“뭐가 말입니까?”
“아들을 얻었다 들었소만.”
그렇게 말한 살라딘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나도 첫 아이인 알리를 얻었을 때 말로 이루 할 수 없는 행복을 느꼈지. 이젠 그 아이에 대한 걱정만 남았지만 말이오.”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테오도라의 품에 안겨 있던 작은 아기. 아모리는 내 아들이자 왕국을 물려받을 후계자였다.
그 아이는 어떤 삶을 살게 될까?
“그나저나 정말 재미있지 않소? 그대가 서신에서 장담했던 대로 되었으니 말이오.”
살라딘이 말했다.
“우리 둘은 알 쿠드스, 예루살렘에서 얼굴을 맞대고 싸웠지.”
“그렇군요.”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에일라트에서 살라딘에게 보냈던 서신.
[오늘 받은 서신의 답은 예루살렘에서 직접 전하겠다고 전하시오.]사실 임기응변으로 지어낸 말이긴 했는데. 그 말에 딱 맞는 상황이 벌어진 셈이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죠. 정리해야 할 문제가 많습니다.”
살라딘이 내 팔을 붙잡으며 말을 가로막았다.
“그전에 그대에게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소.”
“얼마든지 말씀하시죠.”
“그대는 정말 천상의 계시를 받은 거요? 대천사 미카엘과 주님의 음성을 들었소?”
“….”
살라딘은 비꼬는 게 아니었다.
그는 진심으로 내게 묻고 있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육감으로 느껴지는 살라딘의 몸 상태는 그리 좋지 않았다. 패배의 충격과 후퇴가 영향을 미쳤을 터.
진실을 말해준다 해도 내게 손해는 없겠지.
살라딘이 내 말을 퍼뜨린다 해도 거짓말이라 하면 그만일 테니.
예루살렘 탈환을 위해 자신의 모든 걸 바친 사나이. 살라딘에게 이 정도 자비는 베풀 수 있었다.
“솔직히 말씀드리죠. 천상으로부터 계시를 받은 적은 없습니다.”
“그렇군. 하지만 보두앵 그대는 미래를 알고 있지 않았소? 항상 문제가 터질 곳에 미리 가 있었지.”
살라딘이 물었다.
“그리고 프랑크인들이 말하길 그대는 말에서 떨어진 후 다른 사람이 됐다 하더군.”
“전… 또 다른 미래를 알고 있었습니다.”
난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보두앵 4세가 곧 죽는다는 것과 기와 르노가 말썽을 일으킬 것도 알았죠. 콘스탄티노플에서 반란이 터질 것도 알았습니다.”
그 외에 헨리 2세와 유럽 일도 있지만. 이쪽은 말해도 모르겠지.
“그 미래에는 제가 없었죠. 보두앵 4세가 죽은 후 예루살렘 왕좌에는 기 백작이 앉았고요.”
“기 백작이 왕이라. 그럼 그대가 본 미래에서 예루살렘은 어떻게 됐소?”
“당신이, 술탄 살라딘이 예루살렘을 정복했습니다. 프랑크 기사들은 하틴의 뿔에세 전멸했죠.”
하틴의 뿔 전투.
그 전투 한 번으로 예루살렘은 기사 전력 대부분을 상실했지. 그 후엔 평민 병사들까지 임시로 기사 서임을 해줬을 정도.
“살라딘은 발리앙과 협상을 맺어 예루살렘 시민들을 풀어줬습니다. 사실상 푼돈에 가까운 몸값만 받았죠.”
이건 역사에 아주 자세히 기록된 부분이지.
발리앙과 살라딘의 협상.
성벽이 무너진 상황에서 발리앙은 항복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예루살렘을 불태우겠다고 협박.
살라딘은 제안을 받아들여 예루살렘 시민들을 풀어준다.
‘몸값을 내지 못하는 과부와 아이들을 위해선 자신이 직접 돈을 냈고.’
약속을 어기고 그들을 몰살할 수도 있었지만, 순순히 보내준 것이다.
그 후 살라딘은 같은 무슬림들로부터 큰 비난을 들었다.
‘나중에 검을 들고 와서 우리와 싸울 자들이오! 근데 왜 그렇게 순순히 보내준 거요?!’
살라딘이 생각에 빠진 듯 두 눈을 감았다.
“그렇군. 그럼 마지막으로 하나 더 묻고 싶소. 그 미래에서…. 내가 예루살렘을 정복한 후에 전쟁이 멈췄소? 무슬림과 프랑크인들 사이의 전쟁이 말이오.”
“전쟁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내가 말했다.
십자군 원정은 9차까지 이어졌지.
오스만 제국이 나타나고, 동로마는 멸망했다. 그 후에는 대영제국이 다스렸고….
이스라엘이 세워지며 유대인과 아랍인들이 전쟁을 벌였다.
예루살렘에는 21세기까지 피가 흘렀다.
“마지막엔 유대인들이 무슬림들을 쫓아내고 예루살렘을 차지했죠.”
“그렇구려. 하지만 이미 그 미래는 바뀌었지.”
살라딘이 중얼거렸다.
짧은 침묵이 흐르고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대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우리의 성지인 메카를 정복했소. 예루살렘을 프랑크인의 손에 맡겨야 한다면, 그대보다 더 나은 적임자는 없을 거요.”
“…하지만 다마스쿠스가 술탄의 통치를 받는 한 예루살렘에 평화는 없을 겁니다.”
내가 말했다.
이제 승부를 낼 때였다.
다마스쿠스는 예루살렘을 위협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렇다면 다마스쿠스를 얻을 때까지 전쟁을 멈추지 않겠다는 거요?”
“도시를 넘기라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난 고개를 앞으로 숙였다.
“하지만 성벽을 무너뜨려야겠습니다.”
“우리 손으로 직접 허물라는 얘기군. 그건 스스로 목숨을 끊으란 얘기나 마찬가지요. 성벽을 허물고 그대들이 공격해온다면….”
살라딘이 기침을 내뱉었다.
“다마스쿠스는 반나절도 채 버티지 못할 터.”
“성벽을 허문다면 다마스쿠스를 공격하지 않겠습니다. 저와 왕국의 명예를 걸고 약속하죠. 원하신다면 공식적인 발표라도 하겠습니다.”
살라딘의 말이 옳았다.
성벽을 허물면 언제든 우리가 점령할 수 있지.
예루살렘 우위의 억지력이 유지되는 셈.
“다마스쿠스 주민들은 결코 그런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거요. 그들을 바보라고 생각하는 거라면….”
“물론 그렇겠죠. 하지만 당신이라면 그들을 설득하실 수 있을 겁니다. 비록 패했다 해도 다마스쿠스 주민들은 여전히 당신을 사랑하니까요.”
“만약 내가 거절한다면?”
“예루살렘과 다마스쿠스 양쪽 모두에게 안 좋은 일이 벌어질 겁니다. 모든 무슬림에게도 마찬가지고요.”
메카와 메디나.
이 두 곳은 내 손 안에 있었다.
살라딘도 내 말뜻을 알아들었겠지.
“만약 메카가 불탄다면 아이유브 가문은 영영 죄인이 될 겁니다. 예루살렘을 정복하지 못한 게 아닌, 메카를 버린 배신자들이라고 역사에 남겠죠.”
“그대가 메카를 불태울 것 같지는 않소만.”
“저도 신성한 도시를 잿더미로 바꾸고 싶진 않습니다. 하지만 더 물러설 길도 없죠.”
“메카가 불탄다 해도 우리 무슬림들을 그곳에 새로운 성지를 세울 거요. 신성한 곳은 그 장소일 뿐.”
살라딘이 고개를 살짝 흔들며 말했다.
“성벽과 건물 따위는 중요하지 않소.”
“그렇다면 전쟁을 계속하는 수밖에 없겠군요.”
그렇게 말한 난 자리에서 일어섰다. 살라딘이 허세를 부렸지만, 난 그의 본심을 알 수 있었다.
살라딘은 그런 사내였다.
“다마스쿠스가 성벽을 허문다면 위협은 저희 프랑크인들이 아니라 다른 무슬림들이 될 겁니다.”
알레포와 다른 에미르(제후)들이 다스리는 도시들.
그들이 다마스쿠스를 노릴 게 분명했다.
“만약 그들이 다마스쿠스를 공격한다면 언제든 지원군을 보내겠습니다.”
“다마스쿠스를 사실상 자네들의 앞마당으로 삼겠다는 거군. 적이 많아질수록 그대들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을 테니.”
“선택은 술탄의 몫입니다.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내일 아침까지 답을 주시죠.”
난 방을 나가기 전 그를 마지막으로 바라봤다.
“저도 술탄께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이 시대에 떨어지기 전부터 줄곧 머리를 맴돌았던 질문.
“관용과 자비. 그건 당신의 진심입니까, 아니면 권력을 위한 수단입니까?”
살라딘은 레반트의 신흥 세력.
그가 권력을 얻기 위해선 최대한 포용의 정치를 해야 했을 터.
‘예루살렘 시민들을 학살했다면 유럽이 곧장 보복에 나선다는 것도 알았을 터.’
그가 원 역사에서 예루살렘 시민들을 풀어줬던 건 진심에서 우러나온 자비였을까, 아니면 치밀한 계산의 결과였을까?
내 말을 들은 살라딘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시르쿠 숙부께서 이집트 원정에 날 끌고 가실 때 난 어린아이처럼 펑펑 울었소. 내게 전쟁이란 그저 무섭고 두려운 것이었지.”
그의 눈동자가 날 바라봤다.
“숙부께서 갑자기 돌아가신 후 난 얼떨결에 이집트 와지르(총리)가 됐소. 그 후엔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들만 해왔지.”
그가 숨을 쥐어 짜내듯 말했다.
“그게 내가 대답할 수 있는 전부요.”
“그렇군요.”
난 고개를 끄덕였다.
설령 위선이라 하더라도, 그게 평생 이어진다면 진심과 구별할 수 있을까?
“그럼 답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 *
보두앵이 떠난 후, 살라딘은 홀로 침묵을 지켰다.
그날 늦은 오후, 알 아딜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타키 앗딘을 이집트로 보낸 건 내 실책이었다. 역시 그곳엔 네가 갔어야 했어.”
“형님….”
“너와 그 아이가 이집트를 놓고 그렇게까지 싸울 줄은 몰랐다. 미리 읽지 못한 내 잘못이겠지.”
“….”
“보두앵에게 요구를 받아들이겠다고 전해라.”
“하지만 다마스쿠스 시민들은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겁니다. 성벽을 허물라니요!”
알 아딜이 외쳤다.
“사실상 프랑크 놈들이 공격하기 편하게 만들어주는 꼴 아닙니까?”
“보두앵은 공격해오지 않을 거다. 메카와 메디나에서도 곧바로 철수할 거고.”
살라딘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보두앵은 검이 아닌 빵으로 메카를 정복했어. 우리도 알 쿠드스(예루살렘)를 그렇게 공략했어야 했거늘….”
“하지만 형님께선 무슨 일이 있어도 알 쿠드스를 탈환하겠다고 맹세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우린 할 만큼 했다. 무슬림들의 피도 충분히 흘렸어. 다만 알라께서 아직 원치 않으실 뿐.”
살라딘이 답했다.
“언젠가는 우리 무슬림들에게도 새로운 기회가 올 거다. 프랑크인들이 우리처럼 분열되고 흔들릴 때가 오겠지. 그때가 오면 우리의 후손들이 알 쿠드스를 되찾을 거다.”
“만약 영영 알 쿠드스를 되찾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알 아딜이 물었다.
그는 어느새 팔짱을 낀 채 이마를 찌푸리고 있었다.
살라딘은 그런 동생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그것도 알라의 뜻이겠지. 주님께선 모든 운명을 정하시는 분이니.”
“….”
“넌 알리에게 충성 맹세를 했지. 하지만 내가 죽은 후에도 네가 그 맹세를 지킬 것 같지는 않구나.”
“형님! 그게 무슨…!”
“널 뭐라 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알리와 내 자식들을 끝까지 보살펴 주려무나. 가족은 서로 싸우더라도 피를 흘리지는 않는 법이다.”
“물론입니다, 형님. 전 끝까지 알리 곁에서 싸우겠습니다.”
“네가 살아있을 땐 결코 알 쿠드스를 쳐선 안 된다. 프랑크인들에게 그 어떤 명분도 줘선 안 돼. 그걸 꼭 명심해라.”
그렇게 말한 살라딘이 문밖을 바라봤다.
해가 천천히 지며 기도 시간을 알리는 아잔이 울려 퍼졌다.
“바람이 부는구나.”
살라딘이 중얼거렸다.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