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King of Crusaders RAW novel - Chapter (30)
십자군의 왕이 되었다-30화(30/215)
지상 최대의 매수 작전 (5)
* * *
“그래. 옳지, 옳지.”
어둠이 내려앉은 콘스탄티노스 궁전의 마구간.
난 불트의 입 앞에 사과를 갖다 댔다.
녀석이 가장 좋아하는 간식.
하지만 불트는 고개를 휙 돌렸다.
“고작 며칠 안 들렀다고 삐진 거야?”
녀석이 대답하듯 콧김을 내뿜었다.
말들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네.
“미안해, 그래도 에이그가 잘 챙겨줬잖아. 자, 여기 사과 더 줄게.”
난 갈기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렇게 몇 분 정도 지나자 녀석이 마침내 사과를 베어 물었다.
‘지난 며칠 동안 많이 바쁘긴 했지.’
귀족, 성직자들과 끊임없는 만찬.
구호소들을 돌아다니면서 병자들을 돌보는 것까지.
‘사실은 예루살렘에서 도입한 것들을 그대로 반복한 거지만.’
에일라트에서도 이렇게 바쁘진 않았던 것 같은데.
“이럴 줄 알았으면 불트 널 예루살렘에 두고 올 걸 그랬구나.”
그때 마구간 밖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
검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
뭐지?
난 조심스레 소리가 나는 곳으로 다가갔다.
이상한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차분함.
인영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달빛 아래 낯선 얼굴이 보였다.
잠깐.
어디서 많이 본 동작인데.
‘위그잖아?’
그는 가면을 쓰고 있지 않았다.
동생인 발리앙과 비슷한 외모.
검술 훈련이라도 하는 건가?
가까이 다가간 난 헛기침을 했다.
“아, 공자님! 이 시간까지 깨어 계실 줄은 몰랐군요.”
그가 여느 때처럼 호탕한 목소리로 외쳤다.
“어서 가면을….”
“굳이 저 때문에 쓰실 필요 없습니다.”
내가 말했다.
달빛 아래 서자 그의 얼굴이 선명히 보였다.
얼굴 전체를 덮은 흉터들.
거기에 피부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왼쪽 눈은 초점 없이 흐릿했다.
눈이 먼 건가?
“나병에 걸리고 시간이 지나면 눈이 먼다고들 하더군요.”
그가 내 시선을 눈치챈 듯 웃으며 말했다.
“다행히 왼쪽만 멀었습니다. 오른쪽은 아직 쌩쌩하죠.”
“언제 시력을 잃으신 겁니까?”
“꽤 오래전입니다. 공자님을 호위하러 에일라트로 가기 전이니까요.”
그동안 한쪽 눈이 먼 상태로 싸웠다고?
나병에 걸리기 전엔 도대체 얼마나 괴물이었을까.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가면을 벗고 훈련하던 중이었는데….”
그가 말했다.
“우연히 창문으로 마주친 아이가 비명을 지르더군요. 그 이후론 항상 사람이 없는 밤에만 검을 휘둘렀습니다.”
“….”
대부분 사람들은 나병 환자들의 모습에 거부감을 느꼈다.
심지어 20세기 한국에서도 이들을 한 섬에 몰아넣었을 정도.
‘일본이나 미국, 유럽 다른 나라들도 다 마찬가지였지.’
나병이 유전병이라면서 임산부를 유산시키고 남자들을 거세한 건 덤.
‘항생제만 있으면 간단하게 해결되는 문제를….’
난 반쯤 무의식적으로 물었다.
“누군가를 원망해보신 적은 없습니까?”
“제가 나병에 걸린 걸 말입니까?”
그가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웃음.
“전 평생을 기사도와 주님의 말씀에 따라 살려 노력해왔습니다. 예루살렘 말고도 수많은 성지를 순례했죠.”
그가 말했다.
“처음 나병에 걸렸을 땐 주님을 원망했습니다. 평생 성실하게 살아온 내가 왜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나 생각했었죠.”
“….”
“심지어 사라센 마녀들을 찾아가 치료제를 구걸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그가 빙긋 미소 지었다.
“이 지상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게 정녕 주님의 뜻이라면, 어떻게든 천국에 가서 주님께 여쭤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떤 걸 묻는….”
“왜 저에게 이런 시련을 내리신 건지, 왜 죄 없는 아이들과 여인들이 굶어 죽는지. 왜 수많은 기사와 성직자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악행을 저지르는지 말입니다.”
그가 덧붙였다.
“지옥에 떨어지면 그럴 기회도 없겠죠. 영원히 호기심을 해소 못 할 겁니다. 그거야말로 가장 고통스러운 고문 아니겠습니까?”
그가 내 반응을 보더니 재밌다는 듯 계속 웃었다.
“공자님께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마음껏 물어보시죠.”
“공자님께선 직접 콘스탄티노플의 구제원들을 돌아다니시면서 병자들을 돌보셨죠. 왜 굳이 그러신 겁니까?”
그의 표정이 진지하게 바뀌었다.
“로마 시민들의 호의를 사는 거라면 기부금을 낸 것만으로도 충분했을 텐데요.”
“그만큼 절박했다고 해두죠.”
난 옅은 미소를 지었다.
단기간에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의 민심을 바꿔놓는 건 쉽지 않았다.
축제, 성직자, 엘릭서 말고도 손에 있는 건 뭐든 써야만 했다.
‘거기엔 나 자신도 포함되겠지.’
위그가 땀을 닦으며 말했다.
“처음엔 반신반의했습니다만, 공자님께선 정말 이 도시가 불탈 거라고 생각하시는 거군요. 에일라트가 습격받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면 애초에 이곳까지 오지도 않았겠죠.”
“공자께서 이 도시가, 제국이 위험에 처해있다 하신다면 그런 것이겠지요.”
위그가 고개를 돌려 궁전 밖 콘스탄티노플을 바라봤다.
“만약 이 거대한 도시에 문제가 생긴다면, 셀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을 겁니다. 그리스도교인, 무슬림에 상관없이요.”
그가 날 바라봤다.
“무고한 자들을 지키는 것, 그게 저희가 할 일이라면 얼마든지….”
그때 누군가 다가왔다.
특유의 도끼를 든 바랑기 근위대 병사.
그가 날 바라보며 말했다.
“보두앵 공자님, 마리아 황태후께서 찾으십니다.”
“이 시간에 말입니까?”
나도 모르게 인상이 찌푸려졌다.
그렇다면 공개적인 자리는 아니라는 건데.
“예, 황태후께선 공자님과 ‘따로’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하십니다.”
“그럼 안내해주시죠.”
난 위그와 시선을 교환했다.
그가 다시 은가면을 썼다.
“밤이 깊습니다, 공자님. 저도 함께 가도록 하죠.”
* * *
마리아 황태후의 방은 다른 방들과 분리되어 있었다.
화려한 벽화, 실크와 황금들까지.
그저 방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동로마의 부를 느낄 수 있었다.
“공자께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마리아 황태후가 날 바라봤다.
방엔 그녀와 나 단둘뿐.
첫날에 만났던 것 이후로는 처음인 것 같은데.
그녀는 하얀 피부에 뚜렷한 이목구비의 소유자였다.
누가 봐도 유럽 출신.
“공자께서 이렇게까지 큰 축제를 후원하신 진짜 이유가 뭔가요?”
“…….”
“말이 새어나가는 건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이곳은 제국에서도 가장 보안이 철저한 곳이니까요.”
그녀가 문을 가리켰다.
두꺼운 문으론 말소리 하나 못 빠져나갈 것 같았다.
“축제뿐만이 아니죠. 성직자들에게 거금을 기부하고 대귀족들에겐 엘릭서까지 주셨으니까요. 마치 처음부터 이걸 노리고 제도에 오신 것 같은데요.”
“전 보두앵 4세 국왕 폐하로부터 한 가지 명령을 받았습니다.”
난 고개를 앞으로 숙였다.
보두앵 4세도 원한 거니깐 내 말이 틀린 건 아니지.
“바로 예루살렘 왕국과 로마 제국 간의 동맹 관계를 확고히 다져놓으라는 거였죠.”
“그걸 위해서 이렇게 많은 돈을 내놓으셨다고요?”
그녀가 물었다.
“이미 존재하는 친선을 위해서요?”
“제국의 상황이 어떤지는 황태후께서 더 정확히 아실 거라 믿습니다.”
난 그녀를 바라봤다.
호기심, 그리고 불안감이 느껴졌다.
그녀는 바보가 아니었다.
권력에 미쳐 아들을 손아귀에서 흔드는 짐승은 더더욱 아니고.
‘애초에 지금 섭정단 대표도 수녀 신분으로 하는 거니깐.’
그렇다면 내 말뜻도 잘 알 터.
“마니 황녀가 황제 폐하와 섭정단을 사사건건 흔들려 한단 소문을 들었습니다.”
내가 말했다.
“그리고 콘토스페나노스 제독과 황족인 안드로니코스가 손을 잡았다는 얘기도요. 저흴 습격한 것도 바로 그들이었겠죠, 안 그렇습니까?”
“….”
마리아는 잠시 침묵했다.
그녀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맞아요, 여러분을 습격했던 배는 콘토스페나노스 제독 함대의 소속이었죠. 물론 그는 자신과 관련 없다고 부인하고 있지만….”
그녀가 덧붙였다.
“거짓말일 게 분명하고요. 하지만 지금 그들을 대대적으로 처벌했다간….”
“민중들이 곧바로 들고 일어설 거고요. 저도 무슨 상황인지 잘 압니다. 그걸 해결하러 온 거니까요.”
난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동로마 플레이가 유독 힘들었지.
갈대 같은 민심을 계속 달래줘야 했거든.
“솔직히 공자가 온 이후 시름을 놓을 수 있었어요. 제도의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으니까요.”
그녀가 생각에 빠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전엔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분위기였죠.”
“제가 원하는 건 황제 폐하와 제국의 호의입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차후 공동 원정까지 계획할 수 있겠죠.”
내가 말했다.
이 정도면 날 의심할 필요가 없다는 건 알았겠지.
내가 원하는 걸 숨길 필요는 없었다.
우리 둘이 원하는 건 같으니깐.
“그걸 위해 전 모든 수단을 동원할 겁니다. 필요하다면 직접 검을 들고 싸울 수도 있고요.”
나와 동행한 기사들은 삼십 명 정도.
베테랑 중의 베테랑들뿐이었다.
‘비록 수는 적지만….’
4차 십자군 때 콘스탄티노플 성벽을 넘어서 성문을 연 것도 고작 수십의 프랑크 기사들이었지.
용기라는 면에서 십자군 기사들은 일당백 전사들이었다.
“아직 모든 신민이 호의적인 입장으로 돌아선 건 아니에요. 저와 섭정단에 반대하는 자들도 여전히 많이 남아있고요.”
그녀가 말했다.
“그들을 달래면서 마니, 안드로니코스 같은 황족을 처벌하려면 시간이 필요하겠죠.”
“그때까진 저도 힘을 보태겠습니다.”
“다행이군요.”
마리아가 미소 지었다.
“그럼 좀 더 마음을 터놓고 대화를 나누도록 하죠.”
흐릿한 등불 빛을 뒤로 한 채 밤이 깊어갔다.
* * *
“그 멍청한 놈들 때문에 모든 게 어그러졌어요.”
마니 황녀가 입술을 잘근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녀가 자신의 남편을 노려봤다.
“당신은 도대체 뭘 하는 거예요? 어떻게든 다른 귀족들을 설득하라고 했잖아요.”
“나도 노력했어! 노력했다고.”
레니에르가 다급한 어조로 외쳤다.
그가 자신의 아내를 바라봤다.
“하지만 보두앵 그 녀석이 사방에 너무 많은 선물을 뿌렸어. 우리한테 호의적이던 귀족들까지 넘어갔고.”
“그래서 당신은 그걸 손 놓고 가만히 보고만 있었단 거예요?”
마니 황녀가 성난 어조로 물었다.
모든 게 그들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 호의적이던 동로마 민심도 이젠 축제에 한창 정신없었다.
“아직 안드로니코스 그자한테선 아무 연락도 없어?”
“군대를 모으겠다고 해놓곤 아직도 감감무소식이에요. 제도의 상황을 먼저 파악하겠다는 거겠죠.”
그녀가 중얼거렸다.
“이젠 어쩔 수 없어요. 우리끼리라도 행동에 나서야 해요. 이대로 파묻히기 전에 뭔가 해야 한다고요.”
“행동에 나서야 한다니? 도대체 뭘 어떻게?”
레니에르가 불안하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가 이마의 땀을 연신 닦았다.
“내가 볼 때 지금은 발톱을 숨기고 기다려야 할 때야. 언젠가 다시 때가 오면….”
“우리 둘 다 늙어 죽은 후에야 ‘그때’가 오겠죠.”
마니가 말했다.
그녀가 손뼉을 짝 치며 중얼거렸다.
“며칠 후면 황제가 직접 사절단이랑 저녁 식사를 할 거예요. 황실 전통에 따라 온갖 공연단이랑 음식들이 준비되겠죠.”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선택권은 없어요. 보두앵 그자가 황궁에 있을 때 일을 해치워야 해요.”
그녀가 말했다.
“그래야 책임이 그 녀석들한테 갈 수 있겠죠. 우리가 아니라요.”
“당신 말은… 황제를 죽이자고?”
레니에르의 표정이 새하얗게 변했다.
“그런 짓을 벌였다간 민중들이 절대 용납 안 할 거야. ‘부패한 섭정단을 몰아내고 황제를 돕는다!’ 그게 우리가 맨 처음 계획한 거잖아.”
“황제만 처리하면 마리아는 권력을 유지할 명분이 없어요. 실권이 우리한테 넘어올 거라고요.”
그녀가 손을 흔들었다.
“모든 비난은 보두앵이랑 그 사절단이 뒤집어쓰겠죠. 적절하게 손만 쓰면 못 할 것도 없어요. 지금 당장 해치워야 해요.”
그녀가 손을 뻗어 남편의 팔을 잡았다.
레니에르는 아무 말도 못 한 채 침을 꿀꺽 삼켰다.
“이제 와서 손 뺄 생각은 아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