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King of Crusaders RAW novel - Chapter (54)
십자군의 왕이 되었다-54화(54/215)
암살자의 신념 (4)
* * *
이집트
다미에타 앞 해역
항구를 둘러싼 수십 척의 배들이 바다 쪽으로 선수를 돌렸다.
항구의 반대쪽.
나무로 된 함선들이 물살을 가르며 나아갔다.
선원들이 줄과 통들을 나르며 소리쳤다.
“불을 준비해라!”
“거기 모두 조심해! 타죽고 싶은 거냐?!”
“그쪽만 신경 쓰지 말고 도자기 안에 든 것들도 조심해서 날라!”
배가 흔들릴 때마다 바닷물이 갑판 위로 튀었다.
“곧 있으면 백 척 넘는 배들이 맞붙겠군. 생각만 해도 피가 끓지 않소?”
루아크가 돛대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의 손에 들린 도끼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말 돌리지 말고 어서 인정이나 하게.”
위그가 웃으며 외쳤다.
“결국 내 말이 맞지 않았나? 다미에타를 포위하자마자 놈들이 곧장 돌아왔으니 말이야.”
“….”
루아크가 이마를 찌푸렸다.
“정찰선을 보내기 전엔 확실히 알 수 없었소. 그걸 이렇게….”
“내기는 내기지. 전사 중 전사라는 바이킹이 한입으로 두말하는 건가?”
“그래, 내 말이 틀렸소. 이제 행복하오?”
위그가 장난기 어린 미소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때 한 성묘수호단원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함대 모두 준비를 마쳤습니다, 대장님. 며칠 가만히 있기만 해서 그런지 몸이 근질근질하군요. 선원들에게 정신 차리라고 한 잔씩 돌렸습니다.”
그가 뿔로 만든 잔을 건넸다.
“대장님 건 따로 챙겨놨습니다.”
“……난 괜찮네. 지금은 속이 그리 좋지 않군.”
루아크가 잔을 물끄러미 보며 답했다.
위그가 그의 옆에서 빵 웃음을 터뜨렸다.
“이렇게 통쾌한 기분은 수십 년 만에 처음이군. 고맙네 자네. 아주 고마워.”
위그가 어리둥절한 표정의 수호단원에게 말했다.
루아크가 한숨을 푹 내쉬며 물었다.
“트리폴리랑 베네치아 쪽 함선들과는 연락했나?”
“예. 천사의 눈 덕분에 저희가 먼저 진형을 갖췄습니다. 놈들은 이제야 저희를 발견했을 겁니다.”
부하가 흥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놈들이 허겁지겁 진형을 짤 때 기습할 수 있겠죠. 승리는 이미 따놓은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동안 훈련해온 보람이 있었군.”
루아크가 말했다.
그는 키프로스에서 하던 훈련을 떠올렸다.
‘천사의 눈’을 이용한 교신과 함대 진형 구축.
그 훈련들이 지금 빛을 발하고 있었다.
거리를 먼저 볼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이익이 뭐가 있을까.
“거기에 대천사 미카엘께서 함께하시니 어찌 질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선 자격 있는 자들에게만 승리를 허락하시네.”
위그가 말했다.
“저놈들과 직접 맞서 싸우는 건 결국 우리야. 그걸 명심하게.”
“위그 경의 말씀이 옳다.”
루아크가 말했다.
그가 손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방심해선 안 된다! 저번 키프로스 때 우리 수호단에서만 많은 사상자가 나왔었지. 그런 일을 반복하면 안 된다.”
“승리를 위해선 피를 흘릴 수밖에 없는 게….”
루아크의 눈빛에 부하가 고개를 숙였다.
그가 소리쳤다.
“제가 당부해놓겠습니다. 자, 어서 가자 이 굼벵이들아! 위대한 로마 함대가 트리폴리랑 베네치아 놈들한테 뒤처진다는 말을 듣고 싶은 거냐?!”
“아닙니다!”
“그럼 빨리빨리 움직여!”
루아크와 위그 두 사람 모두 갑판에 서서 전방을 바라봤다.
“만만치 않은 싸움이 될 겁니다.”
“내 생각도 마찬가지일세. 이집트 놈들은 어떻게든 다미에타 포위를 풀려 할 게야. 뭐 여길 압박하는 것만으로 우리 임무는 완수하는 셈이지만.”
“공자께선 지금쯤 아사신들 땅에 계시겠죠. 뭘 하고 계실지 궁금하군요.”
루아크는 생각에 빠졌다.
고향을 떠나고 몇 년이 지났을까?
수많은 바다와 도시.
그리고 콘스탄티노플까지.
하지만 보두앵 같은 인물은 처음이었다.
욕망과 추진력으로 불타는 그 눈빛.
그는 공자를 처음 본 순간 알아차렸다.
이 소년을 따라가야 한다!
그가 성묘수호단장에 자원한 것도 그래서였다.
위그가 웃으며 말했다.
“먹이를 노리는 매처럼 이곳저곳 날아다니고 계실걸세. 에일라트에서부터 계속 그러셨지.”
그때 선원들의 외침이 갑판을 뒤흔들었다.
바닷물이 다시 사방으로 튀었다.
“놈들이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오면 한 척도 빠짐없이 모조리 불태워라!”
* * *
어두운 밤.
수풀 사이로 그림자들이 움직였다.
한 치의 망설임 없는 발걸음.
사슬갑옷이 쩔그럭거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울려 퍼졌다.
“전방에 이상 없습니다.”
“모두 주변을 잘 살펴라. 여긴 적진이다.”
그림자들이 한 장소에 멈춰 섰다.
길을 내려다보는 언덕 위.
“아르난 형제가 말한 장소는 이곳입니다.”
“내일 사라센 놈들이 여기를 지나갈 거다. 수송대 행렬 중에 가장 느슨한 곳을 친다.”
펠기우스가 말했다.
그의 투구와 사슬갑옷이 달빛에 비쳤다.
“모두 무장을 점검하고 돌더미 뒤로 이동해라. 수송대에 대한 정보는 확실하겠지?”
“수송대 중심엔 사라센인들뿐입니다. 보두앵 공자의 호위대는 앞쪽에만 있습니다.”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어. 사라센 놈들을 죽이는 건 상관없지만….”
부하 중 한 명이 그에게 다가왔다.
“펠기우스 형제님. 아무리 기사단의 명령이라지만 이건 보두앵 공자를 상대로 검을 드는 게….”
“우리가 검을 드는 상대는 사라센 놈들이다.”
펠기우스가 말했다.
“우린 단장님의 지시에 따른다. 깊게 생각할 필요 없어. 알겠나?”
“…알겠습니다.”
“좋아, 우리가 습격했다는 흔적을 남겨선 안 된다. 모두 검은색 망토를 쓰도록. 구호기사단으로 보여야 한다.”
펠기우스가 말했다.
“갖고 갈 수 없는 물자는 모두 불태운다. 포로도 필요 없다. 모든 건 성전기사단을 위해.”
“성도와 순례자들을 위해.”
“성도와 순례자들을 위해.”
* * *
희미하게 들려오는 새소리.
마차가 양옆으로 흔들렸다.
“하루종일 이렇게 있으려니 토할 것 같군요.”
조슬랭이 기지개 켜며 말했다.
“차라리 말을 타는 게 낫겠습니다.”
“그럼 놈들이 안 넘어올 겁니다. 아마 멀찍이서 보고 도망치겠죠.”
내가 말했다.
마차가 흔들리는 건 생각보다 참을 만했다.
잠도 제대로 못 자는 뱃멀미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지.
구호기사단과 조슬랭, 내 직속 기사들까지.
성전기사단을 잡기 위한 사냥꾼들.
우린 아사신들이 끄는 수송대 마차에 숨어있었다.
난 조슬랭 백작을 바라봤다.
이렇게 쉽게 승낙할 줄은 몰랐는데.
역시 그는 확고한 국왕파였다.
기와 성전기사단의 음모를 전해 들은 그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함께하겠다고 나섰다.
함정 자체는 간단했다.
수송대에 일부러 취약한 지점을 만들어 그곳으로 습격을 유도한다.
놈들이 미끼를 물면 숨어있던 우리가 현장에서 붙잡는다.
중요한 건 정보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는 것.
난 감정을 확인한 몇몇 이들과만 정보를 공유했다.
“성채에 있던 성전단원들을 체포한 게 걸리는군요. 놈들이 붙잡혔다는 소식이 알려지면….”
“습격대가 그렇게 빨리 정보를 알긴 힘들 겁니다.”
내가 말했다.
우린 성채를 떠나기 직전 성전기사단원들을 성채 안에 억류해놨다.
지금 시대에 통신 방법은 그리 많지 않지.
전서구(비둘기)를 보낼 수도 있겠지만….
전서구는 정해진 위치들로만 이동할 수 있었다.
이미 습격하러 나온 기사단원들은 정보를 받지 못할 터.
“그나저나 고작 연공이 줄어드는 걸 걱정해 이런 짓을 벌이다니.”
조슬랭이 밖으로 침을 뱉었다.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군요.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겠습니다.”
“성도수호보다 돈이 더 중요하다는 거겠죠.”
내가 말했다.
기사단의 창설목적을 생각하면 정반대 일이었다.
성전기사단의 정식명칭은 ‘그리스도와 솔로몬 성전의 가난한 전우들’.
기사 개개인은 가난한 게 맞았다.
하지만 기사단 자체는 다르지.
영지 관리부터 기부금 투자까지.
이들은 돈 되는 거라면 뭐든 손을 뻗쳤다.
내가 제안했던 예치금 역시 마찬가지.
“백작께선 놈들이 저항할 거라 생각하십니까?”
“현장을 덮치면 놈들도 싸울 생각은 못 할 겁니다. 사라센들을 죽이는 건 상관없지만….”
조슬랭이 어깨를 으쓱였다.
“공자님같이 고귀한 분께 검을 들이미는 건 지옥행일 테니깐요.”
“그래도 일단 대비는 해두죠.”
내가 말했다.
이미 한번 신념을 굽힌 자들이었다.
두 번 하지 말란 법은 없지.
“궁지에 몰리면 어떤 선택을 내릴지 모르니깐요. 기사들에게도 주의하라고 전해주십쇼.”
“알겠습니다, 공자.”
난 마차 한쪽에 머리를 기댔다.
이렇게 쉬는 것도 오랜만이네.
예루살렘에서 에일라트.
콘스탄티노플, 키프로스, 그리고 여기 아사신들의 산맥까지.
평생 할 여행은 이미 다 한 것 같은데.
얼마나 더 다녀야 하는 걸까.
졸음이 몰려왔다.
난 마차의 흔들리는 리듬에 맞춰 눈을 감았다.
잠에서 깬 건 늦은 오후였다.
온몸이 불타듯 뜨거웠다.
긴장감, 적개심.
명백한 적의.
난 눈을 부릅뜨며 일어섰다.
이미 땀으로 온몸이 축축했다.
“왜 그러십니까, 공자?”
“놈들이 바로 앞에 있습니다.”
“하지만 마차 안에서 그걸 어떻게….”
“전 알 수 있습니다.”
난 마차 밖을 슬쩍 바라봤다.
해가 지고 있었다.
주황빛이 산맥을 붉게 물들였다.
적의가 느껴지는 건 오른편 산맥 쪽.
“선두 마차한테 천천히 멈추라고 하십쇼. 바퀴에 문제가 생긴 것처럼요.”
“놈들을 유인하시려는 거군요.”
“예, 최대한 먹음직스럽게 보여야 합니다.”
그때 가니에르가 마차 뒤쪽으로 다가왔다.
그는 아사신 복장을 입고 있었다.
“병사들에게 마차에서 내리라고 지시하겠습니다. 하필이면 해가 지는 시간에 놈들이….”
“아직 안 됩니다.”
내가 손을 흔들었다.
“놈들이 가까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아직 거리가 좀 있었다.
우리가 모습을 드러내면 도망칠 터.
놈들이 최대한 가까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중요한 건 타이밍.
마차가 천천히 멈춰섰다.
난 감각에 정신을 집중했다.
주변의 메마른 흙과 잡초 냄새.
땅이 식으면서 차가워지는 게 느껴졌다.
그 사이로 흥분과 증오.
땀 냄새가 희미하게 느껴졌다.
난 천천히 눈을 떴다.
기사와 병사들 모두 무기를 쥐고 내 신호를 기다렸다.
내가 입을 열려던 그때….
고함이 울려 퍼졌다.
짐승의 포효에 가까운 소리.
“데우스 불트!”
“신께서 원하신다!”
라틴어와 오크어.
역시 성전기사단원들이었군.
데우스 불트는 개뿔.
뭐든지 신을 갖다 붙인다지만 이건 좀 심한 거 아닌가?
내가 신호를 보내자 모두 우르르 마차 밖으로 뛰어나갔다.
나도 마차 밖으로 뛰어내리듯 나갔다.
검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조슬랭 백작이 외쳤다.
“모두 멈춰라!”
갑자기 정적이 흘렀다.
새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난 습격자들을 바라봤다.
검은색 망토에 외투.
구호기사단 복장이군.
습격을 구호기사단에 뒤집어씌우려 했던 건가?
아주 가지가지 하네.
그들 모두 당황한 게 느껴졌다.
습격한 마차에서 갑자기 아군이 튀어나올 줄은 몰랐겠지.
“이 멍청한 녀석들! 이러고도 너희가 성도를 지키는 기사들이란 말이냐!”
조슬랭이 침묵을 깨고 움직였다.
그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며 소리쳤다.
“모두 무기를 버려라! 너희가 성전기사단이란 건 이미 알고 있다!”
그의 목소리가 산맥을 타고 울려 퍼졌다.
습격자들 모두 몸을 움찔거렸다.
“구호기사단으로 위장해 이런 저급한 짓을 벌이다니. 이런 짓을 벌이고도 너희가 무사할 거라 생각한 게냐?!”
“성전기사단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맨 앞에 있던 사내가 말했다.
예상외로 침착한 어조.
하지만 그의 감정은 폭발하듯 요동쳤다.
“저흰 근처 성채를 습격한 사라센들을 추격하다 이곳까지 온 것입니다. 백작이야말로 왜 이 이교도들을 지키는 건지….”
“근처 성채에서 이곳까지 사라센들을 추격해 온 거라니. 허 참! 도대체 어느 성채에서 이 먼 곳까지 왔다는 말이냐!”
“비키시지 않는다면 백작께서도 이교도 놈들과 한패인 걸로 알겠습니다.”
“이젠 날 협박까지 하는군.”
조슬랭이 들으라는 듯 코웃음 쳤다.
그가 내 쪽을 손짓했다.
“저분이 누구이신지 정녕 모르겠다는 거냐?!”
난 투구를 벗으며 그들 앞으로 다가갔다.
조슬랭은 그렇다 쳐도 왕족인 나까지 무시할 순 없겠지.
가니에르와 에이그가 날 호위하듯 뒤따랐다.
병사 한 명이 예루살렘 왕실 깃발을 치켜세웠다.
“보두앵 공자?”
내 얼굴을 본 습격자들이 웅성거렸다.
난 그들을 정면으로 노려봤다.
“백작과 왕족을 동시에 죽일 정도의 각오라면 나도 칭찬해주고 싶군.”
“….”
“나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그대들 모두 알고 있겠지. 대천사 미카엘께서 며칠 전 내게 말씀하시길….”
내가 말했다.
기사단원만큼 종교적인 자들은 없을 터.
약간 과장을 더해볼까.
“그리스도를 향해 검을 돌린 배교자들이 있다 하시더군. 내가 정녕 자네들의 계획을 모를 줄 알았나?”
“….”
내 연기는 효과가 있었다.
습격자들 모두 뒤로 움찔거리며 물러섰다.
해가 천천히 지며 지평선 아래로 사라졌다.
땅을 비추던 주황빛이 점차 희미해졌다.
침묵 사이로 고함이 울려 퍼졌다.
“후, 후퇴하라!”
“모두 후퇴해라!”
“뭐 하느냐! 당장 저놈들을 붙잡아라!”
습격자들이 등을 돌려 도망쳤다.
기사와 아사신 대원들이 그 뒤를 쫓았다.
앞쪽에 있던 몇몇은 그대로 붙잡혔다.
하지만 수십이 넘는 습격자들이 산맥 위로 도망쳤다.
말을 타고 쫓아가기 힘든 지형.
도망자와 습격자들 모두 갑옷을 벗고 내달렸다.
조슬랭이 다가와 말했다.
“이런 어둠 속에선 오래 추격할 수 없을 겁니다. 이 근처는 산맥이니….”
그가 덧붙였다.
“전부 잡는 건 포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밤은 깁니다, 백작님. 병사들에게 횃불을 준비하라고 하세요.”
난 눈앞의 어둠을 바라봤다.
앞이 어두운 건 내게 큰 의미 없었다.
“오늘 밤 내내 뛰어다니는 한이 있어도….”
어디까지 도망칠 수 있나 보자고.
난 다시 감각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
“한 놈도 빠짐없이 모조리 잡을 겁니다.”